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함무라비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의 주인공은 우여곡절을 겪더라도 결국엔 정의롭고 마음의 양심을 져버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 이면에는 내가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그럴 용기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말이다. 그러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행동이 먼저 나와 버리는 내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울 때가 많았다. 대부분 나의 생각과 정반대의 행동들이었고 이게 나의 본모습이 아닐까란 좌절을 하기도 했다. 평상시에 내면을 갈고 닦지 않으면 전혀 엉뚱한 내가 튀어나와 버린다는 경험들을 하고 난 뒤, 당황해서 어쩔 수 없는 행동들을 하는 사람들을 이해는 하면서도 온전히 수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성추행 하는 남자에게 니킥을 날리고 얌체 운전자에게 다가가 시원하게 일갈을 날리는 박차오름 신입 판사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정의니, 내면이니 긴 말을 덧붙였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다혈질인 그녀도 실은 사람 눈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자신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의외였다. 나 역시 좀 다혈질일지라도 내 자신에게 솔직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전혀 무관해서인지 그녀가 좀 멋져보였다. 서울중앙지법 44부에서 그녀가 어떠한 활약(?)을 하게 될지 궁금해 조금만 읽고 잔다는 것이 새벽 3시 반까지 완독하고 말았다.

 

나는 왜 이 책을 이렇게 정신없이 읽어 버린 걸까? 나대신 박차오름 판사를 비롯한 그 외 사람들이 정의를 실현하고, 법으로 제대로 심판해서 마음이라도 시원하게 해주길 바랐던 걸까? 그런 기대감으로 이 책을 대했던 나는 완전 낭패를 맛보았다. 이 책 속에 등장하는 판사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일을 해나가지만 등장하는 사건들에 시원하게 결말을 내주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판사들의 단조로운 생활 속에서(오로지 기록지, 기록지, 기록지 뿐이었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사건들에 파묻혀 있는지, 그리고 그 사건들에 대한 고민 또한 어떠한지를 지켜봐서인지 그들이 내린 판결에 마냥 속 시원해 할 수 없었다.

 

열의에 넘쳐서 억울한 사연의 할머니를 도와드리고 싶었지만 정작 할 수 있는 건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밖에 설명할 수 없었던 현실. 책임회피에만 급급해서 법정까지 오게 되었지만 진솔한 이야기를 듣고 모두를 숙연하게 했던 아이 엄마의 이야기. 자신의 상처 때문에 정말 원하는 자녀들을 지키지 못한 아빠의 안타까운 사연. 남편을 죽인 아내가 살인이냐 정당방위냐를 놓고 오랜 시간 토론하는 배심원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오히려 가슴이 더 답답해져 왔다. 법정이라면, 판사라면 그 모든 걸 시원하게 해결해 줄 거라 생각했는데 판사도 역시 인간이고 인간이 인간을 판단하며, 죄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야 그나마 나은 인간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런 사건이 틈바구니에서 사회생활도 해야 하는 판사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판사라는 직업이 머리만 좋아서 되는 것이 아님을, 오히려 따뜻한 마음과 냉철한 사고가 요구되는 상황이 더 많다는 것을 보며 좀 더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었다. 판사의 입장에서 하는 변명보다는 일반적으로 판사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을 벗겨줌과 동시에, 사건을 해결하고 판단하는 건 오로지 판사의 몫이라기보다 다양한 해결책을 보여주고 제시하는 도움 역할을 해준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듯했다.

 

이런 이야기들을 만나다 보니 이 세계가 거대하지만 촘촘히 얽혀 있다고 느꼈다. 그 얽힘이 때로는 범죄를 저지르고, 피곤하고, 답답하게 만들지만 예상치 못한 것으로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결국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가야 할 현재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