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연학 소론 : 자연학에 대한 보론. 스피노자가 당대의 과학혁명 및 이를 형이상학적으로 뒷받침하고자 했던 철학자들(데카르트, 홉스 등)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추론해볼 수 있는 귀중한 전거를 제공해준다. 크게 세 부분으로 구별 된다.

1. 단순물체들 : 공리1 ~ 공리

2. 복합물체들 : 개체에 대한 정의 ~ 보조정리 7의 주석

3. 인간 신체에 관한 요청들 : 요청1 ~ 요청6

 

단순물체들에 대하여

 

공리1 모든 물체는 운동하든가 정지해 있다

공리2 각각의 물체는 때로는 더 느리게 운동하고, 때로는 더 빠르게 운동한다.

 

보조정리1 물체들은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의 관계에 따라 서로 구별되지, 실체의 관계에 따라 서로 구별되는 게 아니다 -> 물체들은 실체들이 아니라 양태들이라는 것

증명 나는 첫 번째 부분은 자명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물체들이 실체의 관계에 따라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은 1부 정리5 및 정리8로부터 명백하다. 하지만 이는 1부 정리15의 주석에서 논의된 것으로부터 훨씬 더 명백하다.

 

보조정리2 모든 물체는 어떤 점들에서 합치한다. -> 속성(연장), 직접적 무한양태(운동과 정지) -> 공통 통념의 대상

증명 왜냐하면 모든 물체는 하나의 동일한 속성 개념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합치하기 때문이다(2부 정의1에 의해). 그 다음 때로는 더 느리게 때로는 더 빠르게 운동할 수 있고 절대적으로 말한다면, 때로는 운동하고 때로는 정지한다는 점에서 합치한다.

 

보조정리3 운동중이거나 정지해 있는 물체는 다른 물체에 의해 운동하거나 정지하도록 규정되었어야 하며, 이 다른 물체 역시 다른 것에 의해 운동하거나 정지하도록 규정되었고, 이 후자 역시 또 다른 것에 의해 [그랬으며], 이처럼 무한하게 나아간다. -> 관성원리의 수용

- “무한하게 나아간다는 매우 중요한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 즉 과학혁명 이전의 우주는 닫혀있는 우주라서 무한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었다. 그 안의 운동은 원운동이다. 출발하면 돌아서 다시 출발점으로 온다. 그러니까 관성 원리무한을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이 원리가 매우 단순해보여도, 아리스토텔레스와는 전혀 다른 무한의 우주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무한우주 개념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기독교 원리를 정면으로 반박하게 된다. 창조론과도 어긋나고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뒤집는 결과가 된다. 왜냐하면 무한은 시작도 끝도 없이 나간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갈릴레이 관련한 책을 보면 갈릴레이가 무한 개념을 이야기하면서 이것은 사고실험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1) 이 무한개념이 기독교에 반하는 개념이니까 돌려서 말하기 위해 2) 무한하니까. 무한을 검증할 수는 없으니까.

- 여기서 스피노자가 유한한 시간이 아니라 무한정한 시간이라고 한 것은 갈릴레이나 데카르트의 물리학에 나오는 관성개념을 함축한 것이다. 갈릴레이의 17세기 사고실험. 끝도 없는 평면을 가정해놓고 거기서 어떤 물체가 운동을 시작하면 그 운동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관성개념. 어떤 물체가 일단 작용하게 되면 그 물체의 작용은 관성원리에 따르면 계속 되고, 다른 물체가 그 물체의 작용에 영향을 미치기 전까지 계속된다. 정지해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계속 정지. 여기서 말한 계속을 스피노자가 무한정하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게 스피노자가 말한 지속개념의 뜻이다(그러니까 무언가에 의해 멈추기는 하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에서는 모든 물체는 자기가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 원운동. 관성개념은 운동이란 건 무한정인 직선운동. 다른 물체가 다른 물체를 멈출 때에서야 끝나는. ,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은 경계가 있는 우주지만 갈릴레이 관성개념은 끝이 없는 우주. 그러나 이 무한정함은 사물의 본질과는 관계없다. (20)

 

-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237자연의 제1 법칙 : 각각의 실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항상 같은 상태에서 존속한다. 따라서 일단 운동하게 된 것은 계속 운동하게 된다.”

- 운동하거나 정지해 있는 물체는 자기 스스로 운동과 정지를 바꿀만한 내적인 힘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것이 운동하거나 정지하는 것은 타자에 달려있음을 의미한다.

- 데카르트의 주장: 관성원리가 제1법칙-> 물체는 피동적이다.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을 박탈해버림 -> 그럼 이 물체를 움직이는 최초의 힘은 무엇인가? ->

- 데카르트는 <철학의 원리> 36항에서 운동의 두 가지 원인을 구별한다.

“36. 신은 운동의 제1원인이며 우주에 항상 동일한 운동량을 보존한다.

운동의 본성을 고찰한 다음 우리는 이제 운동의 원인에 대해 고찰해야 한다. 운동의 원인은 두 가지다. 첫째로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원인, 곧 세계에 있는 모든 운동의 일반원인이 있고, 둘째로 특수한 원인, 곧 전에 운동하고 있지 않던 물질의 부분들을 운동하게 하는 원인이 있다. 일반 운동 원인이 신 이외에 어떤 것일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신은 애초부터 물질을 운동과 정지를 동반시켜서 창조했고 자신의 일상적인 협력만으로도 창조했을 때와 같은 양의 운동과 정지를 물질 속에 보존시킨다.”

자연적 사물들이 운동하는 궁극적 원인은 신에게 있다 : “연속 창조이론

- , 데카르트에게서 신과 자연은 분리되어 있다. 자연에 신이 내재되어 있는 게 아니라 신이 자연 바깥에, 초월적인 거리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다.

- 데카르트에게 있어 물질적 자연은 신의 속성이 아니다. 스피노자는 연장이 신의 속성이라고 봤는데(그리고 이게 그 당시 굉장히 레디컬하고 놀라운 주장이었다는 것은 이전에 이야기했다) 데카르트는 다르다. 자연은 신과 동등한 어떤 것이 아니라 그저 피조물에 불과하다. 신이 원하면 소멸시킬 수 있는 그런 것이다.

- 스피노자는 연장은 신의 속성이라고 2부 정리1과 정리2에서 명시적으로 이야기했지만 사실 1부에서도 이미 이야기하고 있었다. 1부 정리13의 따름정리나 1부 정리14의 따름정리2, 1부 정리15의 주석 같은 데에서.

- 1부 정리13의 따름정리

이로부터 어떤 실체도, 따라서 어떤 물체적 실체도, 실체인 한에서는 분할될 수 없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물체적 실체. 스피노자적인 의미의 실체가 물체일 수 있다, 연장도 실체일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이렇게 표명한 것1부 정리13의 따름정리다.

 

*** 정리13의 따름정리는 매우 중요하다! ”어떤 물체적 실체도라는 말.

- 왜냐면, 이 주장에는 물체적 실체라는 게 존재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있기 때문이다. 물체적 실체, 다른 말로 하면 연장실체, 연장속성. , 연장속성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연장속성이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이야기다. 그건 다른 말로 하면 신이라는 실체는 연장하는 실체다, 물질적인 실체다라는 의미와 같다.

- 이 당시에 신은 연장하는 실체다, 물질적인 실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스피노자 밖에 없었다. 아마 홉스의 생각은 스피노자랑 다르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는 이라고 곧바로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나중에 홉스가 스피노자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신학정치론>을 염두해 두고 나라면 그렇게 대담하게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 스피노자의 신이라는 것은 물질적이다/ 연장이라는 것이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주장은, 당대에 아주 매우 대담한 주장이다. 당시의 다른 철학자들은 일단 종교적인 갈등 때문에라도, 신이 연장을 자신의 속성으로 갖고 있다는 매우 불경한 주장을 감히 할 수 없었다.

- 사실 철학적인 이유에서도 이렇게 주장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왜냐면, 연장이라는 속성이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 -> ”물질적인 자연이 신적이다라는 이야기. ”물질적인 자연이 신적이다라는 말은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물질적인 자연이 다이나믹하다. 다이나믹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내재적인 역량을 갖추고 어떤 결과를 스스로 생산하는 원인으로서 작용한다그런데 이렇게 물질적 자연이 내재적 원인을 갖고 있다라고 사고하기 굉장히 어려웠다.

 

- 특히 갈릴레이나 데카르트 같은 사람들은 굉장히 어려웠을 것이다. ? 데카르트에게 자연이라는 것은 그냥 기하학적 공간에 불과했다. 데카르트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자연철학과 단덜하고 자연을 수학적으로 해석하기 위한 굉장히 중요한 전제는 자연으로부터 원인으로서의 힘을 다 박탈해버리는 것이었다.

- ?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세계관에 따르면 자연이라는 것은, 자연 안에 존재하는 물체들은 다 내재적인 원인으로서의 힘을 갖고 있다. 이 내재적인 원인으로서의 힘은 측량이 불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은 어떻게 보면 매우 역동적인 자연. 측량불가능한 자연. 원인으로서의 여러 가지 물체. 이런 자연은 수학적으로 표현하기 매우 불가능한.

- 데카르트가 이 자연을 수학적으로 표현 가능한자연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자연이 갖고 있는 원인으로서의 힘을 배제해버려야 한다. 그래서 자연을 기하학적인 평면처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자연이 양으로 환원될 수도 있고, 계산도 가능하다. 데카르트의 자연은 아무런 내적인 힘이 없는 자연, 기계론적인 자연.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자기철학의 내적인 이유 때문에 자연에 원인으로서의 힘을 부여할 수 없었던 것. , “자연 자체는 원인을 부여할 수 없고, 원인을 부여할 수 있는 존재는 자연 바깥의 신이다라는 주장.

 

- 스피노자는 이 주장을 부인. 신즉자연, 자연 자체가 신이다. 신이 갖고 있는 무한한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자연이 스스로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데카르트가 부딪혔던 문제들이 스피노자에게도 똑같이 제기된다. 그럼 우리는 자연을 어떻게 수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가. 신이 갖고 있는 무한한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어떻게 수학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가.

- 불행히도 스피노자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스피노자가 자연철학에 관한 책을 쓰고 싶다고 했었는데, 아마 그 책을 쓰려고 했다면 바로 이 문제를 설명했어야 할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설명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 원인으로서의 역량. 하지만 스피노자는 라이프니츠 같은 수학적 능력은 가지고 있지 못했으니까 자연철학에 관학 책을 썼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지 모르겠다.

- 아무튼 스피노자는 형이상학적으로 데카르트와는 다르게 1) 신과 자연을 같은 것으로 봤고, 2) 데카르트가 자연에서 배제했던 원인개념을 자연 안에 포함을 시켰다. 스피노자의 자연은 데카르트에게 없는 굉장히 역동적인 힘을 내재적으로 갖고 있는 자연이다. (물론 이러한 자연에 대한 형이상학적 개념에 입각해서 어떻게 이것을 자연철학적인 체계로 구성할 수 있을까는, 또 다른 과제다. 스피노자는 그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지 못했지만) 데카르트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자연개념에 원인개념을 넣어줬다. 그러니 정리13의 따름정리는 굉장히 중요한 것!

 

- 1부 정리14 따름정리2 다음과 같은 점이 따라 나온다. 2. 연장되는 실재와 사고하는 실재는 신의 속성들이든가 아니면 신의 속성들의 변용들이다

- 그러니까 스피노자는 연장, 즉 물질적 자연은 신이 갖고 있는 자기원인적인 무한한 역량을 갖고 있다. 즉 자연자체는 누가 외부에서 운동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운동/ 정지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자기원인적인 자연이다라고 말한다. 매우 대담한 주장이다.

- 그러나 난점과 한계도 있다. 갈릴레이나 데카르트, 당대의 자연철학자가 자연을 수학에 의해 설명하려고 하면서 자연으로부터 내재적 힘, 인과적 힘을 배제한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설명이 불가능해서였다. 먼저 1) 관성의 법칙에서 어긋난다. 다시 말해, 아리스토텔레스주의, 물체 자체가 내재적인 힘을 갖고 있고 그 힘을 바탕으로 스스로 운동한다는 논리로 돌아가야하는 것이다. 2) 새로운 관성원리에 입각해서 자연에 내재하는 각각의 사물의 운동할 수 있는 힘을 어떻게 수학적으로 설명할지 몰랐다. 그걸 수학적으로 해낸 사람이 바로 뉴턴, 라이프니츠. 미분 적분 개념을 가지고 와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로 돌아가지 않고도 수학적인 방식으로 어떤 물체의 내재적인 힘을 설명할 수 있게 됐다.

- 스피노자는 자연으로부터 새로운 과학의 원리, 관성원리를 받아들인다. 보조정리3에서 자명하다고말할 정도로 확실하게. 그런데 이 관성원리를 받아들이면서도 연장을 신의 속성으로 귀속시켜, 연장이라는 것이 내적인 인과적인 힘을 갖고 있게 한다. 데카르트나 갈릴레이처럼 아주 피동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문제는 스피노자가 이것을 수학적으로, 새로운 물리학 논리에 입각해서 수학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사망 1년 전에 쓴 편지를 보면 자연학에 관한 책을 쓰고 싶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전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 책은 나오지 못했다. 만약 썼다면, 이 관성원리가 함축하는 피동성과 형이상학적인 힘,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킬 수 있는 어떤 과학원리를 증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닐 수도 있지만)

- 아무튼 스피노자의 목표/지향은 분명했다. 데카르트나 갈릴레이, 새로운 자연철학의 선구자들을 따라 새로운 과학원리가 맞다, 그것에 입각해서 자연을 설명해야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그들이 자연을 새로운 과학적 원리에 입각해서 설명하는 건 좋은데 왜 자연으로부터 인과적인 힘을 다 박탈해야하는가, 그래서 운동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못마땅했다. 그래서 형이상학적으로 연장이라는 것을 신의 속성으로 만든 것.

- 물론 그렇게 형이상학적으로 주장하는 것과 그것을 체계적인 과학이론으로 구성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지만. 그래서 스피노자의 자연학 소론을 포함해서 항상 어떤 운동, 인과성, 개체성 이런 문제에 있어 이 괴리가 문제가 되곤 한다. 그러니까 그의 의도는 매우 분명한데, 그걸 뒷밤침할 수 있는 이론이나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들은 스피노자의 개체개념을 2중적이라고 비판한다.

 

* 따름정리

- “자명한 것이다” : 그러나 과학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의 사람이 본다면 절대 자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피노자가 근대의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의 핵심에 있는 관성의 법칙을 공리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여기서 볼 수 있다.

- “물체A가 정지해있다가 운동을 한다” -> A가 정지해있었다는 사실에서는 A가 운동한다는 사실이 따라 나올 수 없다 -> 외부물체가 작용했다는 사실이 따라 나온다 -> A는 자기 스스로 운동할 수 없다는 게 따라 나온다. : , A가 정지한다면 외부원인, A가 운동한다면 역시 외부원인.

- 관성원리에서 물체는 자기 스스로 운동하는 힘” “원인으로서의 힘을 박탈당하고 있다. 물체는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게 되는 것이다.

- 갈릴레이와 데카르트는 자연의 이치를 설명하는 데에 수학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를테면 자전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수학적 원리를 도입했고, 이 원리를 도입함으로써 갈릴레이와 데카르트는 자연 안의 물체가 내재적 힘으로 스스로 운동하는 힘을 박탈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운동의 원인이 신의 힘이라고 했다.

 

* 데카르트는 정신과 신체의 이원론을 주장했고 데카르트 철학에서는 정신이 속해있는 질서와 신체가 속해있는 질서는 별개의 질서다. 데카르트는 철학자 이전에 과학자로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는 수학과 물리학에서 커다란 업적을 남긴 후, 그 과학적 수학적 발견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형이상학자가 된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철학에 관심이 많기는 했지만. 데카르트는 17세기의 과학혁명이라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세계관을 배격하고 대신에 근대의 새로운 과학혁명을 이룩한 사람 중 하나다. 갈릴레이와 뉴턴의 중간 시기에 있었던 사람. 갈릴레이, 뉴턴, 데카르트들의 공통점은 자연을 수학적으로 인식하려고, 수학의 논리를 가지고-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기하학적인 방식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했던 점이다.

 

뉴턴 이전에는, 자연을 수학적으로 인식하다는 말은 자연으로부터 원인의 힘을 박탈하겠다는 말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이 자연에 내재해있는 걸로 생각했던 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원인은 굉장히 목적론적인 원인인데- 원인으로서의 힘을 자연으로부터 박탈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의 사물을 원이나 삼각형이나 원통 같은 도형처럼 환원했다.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운동이란, 물체가 자기의 내적인 원인으로서의 힘을 가지고 움직이는 게 아니라 그저 위치 이동일뿐이다. 다른 어떤 것에 밀려서 움직이는 것. 이렇게 자연을 수학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은 굉장히 피동적인 세계가 된다. 어떤 내적인, 인과적인 힘이 없는. 외부에서 충격을 주는 대로 움직이는. 그게 관성의 원리 inertia (, 관성의 원리가 이렇게 이어지는구나)

 

자연을 수학적으로 해석한 결과는 자연으로부터 운동능력, 역량을 다 빼앗아간 것이었다. ? 이 시기에는 이 이라는 것을 수학적으로 표현할 방법을 몰랐다. 라이프니츠나 뉴턴 때에 와서 미분적분법을 가지고 와서 운동에너지, 힘이라는 것을 수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어서야 자연의 사물들이 피동성에서 벗어나서 원인으로서의 힘을 부여받게 됐다. 하지만 그 이전, 갈릴레이 데카르트까지는 자연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는 대가로 자연으로부터 힘을 다 박탈했다. 데카르트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데카르트의 초기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작업을 가지고 이 복잡한 것처럼 보이는 자연 사물들을 환원해야할 텐데, 이걸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방법을 나름 탐구한 것이다. 그래서 데카르트의 신체가 속해있는 물리적인 세계는 완전한 피동성의 세계다. 능동성이나 자발성이 전혀 없는 세계.

 

그러면서 이런 문제가 생긴다. 인간의 신체가 물리적인 세계에 속한다고 하면, 인간으로부터 뭐가 빠져버린 거지? 요즘식으로 말하면 주체성, 자발성, 의지, 이런 것들이 빠지는 것인데, 데카르트 입장에서는 그 또한 허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데카르트의 신학적 관점에서도 그렇고, 그리고 데카르트는 인간의 제일 고유한 점이 의지라고 봤기 때문에 인간에게 뭔가 의지의 여지를 남겨줘야만 했다. 벌써 데카르트의 물리학이나 수학의 세계에서는 신체에게 그런 여지를 남겨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남아있는 것은 결국 정신. 그러니까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데카르트의 학문적인 관점(학문적인 맥락)에서 보면 필연적이다. 물리학자로서 보면 신체의 질서는 완전히 수학적으로 양으로 환원된 사물들의 질서인데, 거기서 그대로 놔두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의지라든가 자유가 들어갈 여지가 전혀 없어지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정신과 신체를 분리시킨다. 즉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은 새로운 과학+ 자신의 형이상학적 고민을 접목시켜 둘 다 설명하고자 만든 것

여기에서도 문제가 생긴다. 형이상학적으로 보면 정신과 신체가 분리가 되고, 정신이 속해있는 사유의 질서와 신체가 속해있는 연장의 질서가 완전히 다른데, 그럼 자연의 통일성, 우주의 통일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게 굉장히 수수께끼처럼 남는다. 또 하나, 인간학적 관점에서 보면 데카르트에 따르면 정신과 신체는 서로 상이한 질서에 속해있기 때문에 상호작용 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날마다 일상적인 경험 속에서 우리 정신과 신체가 하나를 이루고 있는, 합일되어 있는 것을 느끼고 있다. , 데카르트의 질서에 따르면 이 두 가지는 분리되어야 마땅하고 다른 질서에 속해있어야 하는 것인데, 우리는 정신과 신체가 합쳐져 있다는 것을 일상경험에서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그걸 두고 우리는 맨날 속고 있는 것이다라고 우길 수도 없고. 그래서 데카르트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할지에 대한 난감한 문제에 봉착한다.

 

데카르트가 1649년에 쓴 마지막 책인 <정념론>, 영혼의 정념이라는 책의 중요한 주제는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데카르트 이후 서양근대철학자들,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말브랑슈 등이 제일 고심했던 주제도 바로 정신과 신체의 관계였다. 라이프니츠가 두 개의 시계의 세 가지 모델을 제안했을 때 첫 번째 모델은 바로 데카르트주의에 입각한 설명이었다. 두 번째가 말브랑슈고 세 번째가 자기 자신. 그러니까 심신 문제는 당시 철학자들에게 굉장히 견고한 논의주제였다. 데카르트가 정신과 신체는 다르다, 분리되어 있다라고 하는 것에 반하여 스피노자는 2부 정리7에서 정신과 신체는 같은 것이다로 출발한다. (25)

 

보조정리3의 따름정리에서 논의해볼 수 있는 문제

1) 물체들은 순전히 수동적 또는 피동적인가 하는 문제

2) 운동의 연쇄는 무한소급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 : 운동의 최초 원인이란 존재하지 않는가? 더욱이 운동의 연쇄가 아주 정교하고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연쇄가 보조정리3에서 말하듯 운동들 간의 기계적이고 맹목적인 타동적 인과연쇄에 의해 자동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러한 운동의 연쇄를 설계하고 구성한 이성적인 설계자가 존재한다. 또는 이지적이고 강력한 존재의 조언과 통제(the counsel and dominion of an intelligent and powerful being)를 통해 우주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체계가 존재하는 것.

 

- 1)의 문제는 위에서 다 이야기했고, 좀 더 나아가서 스피노자는 물체에게만 관성원리가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정신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동일한 법칙이 때로는 신체를 통해 때로는 정신을 통해 표현되는 것. , 코나투스도 때로는 신체를 통해 정신을 통해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데카르트처럼 새로운 과학원리를 물체에게적용하고 정신은 다르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 새로운 과학원리를 양쪽에 다 적용한다. 그러면서 데카르트를 비판한다. 데카르트는 자연에게서 모든 힘을 다 박탈했고, 관성원리 자체, 물체들의 운동법칙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걸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것에 문제가 있다고 데카르트를 비판했다. 이게 스피노자와 데카르트의 상당히 중요한 차이점이다.

- 2) 운동이 무한히 시작된다. 기원도 끝도 없다. 이렇게 되면 기독교의 창조론과도 상당히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 사후 뉴턴이 <프린키피아>10년 후에 출판했고 생전에 3판까지 냈는데, 마지막 3판을 내면서 일반 주석이라고 해서 자신이 증명한 것에 보충설명을 붙인다. 그 주석에 스피노자에 대해 비판하는 구절이 나온다. 그 핵심은 이렇다. 천체, 행성들의 체계를 봐라. 이 행성들의 관계와 이 행성들을 지배하는 법칙이라는게 너무 복잡하고 정교하고 너무 아름다운데, 너무 조화롭게 아주 빈틈없이 잘 들어맞는데, 그런 만큼 이 체계가 우연히 만들어졌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이게 자연적으로 원인들의 무한한 연쇄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이것은 틀림없이 매우 현명한 설계자가 있었고, 그 설계자가 이걸 설계한 게 분명하다. (신을 의미하는 것.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격적인 신과는 약간 다른 신이겠지만 어쨌든) 우주의 질서를 최초로 설계한 설계자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면서 스피노자를 비난한다. 스피노자처럼 원인들의 무한한 연쇄만 가지고서는 이렇게 복잡하고 정교하고 아름다운 우주가 있는지 설명할 수 없다고. 창조과학의 뿌리인 뉴턴이시다ㅋㅋ

 

사실 스피노자는 이 비슷한 이야기를 벌써 했다. 1부 부록에서. 목적론 미신에 대한 비판에서. 그들이 인간 신체의 구조를 보고 놀라 얼이 빠지게 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이 이처럼 대단한 기예의 원인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그들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신체구조는 어떤 역학적인 기예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신 또는 초자연적인 기예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어떤 부분도 다른 부분에 손상을 주지 않도록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적의 진짜 원인을 찾으려 하고, 바보처럼 자연적인 것들에 대해 놀라기보다는 학식 있는 사람들처럼 그것들을 이해하는데 전념하는 사람들은 도처에서 불경한 이단으로 간주되며 우중이 자연과 신의 해석자로 숭배하는 사람들에 의해 비난받는다.“ <- 이 인간 신체가 이렇게 정교하고 복잡하고 아름다운데 이게 어떻게 자연적으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분명 누군가 초자연적인 기술자가 인간신체를 처음부터 설계한 게 분명하다고 말할 거라는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들뢰즈 같은 경우도 뉴턴과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얼마나 급진적인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다ㅋㅋ

 

공리한 물체가 다른 물체에 의해 변용되는 모든 방식은 변용된 물체의 본성과 동시에 변용하는 물체의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온다. 따라서 하나의 동일한 물체는 그것을 움직이는 물체들의 차이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게 되며, 역으로 다른 물체들은 하나의 동일한 물체에 의해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게 된다.

- 1부에서 변용 개념을 자주 봤었다. 양태와 비슷한 개념. 1부 정의5. 그런데 2부에서 변용이라는 개념의 다른 용법이 나타나게 된다. 이 공리에서 쓰인 변용1부에서 이야기하는 양태로서의 변용이 아니라 물체가 다른 물체에 의해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정지해있던 물체가 외부 물체와의 충돌에 의해 운동을 하게 되는 것, 동쪽으로 향해 가던 것이 충돌해서 북쪽으로 가게 되는 것, 이런 것을 말한다. 2부에서 신체/물체와 관계해서 이 변용 개념이 상당히 자주 쓰인다.

- 변용하는 것과 변용되는 것의 본성이 동시에 반영된다는 것. 2부 정리16, 정리17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공리이다.

여기 등장하는 물체는 추상되긴 했지만 하나의 개체, 곧 복합물체다. 두 가지 이유

1) 스피노자는 여기서 본성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데, 본성은 개체에 대한 정의 이후에 나오는 논의에 따르면 부분들 사이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 또는 형태를 통해서만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물체는 부분들 사이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에 의해 성립하는 내부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물체들 사이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고찰하기 위한 논의 목적상 다른 물체와의 외재적 관계에 따라서만 고찰될 수 있다.

2) 스피노자가 변용되다affici“변용하다afficare“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 더욱이 상이한 본성을 지닌 다른 물체들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르게 변용하거나 변용될 수 있다는 점

 

공리운동하는 물체가 정지해 있는 다른 물체와 부딪치지만 이 다른 물체를 밀쳐내지 못하는 경우 앞의 물체는 반사되며, 이 물체는 계속 운동하고 반사된 운동이 정지해 있는 물체(앞의 물체가 부딪쳤던)의 표면과 이루는 선의 각도는 동일한 표면과 이루는 입사 운동의 각도와 똑같을 것이다.

- 데카르트의 <굴절광학>이라는 책에 나오는 논의를 가져왔다. 테니스채를 들고 테니스공이 나아가는 각도를 표시한 그림. 입사각과 반사각의 각도가 같다.

 

이것으로 가장 단순한 물체들에 대해서는 충분할 텐데, 이 물체들은 오직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에 의해서만 서로 구별된다. 이제 복합물체들로 나아가보자.

- 스피노자가 가장 단순한 물체들로 추상하는 것은 원자 같은 것이 아니다. 가장 단순한 물체는 그 자체로 실존하는 어떤 물체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실존하는 물체들을 추상한 것. 가장 단순한 성질-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로 추상되는. 가장 단순한 물체들이 합성해서 복합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복합물체는 여러 가지 부분들이 합성해서 생기는 것인데, 이 부분들도 역시 복합물체. A라는 복합물체를 구성하는 B1 B2 B3..... B1 B2 B3.....들도 복합물체고, 이것을 구성하는 C1 C2 C3....... 이것도 복합물체. 이건 다른 말로 하면 무한히 분해 가능한. 계속 분해해도 가장 단순한 물체가 나오지 않는다. 끝까지 가도 복합물체.

- 그렇다면 단순물체에 대해 자연학소론에서 왜 이야기하는가. 그것은 스피노자가 자연학소론 시작할 때 물체의 본성에 관해서 간단하게 논의하겠다고 하는데, 가장 단순한 물체로 스피노자가 추상한 것은 복합물체를 가지고 와서 이야기 하다보면 운동이라든가 물체가 갖는 그 자체의 특성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복합물체는 실존을 가지고 있고 질량, 크기, 강도, 표면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의 측면만을 가지고 물체의 가장 원초적인 성질을 설명하기 위해서 가장 단순한 물체를 추상한 것.

 

정의 같은 크기를 지니고 있거나 크기가 서로 다른 일정한 수의 물체들이 다른 물체들에 의해 압력을 받아coercentur 서로 의지할 때, 또는 그것들이 같은 속도나 서로 다른 속도로 운동하고 있을 경우에는 일정하게 규정된 어떤 관계에 따라 자신들의 운동을 서로 전달할 때, 우리는 이 물체들이 서로 연합되어 있으며, 이것들 모두가 단 하나의 물체 또는 개체를 합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개체는 물체들 사이의 이러한 연합에 의해 다른 모든 개체들과 구별된다.

- union ‘연합이라고 할지 합일이라고 할지 고민이 있다. 2부 정리13에서는 합일이라고 했고 같은 단어니 통일시켜서 합일이라고 해야할지 연합이라고 해야할지에 대해.

- 복합물체로 오니까 벌써 크기라는 개념이 들어온다.

- 어떤 관계“ certa + ratio. certacertainfixed로 번역될 수 있는데, 이걸 ‘fixed’로 번역해서 엄밀한 관계라고 번역하게 되면 아주 엄격하게 정해진 비율을 갖고 있다는 의미가 되고, 그러면 이 비율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개체로서의 고유성을 상실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이 비율을 이렇게 엄격하게 해석해버리면 개체가 갖고 있는 정체성이 너무 취약해진다. 예를 들어 도마뱀 꼬리가 잘려나갈 수도 있고 팔이 없어질 수도 있는데 이렇게 비율이 깨어져버린다고 실제로 정체성이 깨어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부분이 사라지더라도 그 정체성은 유지가 되는 것이다. 보조정리4와 보조정리5를 보면 스피노자의 생각은 훨씬 다이다믹하다. 개체와 환경이 서로 변화를 주고받으며 끊임없이 변한다. 개체는 일부를 환경에 내어주고 환경은 일부를 주고, 그 반대도 성립하고, 이게 개체가 실존하는 방식이다.

- 요청4에도 관련한 이야기가 나온다. 인간 신체는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매우 많은 수의 다른 물체들을 필요로 하며, 이것들은 말하자면 인간 신체를 계속해서 재생시킨다regeneratur“ 재생시킨다라는 말은 굉장히 강한 말이다. 개체가 딱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주변 환경과 교환하면서 재생된다는 것. 그래서 certa ratio엄밀한 관계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특히 현대처럼 예전이었으면 시체였을 속성을 생명으로 바꿀 수 있기 쉬운 시대에서는.

 

- 이 정의는 개체에 대한 정의를 두 측면에서 내리고 있다.

1) 주변 물체들의 압력에 의한 규정: ”다른 물체들에 의해 압력을 받아coercentur 서로 의지할 때 1부 정리28에 나오는 독특한 실재들의 타동적 인과관계 또는 보조정리3에 나오는 단순한 물체들 사이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에 따라 규정되는 것을 표현

2) 운동과 정지의 관계에 의한 규정: ”일정하게 규정된 어떤 관계에 따라 자신들의 운동을 서로 전달할 때

- 이 정의에서 흥미로운 점은 스피노자가 개체에 대한 정의를 개체가 지닌 어떤 본래적인 본질에 입각해서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개체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이것 역시 하나의 복합물체이며, 개체들이다)의 본성에 의해서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스피노자는 연합체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의 본성에 외재적인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입각하여 연합체의 본성을 정의한다. 따라서 이 연합체의 본성은 이러한 외재적 관계의 결과인 셈이다.

- , 스피노자가 정의하는 개체의 범위는 매우 넓다. 어떤 게 갖춰지면 개체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스피노자의 답은 개체들이 연합해 있을 때’. 그렇다면 연합은 무엇인가? ”같은 크기를 지니고 있거나 크기가 서로 다른 일정한 수의 물체들이 다른 물체들에 의해 압력을 받아coercentur 서로 의지할 때, 또는 그것들이 같은 속도나 서로 다른 속도로 운동하고 있을 경우에는 일정하게 규정된 어떤 관계에 따라 자신들의 운동을 서로 전달 하는 것.

- 2부 정의7이 연상된다. singular thing. 독특한 실재에 대한 정의의 핵심은 원인이다. 다수의 개체들이 하나의 작용에 협력해서 개체 모두가 하나의 결과에 대한 원인이 되는 것. 다수의 개체들이 모여 공동의 결과를 산출. 자연학소론에 나오는 개체와는 강조점이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이 singular thing도 굉장히 광범위한 개념.

 

- 개체에 대한 아주 느슨한 정의다. 그러다보니 이게 개체에 대한 충분한 정의가 되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단순물체에 내재성, 내면성이 없듯이 여기서 개체라고 정의된 복합물체도 마찬가지로 내재성, 내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개체를 개체로 만드는 것은 외부 물체들의 압력이다. 압력에 의해 서로 의지하게 되고, 연합하게 되고, 하나의 개체를 이루는 것. 일정한 운동을 전달하며(= 운동과 정지 사이에 일정한 관계를 형성하며) 개체를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본성이라는 말이 없다. 내면적인 본성이 없는 개체기 때문에.

- 스피노자가 2부 정리13의 주석에서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정신: 신체의 관념- 신체: 정신의 대상이러고 정의했고, 그게 합일(연합)을 이루는 게 인간이라고 이야기했다. 거기서 스피노자의 인간에 대한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도 다르고 데카르트와도 다르다. 스피노자의 개체에는 형상, 질료는 나오지 않거니와 내면성도 없다. 매우 담백하다. ”다른 물체들에 의해 압력을 받아coercentur 서로 의지할 때, 또는 그것들이 같은 속도나 서로 다른 속도로 운동하고 있을 경우에는 일정하게 규정된 어떤 관계에 따라 자신들의 운동을 서로 전달할 때라고 정의내릴 뿐이다.

* 정리13의 주석

이로써 우리는 인간 정신이 신체와 단지 연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정신과 신체의 연합을 무엇이라 이해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 이 한 문장으로 여러 사람(데카르트 중세스콜라철학 기독교 철학)을 동시에 비판하고 있다.

- 데카르트. 데카르트도 정신도 실체고 신체도 실체고 상이한 두 실체가 합일을 이루는 게 인간이다라고 말한바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데카르트 말처럼 유한 실체로서의 정신과 신체의 합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데카르트처럼 이러한 합일이 실체들 사이의 합일이라고 한다면, 이는 양자의 상호작용을 전제하게 된다. 이는 2부 정리73부 정리2, 5부 서문을 통해 불가능한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정신과 신체의 합일은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그 대상으로서의 합일이다.

- 중세 스콜라철학. 따라서 정신 내지 영혼을 인간의 실체적 형상으로 이해하는 중세 스콜라철학적인 관점도 배격된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인간이라는 실체는 정신 내지 영혼이라는 형상과 신체라는 질료로 구성되어 있으며, 따라서 영혼이 능동적이고 신체는 수동적이라고 간주된다. 이렇게 영혼의 능동성과 신체의 수동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스콜라철학적 관점과 데카르트는 일치하는 측면이 있다. , 데카르트는 이것을 도덕적 관점에서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데카르트는 신체가 정신 내지 영혼에 대해 수행하는 작용으로 인해 생겨난 우리의 정념들의 힘을 제어하는 것, 따라서 능동적인 정신이 신체를 통제하는 것이 유덕한 삶을 위해 필요하다고 보았다. 스피노자는 지속적으로 이러한 관점을 비판한다.

 

- 그렇다면 이 정의는 물체에만 해당이 되는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좀 멀리 가볼까? 4부 정리39 인간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 간에 지니고 있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비율 ratio)가 보존되도록 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인간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 간에 운동과 정지의 다른 관계[비율]을 갖게 하는 것은 나쁜 것이다.” 4부 정리39의 주석 한 부분 나는 5부에서 이것들이 정신에 얼마나 이롭거나 해로울 수 있는지 설명해볼 생각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는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 상이한 운동과 정지의 관계(비율, ratio)을 갖도록 배치될 때 신체가 죽는다고 이해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인간의 신체가 사람들이 그로 인해 그 신체가 살아있게 된다고 생각하는 피의 순환 및 다른 것들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좁은 의미의 생물학적 생리학적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이를테면 호흡 같은) 그 자신의 본성과는 완전히 다른 본성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점을 감히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근거도 나로 하여금 신체는 오직 시체로 변화되었을 경우에만 죽는 것이라고 여기도록 강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 죽는 것만 신체가 죽는 게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죽지 않더라도 신체가 사실상 사망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다른 경우들이 있다). 더욱이 경험 자체는 그와 다른 것이 옳다고 설득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때로는 사람은 과연 그가 동일한 그 사람인지 말하기 어려울 만큼 심각한 변화를 겪곤 하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어떤 스페인 시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는 병을 앓은 뒤에 비록 회복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썼던 우화들 및 비극들을 자신의 것이라고 믿지 않을 만큼 자신의 과거 삶을 망각해버렸으며, 그가 자신의 모국어까지 망각했다면, 사람들이 그를 얼마든지 성인 어린애로 간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이것이 믿을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면, 우리가 어린애에 대해서는 무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노인은 어린애들의 본성이 자신과는 전혀 다르다고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사례]로부터 스스로 이 사실에 대해 추측해보지 않는다면 자신이 예전에 어린애였다는 사실을 납득하려고 하지 않는다.

-> 다른 비율을 가지면 심한 경우 죽거나 질병에 걸리거나 어려서부터 어린애와 노인은 생물학적으로는 같은 사람일 수 있지만 스피노자에 따르면 변형, 운동과 정지의 일정한 관계의 변형,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2부 정리13과 자연학소론에서 개체를 정의할 때 어떤 내면성, 영원 같은 확고하고 불변적인 정체성에 따라 개체를 정의하지는 않지만, 단지 물체들의 차원에서만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정체성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 것이다.

- 생물학적 기능이 곧 정지되어야만 신체가 죽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스피노자는 좁은 의미의 생물학적 기준에 따라서 인간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게 아니다. 생물학적 기준 말고도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다른 식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스피노자가 운동과 정지의 일정한 관계=비율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운동과 정지의 일정한 관계=비율은 단지 생물학적 관계만이 아니라 훨씬 느슨하고 탄력적인 관계다. 그런 면에서 개체에 대한 이 정의는 좀 흥미롭다.

 

- 그런데 이러한 개체에 대한 정의 때문에 주석가들은 개체성의 이중적 기준의 문제를 제기한다. 지금 스피노자가 개체에 대한 정의에서 제시하는 기준은 아주 순수하게 자연학적/물리학적인 기준이다. 운동과 정지의 일정한 관계로서의 기준. 그런데 3부에서 스피노자는 모든 독특한 실재의 본질을 코나투스라고 부르고, 인간의 경우에 그걸 욕망이라고 정의한다. 코나투스에 대한 정의는 3부 정리6, 정리7에 나온다.

- 3부 정리6 각각의 실재는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한에서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노력한다.“ 3부 정리6은 좀 놀라운 정리다. 왜냐면 어떻게 보면 관성원리와 똑같은 명제인데(‘운동하는 물체는 운동하는 한에서 계속 운동하려고 한다/ 정지하는 물체는 정지해있는 한에서 계속 정지하려고 한다), 관성원리와 굉장히 달라지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3부 정리6의 증명을 보면 왜냐하면 독특한 실재들은, 신의 속성들이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되는(1부 정리25의 따름정리에 의해) 양태들, (1부 정리34에 의해) 신이 존재하고 활동하는 신의 역량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하는 실재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독특한 실재들을 신의 속성들/신의 본질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한다= 존재하고 활동하는 신의 역량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한다= 독특한 실재들은 신의 역량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나눠 갖는다‘.

- 즉 정리6의 문장 자체는 자연학소론에서 봤던 관성원리를 표현하는 바와 다를 게 없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여기에 내적인 역량을 부여한다. 이 물체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하는 이 경향을 실재가 갖고 있는 내적인 역량으로, 내적인 역량의 결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리7에서 각각의 실재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추구하는 노력conatus은 실재의 현행적 본질 자체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정리7의 증명 마지막 부분에서 각각의 실재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하는 역량 또는 노력은 실재의 주어진 본질, 또는 현행적 본질과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는 실재의 본질, 독특한 실재의 본질을 코나투스, 역량이라고 정의한다. 독특한 실재의 본질을. 자연학소론에서 우리가 봤던 개체에 대한 정의에서는 내면성도 없고 이런 역량의 개념이 없었던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스피노자가 개체를 두 가지 방식으로 정의를 했다고 말한다. 1) 형이상학적인 측면(3부 정리6, 정리7의 코나투스 개념) : 형이상학적 방식으로 정리했다고 말하는 이유는, 신의 역량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하면서 자신의 내적 역량을 갖기 때문에 그렇다. 그 역량이 이 개체의 본질을 형이상학적으로 규정하니까. 2) 순수하게 물리학적이고 자연학적인 측면. 역량 개념도 없고 본질, 내면성도 없는 개체. 그러니까 1)2)는 다른 정의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걸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까. 들뢰즈는 관계와 본질을 구별해야 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관계는 실존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고 본질은 말 그대로 본질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고, 그래서 관계가 지속의 차원에 속한다면 본질은 영원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 아무튼 자연학소론에 나오는 개체에 대한 정의와 코나투스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정의 사이에 차이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니까, 이걸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지의 문제가 주석가들 사이에서 계속 나오게 되고(최근에 영미 주석가들중에서도), 실존과 본질의 구별로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나온다. 그래서 매우 문제적인 정의이다. 하지만 4부 정리39와 주석을 더 보면 다른 측면들도 있는 것 같다. 나중에 자세히 더 살펴보게 될 것이다.

 

- 마지막으로 2부 정리24의 증명을 한 번 보자. 인간 신체를 구성하는 부분들은, 인간 신체와의 관계없이 개체로 간주될 수 있는 한에서가 아니라 어떤 일정한 관계에 따라 서로 운동을 전달하는 것인 한에서만(보조정리3 다음에 나오는 정의를 보라) 인간 신체 자체의 본질에 속한다이 문장을 라틴어 원문에 더 가깝게 직역하면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인간 신체를 구성하는 부분들은 인간 신체 자체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이 부분들이 인간 신체와의 관계없이 개체들로 간주될 수 있는 한에서가 아니라 어떤 일정한 관계에 따라 자신들의 운동을 서로 전달하는 한에서가 아니라면 말이다.”

- 여기에서는 인간 신체가 바로 개체이고, ’인간 신체와의 관계없이 개체로 간주된다는 것은, 이를테면 여기서 부분A가 떨어져 나오면 이 A는 더 이상 신체의 부분이 아니라 이 부분 자체가 하나의 개체인 것이고, 이 부분A를 구성하는 또 다른 부분들, 즉 개체들B,C,D,E......가 있을 것이고. 이렇게 되면 이 부분들은 A를 포함해서 더 이상 신체의 부분들이 아닌 독립된 개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본질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개체들이 얼마나 느슨하고 취약한가. 개체를 이루는 이 부분들이 떨어져 나오면 (아무런 관계없는) 또 다른 개체가 되는 것. 이 부분들이 서로 일정하게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유지하면 그때만 개체의 부분이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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