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의 방탕한 선지자 - 높아진 자아, 하나님을 거부하다
팀 켈러 지음, 홍종락 옮김 / 두란노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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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민족 사랑과 애국심은 선한 것이었지만 잘못되었다. 그의 민족사랑은 편협함으로 변질되었고, 이스라엘이 국제적 권력 투쟁에서 이길 가망이 사라지자 그의 삶도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273~274쪽


오늘 주일 예배 대표 기도를 했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이웃에게 복음과 사랑을 전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진심으로 그런 마음이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내가 이웃에게 복음과 사랑을 제대로 전하고 있다 여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그 기도의 바탕에는 나, 내 가족, 내 교회, 내 지역의 안락함이 우선이고 그 다음에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 거란 의미가 있을지도 몰랐다. 여전히 나는 복음의 의미와 싸우고 있는 것일까? 왜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있을까?


이런 마음 상태에서 만난 요나의 이야기는 완전히 새롭게 다가왔다. 둘째가 책에 관심을 한참 가질 때, 밤마다 어린이 성경 중에서도 요나 이야기를 가져와 매일 읽어달라고 할 때가 있었다. 길이가 짧아 매일 읽다 보니 아예 외워버려서 어둠 속에서 아이에게 들려줄 때가 있었다. 큰 물고기가 등장해 요나를 삼키는 부분에서 아이는 가장 흥미로워했는데, 나 역시 요나의 이야기를 흥미 위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저 니느웨로 가기 싫었던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 바다에 던져지는 벌을 받고 결국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를 끌어냈다고 말이다. 하지만 요나가 니느웨로 가기 싫어했던 이유가 잘못된 애국심과 민족 사랑이라는 해석 앞에서 내 안의 나름대로 쳐 놓았던 여러 가지의 벽들이 ‘퍽’ 하고 무너진 기분이 들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민족,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존중하고 사랑하여 그들을 너그럽고 정의롭게 대하기를 원하신다. 48쪽

익히 알고 있듯이 앗수르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제국이었다. ‘요나의 생애 내내 유대인들의 왕국을 계속해서 위협했’고, 결국 ‘북왕국 이스라엘과 사마리아를 침공하여 파괴’한다. 그런데 그런 곳으로 요나를 보내셨다. 그리고 요나가 결국 도망치게 된 의문 즉, ‘선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앗수르와 같은 민족에게 그분의 자비를 경험할 일말의 가능성’을 주신 것일까? ‘가령, 1941년에 한 유대인 랍비가 베를린 거리에 서서 나치 독일을 향해 회개를 촉구했다면 그는 얼마나 오래 목숨을 부지했을까?(25쪽)’만 생각해봐도 요나가 했던 고민에 공감을 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 했고, 다른 곳으로 향하는 배를 탔지만 오히려 그곳에서 요나보다 훌륭하게 처신하는 이교도들을 만나게 된다. 거기서부터 종교, 민족을 떠나 타인을 존중하고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주신다. 그건 요나뿐만이 아니라 당연히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비신자들에게 배울 것이 많음을 알고 모든 사람의 수고에 감사해야 한다. 요나는 이 사실을 어렵게 배우고 있는 중이다. 59쪽

요나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짚어보면서 이렇게 다양한 의미가 들어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마지못해 하나님의 명령에 이끌려 니느웨로 가서 ‘회개하라.’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게 가장 큰 목적인 줄 알았다. 그랬기에 박넝쿨 사건에서 하나님과 논쟁하는 부분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요나가 니느웨에 가기 싫어서 엉뚱한 배를 타고 가다 폭풍을 만나고, 이교들이 요나보다 더 훌륭히 처신하고, 절대 자비를 베풀고 싶지 않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는 것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하나님은 그 사실을 요나를 비롯해 우리에게 알려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구원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복음을 전하면 된다. 그리고 복음에는 차별이 없어야 하며, 우리가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을 버려야 한다. 때론 희생이 필요로 할 때도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

요나서를 깊이 마주하면서 이러한 사실들을 깨닫는 시간들이 참 감사했다. 요나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다양하게 알 수 있었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관한 해석이 인상 깊었다. 요나가 제비뽑기로 바다에 던져져야 할 사람으로 뽑혔을 때 뱃사람들이 물음에 ‘나는 히브리 사람이오.’라며 민족에 관한 질문에 가장 먼저 대답한다. 이에 저자는 ‘요나는 하나님을 믿었지만, 그 믿음은 민족과 국적만큼 그의 정체성에 깊고 근본적인 영향을 주지 않았던 모양(71쪽)’ 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나와 다르면 타자화 시켜 지역, 교회, 소속으로 분류하고 나누며 우리는 그 안에서 어떤 정체성을 찾으려 했던 것일까? ‘우리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사실은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이라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우리는 자신 안에서 길을 잃고 결점 많고 자격 없는 존재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흠모하는 분이 용납하시고 기뻐하시는 존재이다.(278쪽)’라고 했다. 지금껏 나만 그러하다는 우월감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요나서를 읽으면서 단지 복음을 받아들이고의 차이일 뿐, 하나님에게 이 세상 모두가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면 우리가 구분 짓고 나누고 규정하는 모든 경계가 허물어져야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그게 요나서가 주는 가장 큰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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