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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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 년이 넘도록 소설을 써 온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써내려간 글을 읽으면서 처음 드는 생각은 그간 좀 오해를 했다는 사실이었다. 하루키 소설을 읽고 성性에 관한 부분이 너무 노골적이라서 불편하다는 이유로 등한시하다 그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그의 작품에 좀 더 다가갔지만 더 많은 오해를 하지 않았나 싶다. 재즈 바를 운영하던 중 야구장에서 홈런볼을 보면서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고, 첫 소설이 상을 받고 몇 년 뒤에는 소설가로 전업을 한 게 물질적인 뒷받침이 되어주었기 때문이 아니냐고(<상실의 시대>의 성공이 밑받침이 되어주었는데도 말이다), 미국에서는 강연도 잘 하고 사인회도 하면서 한국에서 이렇게 책이 잘 팔리는 데 한 번도 오지 않은 게 괘씸하다는 둥 뭐 이런 사적인 오해였다. 소설가의 하루키를 존중하지 못한 데서 나온 억지였다.


  저자는 스스로를 ‘너무도 개인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간 써온 소설에 관한 이야기도, 자신의 소설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문단을 멀리하는 것도, 이 책 속에서 말하는 소설 쓰는 노하우도 모두 개인적인 사고방식 안에서의 이야기라고 말이다. 지극히 평범하고 개인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저자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니 소설에 관한 독자의 입장이 아닌 그 밖에서의 저자를 내 멋대로 판단하고 비난한 것 같아 미안해졌다. 스스로를 장편 소설가라고 말하고 있는데 나는 하루키의 에세이가 더 좋다고 당당히 말하고 있으며(이건 취향의 문제라 변함이 없을 것 같지만 이 책을 계기로 장편 소설가로 인식하기로 했다) 싫은 소리를 더 해대면서도 신간이 나오면 꼬박꼬박 구입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긴 시간동안 글을 쓸 수 있었던 이유와 나름대로의 소설 쓰기에 관한 이야기를 다양하게 들려준다. 소설 쓰기가 즐거웠기 때문에 이 일을 할 수 있었고, 자신의 책을 읽어주는 독자와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어서 오랫동안 이 일을 해왔다고 밝히고 있다. 마감과 청탁에 얽매이지 않고 쓰고 싶을 때 쓰지만 마감시한은 넘겨본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더한 생활습관이 있었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그 안에서 꾸준히 글을 쓰며 체력을 기르는 일. 작가가 그런 생활을 한다는 게 좀 유별나게 보이긴 하지만, 그래서 평범한 듯 특별해 보이는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었기 때문에 마감과 청탁에 얽매이지 않은 글을 오랫동안 쓸 수 있었던 게 아니었나 싶다.


  스스로도 그렇게 글을 쓸 수 있었던 게 운명이었다고 말하지만 어느 정도의 운도 있고 여러 가지 요인들이 긍정적으로 다가와 주어 가능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정말 소설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열심히 소설을 써왔다는 사실이 느껴진다.


  저자의 그 모든 이야기를 담담히 들고 난 뒤에도 나와 저자의 거리가 확 좁혀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생각되어지는 게 더 만족스러울 정도로 자신의 이야기, 소설 이야기, 그 안에 녹아든 해명 아닌 해명도 있어서 그를 더 잘 알게 된 기분이다. 저자도 갑자기 확 다가오는 게 아닌 적정한 거리에서 여전히 약간의 의심의 눈초리를 하면서 지켜보는 걸 더 좋아할 것 같단 생각도 들었다. 이번 소설을 유감스럽게도 맘에 들지 않았지만 다음번에는 더 좋은 소설을 써달라고 한 독자의 편지를 좋아한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그 독자만큼 행동하지는 못하겠지만 오해는 풀렸을지언정 여전히 적당한 거리에서 그의 글들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있을 것이다. 저자는 소설가로서의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고, 나는 독자의 입장에서 자유롭게 즐기는 것. 그걸 잘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좀 오글거리지만 그를 응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거창하게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이 온전히 소설에 관한 기술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삼십 년이 넘도록 소설을 써 온 저자의 회고록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소설가란 직업을 가진 하루키를 만난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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