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산책 (봄꽃 에디션 한정 판매) - 식물세밀화가가 식물을 보는 방법
이소영 지음 / 글항아리 / 2018년 4월
평점 :
품절


1층으로 이사를 하면서 가장 걱정한 건 벌레였다. 이사한 집이 화단과 맞닿아 있는 1층이라 여름이면 벌레가 극성일 것을 미리 걱정했다. 그리고 이사한 지 며칠 만에 거실 방바닥에 떡하니 거미가 있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다. 집 안의 모든 창문의 물구멍을 막고 나서야 벌레들이 조금씩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런 나를 위안해 주었던 건 벌레들의 요충지인 화단의 꽃과 나무들이었다. 식물도 잘 못 키워서 화분이라곤 하나도 없는 삭막한 집을 앞 뒤 베란다의 식물들이 대신해 주고 있다. 아침마다 베란다 창문을 열면 꽃과 나무가 보이고, 설거지를 할 때는 벚꽃이 피고 지는 걸 모두 보기도 했다. 분명 나는 시골에서 자라 벌레와 식물에 익숙한데도 아파트라는 공간에 길들여져 집 안이 아닌 밖에서 만날 수 있는 것들로 정의해왔던 것 같다.


식물의 형태를 기록하는 게 내 일이다. 7쪽

솔직히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식물세밀화가라는 직업이 있는 줄도 몰랐다. 식물세밀화를 본 적은 많지만 당연히 화가가 그리겠거니 했다. 국립수목원에서 일을 하며 ‘세밀화를 그리는 나는 식물을 연구하는 모두와 연결돼 있는 동시에, 언제나 독립된 개체’라고 했지만 식물세밀화가도 식물을 연구하는 사람이며, ‘종의 보존’에 동참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식물학자들과 함께 식물을 관찰하고 얘기를 나누고 그림을 그린 뒤 또 함께 관찰해서 수정하는 일을 했다고 했다. 그 외에도 동료 식물학자들이 조사하고 수집한 그림을 기록하고, ‘기록한 그림은 새로운 종이거나 기록이 없는 종으로서 학술 발표에 게재되기도, 식물도감을 엮는 데 쓰이기도’ 한단다.

이 정도의 설명으로 식물세밀화가가 하는 일과 역할을 인지하는 데 충분한데 왜 나는 이 책이 이렇게 재밌었던 걸까? 한 번 읽기 시작하자 멈출 수 없을 정도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물들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갔다. 그러다 저자의 그린 식물세밀화에 감탄을 하고(이게 정말 그림이란 말인가!), 얼마나 식물들을 사랑해야 이렇게 낱낱이, 아름답게 그릴 수 있는지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꽃과 열매 하나를 그리는데도 변화하는 과정을 모두 관찰하며 그려야 하기에 녹록한 작업이 아님에도 저자는 기꺼이, 그 모든 일들을 즐겁게 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세밀화를 그리려면 식물들을 관찰하는 건 기본이라 세계의 식물원과 수목원을 소개하고 그곳에서 느낀 점들이 이 책의 전반을 차지하고 있지만 식물을 관찰하는데 환경을 나눌 수는 있어도 국가의 경계는 큰 의미가 될 수 없음을(물론 연구 목적일 때는 다를 수도 있지만 일본에서 본 무궁화는 좀 달랐다) 느끼자 그저 저자의 동선을 따라 관찰하는 게 점점 즐거워졌다.

도시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원예식물들의 건강하게 우리와 공존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는 프랑스 사람들이 포도나 밀, 커피 같은 식물을 대하듯, 다양한 품종이 있음을 알고 폭넓게 소비하는 것이다. 159쪽

단순하게 눈으로 좇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식물학자의 시선으로 보는 세상, 화가이기 때문에 식물의 색으로 색감을 표현하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럼에도 식물세밀화를 남기기 위해서는 ‘한 개체 이상의 희생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며 채집에 따른 죄책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용서를 빌고 ‘네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정확히 잘 그려서, 네 친구들의 삶에 도움이 되도록 할게.’라며 속마음을 드러내는 저자 덕분에 괜히 나도 마음이 놓였다.

숲은 시시때때로 변해 단 한 순간도 같은 풍경이 반복되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식물의 매 순간을 기록하다 보면, 계절 변화나 식물의 시간성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누군가 어떤 대상을 보며 민감하게 관찰하고 기록을 남기는 건 사랑하는 마음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저자가 식물을 대하는 방식에서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어떻게 대해야할지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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