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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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난 장강명을 잘 몰랐다. 요즘 책 볼 시간도 많이 없고, 더군다나 소설 읽은 것도 참 오랜만이다. 어지간한 작가의 이름은 꿰차고 있다고 자신했는데 그런 내게도 장강명은 생소한 작가다. 그런데, 그는 상복이 많은 작가였다.  보수신문인 동아일보 기자를 10년 가까이 하다,  한겨례 문학상을 받으며 기자에서 작가로 전업한 독특한 이력에다 주요 문학상을 휩쓸며 몇 해 만에 1억 5천만원에 달하는 상금을 거머쥐었다.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니 작가로서 더할나위 없이 호시절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작가는 "하루 8시간 1년 2,000시간을 준수하며, 액셀로 투명하게 문장 생산량을 기록할" 정도로 성실함을 보여주고도 있다.(조선비즈 인터뷰 中) 


글쓰기에서 성실함은 중요하다.  글은 머리가 아닌 `엉덩이'로 쓴다는 것은 동서고금 작가들이 모두 동의할 테니까 말이다. 월급쟁이 기자에서 프리랜서 작가로 신분이 바뀌었으니 고정수입은 없을테고, 믿을 것은 자신의 펜 끝 아니겠는가.  장강명에게 글쓰기의 성실함은 미덕이 아니라 기본이자 필수였을 것 같다.  나는 장강명을 잘 몰랐으나 <댓글부대>라는 제목만으로도 그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일까 곧바로 눈치했다.  때로 작가의 의중은 책 한 권 보다 단 한 문장안에 함축되는 경우가 많다.  이 소설은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소설의 첫 문장을 보자.  " 대체로 2012년 대선 당시 국정원이 운영한 댓글부대를 1세대로 본다 " (6쪽)  이 소설은 제주 4.3 평화 문학상을 받았다.  상금도 상당한 것으로 안다.  장강명은 50여편의 응모작을 따돌리고 <댓글부대>로 이 의미깊은 문학상을 받았다.  제주 4.3 사건은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고 그때 희생된 1만 4천명에 달하는 무고한 양민들은 명예 회복의 절차를 끝마쳤다. 국회에서 통과된 특별법을 통해서 말이다.  일부 극우논평가들을 제외하곤 제주 4.3은 국가폭력의 대표적 사례로 기억되는 역사다.  <댓글부대>가 이 상을 수상한 것은 민감한 사회적 사안을 다루려는 작가의 용기와 치열함에 대한 격려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이 소설은 기대와 달리 2012년 대선 당시의 국정원 댓글 사건을 다루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댓글 조작'을 하는 집단은 20대의 세 청년이다.  그들은 정체를 알 수 없으나, 국가권력이나 국정원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게 `분명한' 합포회라는 베일에 가려진 조직의 지시를 받는다.  이 세 청년은 대단히 뒤틀린 문제아들이 아니다.  기업이 요구하는 모든 스펙을 장착하고서도 취업 문을 넘지 못하는 청년 3인조. 그들은 이 사회와 세계에 대해 기본적으로 냉소적 태도를 갖는다.  그럼에도, 이 소설속에서 그들이 사회에 대해 불평 불만을 드러내지 않는게 신기하다.  대신, 이 부조리한 세계에서 아무 죄책감 없이 그들을 조종하는 물주 앞에 충성을 다하려는 단세포적인 자세만이 엿보인다. 이 청년들의 놀라움 성실함 속에는 2012년 대선 당시 국정원 여직원이 댓글 조작 현장에 사람들이 몰려들자, 문을 걸어잠그고 두문불출의 자세로 헌신하던 유전자가 그대로 살아 숨쉰다.  당시, 문을 걸어잠근 국정원 20대 여직원에게서 분노보다 밥벌이의 엄중함이 느껴졌던 것은 참 서글픈 일이었다.  


그들이 `합포회'라는 기성보수 조직의 지시에 따라, 인터넷 여론 조작을 통해 청년들과 진보집단의 다툼과 분열을 이끌어낼 때, 그들에게 제공되는 `당근'은 오직 `섹스할 수 있는 여성'과 `충분한 사례금' 정도다.  청년 실업 문제가 별다른게 아니다. `섹스와 돈'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기회불평등, 기회상실이 청년 실업의 핵심적 사안 아닌가.  하여, 이 소설의 전반을 지배하는 이 끈적하고 은밀한 한국 사회의 퇴폐적 밤문화는 이 소설의 필요악이다. 그들은 합포회의 프로젝트를 성공할 때마다 상당한 보수를 받는다. 여기에 비례해, 이 세 청년의 섹스는 `노래방의 보도 여인들'과 노닥거리는 것에서 `텐프로 업소의 연예인 뺨치는 여인들'에 이르는 것으로 그들의 신분 상승을 상징화 시킨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독자는 국정원 댓글 사건이 아닌 별 볼 일 없는 3인조 청년의 인터넷 여론 조작의 실태와 그 비열함에 빠져들게 된다.  독자의 기대와 달리 소설이 `삼천포'로 긴 여행을 시작하고 만 것이다.


" 독재 국가에서는 지금도 인터넷이 그런 고발자, 감시자 역할을 해, 그런데 한국에서도 그런가?  인터넷 신문이나 블로거들이 과연 그런 역할을 하냐고. 아니지. 그냥 거대 언론이 하던 나쁜 짓을 아마추어들도 소자본으로 하게 됐을 뿐이야. 거대 언론이 점잖게 기업에 겁을 주며 광고를 따냈다면 인터넷신문들은 대놓고 삥을 뜯지. 블로거들은 동네 식당을 상대로 협찬을 요구하고, 이것도 민주화라면 민주화지. 협박, 공갈, 갈취의 민주화, 누구나 더럽고 야비한 짓을 할 수 있게 되는 민주화. "   55쪽, 장강명 <댓글부대>


<댓글부대>는 `2012년 국정원의 선거 여론조작'을 이야기하고 있는 소설이 아닌게 분명해졌다.  난 왜 그런데 이 소설이 그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룬다거나 에둘러서라도 파고들것이라고 예측했을까.  소설제목과 책에 걸쳐있는 띠지에서 오는 착시 때문이었다.  "제가 쓴 소설 중에서 가장 빠르고 독합니다"  사건 진행이 빠른 것은 맞는데 `독하지는 않았다'.  결국 이 소설은 `양비론'에 가닿는다.  이 세계에서 나쁜짓은 거대 권력만의 특권은 아니라는 사실, 따지고 들면 `털어서 먼지 안나오는 인간 없다'는 이상한 결론에 이른다. 하지만, 진정 내가 이런 식의 결론을 도출해내기 위해 이 소설을 잡지는 않았다는건 또 분명하다.  <댓글부대>에서 난 정말 장강명이 `독하게' 국정원의 대선 댓글 조작을 희화화라고 시켜줄 지 알았다.  이건 나만의 바람이었나?


장강명은 책의 마지막 페이지 `출처에 대하여'라는 장에서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거나 마음에 부담을 털어버리듯, 이렇게 일갈한다. " 작가인 저는 이 소설에 나오는 어떤 견해도 찬성하지 않고, 어떤 인물도 지지하지 않습니다 "(243쪽)  그렇다면 묻고 싶다.  작가로서 그는 왜 이 소설을 `독하게 썼다고 주장했는가'  누구의 견해도 찬성하지 않고, 어떤 인물도 지지 하지 않으면서 장황하게 이 긴 소설을 왜 쓰셨는지 묻고 싶다.  그저 4.3 문학상이 주는 무게와 대가를 바라고 소설을 쓰셨다는 이야기일까.  


한국 문학이 망해가고 있다는 비명이 들려온게 어제 오늘의 이야긴 아니다.  최근 신경숙의 표절 사태에서 보여준 양식있는 자들의 행태는 왜 한국 문학이 이지경에 이르렀는지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어정쩡한 태도.   책을 읽지 않는 독자 탓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이 나올 때마다 천문학적인 선인세를 제공하는 출판사와 하루키의 신작을 구입하기 위해, 서점에 긴 줄이 늘어선 것은 하루키 책에다 뭔가 대단한 선물을 끼워팔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작가의 작품이 좋다는 것을 독자들이 느끼고 작가의 상상력이 펼쳐진 그 무한한 세계에 먼저 발 담가 보고자 하는 마음에서다.  한국 독자들은 죽지 않았고, 그들은 좋은 작품에 지갑을 열 준비가 되어 있다.  


그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질 않아서 모르겠지만, <댓글부대>는 적잖이 실망감을 안겨준 것이 사실이다. 내가 진영 논리에 빠져 있어서가 아니다.  작가가 이 세계의 실상을 진보와 보수를 떠나 보편적인 관점에서 반성하자는 의미를 담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힘있는 자들과 힘없는 이들의 양태를 비양심으로 등치시키는 것 자체가 비열한 양비론이다.  대의 민주제는 완벽하지 않는 다수가 그래도 깨끗한 소수를 선택해 정치를 맡기는 제도다.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것은 그들이 깨끗함을 선택받았기 때문이지 대중이 깨끗해서가 아닌 것이다.  국정원의 댓글조작과 희망없는 청년 3인조의 여론 조작이 같을 수 없는 이유다. 


작가에게 분명한 관점은 생명과도 같다.  인간은 완전히 선하지도 않고, 완전히 악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선과 악이 구별되지 않는건 아니다.  어느 시대나 작가의 책무란 선과 악이 공존한 세상에서 용기있게 그 악을 고발하는 역할이다.  분명한 악을 보고도 악이라고 말할 용기조차도 내지 못한다면, 그는 왜 글을 쓰는 것인가.  기자이자 작가였던 고 리영희 선생은 살아 생전 자신의 자서전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이며 그것은 고통을 무릅써야 한다"고 했다.  <댓글부대>에선 그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고통이라면 `밥벌이로 전락한 서글픈 글쓰기'가 보여질 뿐이다.  젊은 작가들이 이런 식으로 소설을 쓴다면 한국 소설에서 맵고 독한 맛은 잊어야 한다. 차라리 매 끼니 청양 고추로 밥 한 사발을 말아 먹든지, 아니면 `발렌타인 17년산'으로 독한 맛을 느껴 보는게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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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02-06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말씀이 참 와 닿네요. 고 리영희 선생의 말씀도요.
이 작품에 대한 아쉬움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님도 역시 그렇군요.
또 이만한 작품에 그런 문학상을 수여해야 한다는 사실이
약간은 서글프네요. 우리나라 작가들 더 치열하고 스스로에게
더 혹독해져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러다 우리나라 문학 하양평준화되겠어요.

개츠비 2016-06-08 09:46   좋아요 0 | URL
상을 받을 수는 있지만, 4.3문학상과는 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엠뷔피콥 2016-08-13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성어린 리뷰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이 글을 장강명 작가가 읽고 리뷰를 해줬으면 할 정도네요.

고통이라고는 밥벌이를 위한 고통밖에 보이질 않는다라는 마지막 글에서
무릎을 탁치고 갑니다

리뷰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