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라이프니츠의 [보편정신 학설에 대한 고찰]에서 미리 봤을 때부터 모든 것이 정신화 되어 있다는 스피노자의 말이 무척 좋았다. 3부 서문에 나오는 인간은 국가 속의 국가가 아니라는 말과도 통하는데, 정도의 차이는 있으되 인간과 사물 사이에 질적 차이는 없다는 것, 개별화되고 내면화되고 사적인 정신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스피노자의 단호함과 함께 무척 좋았다. 그래서 시몽동의 책을 샀다. 스피노자 수업 들으면서 읽고 싶은 많은 책들이 생겼지만 이렇게 덜컥 산 책은 처음인데 언제 읽을지 모르지만 인간과 기술은 차이가 없다라는 그의 생각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싶다. 정말 파격적이잖아. 인간과 사물을 동급으로 놓는 생각은 스피노자가 아니더라도 그 이후 여러 철학이나 문학에서 접했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서 인간과 기술에 차이가 없다니. 인간과 기술이 존재와 도구의 관계가 아니라 같은 계열에 속한다니 이 파격적인 주장을 어떤 논리들로 전개해나가고 논증해갈지 정말 궁금하다. 현재의 얄팍한 연상으로는 AI가 당장에 떠오르는데 어쨌든 매력적인 주장이다.

 

다른 개체들- 이것들도 상이한 정도이긴 하지만 모두 정신화animata되어 있다-보다 인간에게 더 많이 속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 안에는 모든 실재에 대한 관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 인간과 다른 자연 존재자들 사이에 존재론적 차이가 난다는 점을 부정하고 있다. 3[서문]에 나오는 스피노자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은 국가 속의 국가가 아니다. 그 대신 스피노자는 나는 정서들의 본성과 역량, 그리고 정서들에 대한 정신의 역량을 내가 앞의 1, 2부에서 신과 정신을 다루었던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다룰 것이며, 인간의 행위 및 욕구를 마치 선과 면, 물체들의 문제인 것처럼 간주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는 다른 개체들-이거들도 상이한 정도이긴 하지만 모두 정신화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 인간과 다른 개체 사이에 질적 차이는 없고 단지 정도 차이라는 것.

 

- 질베르 시몽동 Gilbert Simondon.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추어 본 개체화>가 이번에 한국에 나왔는데, 그는 매우 독창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철학자다. 스피노자 철학과도 아주 비슷하다. 흥미롭게도 그는 정작 스피노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ㅋㅋㅋ 스피노자에 대한 아주 전통적인 평가인 범신론자라는 점을 받아들여서 싫어하는 것인데 하지만 생각은 스피노자와 매우 비슷하다. 처음 <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추어 본 개체화> 논문이 나왔을 때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었지만, 들뢰즈가 발굴해서 서문도 쓰고 <천개의 고원>에서 인용도 하고 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논문이 프랑스어 말고 외국어로 번역된 것은 한국이 처음이다. 아직 영어로도 번역되지 않았는데 그만큼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 지금까지 기술철학의 기조는 인간과 기술은 차이가 있다는 것인데 시몽동은 인간과 기술은 차이가 없다라고 말한다. 인간과 기술은 결코 존재와 도구의 관계가 아니고, 같은 계열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생각이 너무 파격적이라서 80년대까지도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80년대 말부터 프랑스에서 주목을 받고 현재 영미철학계에서 굉장한 주목을 받고 있다. 미국에도 곧 번역이 되어 출간될 예정이다. 이 책을 스피노자 철학과 비교하면서 읽어보면 꽤 흥미로울 것이다.

 

2. 스피노자가 내린 실망의 정의를 보고 절대 미리 예습하지 않겠다는 나만의 원칙을 깨고 3부 부록을 미리 공부할 뻔했다. ’양심에 흠집을 내다실망으로 이어지는 것에 대해 내 멋대로 해석해놓고 혼자 너무 좋아서. 너무 좋았던 이유는 내가 내 자신에게 가장 실망을 느끼는 순간은 내 양심에 떳떳하지 못한 순간, 눈앞의 나의 욕망과 양심에서부터 자라났을 나의 신념이 충돌할 때 어느 정도의 타협을 하는/하고자 하는 유혹을 느끼는 나 자신을 발견했을 때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양심에 구멍을 내다가 아니라 흠집을 낸다는 것이 마음에 깊게 다가왔다. 보통 나처럼 소심한 사람들은 윤리적이고 양심적이어서가 아니라 용기가 없거나 죄책감을 짊어질 에너지가 없어서 양심을 확 거스르거나 양심에 직격탄을 맞추는 일은 또 잘 하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아예 눈 딱 감고 양심에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경우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때문에 실망이 희석되는, 매우 아이러니하고 왜곡된 방식으로 감정이 변한다. 이런 직격탄을 맞췄던 경우의 99프로는 나의 시간을 확보하고자할 때였으므로 합리화할 근거마저 충분했다. 항상 시간이 너무 모자라니까, 그런 것에 비해 해야 할 일들은 너무 많으니까, 늘 충실했으니 나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이 정도 이기적이어도 되지 않을까... 등등. 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주체적으로‘ ’고민 끝에양심을 외면했다는 (가짜) 성취감이 실망을 희석하는 것이다. 왜 가끔씩 전혀 안 그러던 사람이 어쩌다 양심에서 완전히 일탈해서 팜므파탈처럼 구는 스스로에게 해방감을 느끼는 것, 주변에서나 소설에서 종종 보잖아. 하지만 흠집을 낼 때는 그런 것조차 없다. 그냥 나는 하찮고 같잖은 이유로 양심에 흠집을 낸, 그러니까 양심을 외면하겠다는 원대한마음조차 없이 양심을 온전히 지켜내고 싶었는데 결국 몇 프로의 양심을 팔아치워 타협한 하찮고 같잖은 사람일 뿐이다. 그때 내 스스로에게 느끼는 수치심과 실망은 내 영혼에도 흠집을 내는 치명적인 것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흠집은 구멍보다 쉽게 날 수 있기에 때로는 더 치명적이지. 아무튼 그래서 스피노자가 실망이라는 단어를 조합해서 만들어낸 방식이 나에게는 너무 좋았다. 나처럼 이 단어를 받아들이는 것은 양심과 실망 사이를 니체와 반대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셈인데 결국 비슷한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 같아도 어떤 순간에는 방향의 흐름이 본질을 바꾸는 경우도 있으니까.

 

- 스피노자는 사실 신조어를 거의 쓰지 않는다. 아주 가끔 있다. 신조어라기보다 단어들을 가지고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테면 3부 부록에서 실망이라는 정의. conscientiae morsus. consicientiae는 양심, morsus라는 말은 흠집내다, 물어뜯다 같은 뜻이다. 이것을 스피노자는 conscientiae morsus는 희망했던 것보다 더 나쁘게 일어난 과거의 것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이다, 실망이라고 말한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스피노자를 언급하면서 이 용어를 쓰는데 스피노자가 만들어낸 말이기 때문이다. concientiae라는 말과 morsus라는 말을 합쳐서 쓴 것은 스피노자가 처음이다. 니체는 이 용어를 <도덕의 계보>에서 양심의 가책이라고 번역한다. 사실 이것이 원래 단어의 뜻에는 더 부합한다. 도덕률 도덕법칙 도덕적인 이상에 부합하지 못하거나 지키지 못했을 때 내면적으로 자신을 책망하고 자책하는 것을 두고 니체가 스피노자의 용어를 가져오면서 양심의 가책이라고 쓰는 것. 스피노자의 용법과 니체가 가져다 쓴 용법은 전혀 다르다. 어쨌든 스피노자가 만들어낸 표현이다. 단어를 만들어낸 건 아니고 기존의 단어를 새롭게 결합해서 새로운 뜻으로 만든 것.

 

3. 시몽동의 책을 덜컥 사버린 것과 비슷한 크기로 아니 어쩌면 더 크게 조나단 이스라엘의 급진적 계몽이 너무 궁금하고 읽고 싶어서 아는 몇 명을 통해 번역진행상황을 수소문했는데 현재로서는 그 어디서도 이 책을 낼 계획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존에 들러 주문할까말까 한참 고민했는데 원서까지 손대기 시작하면 끝도 없을 것 같아서(이럴 때마다 늘 하나마나한 생각이지만 로또를 맞아서 정말 공부할 수 있는 삶이었으면 좋겠다) 가까스로 참았다. <세 명의 사기꾼>은 번역되어 나와 있지만 굳이 사서 읽게 될 것 같지는 않은데 스피노자의 정신이라는 익명은 너무 귀여우면서 명확하잖아ㅋㅋ 90년대 후반 인디밴드 이름 같고 막ㅋㅋ

 

17세기에서 18세기까지 스피노자주의 또는 반스피노자주의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보기에 가장 포괄적이고 제일 좋은 책은 조나단 이스라엘Jonathan Israel<The Radical Enlightenment: Philosophy and the Making of Modernity, 1650~1750>이다. 2002년에 이 책이 나왔는데 서평만 해도 수백편이 나올 정도로 서양학계에서 엄청나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계몽주의를 이해하는 아주 새로운 관점을 세운 책이다. 이 책의 중요한 논점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계몽주의는 반쪽의 계몽주의였다는 것. 조나단 이스라엘의 표현을 빌면, moderated enlightenment.

 

그의 주장은 이렇다. 우리는 온건한 계몽주의, 절충적인 계몽주의를 계몽주의의 본질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사실 moderated enlightenment의 기저에는 훨씬 radical enlightenment의 흐름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훨씬 더 급진적인 계몽주의의 중심에는 스피노자가 있었다. 스피노자 철학이 급진적인 계몽주의의 기원에 있었으며 동력을 제공해준 원천이었다. 그래서 이 책 전체는 어떻게 보면 스피노자주의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스피노자 철학이 어떻게 네덜란드에서 프랑스에서 독일로 영국으로 유럽 각지로 전파되어 영향을 미치고 어떤 반발을 불러일으켰는지의 과정을 따라간 것. 이 책은 서양철학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계몽주의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큰 화두를 던졌다.

 

우리는 그동안 스피노자라는 사람이 1677년에 사망한 이후에 스피노자의 책이나 글이 어떻게 수용됐고 어떤 영향을 미쳐왔는지는 사실 잘 몰랐는데 특히 최근에 들어서 이와 관련한 논문들이 많이 나오면서 예전보다 훨씬 그의 책이 어떤 영향을 미쳤고 어떻게 왜곡됐는지를 잘 알게 되었다. 그런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준 것이 바로 이 조나단 이스라엘의 책이다. 이게 번역된다는 이야기를 7-8년전부터 들었는데 아직 안 됐다. 900페이지의 상당이 두꺼운 책인데 어렵지 않고 소설 읽듯이 역사책 읽듯이 술술 넘어가는 아주 재미있는 책이다.

 

<세 명의 사기꾼> 18세기 유럽의 스피노자주의 문헌을 대표하는 책 중에 하나다. 저자 이름이 스피노자의 정신이다ㅋㅋ 17세기, 18세기 검열이 아주 심했던 시기에 저자 이름 없이, 어떤 출판사에서 나왔는지도 모르게 내는 문헌들을 지하간행물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 중 하나며, 제일 유명한 문헌 중 하나기도 하다. 여기서 세 명의 사기꾼은 누굴까? 데카르트? 데카르트가 사기꾼은 아니지ㅋㅋ 바로 예수, 마호메트, 모세. 성경에서 나온 3개의 종교 창시자를 사기꾼이라고 칭한다. 아주 급진적인 종교비판론이다.

 

4. 첫 번째 갸웃함) 스피노자에게 선/, 좋고/싫음은 애초에 인간 중심적으로 자의적 개념인 건데 유용하다-무용하다라는 나눔도 역시 그런 것 아닌가? 유용-무용의 기준은 누가 어디에 잡는 거지? 두 번째 갸웃함) ‘유용하다는 개념을 십분 받아들여서 생각했을 때, 여러 가지 작용을 동시에 하는 인간 쪽이 단순한 작용만 하는 생물체보다 유용하겠지만, 여러 가지 작용을 하는 만큼 다방면으로 유해하기도 하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서의 유해함과 여러 가지 방식으로서의 유용함의 플러스 마이너스 계산은 어떤 식으로 할 것인가. 단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유용하다고 해서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나? 물론 여기서 말하는 우월함은 좋은 방식이든 나쁜 방식이든 영향력을 행사하는 범위와 크기에 따라,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변용하고 변용되는방식의 다양함과 크기로 따지는 것 같긴 하지만. 그러니까 아이보다 어른이 더 우월한 것처럼 권총보다 원자폭탄이 더 우월한 것처럼. 그렇다면 더욱더 유용이라는 개념에 대해 갸웃하게 된다.

 

이와는 별개로 스피노자가 작용만 이야기한 게 아니라 수용할 수 있는 능력도 이야기한 것이 정말 좋았다. 다양한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수용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중요한 능력이라는 것. 나는 요즘 특히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 내가 보기에는 다른 게 아니라 틀린 생각을 가진 것 같은 사람, 그래서 피곤한 논쟁을 해야 하거나 서로 그 부분은 건드리지 않기 위해 암묵적 괄호를 쳐놓고 그 주변부만 겉도는 대화를 해야 하는 사람을 내 일상에서 도려내기 보다는 나에게 부정적 작용을 하더라도 계속 대화하고 계속 의견을 주고받고 계속 불편해지면서 일상의 한 부분으로 끌고 가야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게 쉽지만은 않아서 가끔씩 고민하게 된다.

 

사실 나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굳이 왜 에너지 흡혈요소를 일상에 붙여놓고 가야하는지 회의를 깊이 가졌던 사람인데 생각이 바뀐 이유는 그 몇 년 간 그런 사람을 일상에서 도려내온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이 결국 아집과 퇴행인 여러 사례들을 봐왔기 때문이다. 거의 예외가 없었다. 물론 그들은 지금의 자신의 삶이 너무 편안하고 평온하고 즐겁다고 이야기한다. 당연하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 듣고 싶은 말만 해줄 수 있는 사람, 공감해주는 사람들만 딱 모아놓고 그들끼리 같은 의견을 계속 주고받으면서 그와는 다른의견은 다 틀린것으로 확정짓거나 그저 타자화시켜버리는 세계는 평온할 수밖에 없다. 그 세계 안에서 나는 대부분 옳고 모두가 나의 의견을 지지해주고 공감해주고 나와 다른 사람들은 그저 이상하고 빻은사람들이니까. 얼마나 명료하고 명쾌하고 평온하고 따뜻해. 분명 그 안에서 여러 고민을 하겠지만 그 고민의 답조차 주변에서 결국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는 환경이니까 자신이 진짜로 고민을 진지하게 한다고 착각조차 하기 쉬운 완벽한 세계다. 나 역시 그런 세계를 구축하는 것에 커다란 유혹을 느낀다. 그런데 그러니까 한때 총명하고 조금 앞서 나가있는 것 같던 사람들이 다 그 안의 세계 속에서 아집의 크기를 불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아집에 먹이를 주고 결국 퇴행해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고나니 조금 무섭다. 적어도 내가 다다르고 싶은 세계는 저 세계보다는 훨씬 흐릿하고 고민할 것도 많고 불명료하고 불편하고 피곤하더라도 수용의 가능성이 보다 훨씬 열려있는 세계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그게 너무 피곤해져서 아 몰라 그냥 나도 클린한 세계를 만들고 살래라는 생각에 빠지곤 하는데(좀 아집이 커지고 퇴행 좀 하면 어때!) 그렇다면 나는 왜 공부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부딪혔다. 반지성주의라는 것은 공부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결국 공부를 많이 하더라도 그 공부를 자신의 아집을 공고히하는 사료로 쓰면서 다른’, 내 눈에는 빻아보이는세상을 이해하려는 것을 포기해버리고, 나와 다른 의견에 귀를 닫아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전혀 공부하지 않더라도 어떤 경험을 자기 안에서 지성적인 방식으로 녹여가는 사람들은 결국 다양한 방식으로 무언가를 수용할 수 있는 틀을 키워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만약 반지성의 세계 속에서 평온함을 찾고자 결정한다면 나는 공부할 필요가 없고 아니 공부하는 게 오히려 더 유해할 텐데(나의 반지성적 세계를 공고히 하는 말만 취사선택해서 받아들일테니까) 그렇게 살고 싶은가? 근데 너무 피곤해!!! 이런 고민을 하던 차에 스피노자가 수용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 언급한 2부 정리29가 나의 마음을 조금 다잡아줬다. 내가 스피노자를 공부하고 여타의 책을 읽고 공부라고 할 만한 것들을 하는 어떤 이유와 목표로 삼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방식으로 무언가를 수용하는 능력. 내 정신이 조금 덜 늙을 수 있는, 안 좋은 방식으로 덜 공고해질 수 있는 중요한 능력.

 

1) 하지만 나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한 물체가 동시에 여러 방식으로 작용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그 능력에 의해 다른 물체들보다 우월할수록, 그 물체의 정신은 (여기에 상응해서 여기에 비례해서) 동시에 여러 가지 것들을 지각할 수 있는 그 능력에 의해 다른 정신들보다 우월하다고 말하겠다

 

- 능력에 의한 논변 :

물체/신체 : 동시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작용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그 능력.

작용하다” agere -> actio 악치오, ago 수용하다 pati > passio 파시오 patior

물체/신체의 정신: 동시에 여러 가지 것들을 지각할 수 있는 그 능력

 

, 한 가지로 작용하는 것보다 여러 가지로 작용하는 것이 더 우월하다. 아주 단순한 순환작용만 하는 생물체와 인간을 비교했을 때 여러 가지 작용을 동시에 하는 인간 쪽이 더 유용한 것처럼. 신체의 열등과 우월도 여기서 갈린다. 아기<어른.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스피노자가 작용만 이야기한 게 아니라 수용할 수 있는 능력도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스피노자가 볼 때 이 수용한다도 굉장히 중요한 능력인 것이다, 물체의 우월성을 규정하는 요소로. 그 물체/신체가 다양한 방식으로 무언가를 수용할 수 있으면 있을수록 그 신체의 정신은 거기에 상응해서 더 다양한 방식으로 지각할 수 있다. , 어떤 물체가 외부의 영향을 다양한 방식으로 수용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그 신체의 정신적 능력의 발전에도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2부 정리29에서 스피노자는 여기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다.

 

문단띠로 사각형입니다.

5. 물체들은 실체들이 아니라 양태들이다, 라는 이야기를 스피노자가 여기서 다시 확고하게 하고 있다. 보조정리1이 분명하게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것이겠으나 실체의 관계에 따라 서로 구별되는 게 아니다라는 표현이 나에게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했는데(그러니까 보조정리1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 멋대로의 생각을 하게 했는데) 철학자마다 실체의 범위가 다르듯이 이 실체를 일반인들에게 적용해본다면,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실체에 가까운 것, 즉 철학자들에게 실체가 갖는 위상을 갖고 있는 어떤 대상, , 그러니까 각자가 최상급의 포지션에 놓고 신처럼 믿고 있는 각자들의 신, 굳이 이름 붙이자면 신념이라고 봤을 때 나 자신을 포함, 모두가 이 보조정리1이 주는 교훈을 잘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너무나 많은 양태로서의 사람들이 각자가 하는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 그러니까 행동으로서 구별된다는 것을 잊고, 내가 믿고 있는 실체 자체가 나 자신이라고 믿어버리는 것 같다. 나는 신을 믿으니까, 나는 신과 이런 sincere한 관계를 맺고 있으니까, 나는 민주주의를 믿으니까, 나는 철학을 믿으니까, 나는 별점을 믿으니까, 나는 정의를 믿으니까, 나는 예술을 믿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실체와 맺고 있는 어떤 추상적 관계성 속에서 인간의 우월이 갈리고 구별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실체와 너와의 긴밀한 관계 말고, 그런 관계를 내세우는 말 말고, 직접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데? 라는 질문에 행동으로 하는 답이 더 많은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어떤 운동과 정지, 어떤 빠름과 느림을 행동으로 펼치고 있는지가 양태를 구별하는 것이지 어떤 실체와의 추상적 관계성만으로 구별된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믿음은 착각이다. 당신이 믿고 있는 실체의 훌륭함이 당신을 규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 믿음이 당신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겠지만, 그리고 뒤에 가서 보면 스피노자는 이 운동과 정지의 일정한 관계비율을 생물학적으로만 정의하는 게 아니라 매우 느슨하고 탄력적으로 적용하는데 운동과 정지가 (아주 사소할지라도) 어떤 실질적 행동과 정신적 태도로 나와야 비로소 구별점이 생긴다는 것. 이게 보조정리1이 나에게 다시 한 번 상기해준 교훈.

 

보조정리1 물체들은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의 관계에 따라 서로 구별되지, 실체의 관계에 따라 서로 구별되는 게 아니다 -> 물체들은 실체들이 아니라 양태들이라는 것

 

6. 인간의 믿음이 튀는 방향은 예측이 너무 어려워서 그 믿음의 농도와 비율을 보지 않고 어디에 떨어졌는지 튀어있는 자국만 보고 그 믿음의 주인의 합리성과 이성을 판단하는 것 또한 쉽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인 것 같다. 적어도 나에게는 어려운 문제. 누구보다도 이성적이고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어떤 문제에 접근하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심지어 창조적 발견까지 해냈지만 그 결과로 신이라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 사람과, 누군가의 논리에 기대어 과학과 이성에 대한 막연한 믿음으로(과학적으로 밝혀졌다고 하니까 이게 사실이겠지) 산출된 이성적인 결과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 사람 중 누가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인가. 전자인가? 과학에 대한 굳건한 최종믿음을 지켜낸 후자인가?

 

마이자의 <암호해독자>를 읽으면서도 한 생각이지만 이성과 과학의 영역과 감성과 비과학적이면서 초월적인 영역 사이의 문은 생각보다도 너무 얇아서 나 같은 범인들은 짐작도 못할 압도적인 과학과 수식의 세계를 경험하고 나면 스르륵 그 문을 열고 그 너머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측면에서 따지면 전 세계 1프로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런 이야기들은 나에게 어떤 종류의 두려움과 혼란을 준다.

 

알면 알수록 파면 팔수록 이 세계의 과학적 정교함에 압도당해서 본인이 논리와 이성과 과학으로 증명해내고 밝혀낸 결과를 놓고 초월적 신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뉴턴에게는 그게 결국 제일 과학적인 설명이었을 것이다. 창조과학의 아버지가 결국 가닿은 초월적 영역은 <암호해독자>의 룽진전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는데, 정말 흥미로운 지점이다. 들뢰즈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그 영역에서 새어나오는 소리들을 굳건하고 두꺼운 문으로 단호히 차단하고, 뉴턴에 앞서 이미 이런 목적론 미신과 그 미신을 갖게 되는 사람들의 심리까지 짐작해서 비판했던 스피노자는 선생님 말대로 정말 대단히 급진적인 사람이다. 스피노자의 급진성에 놀라는 게 한두번은 아니지만 이런 점에서의 급진성이야말로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부분.

 

- 2) 운동이 무한히 시작된다. 기원도 끝도 없다. 이렇게 되면 기독교의 창조론과도 상당히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 사후 뉴턴이 <프린키피아>10년 후에 출판했고 생전에 3판까지 냈는데, 마지막 3판을 내면서 일반 주석이라고 해서 자신이 증명한 것에 보충설명을 붙인다. 그 주석에 스피노자에 대해 비판하는 구절이 나온다. 그 핵심은 이렇다. 천체, 행성들의 체계를 봐라. 이 행성들의 관계와 이 행성들을 지배하는 법칙이라는 게 너무 복잡하고 정교하고 너무 아름다운데, 너무 조화롭게 아주 빈틈없이 잘 들어맞는데, 그런 만큼 이 체계가 우연히 만들어졌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이게 자연적으로 원인들의 무한한 연쇄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이것은 틀림없이 매우 현명한 설계자가 있었고, 그 설계자가 이걸 설계한 게 분명하다. (신을 의미하는 것.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격적인 신과는 약간 다른 신이겠지만 어쨌든) 우주의 질서를 최초로 설계한 설계자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면서 스피노자를 비난한다. 스피노자처럼 원인들의 무한한 연쇄만 가지고서는 이렇게 복잡하고 정교하고 아름다운 우주가 있는지 설명할 수 없다고. 창조과학의 뿌리인 뉴턴이시다ㅋㅋ

 

사실 스피노자는 이 비슷한 이야기를 벌써 했다. 1부 부록에서. 목적론 미신에 대한 비판에서. ”그들이 인간 신체의 구조를 보고 놀라 얼이 빠지게 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이 이처럼 대단한 기예의 원인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그들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신체구조는 어떤 역학적인 기예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신 또는 초자연적인 기예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어떤 부분도 다른 부분에 손상을 주지 않도록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적의 진짜 원인을 찾으려 하고, 바보처럼 자연적인 것들에 대해 놀라기보다는 학식 있는 사람들처럼 그것들을 이해하는데 전념하는 사람들은 도처에서 불경한 이단으로 간주되며 우중이 자연과 신의 해석자로 숭배하는 사람들에 의해 비난받는다.“ <- 이 인간 신체가 이렇게 정교하고 복잡하고 아름다운데 이게 어떻게 자연적으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분명 누군가 초자연적인 기술자가 인간신체를 처음부터 설계한 게 분명하다고 말할 거라는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들뢰즈 같은 경우도 뉴턴과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얼마나 급진적인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다ㅋㅋ


7. ”변용하는 것과 변용되는 것의 본성이 동시에 반영된다는 것.“ 이 점까지 자연학소론에 기술하다니 이 세심한 스피노자! 평소에 나는 이것을 ”oo의 지문이 **의 영혼에 찍히면서 만들어지는 변화라고 표현하는데 oo의 지문이 변용하는 것의 본성, **의 영혼이 변용되는 것의 본성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어떤 변화에 대해 이해하는 기본적인 방식인데 에티카에서 스피노자가 스피노자식으로 찝어준 걸 보고 반가움

 

공리한 물체가 다른 물체에 의해 변용되는 모든 방식은 변용된 물체의 본성과 동시에 변용하는 물체의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온다. 따라서 하나의 동일한 물체는 그것을 움직이는 물체들의 차이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게 되며, 역으로 다른 물체들은 하나의 동일한 물체에 의해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게 된다.

- 1부에서 변용 개념을 자주 봤었다. 양태와 비슷한 개념. 1부 정의5. 그런데 2부에서 변용이라는 개념의 다른 용법이 나타나게 된다. 이 공리에서 쓰인 변용1부에서 이야기하는 양태로서의 변용이 아니라 물체가 다른 물체에 의해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정지해있던 물체가 외부 물체와의 충돌에 의해 운동을 하게 되는 것, 동쪽으로 향해 가던 것이 충돌해서 북쪽으로 가게 되는 것, 이런 것을 말한다. 2부에서 신체/물체와 관계해서 이 변용 개념이 상당히 자주 쓰인다.

- 변용하는 것과 변용되는 것의 본성이 동시에 반영된다는 것. 2부 정리16, 정리17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공리이다.

 

8. 개체에 대한 매우 느슨하면서 매력적인 정의. 6번과도 통하는 구석이 있는데 개채성, 내재성, 본성, 본래적 본질로 개체를 정의하지 않고 개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그것들로도 제시하지 않고 철저히 외재적인 운동과 정지의 관계에 입각해서 정의하는 점. 놀랍도록 담백하면서 어떤 점에서 매우 차가운 정의다. 이 정의의 틀이 나중에 코나투스라는 내적인 역량을 어떻게 모순 없이 잘 담아내는지 지켜볼 것도 흥미롭다 (아직까지 나는 개채성에 대한 이중적 기준의 문제에 동감하고 이 상반된 관점에서 오는 혼란을 해결하지 못한 상태다)

 

- 이 정의에서 흥미로운 점은 스피노자가 개체에 대한 정의를 개체가 지닌 어떤 본래적인 본질에 입각해서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개체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이것 역시 하나의 복합물체이며, 개체들이다)의 본성에 의해서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스피노자는 연합체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의 본성에 외재적인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입각하여 연합체의 본성을 정의한다. 따라서 이 연합체의 본성은 이러한 외재적 관계의 결과인 셈이다.

- , 스피노자가 정의하는 개체의 범위는 매우 넓다. 어떤 게 갖춰지면 개체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스피노자의 답은 개체들이 연합해 있을 때’. 그렇다면 연합은 무엇인가? ”같은 크기를 지니고 있거나 크기가 서로 다른 일정한 수의 물체들이 다른 물체들에 의해 압력을 받아coercentur 서로 의지할 때, 또는 그것들이 같은 속도나 서로 다른 속도로 운동하고 있을 경우에는 일정하게 규정된 어떤 관계에 따라 자신들의 운동을 서로 전달 하는 것.

 

- 개체에 대한 아주 느슨한 정의다. 그러다보니 이게 개체에 대한 충분한 정의가 되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단순물체에 내재성, 내면성이 없듯이 여기서 개체라고 정의된 복합물체도 마찬가지로 내재성, 내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개체를 개체로 만드는 것은 외부 물체들의 압력이다. 압력에 의해 서로 의지하게 되고, 연합하게 되고, 하나의 개체를 이루는 것. 일정한 운동을 전달하며(= 운동과 정지 사이에 일정한 관계를 형성하며) 개체를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본성이라는 말이 없다. 내면적인 본성이 없는 개체기 때문에.

- 스피노자가 2부 정리13의 주석에서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정신: 신체의 관념- 신체: 정신의 대상이라고 정의했고, 그게 합일(연합)을 이루는 게 인간이라고 이야기했다. 거기서 스피노자의 인간에 대한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도 다르고 데카르트와도 다르다. 스피노자의 개체에는 형상, 질료는 나오지 않거니와 내면성도 없다. 매우 담백하다. ”다른 물체들에 의해 압력을 받아coercentur 서로 의지할 때, 또는 그것들이 같은 속도나 서로 다른 속도로 운동하고 있을 경우에는 일정하게 규정된 어떤 관계에 따라 자신들의 운동을 서로 전달할 때라고 정의내릴 뿐이다.

 

- 그렇다면 이 정의는 물체에만 해당이 되는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좀 멀리 가볼까? 4부 정리39 인간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 간에 지니고 있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비율 ratio)가 보존되도록 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인간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 간에 운동과 정지의 다른 관계[비율]을 갖게 하는 것은 나쁜 것이다.” 4부 정리39의 주석 한 부분 나는 5부에서 이것들이 정신에 얼마나 이롭거나 해로울 수 있는지 설명해볼 생각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는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 상이한 운동과 정지의 관계(비율, ratio)을 갖도록 배치될 때 신체가 죽는다고 이해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인간의 신체가 사람들이 그로 인해 그 신체가 살아있게 된다고 생각하는 피의 순환 및 다른 것들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좁은 의미의 생물학적 생리학적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이를테면 호흡 같은) 그 자신의 본성과는 완전히 다른 본성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점을 감히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근거도 나로 하여금 신체는 오직 시체로 변화되었을 경우에만 죽는 것이라고 여기도록 강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 죽는 것만 신체가 죽는 게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죽지 않더라도 신체가 사실상 사망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다른 경우들이 있다). 더욱이 경험 자체는 그와 다른 것이 옳다고 설득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때로는 사람은 과연 그가 동일한 그 사람인지 말하기 어려울 만큼 심각한 변화를 겪곤 하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어떤 스페인 시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는 병을 앓은 뒤에 비록 회복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썼던 우화들 및 비극들을 자신의 것이라고 믿지 않을 만큼 자신의 과거 삶을 망각해버렸으며, 그가 자신의 모국어까지 망각했다면, 사람들이 그를 얼마든지 성인 어린애로 간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이것이 믿을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면, 우리가 어린애에 대해서는 무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노인은 어린애들의 본성이 자신과는 전혀 다르다고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사례]로부터 스스로 이 사실에 대해 추측해보지 않는다면 자신이 예전에 어린애였다는 사실을 납득하려고 하지 않는다.

-> 다른 비율을 가지면 심한 경우 죽거나 질병에 걸리거나 어려서부터 어린애와 노인은 생물학적으로는 같은 사람일 수 있지만 스피노자에 따르면 변형, 운동과 정지의 일정한 관계의 변형,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 그렇다면 이 정의는 물체에만 해당이 되는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좀 멀리 가볼까? 4부 정리39 인간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 간에 지니고 있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비율 ratio)가 보존되도록 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인간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 간에 운동과 정지의 다른 관계[비율]을 갖게 하는 것은 나쁜 것이다.” 4부 정리39의 주석 한 부분 나는 5부에서 이것들이 정신에 얼마나 이롭거나 해로울 수 있는지 설명해볼 생각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는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 상이한 운동과 정지의 관계(비율, ratio)을 갖도록 배치될 때 신체가 죽는다고 이해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인간의 신체가 사람들이 그로 인해 그 신체가 살아있게 된다고 생각하는 피의 순환 및 다른 것들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좁은 의미의 생물학적 생리학적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이를테면 호흡 같은) 그 자신의 본성과는 완전히 다른 본성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점을 감히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근거도 나로 하여금 신체는 오직 시체로 변화되었을 경우에만 죽는 것이라고 여기도록 강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 죽는 것만 신체가 죽는 게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죽지 않더라도 신체가 사실상 사망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다른 경우들이 있다). 더욱이 경험 자체는 그와 다른 것이 옳다고 설득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때로는 사람은 과연 그가 동일한 그 사람인지 말하기 어려울 만큼 심각한 변화를 겪곤 하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어떤 스페인 시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는 병을 앓은 뒤에 비록 회복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썼던 우화들 및 비극들을 자신의 것이라고 믿지 않을 만큼 자신의 과거 삶을 망각해버렸으며, 그가 자신의 모국어까지 망각했다면, 사람들이 그를 얼마든지 성인 어린애로 간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이것이 믿을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면, 우리가 어린애에 대해서는 무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노인은 어린애들의 본성이 자신과는 전혀 다르다고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사례]로부터 스스로 이 사실에 대해 추측해보지 않는다면 자신이 예전에 어린애였다는 사실을 납득하려고 하지 않는다.

-> 다른 비율을 가지면 심한 경우 죽거나 질병에 걸리거나 어려서부터 어린애와 노인은 생물학적으로는 같은 사람일 수 있지만 스피노자에 따르면 변형, 운동과 정지의 일정한 관계의 변형,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2부 정리13과 자연학소론에서 개체를 정의할 때 어떤 내면성, 영원 같은 확고하고 불변적인 정체성에 따라 개체를 정의하지는 않지만, 단지 물체들의 차원에서만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정체성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 것이다.

- 생물학적 기능이 곧 정지되어야만 신체가 죽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스피노자는 좁은 의미의 생물학적 기준에 따라서 인간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게 아니다. 생물학적 기준 말고도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다른 식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스피노자가 운동과 정지의 일정한 관계=비율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운동과 정지의 일정한 관계=비율은 단지 생물학적 관계만이 아니라 훨씬 느슨하고 탄력적인 관계다. 그런 면에서 개체에 대한 이 정의는 좀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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