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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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지인을 갖는다는 게 어렵기도 하지만 나와 취향이 맞는다는 건 더 어려운 것 같다. 그럼에도 나에게는 독서취향이 맞는 지인이 있다. 아무 때나 툭 책 얘기나 일상 얘기를 꺼내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이런 저런 수다를 떠는 시간이 참 좋은 지인이다. 서로 읽는 책이 많아 책 추천은 의외로 가끔 하게 되는데 그런 지인에게 요즘 일본 문학 중에서도 고전에 빠져 있다고, 사고 싶은 책이 있는데 고민이라고 하자 그냥 지르라고 하면서 이 책도 함께 추천해 주었다. 일본 고전은 아니지만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 무척 좋았다고 했다. 냉큼 이 책을 주문하고 책이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꺼내서 읽었다. 첫 번째 단편「환상의 빛」을 읽는데 어쩜 묘사가 이렇게 섬세하고 마음을 아리게 할까 싶어 감탄하고 말았다. 첫 번째 단편을 다 읽기도 전에 저자의 팬이 될 것 같은 예감은 정확히 들어맞았고 저자의 다른 책까지 주문하고 말았다.

 

  태어난 지 세 달 된 아이와 자신을 두고 철길 위에서 자살한 남편에게 쉼 없이 읊조리게 되는 유미코. 집 주인의 소개로 자신이 살던 곳과 멀리 떨어진 어촌으로 다시 시집을 갔지만 상대방이 마음에 들었다는 현실적인 이유보다 남편의 흔적을 견딜 수 없어서 머나먼 곳으로 떠나게 되었다. 다행히 남편과 딸린 아이도 모두 사이가 좋아 그럭저럭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만 죽은 남편에 대한 회한과 원망 섞인 넋두리는 멈출 수가 없다. 자살할 이유를 전혀 가늠할 수 없어 유미코의 괴로움과 넋두리는 더 짙어 갔는지도 모른다. 끝내 남편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아내지 못하지만 새 남편은 혼이 빠져나가면 죽고 싶어지는 법이라고 말한다. 유미코는 사람의 혼을 빼가는 병에 걸려 전 남편이 그런 선택을 했다고 믿는다.

 

  유미코가 전 남편과의 첫 만남, 추억이 깃든 곳, 함께 살았던 추억들을 떠올리고 새로운 곳에 정착하며 살면서 그곳의 지명과 배경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음에도 낯선 느낌 없이 그 모든 풍경이 그대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때때로 낯선 지명들이 흐름을 방해하기 마련인데 유미코의 내면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내가 그녀가 된 듯한 기분이 들어 그 모든 풍경을 눈으로 보고 마음속에 간직한 비밀들도 조심히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았다. 눈발마저 날려 버리는 강한 바람 속에서 전남편에게 읊조리는 그녀의 마음, 새 남편을 비롯해 어느 누구에도 털어놓지 못한 그녀의 깊은 속내가 마치 내가 겪은 일 같아서 시리도록 아픈 슬픔과 고독 가운데서도 폭삭 무너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환상의 빛」이외에「밤 벚꽃」「박쥐」「침대차」에는 모두 죽음이 등장한다. 남편의 외도를 목격하고 이혼하고 홀로 아들을 키웠지만 사고로 잃고(밤 벚꽃), 중학교 때 독특한 추억을 가지고 있던, 친하다고 할 수 없었던 친구의 죽음 소식을 듣고(박쥐), 출장 가는 기차 안에서 옆 칸에 앉은 할아버지의 울음소리를 듣고 어릴 때 함께 놀던 친구의 죽음을 떠올린다. 네 편의 단편 속에 죽음이 모두 등장하자 처음엔 이 죽음의 의미가 어떤 특별한 뜻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은지 고민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저자는 죽음을 등장시키면서 색다른 의미를 드러내기 보다는 어쩌면 우리가 늘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쉽게 지나치는 일상의 상실에 대한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가까운 가족이든 친하지 않던 사람이든 우리는 늘 죽음의 소식을 듣고 겪는다. 그러면서도 살아남아 있는 우리는 죽은 이들에게 어떠한 이유를 붙여 삶을 지속시키려고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죄책감과 무기력감으로 떠나간 사람을 마음속에 내내 품고 있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저자의 단편 속에 스며들어 있는 그런 죽음은 특별히 도드라지지 않으면서도 인물들에게 마음속을 들여다봄으로써 죽음으로 인한 내면의 변화를 상세히 들여다보게 한다.「환상의 빛」이 묘사도 뛰어나고 섬세하게 마음을 드러내고 있어 아름답다는 생각까지 들었다.「밤 벚꽃」도 20년 만에 조우한 남편과의 추억과 함께 왜 그를 한 번이라도 용서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후회와 함께 덧입혀 지는 마당의 벚꽃, 그 벚꽃 때문에 우연찮게 신혼부부를 하룻밤 재우게 되는 이야기가 잔잔했다.「박쥐」와「침대차」는「환상의 빛」처럼 묘사가 충분히 드러내지 않지만 저자의 또 다른 문체를 보는 것 같아 색다른 맛이 있었다. 이제라도 저자를 알고 그의 작품을 읽게 되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린 겨울이라서 이 작품들이 나에 마음에 더 쏙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올해가 가기 전에 저자의 글을 읽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는 기분까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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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미 2014-12-21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좋아하는 지인이 곁에 있다니 부럽네요^^ 저도 책 얘기 맘껏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옆에 있었음 참 좋겠다 싶을 때가 많거든요.

안녕반짝 2014-12-23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리는 멀어서 주로 메신저로 이야기 하지만 그래도 그런 친구가 있으니 너무 좋은 것 같아요! 가까이 있음 더 금상첨화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