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개가 온다
송시우 지음 / 시공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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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가장 글 잘 쓰는 추리소설작가는 송시우 작가라고 늘 생각해왔는데, 이번 책을 보고 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유려하고 매끄러우면서 가끔씩 사람 마음을 콱 치고 지나가는 문장들로 착착착 쌓여올라가는 서사를 읽는 맛에 책을 붙든 자리에서 한번에 다 읽었다. 소재의 특성상 우울증에 대한 고찰이 들어가있는데, 전반적인 지식뿐만 아니라 우울증을 겪는 환자들의 심리와 상태에 대한 섬세한 묘사, 우울증이 한국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있고 이런 인식이 우울증으로 괴로워하는 개개인의 삶에 어떤 작용들을 하는지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거쳐, 그렇다면 우울증을 사법적 맥락에서는 어떻게 다루어야할 것인가에 대한 폭넓은 고민을 던지고 있다. 이 커다란 주제 안에서 추리의 끈을 놓치지 않고 사건의 종장까지 죽 밀고 나가는 힘도 인상적이고,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 하나하나를 그려내는 방식도 매우 좋았다. 각 인물들이 겪어온 개인사에 대한 압축적인 설명들이 IMF 시절의 한국을 생생하게 반영하는 부분에서는 찬호께이의 소설도 떠올랐는데, 거시적인 흐름 속에서 한 개인의 미시적인 개인사들이 2010년대에 만나고 이어지며 커다란 이야기를 구성하는 와중에 그 개인들 사이의 관계에서 매우 미묘한 심리까지 건져올리는 솜씨는 역시 송시우 작가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아무런 사건이 진행되지 않고 인물들만 나오는 씬들에서도 이런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건 아무나 하지 못하는 일이다. ㄴㅌㅇ(스포가 될 것 같아 부득이하게 초성처리를 한다) 하나까지 깔끔하게 추리로 회수하는 추리소설적 재미까지, 이 묵직하면서도 슬픈 이야기로 하룻밤을 새울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송시우 작가의 다음 소설을 이제부터 다시 목빠지게 기다려야한다는 점 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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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이프니츠의 [보편정신 학설에 대한 고찰]에서 미리 봤을 때부터 모든 것이 정신화 되어 있다는 스피노자의 말이 무척 좋았다. 3부 서문에 나오는 인간은 국가 속의 국가가 아니라는 말과도 통하는데, 정도의 차이는 있으되 인간과 사물 사이에 질적 차이는 없다는 것, 개별화되고 내면화되고 사적인 정신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스피노자의 단호함과 함께 무척 좋았다. 그래서 시몽동의 책을 샀다. 스피노자 수업 들으면서 읽고 싶은 많은 책들이 생겼지만 이렇게 덜컥 산 책은 처음인데 언제 읽을지 모르지만 인간과 기술은 차이가 없다라는 그의 생각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싶다. 정말 파격적이잖아. 인간과 사물을 동급으로 놓는 생각은 스피노자가 아니더라도 그 이후 여러 철학이나 문학에서 접했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서 인간과 기술에 차이가 없다니. 인간과 기술이 존재와 도구의 관계가 아니라 같은 계열에 속한다니 이 파격적인 주장을 어떤 논리들로 전개해나가고 논증해갈지 정말 궁금하다. 현재의 얄팍한 연상으로는 AI가 당장에 떠오르는데 어쨌든 매력적인 주장이다.

 

다른 개체들- 이것들도 상이한 정도이긴 하지만 모두 정신화animata되어 있다-보다 인간에게 더 많이 속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 안에는 모든 실재에 대한 관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 인간과 다른 자연 존재자들 사이에 존재론적 차이가 난다는 점을 부정하고 있다. 3[서문]에 나오는 스피노자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은 국가 속의 국가가 아니다. 그 대신 스피노자는 나는 정서들의 본성과 역량, 그리고 정서들에 대한 정신의 역량을 내가 앞의 1, 2부에서 신과 정신을 다루었던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다룰 것이며, 인간의 행위 및 욕구를 마치 선과 면, 물체들의 문제인 것처럼 간주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는 다른 개체들-이거들도 상이한 정도이긴 하지만 모두 정신화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 인간과 다른 개체 사이에 질적 차이는 없고 단지 정도 차이라는 것.

 

- 질베르 시몽동 Gilbert Simondon.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추어 본 개체화>가 이번에 한국에 나왔는데, 그는 매우 독창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철학자다. 스피노자 철학과도 아주 비슷하다. 흥미롭게도 그는 정작 스피노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ㅋㅋㅋ 스피노자에 대한 아주 전통적인 평가인 범신론자라는 점을 받아들여서 싫어하는 것인데 하지만 생각은 스피노자와 매우 비슷하다. 처음 <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추어 본 개체화> 논문이 나왔을 때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었지만, 들뢰즈가 발굴해서 서문도 쓰고 <천개의 고원>에서 인용도 하고 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논문이 프랑스어 말고 외국어로 번역된 것은 한국이 처음이다. 아직 영어로도 번역되지 않았는데 그만큼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 지금까지 기술철학의 기조는 인간과 기술은 차이가 있다는 것인데 시몽동은 인간과 기술은 차이가 없다라고 말한다. 인간과 기술은 결코 존재와 도구의 관계가 아니고, 같은 계열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생각이 너무 파격적이라서 80년대까지도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80년대 말부터 프랑스에서 주목을 받고 현재 영미철학계에서 굉장한 주목을 받고 있다. 미국에도 곧 번역이 되어 출간될 예정이다. 이 책을 스피노자 철학과 비교하면서 읽어보면 꽤 흥미로울 것이다.

 

2. 스피노자가 내린 실망의 정의를 보고 절대 미리 예습하지 않겠다는 나만의 원칙을 깨고 3부 부록을 미리 공부할 뻔했다. ’양심에 흠집을 내다실망으로 이어지는 것에 대해 내 멋대로 해석해놓고 혼자 너무 좋아서. 너무 좋았던 이유는 내가 내 자신에게 가장 실망을 느끼는 순간은 내 양심에 떳떳하지 못한 순간, 눈앞의 나의 욕망과 양심에서부터 자라났을 나의 신념이 충돌할 때 어느 정도의 타협을 하는/하고자 하는 유혹을 느끼는 나 자신을 발견했을 때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양심에 구멍을 내다가 아니라 흠집을 낸다는 것이 마음에 깊게 다가왔다. 보통 나처럼 소심한 사람들은 윤리적이고 양심적이어서가 아니라 용기가 없거나 죄책감을 짊어질 에너지가 없어서 양심을 확 거스르거나 양심에 직격탄을 맞추는 일은 또 잘 하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아예 눈 딱 감고 양심에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경우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때문에 실망이 희석되는, 매우 아이러니하고 왜곡된 방식으로 감정이 변한다. 이런 직격탄을 맞췄던 경우의 99프로는 나의 시간을 확보하고자할 때였으므로 합리화할 근거마저 충분했다. 항상 시간이 너무 모자라니까, 그런 것에 비해 해야 할 일들은 너무 많으니까, 늘 충실했으니 나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이 정도 이기적이어도 되지 않을까... 등등. 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주체적으로‘ ’고민 끝에양심을 외면했다는 (가짜) 성취감이 실망을 희석하는 것이다. 왜 가끔씩 전혀 안 그러던 사람이 어쩌다 양심에서 완전히 일탈해서 팜므파탈처럼 구는 스스로에게 해방감을 느끼는 것, 주변에서나 소설에서 종종 보잖아. 하지만 흠집을 낼 때는 그런 것조차 없다. 그냥 나는 하찮고 같잖은 이유로 양심에 흠집을 낸, 그러니까 양심을 외면하겠다는 원대한마음조차 없이 양심을 온전히 지켜내고 싶었는데 결국 몇 프로의 양심을 팔아치워 타협한 하찮고 같잖은 사람일 뿐이다. 그때 내 스스로에게 느끼는 수치심과 실망은 내 영혼에도 흠집을 내는 치명적인 것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흠집은 구멍보다 쉽게 날 수 있기에 때로는 더 치명적이지. 아무튼 그래서 스피노자가 실망이라는 단어를 조합해서 만들어낸 방식이 나에게는 너무 좋았다. 나처럼 이 단어를 받아들이는 것은 양심과 실망 사이를 니체와 반대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셈인데 결국 비슷한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 같아도 어떤 순간에는 방향의 흐름이 본질을 바꾸는 경우도 있으니까.

 

- 스피노자는 사실 신조어를 거의 쓰지 않는다. 아주 가끔 있다. 신조어라기보다 단어들을 가지고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테면 3부 부록에서 실망이라는 정의. conscientiae morsus. consicientiae는 양심, morsus라는 말은 흠집내다, 물어뜯다 같은 뜻이다. 이것을 스피노자는 conscientiae morsus는 희망했던 것보다 더 나쁘게 일어난 과거의 것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이다, 실망이라고 말한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스피노자를 언급하면서 이 용어를 쓰는데 스피노자가 만들어낸 말이기 때문이다. concientiae라는 말과 morsus라는 말을 합쳐서 쓴 것은 스피노자가 처음이다. 니체는 이 용어를 <도덕의 계보>에서 양심의 가책이라고 번역한다. 사실 이것이 원래 단어의 뜻에는 더 부합한다. 도덕률 도덕법칙 도덕적인 이상에 부합하지 못하거나 지키지 못했을 때 내면적으로 자신을 책망하고 자책하는 것을 두고 니체가 스피노자의 용어를 가져오면서 양심의 가책이라고 쓰는 것. 스피노자의 용법과 니체가 가져다 쓴 용법은 전혀 다르다. 어쨌든 스피노자가 만들어낸 표현이다. 단어를 만들어낸 건 아니고 기존의 단어를 새롭게 결합해서 새로운 뜻으로 만든 것.

 

3. 시몽동의 책을 덜컥 사버린 것과 비슷한 크기로 아니 어쩌면 더 크게 조나단 이스라엘의 급진적 계몽이 너무 궁금하고 읽고 싶어서 아는 몇 명을 통해 번역진행상황을 수소문했는데 현재로서는 그 어디서도 이 책을 낼 계획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존에 들러 주문할까말까 한참 고민했는데 원서까지 손대기 시작하면 끝도 없을 것 같아서(이럴 때마다 늘 하나마나한 생각이지만 로또를 맞아서 정말 공부할 수 있는 삶이었으면 좋겠다) 가까스로 참았다. <세 명의 사기꾼>은 번역되어 나와 있지만 굳이 사서 읽게 될 것 같지는 않은데 스피노자의 정신이라는 익명은 너무 귀여우면서 명확하잖아ㅋㅋ 90년대 후반 인디밴드 이름 같고 막ㅋㅋ

 

17세기에서 18세기까지 스피노자주의 또는 반스피노자주의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보기에 가장 포괄적이고 제일 좋은 책은 조나단 이스라엘Jonathan Israel<The Radical Enlightenment: Philosophy and the Making of Modernity, 1650~1750>이다. 2002년에 이 책이 나왔는데 서평만 해도 수백편이 나올 정도로 서양학계에서 엄청나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계몽주의를 이해하는 아주 새로운 관점을 세운 책이다. 이 책의 중요한 논점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계몽주의는 반쪽의 계몽주의였다는 것. 조나단 이스라엘의 표현을 빌면, moderated enlightenment.

 

그의 주장은 이렇다. 우리는 온건한 계몽주의, 절충적인 계몽주의를 계몽주의의 본질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사실 moderated enlightenment의 기저에는 훨씬 radical enlightenment의 흐름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훨씬 더 급진적인 계몽주의의 중심에는 스피노자가 있었다. 스피노자 철학이 급진적인 계몽주의의 기원에 있었으며 동력을 제공해준 원천이었다. 그래서 이 책 전체는 어떻게 보면 스피노자주의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스피노자 철학이 어떻게 네덜란드에서 프랑스에서 독일로 영국으로 유럽 각지로 전파되어 영향을 미치고 어떤 반발을 불러일으켰는지의 과정을 따라간 것. 이 책은 서양철학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계몽주의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큰 화두를 던졌다.

 

우리는 그동안 스피노자라는 사람이 1677년에 사망한 이후에 스피노자의 책이나 글이 어떻게 수용됐고 어떤 영향을 미쳐왔는지는 사실 잘 몰랐는데 특히 최근에 들어서 이와 관련한 논문들이 많이 나오면서 예전보다 훨씬 그의 책이 어떤 영향을 미쳤고 어떻게 왜곡됐는지를 잘 알게 되었다. 그런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준 것이 바로 이 조나단 이스라엘의 책이다. 이게 번역된다는 이야기를 7-8년전부터 들었는데 아직 안 됐다. 900페이지의 상당이 두꺼운 책인데 어렵지 않고 소설 읽듯이 역사책 읽듯이 술술 넘어가는 아주 재미있는 책이다.

 

<세 명의 사기꾼> 18세기 유럽의 스피노자주의 문헌을 대표하는 책 중에 하나다. 저자 이름이 스피노자의 정신이다ㅋㅋ 17세기, 18세기 검열이 아주 심했던 시기에 저자 이름 없이, 어떤 출판사에서 나왔는지도 모르게 내는 문헌들을 지하간행물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 중 하나며, 제일 유명한 문헌 중 하나기도 하다. 여기서 세 명의 사기꾼은 누굴까? 데카르트? 데카르트가 사기꾼은 아니지ㅋㅋ 바로 예수, 마호메트, 모세. 성경에서 나온 3개의 종교 창시자를 사기꾼이라고 칭한다. 아주 급진적인 종교비판론이다.

 

4. 첫 번째 갸웃함) 스피노자에게 선/, 좋고/싫음은 애초에 인간 중심적으로 자의적 개념인 건데 유용하다-무용하다라는 나눔도 역시 그런 것 아닌가? 유용-무용의 기준은 누가 어디에 잡는 거지? 두 번째 갸웃함) ‘유용하다는 개념을 십분 받아들여서 생각했을 때, 여러 가지 작용을 동시에 하는 인간 쪽이 단순한 작용만 하는 생물체보다 유용하겠지만, 여러 가지 작용을 하는 만큼 다방면으로 유해하기도 하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서의 유해함과 여러 가지 방식으로서의 유용함의 플러스 마이너스 계산은 어떤 식으로 할 것인가. 단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유용하다고 해서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나? 물론 여기서 말하는 우월함은 좋은 방식이든 나쁜 방식이든 영향력을 행사하는 범위와 크기에 따라,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변용하고 변용되는방식의 다양함과 크기로 따지는 것 같긴 하지만. 그러니까 아이보다 어른이 더 우월한 것처럼 권총보다 원자폭탄이 더 우월한 것처럼. 그렇다면 더욱더 유용이라는 개념에 대해 갸웃하게 된다.

 

이와는 별개로 스피노자가 작용만 이야기한 게 아니라 수용할 수 있는 능력도 이야기한 것이 정말 좋았다. 다양한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수용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중요한 능력이라는 것. 나는 요즘 특히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 내가 보기에는 다른 게 아니라 틀린 생각을 가진 것 같은 사람, 그래서 피곤한 논쟁을 해야 하거나 서로 그 부분은 건드리지 않기 위해 암묵적 괄호를 쳐놓고 그 주변부만 겉도는 대화를 해야 하는 사람을 내 일상에서 도려내기 보다는 나에게 부정적 작용을 하더라도 계속 대화하고 계속 의견을 주고받고 계속 불편해지면서 일상의 한 부분으로 끌고 가야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게 쉽지만은 않아서 가끔씩 고민하게 된다.

 

사실 나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굳이 왜 에너지 흡혈요소를 일상에 붙여놓고 가야하는지 회의를 깊이 가졌던 사람인데 생각이 바뀐 이유는 그 몇 년 간 그런 사람을 일상에서 도려내온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이 결국 아집과 퇴행인 여러 사례들을 봐왔기 때문이다. 거의 예외가 없었다. 물론 그들은 지금의 자신의 삶이 너무 편안하고 평온하고 즐겁다고 이야기한다. 당연하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 듣고 싶은 말만 해줄 수 있는 사람, 공감해주는 사람들만 딱 모아놓고 그들끼리 같은 의견을 계속 주고받으면서 그와는 다른의견은 다 틀린것으로 확정짓거나 그저 타자화시켜버리는 세계는 평온할 수밖에 없다. 그 세계 안에서 나는 대부분 옳고 모두가 나의 의견을 지지해주고 공감해주고 나와 다른 사람들은 그저 이상하고 빻은사람들이니까. 얼마나 명료하고 명쾌하고 평온하고 따뜻해. 분명 그 안에서 여러 고민을 하겠지만 그 고민의 답조차 주변에서 결국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는 환경이니까 자신이 진짜로 고민을 진지하게 한다고 착각조차 하기 쉬운 완벽한 세계다. 나 역시 그런 세계를 구축하는 것에 커다란 유혹을 느낀다. 그런데 그러니까 한때 총명하고 조금 앞서 나가있는 것 같던 사람들이 다 그 안의 세계 속에서 아집의 크기를 불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아집에 먹이를 주고 결국 퇴행해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고나니 조금 무섭다. 적어도 내가 다다르고 싶은 세계는 저 세계보다는 훨씬 흐릿하고 고민할 것도 많고 불명료하고 불편하고 피곤하더라도 수용의 가능성이 보다 훨씬 열려있는 세계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그게 너무 피곤해져서 아 몰라 그냥 나도 클린한 세계를 만들고 살래라는 생각에 빠지곤 하는데(좀 아집이 커지고 퇴행 좀 하면 어때!) 그렇다면 나는 왜 공부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부딪혔다. 반지성주의라는 것은 공부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결국 공부를 많이 하더라도 그 공부를 자신의 아집을 공고히하는 사료로 쓰면서 다른’, 내 눈에는 빻아보이는세상을 이해하려는 것을 포기해버리고, 나와 다른 의견에 귀를 닫아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전혀 공부하지 않더라도 어떤 경험을 자기 안에서 지성적인 방식으로 녹여가는 사람들은 결국 다양한 방식으로 무언가를 수용할 수 있는 틀을 키워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만약 반지성의 세계 속에서 평온함을 찾고자 결정한다면 나는 공부할 필요가 없고 아니 공부하는 게 오히려 더 유해할 텐데(나의 반지성적 세계를 공고히 하는 말만 취사선택해서 받아들일테니까) 그렇게 살고 싶은가? 근데 너무 피곤해!!! 이런 고민을 하던 차에 스피노자가 수용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 언급한 2부 정리29가 나의 마음을 조금 다잡아줬다. 내가 스피노자를 공부하고 여타의 책을 읽고 공부라고 할 만한 것들을 하는 어떤 이유와 목표로 삼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방식으로 무언가를 수용하는 능력. 내 정신이 조금 덜 늙을 수 있는, 안 좋은 방식으로 덜 공고해질 수 있는 중요한 능력.

 

1) 하지만 나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한 물체가 동시에 여러 방식으로 작용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그 능력에 의해 다른 물체들보다 우월할수록, 그 물체의 정신은 (여기에 상응해서 여기에 비례해서) 동시에 여러 가지 것들을 지각할 수 있는 그 능력에 의해 다른 정신들보다 우월하다고 말하겠다

 

- 능력에 의한 논변 :

물체/신체 : 동시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작용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그 능력.

작용하다” agere -> actio 악치오, ago 수용하다 pati > passio 파시오 patior

물체/신체의 정신: 동시에 여러 가지 것들을 지각할 수 있는 그 능력

 

, 한 가지로 작용하는 것보다 여러 가지로 작용하는 것이 더 우월하다. 아주 단순한 순환작용만 하는 생물체와 인간을 비교했을 때 여러 가지 작용을 동시에 하는 인간 쪽이 더 유용한 것처럼. 신체의 열등과 우월도 여기서 갈린다. 아기<어른.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스피노자가 작용만 이야기한 게 아니라 수용할 수 있는 능력도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스피노자가 볼 때 이 수용한다도 굉장히 중요한 능력인 것이다, 물체의 우월성을 규정하는 요소로. 그 물체/신체가 다양한 방식으로 무언가를 수용할 수 있으면 있을수록 그 신체의 정신은 거기에 상응해서 더 다양한 방식으로 지각할 수 있다. , 어떤 물체가 외부의 영향을 다양한 방식으로 수용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그 신체의 정신적 능력의 발전에도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2부 정리29에서 스피노자는 여기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다.

 

문단띠로 사각형입니다.

5. 물체들은 실체들이 아니라 양태들이다, 라는 이야기를 스피노자가 여기서 다시 확고하게 하고 있다. 보조정리1이 분명하게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것이겠으나 실체의 관계에 따라 서로 구별되는 게 아니다라는 표현이 나에게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했는데(그러니까 보조정리1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 멋대로의 생각을 하게 했는데) 철학자마다 실체의 범위가 다르듯이 이 실체를 일반인들에게 적용해본다면,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실체에 가까운 것, 즉 철학자들에게 실체가 갖는 위상을 갖고 있는 어떤 대상, , 그러니까 각자가 최상급의 포지션에 놓고 신처럼 믿고 있는 각자들의 신, 굳이 이름 붙이자면 신념이라고 봤을 때 나 자신을 포함, 모두가 이 보조정리1이 주는 교훈을 잘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너무나 많은 양태로서의 사람들이 각자가 하는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 그러니까 행동으로서 구별된다는 것을 잊고, 내가 믿고 있는 실체 자체가 나 자신이라고 믿어버리는 것 같다. 나는 신을 믿으니까, 나는 신과 이런 sincere한 관계를 맺고 있으니까, 나는 민주주의를 믿으니까, 나는 철학을 믿으니까, 나는 별점을 믿으니까, 나는 정의를 믿으니까, 나는 예술을 믿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실체와 맺고 있는 어떤 추상적 관계성 속에서 인간의 우월이 갈리고 구별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실체와 너와의 긴밀한 관계 말고, 그런 관계를 내세우는 말 말고, 직접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데? 라는 질문에 행동으로 하는 답이 더 많은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어떤 운동과 정지, 어떤 빠름과 느림을 행동으로 펼치고 있는지가 양태를 구별하는 것이지 어떤 실체와의 추상적 관계성만으로 구별된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믿음은 착각이다. 당신이 믿고 있는 실체의 훌륭함이 당신을 규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 믿음이 당신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겠지만, 그리고 뒤에 가서 보면 스피노자는 이 운동과 정지의 일정한 관계비율을 생물학적으로만 정의하는 게 아니라 매우 느슨하고 탄력적으로 적용하는데 운동과 정지가 (아주 사소할지라도) 어떤 실질적 행동과 정신적 태도로 나와야 비로소 구별점이 생긴다는 것. 이게 보조정리1이 나에게 다시 한 번 상기해준 교훈.

 

보조정리1 물체들은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의 관계에 따라 서로 구별되지, 실체의 관계에 따라 서로 구별되는 게 아니다 -> 물체들은 실체들이 아니라 양태들이라는 것

 

6. 인간의 믿음이 튀는 방향은 예측이 너무 어려워서 그 믿음의 농도와 비율을 보지 않고 어디에 떨어졌는지 튀어있는 자국만 보고 그 믿음의 주인의 합리성과 이성을 판단하는 것 또한 쉽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인 것 같다. 적어도 나에게는 어려운 문제. 누구보다도 이성적이고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어떤 문제에 접근하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심지어 창조적 발견까지 해냈지만 그 결과로 신이라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 사람과, 누군가의 논리에 기대어 과학과 이성에 대한 막연한 믿음으로(과학적으로 밝혀졌다고 하니까 이게 사실이겠지) 산출된 이성적인 결과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 사람 중 누가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인가. 전자인가? 과학에 대한 굳건한 최종믿음을 지켜낸 후자인가?

 

마이자의 <암호해독자>를 읽으면서도 한 생각이지만 이성과 과학의 영역과 감성과 비과학적이면서 초월적인 영역 사이의 문은 생각보다도 너무 얇아서 나 같은 범인들은 짐작도 못할 압도적인 과학과 수식의 세계를 경험하고 나면 스르륵 그 문을 열고 그 너머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측면에서 따지면 전 세계 1프로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런 이야기들은 나에게 어떤 종류의 두려움과 혼란을 준다.

 

알면 알수록 파면 팔수록 이 세계의 과학적 정교함에 압도당해서 본인이 논리와 이성과 과학으로 증명해내고 밝혀낸 결과를 놓고 초월적 신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뉴턴에게는 그게 결국 제일 과학적인 설명이었을 것이다. 창조과학의 아버지가 결국 가닿은 초월적 영역은 <암호해독자>의 룽진전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는데, 정말 흥미로운 지점이다. 들뢰즈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그 영역에서 새어나오는 소리들을 굳건하고 두꺼운 문으로 단호히 차단하고, 뉴턴에 앞서 이미 이런 목적론 미신과 그 미신을 갖게 되는 사람들의 심리까지 짐작해서 비판했던 스피노자는 선생님 말대로 정말 대단히 급진적인 사람이다. 스피노자의 급진성에 놀라는 게 한두번은 아니지만 이런 점에서의 급진성이야말로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부분.

 

- 2) 운동이 무한히 시작된다. 기원도 끝도 없다. 이렇게 되면 기독교의 창조론과도 상당히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 사후 뉴턴이 <프린키피아>10년 후에 출판했고 생전에 3판까지 냈는데, 마지막 3판을 내면서 일반 주석이라고 해서 자신이 증명한 것에 보충설명을 붙인다. 그 주석에 스피노자에 대해 비판하는 구절이 나온다. 그 핵심은 이렇다. 천체, 행성들의 체계를 봐라. 이 행성들의 관계와 이 행성들을 지배하는 법칙이라는 게 너무 복잡하고 정교하고 너무 아름다운데, 너무 조화롭게 아주 빈틈없이 잘 들어맞는데, 그런 만큼 이 체계가 우연히 만들어졌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이게 자연적으로 원인들의 무한한 연쇄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이것은 틀림없이 매우 현명한 설계자가 있었고, 그 설계자가 이걸 설계한 게 분명하다. (신을 의미하는 것.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격적인 신과는 약간 다른 신이겠지만 어쨌든) 우주의 질서를 최초로 설계한 설계자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면서 스피노자를 비난한다. 스피노자처럼 원인들의 무한한 연쇄만 가지고서는 이렇게 복잡하고 정교하고 아름다운 우주가 있는지 설명할 수 없다고. 창조과학의 뿌리인 뉴턴이시다ㅋㅋ

 

사실 스피노자는 이 비슷한 이야기를 벌써 했다. 1부 부록에서. 목적론 미신에 대한 비판에서. ”그들이 인간 신체의 구조를 보고 놀라 얼이 빠지게 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이 이처럼 대단한 기예의 원인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그들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신체구조는 어떤 역학적인 기예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신 또는 초자연적인 기예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어떤 부분도 다른 부분에 손상을 주지 않도록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적의 진짜 원인을 찾으려 하고, 바보처럼 자연적인 것들에 대해 놀라기보다는 학식 있는 사람들처럼 그것들을 이해하는데 전념하는 사람들은 도처에서 불경한 이단으로 간주되며 우중이 자연과 신의 해석자로 숭배하는 사람들에 의해 비난받는다.“ <- 이 인간 신체가 이렇게 정교하고 복잡하고 아름다운데 이게 어떻게 자연적으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분명 누군가 초자연적인 기술자가 인간신체를 처음부터 설계한 게 분명하다고 말할 거라는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들뢰즈 같은 경우도 뉴턴과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얼마나 급진적인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다ㅋㅋ


7. ”변용하는 것과 변용되는 것의 본성이 동시에 반영된다는 것.“ 이 점까지 자연학소론에 기술하다니 이 세심한 스피노자! 평소에 나는 이것을 ”oo의 지문이 **의 영혼에 찍히면서 만들어지는 변화라고 표현하는데 oo의 지문이 변용하는 것의 본성, **의 영혼이 변용되는 것의 본성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어떤 변화에 대해 이해하는 기본적인 방식인데 에티카에서 스피노자가 스피노자식으로 찝어준 걸 보고 반가움

 

공리한 물체가 다른 물체에 의해 변용되는 모든 방식은 변용된 물체의 본성과 동시에 변용하는 물체의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온다. 따라서 하나의 동일한 물체는 그것을 움직이는 물체들의 차이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게 되며, 역으로 다른 물체들은 하나의 동일한 물체에 의해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게 된다.

- 1부에서 변용 개념을 자주 봤었다. 양태와 비슷한 개념. 1부 정의5. 그런데 2부에서 변용이라는 개념의 다른 용법이 나타나게 된다. 이 공리에서 쓰인 변용1부에서 이야기하는 양태로서의 변용이 아니라 물체가 다른 물체에 의해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정지해있던 물체가 외부 물체와의 충돌에 의해 운동을 하게 되는 것, 동쪽으로 향해 가던 것이 충돌해서 북쪽으로 가게 되는 것, 이런 것을 말한다. 2부에서 신체/물체와 관계해서 이 변용 개념이 상당히 자주 쓰인다.

- 변용하는 것과 변용되는 것의 본성이 동시에 반영된다는 것. 2부 정리16, 정리17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공리이다.

 

8. 개체에 대한 매우 느슨하면서 매력적인 정의. 6번과도 통하는 구석이 있는데 개채성, 내재성, 본성, 본래적 본질로 개체를 정의하지 않고 개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그것들로도 제시하지 않고 철저히 외재적인 운동과 정지의 관계에 입각해서 정의하는 점. 놀랍도록 담백하면서 어떤 점에서 매우 차가운 정의다. 이 정의의 틀이 나중에 코나투스라는 내적인 역량을 어떻게 모순 없이 잘 담아내는지 지켜볼 것도 흥미롭다 (아직까지 나는 개채성에 대한 이중적 기준의 문제에 동감하고 이 상반된 관점에서 오는 혼란을 해결하지 못한 상태다)

 

- 이 정의에서 흥미로운 점은 스피노자가 개체에 대한 정의를 개체가 지닌 어떤 본래적인 본질에 입각해서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개체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이것 역시 하나의 복합물체이며, 개체들이다)의 본성에 의해서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스피노자는 연합체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의 본성에 외재적인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입각하여 연합체의 본성을 정의한다. 따라서 이 연합체의 본성은 이러한 외재적 관계의 결과인 셈이다.

- , 스피노자가 정의하는 개체의 범위는 매우 넓다. 어떤 게 갖춰지면 개체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스피노자의 답은 개체들이 연합해 있을 때’. 그렇다면 연합은 무엇인가? ”같은 크기를 지니고 있거나 크기가 서로 다른 일정한 수의 물체들이 다른 물체들에 의해 압력을 받아coercentur 서로 의지할 때, 또는 그것들이 같은 속도나 서로 다른 속도로 운동하고 있을 경우에는 일정하게 규정된 어떤 관계에 따라 자신들의 운동을 서로 전달 하는 것.

 

- 개체에 대한 아주 느슨한 정의다. 그러다보니 이게 개체에 대한 충분한 정의가 되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단순물체에 내재성, 내면성이 없듯이 여기서 개체라고 정의된 복합물체도 마찬가지로 내재성, 내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개체를 개체로 만드는 것은 외부 물체들의 압력이다. 압력에 의해 서로 의지하게 되고, 연합하게 되고, 하나의 개체를 이루는 것. 일정한 운동을 전달하며(= 운동과 정지 사이에 일정한 관계를 형성하며) 개체를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본성이라는 말이 없다. 내면적인 본성이 없는 개체기 때문에.

- 스피노자가 2부 정리13의 주석에서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정신: 신체의 관념- 신체: 정신의 대상이라고 정의했고, 그게 합일(연합)을 이루는 게 인간이라고 이야기했다. 거기서 스피노자의 인간에 대한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도 다르고 데카르트와도 다르다. 스피노자의 개체에는 형상, 질료는 나오지 않거니와 내면성도 없다. 매우 담백하다. ”다른 물체들에 의해 압력을 받아coercentur 서로 의지할 때, 또는 그것들이 같은 속도나 서로 다른 속도로 운동하고 있을 경우에는 일정하게 규정된 어떤 관계에 따라 자신들의 운동을 서로 전달할 때라고 정의내릴 뿐이다.

 

- 그렇다면 이 정의는 물체에만 해당이 되는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좀 멀리 가볼까? 4부 정리39 인간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 간에 지니고 있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비율 ratio)가 보존되도록 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인간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 간에 운동과 정지의 다른 관계[비율]을 갖게 하는 것은 나쁜 것이다.” 4부 정리39의 주석 한 부분 나는 5부에서 이것들이 정신에 얼마나 이롭거나 해로울 수 있는지 설명해볼 생각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는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 상이한 운동과 정지의 관계(비율, ratio)을 갖도록 배치될 때 신체가 죽는다고 이해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인간의 신체가 사람들이 그로 인해 그 신체가 살아있게 된다고 생각하는 피의 순환 및 다른 것들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좁은 의미의 생물학적 생리학적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이를테면 호흡 같은) 그 자신의 본성과는 완전히 다른 본성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점을 감히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근거도 나로 하여금 신체는 오직 시체로 변화되었을 경우에만 죽는 것이라고 여기도록 강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 죽는 것만 신체가 죽는 게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죽지 않더라도 신체가 사실상 사망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다른 경우들이 있다). 더욱이 경험 자체는 그와 다른 것이 옳다고 설득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때로는 사람은 과연 그가 동일한 그 사람인지 말하기 어려울 만큼 심각한 변화를 겪곤 하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어떤 스페인 시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는 병을 앓은 뒤에 비록 회복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썼던 우화들 및 비극들을 자신의 것이라고 믿지 않을 만큼 자신의 과거 삶을 망각해버렸으며, 그가 자신의 모국어까지 망각했다면, 사람들이 그를 얼마든지 성인 어린애로 간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이것이 믿을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면, 우리가 어린애에 대해서는 무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노인은 어린애들의 본성이 자신과는 전혀 다르다고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사례]로부터 스스로 이 사실에 대해 추측해보지 않는다면 자신이 예전에 어린애였다는 사실을 납득하려고 하지 않는다.

-> 다른 비율을 가지면 심한 경우 죽거나 질병에 걸리거나 어려서부터 어린애와 노인은 생물학적으로는 같은 사람일 수 있지만 스피노자에 따르면 변형, 운동과 정지의 일정한 관계의 변형,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 그렇다면 이 정의는 물체에만 해당이 되는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좀 멀리 가볼까? 4부 정리39 인간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 간에 지니고 있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비율 ratio)가 보존되도록 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인간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 간에 운동과 정지의 다른 관계[비율]을 갖게 하는 것은 나쁜 것이다.” 4부 정리39의 주석 한 부분 나는 5부에서 이것들이 정신에 얼마나 이롭거나 해로울 수 있는지 설명해볼 생각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는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 상이한 운동과 정지의 관계(비율, ratio)을 갖도록 배치될 때 신체가 죽는다고 이해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인간의 신체가 사람들이 그로 인해 그 신체가 살아있게 된다고 생각하는 피의 순환 및 다른 것들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좁은 의미의 생물학적 생리학적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이를테면 호흡 같은) 그 자신의 본성과는 완전히 다른 본성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점을 감히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근거도 나로 하여금 신체는 오직 시체로 변화되었을 경우에만 죽는 것이라고 여기도록 강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 죽는 것만 신체가 죽는 게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죽지 않더라도 신체가 사실상 사망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다른 경우들이 있다). 더욱이 경험 자체는 그와 다른 것이 옳다고 설득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때로는 사람은 과연 그가 동일한 그 사람인지 말하기 어려울 만큼 심각한 변화를 겪곤 하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어떤 스페인 시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는 병을 앓은 뒤에 비록 회복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썼던 우화들 및 비극들을 자신의 것이라고 믿지 않을 만큼 자신의 과거 삶을 망각해버렸으며, 그가 자신의 모국어까지 망각했다면, 사람들이 그를 얼마든지 성인 어린애로 간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이것이 믿을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면, 우리가 어린애에 대해서는 무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노인은 어린애들의 본성이 자신과는 전혀 다르다고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사례]로부터 스스로 이 사실에 대해 추측해보지 않는다면 자신이 예전에 어린애였다는 사실을 납득하려고 하지 않는다.

-> 다른 비율을 가지면 심한 경우 죽거나 질병에 걸리거나 어려서부터 어린애와 노인은 생물학적으로는 같은 사람일 수 있지만 스피노자에 따르면 변형, 운동과 정지의 일정한 관계의 변형,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2부 정리13과 자연학소론에서 개체를 정의할 때 어떤 내면성, 영원 같은 확고하고 불변적인 정체성에 따라 개체를 정의하지는 않지만, 단지 물체들의 차원에서만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정체성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 것이다.

- 생물학적 기능이 곧 정지되어야만 신체가 죽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스피노자는 좁은 의미의 생물학적 기준에 따라서 인간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게 아니다. 생물학적 기준 말고도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다른 식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스피노자가 운동과 정지의 일정한 관계=비율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운동과 정지의 일정한 관계=비율은 단지 생물학적 관계만이 아니라 훨씬 느슨하고 탄력적인 관계다. 그런 면에서 개체에 대한 이 정의는 좀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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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학 소론 : 자연학에 대한 보론. 스피노자가 당대의 과학혁명 및 이를 형이상학적으로 뒷받침하고자 했던 철학자들(데카르트, 홉스 등)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추론해볼 수 있는 귀중한 전거를 제공해준다. 크게 세 부분으로 구별 된다.

1. 단순물체들 : 공리1 ~ 공리

2. 복합물체들 : 개체에 대한 정의 ~ 보조정리 7의 주석

3. 인간 신체에 관한 요청들 : 요청1 ~ 요청6

 

단순물체들에 대하여

 

공리1 모든 물체는 운동하든가 정지해 있다

공리2 각각의 물체는 때로는 더 느리게 운동하고, 때로는 더 빠르게 운동한다.

 

보조정리1 물체들은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의 관계에 따라 서로 구별되지, 실체의 관계에 따라 서로 구별되는 게 아니다 -> 물체들은 실체들이 아니라 양태들이라는 것

증명 나는 첫 번째 부분은 자명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물체들이 실체의 관계에 따라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은 1부 정리5 및 정리8로부터 명백하다. 하지만 이는 1부 정리15의 주석에서 논의된 것으로부터 훨씬 더 명백하다.

 

보조정리2 모든 물체는 어떤 점들에서 합치한다. -> 속성(연장), 직접적 무한양태(운동과 정지) -> 공통 통념의 대상

증명 왜냐하면 모든 물체는 하나의 동일한 속성 개념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합치하기 때문이다(2부 정의1에 의해). 그 다음 때로는 더 느리게 때로는 더 빠르게 운동할 수 있고 절대적으로 말한다면, 때로는 운동하고 때로는 정지한다는 점에서 합치한다.

 

보조정리3 운동중이거나 정지해 있는 물체는 다른 물체에 의해 운동하거나 정지하도록 규정되었어야 하며, 이 다른 물체 역시 다른 것에 의해 운동하거나 정지하도록 규정되었고, 이 후자 역시 또 다른 것에 의해 [그랬으며], 이처럼 무한하게 나아간다. -> 관성원리의 수용

- “무한하게 나아간다는 매우 중요한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 즉 과학혁명 이전의 우주는 닫혀있는 우주라서 무한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었다. 그 안의 운동은 원운동이다. 출발하면 돌아서 다시 출발점으로 온다. 그러니까 관성 원리무한을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이 원리가 매우 단순해보여도, 아리스토텔레스와는 전혀 다른 무한의 우주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무한우주 개념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기독교 원리를 정면으로 반박하게 된다. 창조론과도 어긋나고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뒤집는 결과가 된다. 왜냐하면 무한은 시작도 끝도 없이 나간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갈릴레이 관련한 책을 보면 갈릴레이가 무한 개념을 이야기하면서 이것은 사고실험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1) 이 무한개념이 기독교에 반하는 개념이니까 돌려서 말하기 위해 2) 무한하니까. 무한을 검증할 수는 없으니까.

- 여기서 스피노자가 유한한 시간이 아니라 무한정한 시간이라고 한 것은 갈릴레이나 데카르트의 물리학에 나오는 관성개념을 함축한 것이다. 갈릴레이의 17세기 사고실험. 끝도 없는 평면을 가정해놓고 거기서 어떤 물체가 운동을 시작하면 그 운동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관성개념. 어떤 물체가 일단 작용하게 되면 그 물체의 작용은 관성원리에 따르면 계속 되고, 다른 물체가 그 물체의 작용에 영향을 미치기 전까지 계속된다. 정지해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계속 정지. 여기서 말한 계속을 스피노자가 무한정하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게 스피노자가 말한 지속개념의 뜻이다(그러니까 무언가에 의해 멈추기는 하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에서는 모든 물체는 자기가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 원운동. 관성개념은 운동이란 건 무한정인 직선운동. 다른 물체가 다른 물체를 멈출 때에서야 끝나는. ,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은 경계가 있는 우주지만 갈릴레이 관성개념은 끝이 없는 우주. 그러나 이 무한정함은 사물의 본질과는 관계없다. (20)

 

-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237자연의 제1 법칙 : 각각의 실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항상 같은 상태에서 존속한다. 따라서 일단 운동하게 된 것은 계속 운동하게 된다.”

- 운동하거나 정지해 있는 물체는 자기 스스로 운동과 정지를 바꿀만한 내적인 힘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것이 운동하거나 정지하는 것은 타자에 달려있음을 의미한다.

- 데카르트의 주장: 관성원리가 제1법칙-> 물체는 피동적이다.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을 박탈해버림 -> 그럼 이 물체를 움직이는 최초의 힘은 무엇인가? ->

- 데카르트는 <철학의 원리> 36항에서 운동의 두 가지 원인을 구별한다.

“36. 신은 운동의 제1원인이며 우주에 항상 동일한 운동량을 보존한다.

운동의 본성을 고찰한 다음 우리는 이제 운동의 원인에 대해 고찰해야 한다. 운동의 원인은 두 가지다. 첫째로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원인, 곧 세계에 있는 모든 운동의 일반원인이 있고, 둘째로 특수한 원인, 곧 전에 운동하고 있지 않던 물질의 부분들을 운동하게 하는 원인이 있다. 일반 운동 원인이 신 이외에 어떤 것일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신은 애초부터 물질을 운동과 정지를 동반시켜서 창조했고 자신의 일상적인 협력만으로도 창조했을 때와 같은 양의 운동과 정지를 물질 속에 보존시킨다.”

자연적 사물들이 운동하는 궁극적 원인은 신에게 있다 : “연속 창조이론

- , 데카르트에게서 신과 자연은 분리되어 있다. 자연에 신이 내재되어 있는 게 아니라 신이 자연 바깥에, 초월적인 거리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다.

- 데카르트에게 있어 물질적 자연은 신의 속성이 아니다. 스피노자는 연장이 신의 속성이라고 봤는데(그리고 이게 그 당시 굉장히 레디컬하고 놀라운 주장이었다는 것은 이전에 이야기했다) 데카르트는 다르다. 자연은 신과 동등한 어떤 것이 아니라 그저 피조물에 불과하다. 신이 원하면 소멸시킬 수 있는 그런 것이다.

- 스피노자는 연장은 신의 속성이라고 2부 정리1과 정리2에서 명시적으로 이야기했지만 사실 1부에서도 이미 이야기하고 있었다. 1부 정리13의 따름정리나 1부 정리14의 따름정리2, 1부 정리15의 주석 같은 데에서.

- 1부 정리13의 따름정리

이로부터 어떤 실체도, 따라서 어떤 물체적 실체도, 실체인 한에서는 분할될 수 없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물체적 실체. 스피노자적인 의미의 실체가 물체일 수 있다, 연장도 실체일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이렇게 표명한 것1부 정리13의 따름정리다.

 

*** 정리13의 따름정리는 매우 중요하다! ”어떤 물체적 실체도라는 말.

- 왜냐면, 이 주장에는 물체적 실체라는 게 존재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있기 때문이다. 물체적 실체, 다른 말로 하면 연장실체, 연장속성. , 연장속성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연장속성이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이야기다. 그건 다른 말로 하면 신이라는 실체는 연장하는 실체다, 물질적인 실체다라는 의미와 같다.

- 이 당시에 신은 연장하는 실체다, 물질적인 실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스피노자 밖에 없었다. 아마 홉스의 생각은 스피노자랑 다르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는 이라고 곧바로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나중에 홉스가 스피노자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신학정치론>을 염두해 두고 나라면 그렇게 대담하게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 스피노자의 신이라는 것은 물질적이다/ 연장이라는 것이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주장은, 당대에 아주 매우 대담한 주장이다. 당시의 다른 철학자들은 일단 종교적인 갈등 때문에라도, 신이 연장을 자신의 속성으로 갖고 있다는 매우 불경한 주장을 감히 할 수 없었다.

- 사실 철학적인 이유에서도 이렇게 주장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왜냐면, 연장이라는 속성이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 -> ”물질적인 자연이 신적이다라는 이야기. ”물질적인 자연이 신적이다라는 말은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물질적인 자연이 다이나믹하다. 다이나믹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내재적인 역량을 갖추고 어떤 결과를 스스로 생산하는 원인으로서 작용한다그런데 이렇게 물질적 자연이 내재적 원인을 갖고 있다라고 사고하기 굉장히 어려웠다.

 

- 특히 갈릴레이나 데카르트 같은 사람들은 굉장히 어려웠을 것이다. ? 데카르트에게 자연이라는 것은 그냥 기하학적 공간에 불과했다. 데카르트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자연철학과 단덜하고 자연을 수학적으로 해석하기 위한 굉장히 중요한 전제는 자연으로부터 원인으로서의 힘을 다 박탈해버리는 것이었다.

- ?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세계관에 따르면 자연이라는 것은, 자연 안에 존재하는 물체들은 다 내재적인 원인으로서의 힘을 갖고 있다. 이 내재적인 원인으로서의 힘은 측량이 불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은 어떻게 보면 매우 역동적인 자연. 측량불가능한 자연. 원인으로서의 여러 가지 물체. 이런 자연은 수학적으로 표현하기 매우 불가능한.

- 데카르트가 이 자연을 수학적으로 표현 가능한자연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자연이 갖고 있는 원인으로서의 힘을 배제해버려야 한다. 그래서 자연을 기하학적인 평면처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자연이 양으로 환원될 수도 있고, 계산도 가능하다. 데카르트의 자연은 아무런 내적인 힘이 없는 자연, 기계론적인 자연.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자기철학의 내적인 이유 때문에 자연에 원인으로서의 힘을 부여할 수 없었던 것. , “자연 자체는 원인을 부여할 수 없고, 원인을 부여할 수 있는 존재는 자연 바깥의 신이다라는 주장.

 

- 스피노자는 이 주장을 부인. 신즉자연, 자연 자체가 신이다. 신이 갖고 있는 무한한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자연이 스스로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데카르트가 부딪혔던 문제들이 스피노자에게도 똑같이 제기된다. 그럼 우리는 자연을 어떻게 수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가. 신이 갖고 있는 무한한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어떻게 수학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가.

- 불행히도 스피노자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스피노자가 자연철학에 관한 책을 쓰고 싶다고 했었는데, 아마 그 책을 쓰려고 했다면 바로 이 문제를 설명했어야 할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설명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 원인으로서의 역량. 하지만 스피노자는 라이프니츠 같은 수학적 능력은 가지고 있지 못했으니까 자연철학에 관학 책을 썼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지 모르겠다.

- 아무튼 스피노자는 형이상학적으로 데카르트와는 다르게 1) 신과 자연을 같은 것으로 봤고, 2) 데카르트가 자연에서 배제했던 원인개념을 자연 안에 포함을 시켰다. 스피노자의 자연은 데카르트에게 없는 굉장히 역동적인 힘을 내재적으로 갖고 있는 자연이다. (물론 이러한 자연에 대한 형이상학적 개념에 입각해서 어떻게 이것을 자연철학적인 체계로 구성할 수 있을까는, 또 다른 과제다. 스피노자는 그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지 못했지만) 데카르트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자연개념에 원인개념을 넣어줬다. 그러니 정리13의 따름정리는 굉장히 중요한 것!

 

- 1부 정리14 따름정리2 다음과 같은 점이 따라 나온다. 2. 연장되는 실재와 사고하는 실재는 신의 속성들이든가 아니면 신의 속성들의 변용들이다

- 그러니까 스피노자는 연장, 즉 물질적 자연은 신이 갖고 있는 자기원인적인 무한한 역량을 갖고 있다. 즉 자연자체는 누가 외부에서 운동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운동/ 정지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자기원인적인 자연이다라고 말한다. 매우 대담한 주장이다.

- 그러나 난점과 한계도 있다. 갈릴레이나 데카르트, 당대의 자연철학자가 자연을 수학에 의해 설명하려고 하면서 자연으로부터 내재적 힘, 인과적 힘을 배제한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설명이 불가능해서였다. 먼저 1) 관성의 법칙에서 어긋난다. 다시 말해, 아리스토텔레스주의, 물체 자체가 내재적인 힘을 갖고 있고 그 힘을 바탕으로 스스로 운동한다는 논리로 돌아가야하는 것이다. 2) 새로운 관성원리에 입각해서 자연에 내재하는 각각의 사물의 운동할 수 있는 힘을 어떻게 수학적으로 설명할지 몰랐다. 그걸 수학적으로 해낸 사람이 바로 뉴턴, 라이프니츠. 미분 적분 개념을 가지고 와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로 돌아가지 않고도 수학적인 방식으로 어떤 물체의 내재적인 힘을 설명할 수 있게 됐다.

- 스피노자는 자연으로부터 새로운 과학의 원리, 관성원리를 받아들인다. 보조정리3에서 자명하다고말할 정도로 확실하게. 그런데 이 관성원리를 받아들이면서도 연장을 신의 속성으로 귀속시켜, 연장이라는 것이 내적인 인과적인 힘을 갖고 있게 한다. 데카르트나 갈릴레이처럼 아주 피동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문제는 스피노자가 이것을 수학적으로, 새로운 물리학 논리에 입각해서 수학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사망 1년 전에 쓴 편지를 보면 자연학에 관한 책을 쓰고 싶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전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 책은 나오지 못했다. 만약 썼다면, 이 관성원리가 함축하는 피동성과 형이상학적인 힘,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킬 수 있는 어떤 과학원리를 증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닐 수도 있지만)

- 아무튼 스피노자의 목표/지향은 분명했다. 데카르트나 갈릴레이, 새로운 자연철학의 선구자들을 따라 새로운 과학원리가 맞다, 그것에 입각해서 자연을 설명해야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그들이 자연을 새로운 과학적 원리에 입각해서 설명하는 건 좋은데 왜 자연으로부터 인과적인 힘을 다 박탈해야하는가, 그래서 운동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못마땅했다. 그래서 형이상학적으로 연장이라는 것을 신의 속성으로 만든 것.

- 물론 그렇게 형이상학적으로 주장하는 것과 그것을 체계적인 과학이론으로 구성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지만. 그래서 스피노자의 자연학 소론을 포함해서 항상 어떤 운동, 인과성, 개체성 이런 문제에 있어 이 괴리가 문제가 되곤 한다. 그러니까 그의 의도는 매우 분명한데, 그걸 뒷밤침할 수 있는 이론이나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들은 스피노자의 개체개념을 2중적이라고 비판한다.

 

* 따름정리

- “자명한 것이다” : 그러나 과학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의 사람이 본다면 절대 자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피노자가 근대의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의 핵심에 있는 관성의 법칙을 공리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여기서 볼 수 있다.

- “물체A가 정지해있다가 운동을 한다” -> A가 정지해있었다는 사실에서는 A가 운동한다는 사실이 따라 나올 수 없다 -> 외부물체가 작용했다는 사실이 따라 나온다 -> A는 자기 스스로 운동할 수 없다는 게 따라 나온다. : , A가 정지한다면 외부원인, A가 운동한다면 역시 외부원인.

- 관성원리에서 물체는 자기 스스로 운동하는 힘” “원인으로서의 힘을 박탈당하고 있다. 물체는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게 되는 것이다.

- 갈릴레이와 데카르트는 자연의 이치를 설명하는 데에 수학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를테면 자전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수학적 원리를 도입했고, 이 원리를 도입함으로써 갈릴레이와 데카르트는 자연 안의 물체가 내재적 힘으로 스스로 운동하는 힘을 박탈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운동의 원인이 신의 힘이라고 했다.

 

* 데카르트는 정신과 신체의 이원론을 주장했고 데카르트 철학에서는 정신이 속해있는 질서와 신체가 속해있는 질서는 별개의 질서다. 데카르트는 철학자 이전에 과학자로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는 수학과 물리학에서 커다란 업적을 남긴 후, 그 과학적 수학적 발견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형이상학자가 된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철학에 관심이 많기는 했지만. 데카르트는 17세기의 과학혁명이라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세계관을 배격하고 대신에 근대의 새로운 과학혁명을 이룩한 사람 중 하나다. 갈릴레이와 뉴턴의 중간 시기에 있었던 사람. 갈릴레이, 뉴턴, 데카르트들의 공통점은 자연을 수학적으로 인식하려고, 수학의 논리를 가지고-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기하학적인 방식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했던 점이다.

 

뉴턴 이전에는, 자연을 수학적으로 인식하다는 말은 자연으로부터 원인의 힘을 박탈하겠다는 말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이 자연에 내재해있는 걸로 생각했던 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원인은 굉장히 목적론적인 원인인데- 원인으로서의 힘을 자연으로부터 박탈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의 사물을 원이나 삼각형이나 원통 같은 도형처럼 환원했다.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운동이란, 물체가 자기의 내적인 원인으로서의 힘을 가지고 움직이는 게 아니라 그저 위치 이동일뿐이다. 다른 어떤 것에 밀려서 움직이는 것. 이렇게 자연을 수학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은 굉장히 피동적인 세계가 된다. 어떤 내적인, 인과적인 힘이 없는. 외부에서 충격을 주는 대로 움직이는. 그게 관성의 원리 inertia (, 관성의 원리가 이렇게 이어지는구나)

 

자연을 수학적으로 해석한 결과는 자연으로부터 운동능력, 역량을 다 빼앗아간 것이었다. ? 이 시기에는 이 이라는 것을 수학적으로 표현할 방법을 몰랐다. 라이프니츠나 뉴턴 때에 와서 미분적분법을 가지고 와서 운동에너지, 힘이라는 것을 수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어서야 자연의 사물들이 피동성에서 벗어나서 원인으로서의 힘을 부여받게 됐다. 하지만 그 이전, 갈릴레이 데카르트까지는 자연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는 대가로 자연으로부터 힘을 다 박탈했다. 데카르트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데카르트의 초기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작업을 가지고 이 복잡한 것처럼 보이는 자연 사물들을 환원해야할 텐데, 이걸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방법을 나름 탐구한 것이다. 그래서 데카르트의 신체가 속해있는 물리적인 세계는 완전한 피동성의 세계다. 능동성이나 자발성이 전혀 없는 세계.

 

그러면서 이런 문제가 생긴다. 인간의 신체가 물리적인 세계에 속한다고 하면, 인간으로부터 뭐가 빠져버린 거지? 요즘식으로 말하면 주체성, 자발성, 의지, 이런 것들이 빠지는 것인데, 데카르트 입장에서는 그 또한 허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데카르트의 신학적 관점에서도 그렇고, 그리고 데카르트는 인간의 제일 고유한 점이 의지라고 봤기 때문에 인간에게 뭔가 의지의 여지를 남겨줘야만 했다. 벌써 데카르트의 물리학이나 수학의 세계에서는 신체에게 그런 여지를 남겨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남아있는 것은 결국 정신. 그러니까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데카르트의 학문적인 관점(학문적인 맥락)에서 보면 필연적이다. 물리학자로서 보면 신체의 질서는 완전히 수학적으로 양으로 환원된 사물들의 질서인데, 거기서 그대로 놔두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의지라든가 자유가 들어갈 여지가 전혀 없어지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정신과 신체를 분리시킨다. 즉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은 새로운 과학+ 자신의 형이상학적 고민을 접목시켜 둘 다 설명하고자 만든 것

여기에서도 문제가 생긴다. 형이상학적으로 보면 정신과 신체가 분리가 되고, 정신이 속해있는 사유의 질서와 신체가 속해있는 연장의 질서가 완전히 다른데, 그럼 자연의 통일성, 우주의 통일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게 굉장히 수수께끼처럼 남는다. 또 하나, 인간학적 관점에서 보면 데카르트에 따르면 정신과 신체는 서로 상이한 질서에 속해있기 때문에 상호작용 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날마다 일상적인 경험 속에서 우리 정신과 신체가 하나를 이루고 있는, 합일되어 있는 것을 느끼고 있다. , 데카르트의 질서에 따르면 이 두 가지는 분리되어야 마땅하고 다른 질서에 속해있어야 하는 것인데, 우리는 정신과 신체가 합쳐져 있다는 것을 일상경험에서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그걸 두고 우리는 맨날 속고 있는 것이다라고 우길 수도 없고. 그래서 데카르트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할지에 대한 난감한 문제에 봉착한다.

 

데카르트가 1649년에 쓴 마지막 책인 <정념론>, 영혼의 정념이라는 책의 중요한 주제는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데카르트 이후 서양근대철학자들,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말브랑슈 등이 제일 고심했던 주제도 바로 정신과 신체의 관계였다. 라이프니츠가 두 개의 시계의 세 가지 모델을 제안했을 때 첫 번째 모델은 바로 데카르트주의에 입각한 설명이었다. 두 번째가 말브랑슈고 세 번째가 자기 자신. 그러니까 심신 문제는 당시 철학자들에게 굉장히 견고한 논의주제였다. 데카르트가 정신과 신체는 다르다, 분리되어 있다라고 하는 것에 반하여 스피노자는 2부 정리7에서 정신과 신체는 같은 것이다로 출발한다. (25)

 

보조정리3의 따름정리에서 논의해볼 수 있는 문제

1) 물체들은 순전히 수동적 또는 피동적인가 하는 문제

2) 운동의 연쇄는 무한소급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 : 운동의 최초 원인이란 존재하지 않는가? 더욱이 운동의 연쇄가 아주 정교하고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연쇄가 보조정리3에서 말하듯 운동들 간의 기계적이고 맹목적인 타동적 인과연쇄에 의해 자동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러한 운동의 연쇄를 설계하고 구성한 이성적인 설계자가 존재한다. 또는 이지적이고 강력한 존재의 조언과 통제(the counsel and dominion of an intelligent and powerful being)를 통해 우주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체계가 존재하는 것.

 

- 1)의 문제는 위에서 다 이야기했고, 좀 더 나아가서 스피노자는 물체에게만 관성원리가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정신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동일한 법칙이 때로는 신체를 통해 때로는 정신을 통해 표현되는 것. , 코나투스도 때로는 신체를 통해 정신을 통해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데카르트처럼 새로운 과학원리를 물체에게적용하고 정신은 다르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 새로운 과학원리를 양쪽에 다 적용한다. 그러면서 데카르트를 비판한다. 데카르트는 자연에게서 모든 힘을 다 박탈했고, 관성원리 자체, 물체들의 운동법칙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걸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것에 문제가 있다고 데카르트를 비판했다. 이게 스피노자와 데카르트의 상당히 중요한 차이점이다.

- 2) 운동이 무한히 시작된다. 기원도 끝도 없다. 이렇게 되면 기독교의 창조론과도 상당히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 사후 뉴턴이 <프린키피아>10년 후에 출판했고 생전에 3판까지 냈는데, 마지막 3판을 내면서 일반 주석이라고 해서 자신이 증명한 것에 보충설명을 붙인다. 그 주석에 스피노자에 대해 비판하는 구절이 나온다. 그 핵심은 이렇다. 천체, 행성들의 체계를 봐라. 이 행성들의 관계와 이 행성들을 지배하는 법칙이라는게 너무 복잡하고 정교하고 너무 아름다운데, 너무 조화롭게 아주 빈틈없이 잘 들어맞는데, 그런 만큼 이 체계가 우연히 만들어졌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이게 자연적으로 원인들의 무한한 연쇄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이것은 틀림없이 매우 현명한 설계자가 있었고, 그 설계자가 이걸 설계한 게 분명하다. (신을 의미하는 것.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격적인 신과는 약간 다른 신이겠지만 어쨌든) 우주의 질서를 최초로 설계한 설계자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면서 스피노자를 비난한다. 스피노자처럼 원인들의 무한한 연쇄만 가지고서는 이렇게 복잡하고 정교하고 아름다운 우주가 있는지 설명할 수 없다고. 창조과학의 뿌리인 뉴턴이시다ㅋㅋ

 

사실 스피노자는 이 비슷한 이야기를 벌써 했다. 1부 부록에서. 목적론 미신에 대한 비판에서. 그들이 인간 신체의 구조를 보고 놀라 얼이 빠지게 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이 이처럼 대단한 기예의 원인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그들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신체구조는 어떤 역학적인 기예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신 또는 초자연적인 기예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어떤 부분도 다른 부분에 손상을 주지 않도록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적의 진짜 원인을 찾으려 하고, 바보처럼 자연적인 것들에 대해 놀라기보다는 학식 있는 사람들처럼 그것들을 이해하는데 전념하는 사람들은 도처에서 불경한 이단으로 간주되며 우중이 자연과 신의 해석자로 숭배하는 사람들에 의해 비난받는다.“ <- 이 인간 신체가 이렇게 정교하고 복잡하고 아름다운데 이게 어떻게 자연적으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분명 누군가 초자연적인 기술자가 인간신체를 처음부터 설계한 게 분명하다고 말할 거라는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들뢰즈 같은 경우도 뉴턴과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얼마나 급진적인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다ㅋㅋ

 

공리한 물체가 다른 물체에 의해 변용되는 모든 방식은 변용된 물체의 본성과 동시에 변용하는 물체의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온다. 따라서 하나의 동일한 물체는 그것을 움직이는 물체들의 차이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게 되며, 역으로 다른 물체들은 하나의 동일한 물체에 의해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게 된다.

- 1부에서 변용 개념을 자주 봤었다. 양태와 비슷한 개념. 1부 정의5. 그런데 2부에서 변용이라는 개념의 다른 용법이 나타나게 된다. 이 공리에서 쓰인 변용1부에서 이야기하는 양태로서의 변용이 아니라 물체가 다른 물체에 의해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정지해있던 물체가 외부 물체와의 충돌에 의해 운동을 하게 되는 것, 동쪽으로 향해 가던 것이 충돌해서 북쪽으로 가게 되는 것, 이런 것을 말한다. 2부에서 신체/물체와 관계해서 이 변용 개념이 상당히 자주 쓰인다.

- 변용하는 것과 변용되는 것의 본성이 동시에 반영된다는 것. 2부 정리16, 정리17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공리이다.

여기 등장하는 물체는 추상되긴 했지만 하나의 개체, 곧 복합물체다. 두 가지 이유

1) 스피노자는 여기서 본성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데, 본성은 개체에 대한 정의 이후에 나오는 논의에 따르면 부분들 사이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 또는 형태를 통해서만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물체는 부분들 사이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에 의해 성립하는 내부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물체들 사이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고찰하기 위한 논의 목적상 다른 물체와의 외재적 관계에 따라서만 고찰될 수 있다.

2) 스피노자가 변용되다affici“변용하다afficare“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 더욱이 상이한 본성을 지닌 다른 물체들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르게 변용하거나 변용될 수 있다는 점

 

공리운동하는 물체가 정지해 있는 다른 물체와 부딪치지만 이 다른 물체를 밀쳐내지 못하는 경우 앞의 물체는 반사되며, 이 물체는 계속 운동하고 반사된 운동이 정지해 있는 물체(앞의 물체가 부딪쳤던)의 표면과 이루는 선의 각도는 동일한 표면과 이루는 입사 운동의 각도와 똑같을 것이다.

- 데카르트의 <굴절광학>이라는 책에 나오는 논의를 가져왔다. 테니스채를 들고 테니스공이 나아가는 각도를 표시한 그림. 입사각과 반사각의 각도가 같다.

 

이것으로 가장 단순한 물체들에 대해서는 충분할 텐데, 이 물체들은 오직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에 의해서만 서로 구별된다. 이제 복합물체들로 나아가보자.

- 스피노자가 가장 단순한 물체들로 추상하는 것은 원자 같은 것이 아니다. 가장 단순한 물체는 그 자체로 실존하는 어떤 물체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실존하는 물체들을 추상한 것. 가장 단순한 성질-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로 추상되는. 가장 단순한 물체들이 합성해서 복합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복합물체는 여러 가지 부분들이 합성해서 생기는 것인데, 이 부분들도 역시 복합물체. A라는 복합물체를 구성하는 B1 B2 B3..... B1 B2 B3.....들도 복합물체고, 이것을 구성하는 C1 C2 C3....... 이것도 복합물체. 이건 다른 말로 하면 무한히 분해 가능한. 계속 분해해도 가장 단순한 물체가 나오지 않는다. 끝까지 가도 복합물체.

- 그렇다면 단순물체에 대해 자연학소론에서 왜 이야기하는가. 그것은 스피노자가 자연학소론 시작할 때 물체의 본성에 관해서 간단하게 논의하겠다고 하는데, 가장 단순한 물체로 스피노자가 추상한 것은 복합물체를 가지고 와서 이야기 하다보면 운동이라든가 물체가 갖는 그 자체의 특성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복합물체는 실존을 가지고 있고 질량, 크기, 강도, 표면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의 측면만을 가지고 물체의 가장 원초적인 성질을 설명하기 위해서 가장 단순한 물체를 추상한 것.

 

정의 같은 크기를 지니고 있거나 크기가 서로 다른 일정한 수의 물체들이 다른 물체들에 의해 압력을 받아coercentur 서로 의지할 때, 또는 그것들이 같은 속도나 서로 다른 속도로 운동하고 있을 경우에는 일정하게 규정된 어떤 관계에 따라 자신들의 운동을 서로 전달할 때, 우리는 이 물체들이 서로 연합되어 있으며, 이것들 모두가 단 하나의 물체 또는 개체를 합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개체는 물체들 사이의 이러한 연합에 의해 다른 모든 개체들과 구별된다.

- union ‘연합이라고 할지 합일이라고 할지 고민이 있다. 2부 정리13에서는 합일이라고 했고 같은 단어니 통일시켜서 합일이라고 해야할지 연합이라고 해야할지에 대해.

- 복합물체로 오니까 벌써 크기라는 개념이 들어온다.

- 어떤 관계“ certa + ratio. certacertainfixed로 번역될 수 있는데, 이걸 ‘fixed’로 번역해서 엄밀한 관계라고 번역하게 되면 아주 엄격하게 정해진 비율을 갖고 있다는 의미가 되고, 그러면 이 비율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개체로서의 고유성을 상실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이 비율을 이렇게 엄격하게 해석해버리면 개체가 갖고 있는 정체성이 너무 취약해진다. 예를 들어 도마뱀 꼬리가 잘려나갈 수도 있고 팔이 없어질 수도 있는데 이렇게 비율이 깨어져버린다고 실제로 정체성이 깨어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부분이 사라지더라도 그 정체성은 유지가 되는 것이다. 보조정리4와 보조정리5를 보면 스피노자의 생각은 훨씬 다이다믹하다. 개체와 환경이 서로 변화를 주고받으며 끊임없이 변한다. 개체는 일부를 환경에 내어주고 환경은 일부를 주고, 그 반대도 성립하고, 이게 개체가 실존하는 방식이다.

- 요청4에도 관련한 이야기가 나온다. 인간 신체는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매우 많은 수의 다른 물체들을 필요로 하며, 이것들은 말하자면 인간 신체를 계속해서 재생시킨다regeneratur“ 재생시킨다라는 말은 굉장히 강한 말이다. 개체가 딱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주변 환경과 교환하면서 재생된다는 것. 그래서 certa ratio엄밀한 관계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특히 현대처럼 예전이었으면 시체였을 속성을 생명으로 바꿀 수 있기 쉬운 시대에서는.

 

- 이 정의는 개체에 대한 정의를 두 측면에서 내리고 있다.

1) 주변 물체들의 압력에 의한 규정: ”다른 물체들에 의해 압력을 받아coercentur 서로 의지할 때 1부 정리28에 나오는 독특한 실재들의 타동적 인과관계 또는 보조정리3에 나오는 단순한 물체들 사이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에 따라 규정되는 것을 표현

2) 운동과 정지의 관계에 의한 규정: ”일정하게 규정된 어떤 관계에 따라 자신들의 운동을 서로 전달할 때

- 이 정의에서 흥미로운 점은 스피노자가 개체에 대한 정의를 개체가 지닌 어떤 본래적인 본질에 입각해서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개체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이것 역시 하나의 복합물체이며, 개체들이다)의 본성에 의해서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스피노자는 연합체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의 본성에 외재적인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입각하여 연합체의 본성을 정의한다. 따라서 이 연합체의 본성은 이러한 외재적 관계의 결과인 셈이다.

- , 스피노자가 정의하는 개체의 범위는 매우 넓다. 어떤 게 갖춰지면 개체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스피노자의 답은 개체들이 연합해 있을 때’. 그렇다면 연합은 무엇인가? ”같은 크기를 지니고 있거나 크기가 서로 다른 일정한 수의 물체들이 다른 물체들에 의해 압력을 받아coercentur 서로 의지할 때, 또는 그것들이 같은 속도나 서로 다른 속도로 운동하고 있을 경우에는 일정하게 규정된 어떤 관계에 따라 자신들의 운동을 서로 전달 하는 것.

- 2부 정의7이 연상된다. singular thing. 독특한 실재에 대한 정의의 핵심은 원인이다. 다수의 개체들이 하나의 작용에 협력해서 개체 모두가 하나의 결과에 대한 원인이 되는 것. 다수의 개체들이 모여 공동의 결과를 산출. 자연학소론에 나오는 개체와는 강조점이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이 singular thing도 굉장히 광범위한 개념.

 

- 개체에 대한 아주 느슨한 정의다. 그러다보니 이게 개체에 대한 충분한 정의가 되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단순물체에 내재성, 내면성이 없듯이 여기서 개체라고 정의된 복합물체도 마찬가지로 내재성, 내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개체를 개체로 만드는 것은 외부 물체들의 압력이다. 압력에 의해 서로 의지하게 되고, 연합하게 되고, 하나의 개체를 이루는 것. 일정한 운동을 전달하며(= 운동과 정지 사이에 일정한 관계를 형성하며) 개체를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본성이라는 말이 없다. 내면적인 본성이 없는 개체기 때문에.

- 스피노자가 2부 정리13의 주석에서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정신: 신체의 관념- 신체: 정신의 대상이러고 정의했고, 그게 합일(연합)을 이루는 게 인간이라고 이야기했다. 거기서 스피노자의 인간에 대한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도 다르고 데카르트와도 다르다. 스피노자의 개체에는 형상, 질료는 나오지 않거니와 내면성도 없다. 매우 담백하다. ”다른 물체들에 의해 압력을 받아coercentur 서로 의지할 때, 또는 그것들이 같은 속도나 서로 다른 속도로 운동하고 있을 경우에는 일정하게 규정된 어떤 관계에 따라 자신들의 운동을 서로 전달할 때라고 정의내릴 뿐이다.

* 정리13의 주석

이로써 우리는 인간 정신이 신체와 단지 연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정신과 신체의 연합을 무엇이라 이해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 이 한 문장으로 여러 사람(데카르트 중세스콜라철학 기독교 철학)을 동시에 비판하고 있다.

- 데카르트. 데카르트도 정신도 실체고 신체도 실체고 상이한 두 실체가 합일을 이루는 게 인간이다라고 말한바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데카르트 말처럼 유한 실체로서의 정신과 신체의 합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데카르트처럼 이러한 합일이 실체들 사이의 합일이라고 한다면, 이는 양자의 상호작용을 전제하게 된다. 이는 2부 정리73부 정리2, 5부 서문을 통해 불가능한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정신과 신체의 합일은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그 대상으로서의 합일이다.

- 중세 스콜라철학. 따라서 정신 내지 영혼을 인간의 실체적 형상으로 이해하는 중세 스콜라철학적인 관점도 배격된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인간이라는 실체는 정신 내지 영혼이라는 형상과 신체라는 질료로 구성되어 있으며, 따라서 영혼이 능동적이고 신체는 수동적이라고 간주된다. 이렇게 영혼의 능동성과 신체의 수동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스콜라철학적 관점과 데카르트는 일치하는 측면이 있다. , 데카르트는 이것을 도덕적 관점에서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데카르트는 신체가 정신 내지 영혼에 대해 수행하는 작용으로 인해 생겨난 우리의 정념들의 힘을 제어하는 것, 따라서 능동적인 정신이 신체를 통제하는 것이 유덕한 삶을 위해 필요하다고 보았다. 스피노자는 지속적으로 이러한 관점을 비판한다.

 

- 그렇다면 이 정의는 물체에만 해당이 되는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좀 멀리 가볼까? 4부 정리39 인간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 간에 지니고 있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비율 ratio)가 보존되도록 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인간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 간에 운동과 정지의 다른 관계[비율]을 갖게 하는 것은 나쁜 것이다.” 4부 정리39의 주석 한 부분 나는 5부에서 이것들이 정신에 얼마나 이롭거나 해로울 수 있는지 설명해볼 생각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는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 상이한 운동과 정지의 관계(비율, ratio)을 갖도록 배치될 때 신체가 죽는다고 이해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인간의 신체가 사람들이 그로 인해 그 신체가 살아있게 된다고 생각하는 피의 순환 및 다른 것들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좁은 의미의 생물학적 생리학적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이를테면 호흡 같은) 그 자신의 본성과는 완전히 다른 본성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점을 감히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근거도 나로 하여금 신체는 오직 시체로 변화되었을 경우에만 죽는 것이라고 여기도록 강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 죽는 것만 신체가 죽는 게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죽지 않더라도 신체가 사실상 사망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다른 경우들이 있다). 더욱이 경험 자체는 그와 다른 것이 옳다고 설득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때로는 사람은 과연 그가 동일한 그 사람인지 말하기 어려울 만큼 심각한 변화를 겪곤 하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어떤 스페인 시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는 병을 앓은 뒤에 비록 회복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썼던 우화들 및 비극들을 자신의 것이라고 믿지 않을 만큼 자신의 과거 삶을 망각해버렸으며, 그가 자신의 모국어까지 망각했다면, 사람들이 그를 얼마든지 성인 어린애로 간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이것이 믿을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면, 우리가 어린애에 대해서는 무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노인은 어린애들의 본성이 자신과는 전혀 다르다고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사례]로부터 스스로 이 사실에 대해 추측해보지 않는다면 자신이 예전에 어린애였다는 사실을 납득하려고 하지 않는다.

-> 다른 비율을 가지면 심한 경우 죽거나 질병에 걸리거나 어려서부터 어린애와 노인은 생물학적으로는 같은 사람일 수 있지만 스피노자에 따르면 변형, 운동과 정지의 일정한 관계의 변형,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2부 정리13과 자연학소론에서 개체를 정의할 때 어떤 내면성, 영원 같은 확고하고 불변적인 정체성에 따라 개체를 정의하지는 않지만, 단지 물체들의 차원에서만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정체성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 것이다.

- 생물학적 기능이 곧 정지되어야만 신체가 죽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스피노자는 좁은 의미의 생물학적 기준에 따라서 인간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게 아니다. 생물학적 기준 말고도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다른 식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스피노자가 운동과 정지의 일정한 관계=비율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운동과 정지의 일정한 관계=비율은 단지 생물학적 관계만이 아니라 훨씬 느슨하고 탄력적인 관계다. 그런 면에서 개체에 대한 이 정의는 좀 흥미롭다.

 

- 그런데 이러한 개체에 대한 정의 때문에 주석가들은 개체성의 이중적 기준의 문제를 제기한다. 지금 스피노자가 개체에 대한 정의에서 제시하는 기준은 아주 순수하게 자연학적/물리학적인 기준이다. 운동과 정지의 일정한 관계로서의 기준. 그런데 3부에서 스피노자는 모든 독특한 실재의 본질을 코나투스라고 부르고, 인간의 경우에 그걸 욕망이라고 정의한다. 코나투스에 대한 정의는 3부 정리6, 정리7에 나온다.

- 3부 정리6 각각의 실재는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한에서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노력한다.“ 3부 정리6은 좀 놀라운 정리다. 왜냐면 어떻게 보면 관성원리와 똑같은 명제인데(‘운동하는 물체는 운동하는 한에서 계속 운동하려고 한다/ 정지하는 물체는 정지해있는 한에서 계속 정지하려고 한다), 관성원리와 굉장히 달라지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3부 정리6의 증명을 보면 왜냐하면 독특한 실재들은, 신의 속성들이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되는(1부 정리25의 따름정리에 의해) 양태들, (1부 정리34에 의해) 신이 존재하고 활동하는 신의 역량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하는 실재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독특한 실재들을 신의 속성들/신의 본질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한다= 존재하고 활동하는 신의 역량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한다= 독특한 실재들은 신의 역량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나눠 갖는다‘.

- 즉 정리6의 문장 자체는 자연학소론에서 봤던 관성원리를 표현하는 바와 다를 게 없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여기에 내적인 역량을 부여한다. 이 물체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하는 이 경향을 실재가 갖고 있는 내적인 역량으로, 내적인 역량의 결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리7에서 각각의 실재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추구하는 노력conatus은 실재의 현행적 본질 자체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정리7의 증명 마지막 부분에서 각각의 실재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하는 역량 또는 노력은 실재의 주어진 본질, 또는 현행적 본질과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는 실재의 본질, 독특한 실재의 본질을 코나투스, 역량이라고 정의한다. 독특한 실재의 본질을. 자연학소론에서 우리가 봤던 개체에 대한 정의에서는 내면성도 없고 이런 역량의 개념이 없었던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스피노자가 개체를 두 가지 방식으로 정의를 했다고 말한다. 1) 형이상학적인 측면(3부 정리6, 정리7의 코나투스 개념) : 형이상학적 방식으로 정리했다고 말하는 이유는, 신의 역량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하면서 자신의 내적 역량을 갖기 때문에 그렇다. 그 역량이 이 개체의 본질을 형이상학적으로 규정하니까. 2) 순수하게 물리학적이고 자연학적인 측면. 역량 개념도 없고 본질, 내면성도 없는 개체. 그러니까 1)2)는 다른 정의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걸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까. 들뢰즈는 관계와 본질을 구별해야 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관계는 실존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고 본질은 말 그대로 본질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고, 그래서 관계가 지속의 차원에 속한다면 본질은 영원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 아무튼 자연학소론에 나오는 개체에 대한 정의와 코나투스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정의 사이에 차이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니까, 이걸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지의 문제가 주석가들 사이에서 계속 나오게 되고(최근에 영미 주석가들중에서도), 실존과 본질의 구별로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나온다. 그래서 매우 문제적인 정의이다. 하지만 4부 정리39와 주석을 더 보면 다른 측면들도 있는 것 같다. 나중에 자세히 더 살펴보게 될 것이다.

 

- 마지막으로 2부 정리24의 증명을 한 번 보자. 인간 신체를 구성하는 부분들은, 인간 신체와의 관계없이 개체로 간주될 수 있는 한에서가 아니라 어떤 일정한 관계에 따라 서로 운동을 전달하는 것인 한에서만(보조정리3 다음에 나오는 정의를 보라) 인간 신체 자체의 본질에 속한다이 문장을 라틴어 원문에 더 가깝게 직역하면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인간 신체를 구성하는 부분들은 인간 신체 자체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이 부분들이 인간 신체와의 관계없이 개체들로 간주될 수 있는 한에서가 아니라 어떤 일정한 관계에 따라 자신들의 운동을 서로 전달하는 한에서가 아니라면 말이다.”

- 여기에서는 인간 신체가 바로 개체이고, ’인간 신체와의 관계없이 개체로 간주된다는 것은, 이를테면 여기서 부분A가 떨어져 나오면 이 A는 더 이상 신체의 부분이 아니라 이 부분 자체가 하나의 개체인 것이고, 이 부분A를 구성하는 또 다른 부분들, 즉 개체들B,C,D,E......가 있을 것이고. 이렇게 되면 이 부분들은 A를 포함해서 더 이상 신체의 부분들이 아닌 독립된 개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본질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개체들이 얼마나 느슨하고 취약한가. 개체를 이루는 이 부분들이 떨어져 나오면 (아무런 관계없는) 또 다른 개체가 되는 것. 이 부분들이 서로 일정하게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유지하면 그때만 개체의 부분이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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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개체들- 이것들도 상이한 정도이긴 하지만 모두 정신화animata되어 있다-보다 인간에게 더 많이 속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 안에는 모든 실재에 대한 관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 인간과 다른 자연 존재자들 사이에 존재론적 차이가 난다는 점을 부정하고 있다. 3[서문]에 나오는 스피노자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은 국가 속의 국가가 아니다. 그 대신 스피노자는 나는 정서들의 본성과 역량, 그리고 정서들에 대한 정신의 역량을 내가 앞의 1, 2부에서 신과 정신을 다루었던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다룰 것이며, 인간의 행위 및 욕구를 마치 선과 면, 물체들의 문제인 것처럼 간주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는 다른 개체들-이거들도 상이한 정도이긴 하지만 모두 정신화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 인간과 다른 개체 사이에 질적 차이는 없고 단지 정도 차이라는 것.

 

- 질베르 시몽동 Gilbert Simondon.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추어 본 개체화>가 이번에 한국에 나왔는데, 그는 매우 독창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철학자다. 스피노자 철학과도 아주 비슷하다. 흥미롭게도 그는 정작 스피노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ㅋㅋㅋ 스피노자에 대한 아주 전통적인 평가인 범신론자라는 점을 받아들여서 싫어하는 것인데 하지만 생각은 스피노자와 매우 비슷하다. 처음 <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추어 본 개체화> 논문이 나왔을 때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었지만, 들뢰즈가 발굴해서 서문도 쓰고 <천개의 고원>에서 인용도 하고 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논문이 프랑스어 말고 외국어로 번역된 것은 한국이 처음이다. 아직 영어로도 번역되지 않았는데 그만큼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 지금까지 기술철학의 기조는 인간과 기술은 차이가 있다는 것인데 시몽동은 인간과 기술은 차이가 없다라고 말한다. 인간과 기술은 결코 존재와 도구의 관계가 아니고, 같은 계열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생각이 너무 파격적이라서 80년대까지도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80년대 말부터 프랑스에서 주목을 받고 현재 영미철학계에서 굉장한 주목을 받고 있다. 미국에도 곧 번역이 되어 출간될 예정이다. 이 책을 스피노자 철학과 비교하면서 읽어보면 꽤 흥미로울 것이다.

 

* animata

 

- 그런데 이 문장에서 다소 불분명한 것은 스피노자가 왜 정신화되어 있다고 할 때 animata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스피노자는 2부에서부터 5부에 이르기까지 정신을 가리킬 때 일관되게 ’mens‘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고, 정서 내지 정념과 관련해서는 animus, 곧 우리말로 마음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했다. 반면 여기서는 중세 스콜라철학에서 영혼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anima라는 명사의 동사 형태인 animata(동사 기본형 animo)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스피노자가 이 용어를 사용하는 맥락은 인간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개체들도 역시 정신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맥락이다.

- ‘영혼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anima생명의 원리’, 곧 신체가 움직이고 활동하고 생존할 수 있는 원리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렇게 기존의 anima, 영혼이라는 개념이 식물이나 동물, 인간의 생명 원리로 이해되면, 스피노자가 <에티카> 1부 정의2에서부터 강조한 바 있는, 사유속성과 연장속성, 그리고 각각의 속성에 속해 있는 물체들과 관념들의 독립성, 상호 작용 불가능성이라는 기본적인 존재론 원리에 위배된다. 실제로 스피노자는 2부 정리35의 주석에서 anima의 전통적인 용법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에티카>에서 anima라는 용어는 단 3곳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2부 정리35의 주석, 3부 정리57의 주석, 5부 서문

- 사실 스피노자가 “anima”라는 용어를 쓸 때는 다 비판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사용했다. 왜 스피노자가 비일관성의 위험을 무릅쓰고 animata라는 표현을 사용할까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내 생각에 그 이유는 신조어를 사용하지 않는 스피노자의 용어법과 관련되어 있다. 스피노자는 늘 기존에 사용되는 철학, 신학, 정치학의 용어들을 그대로 사용하되, 이 용어들에 자신의 독자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cf. 3[부록] 20항의 해명’). 이는 자신이 비판하거나 해체하고자 하는 기존 철학의 담론과 문제설정 내부에 위치하는 것이 자신의 철학적 전략을 수행하는 데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곧 스피노자는 기존 철학과 동일한 용어, 동일한 개념, 동일한 어법을 사용하면서 그것들이 지닌 내적 한계와 모순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자신의 철학적 개념화를 통해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스피노자는 animata라는 기존 철학의 용어를 사용하면서, 통상적인 용법과 달리 신체의 생명원리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게 아니라 신체와 합일되어 있는 정신을 가리키는 뜻을 부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인간과 다른 개체들에게서 신체와 합일되어 있는 정신이 과연 어떤 것인지, 그리고 인간 및 다른 개체들 사이의 관계가 어떤 의미에서 질적 차별의 관계가 아니라 정도상의 차이의 관계인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 뒤에 나오는 문장들은 이러한 의문과 관련되어 있다.

 

- mens 정신. 어떤 인식 작용, 지각 작용, 의지 작용과 관련해서 많이 쓰는 단어

animus 정서 정념 정서적인 어떤 작용

 

animus마음이라는 말에, mens정신이라는 말에 더 가깝다. ’마음정신은 다르니까. 우리가 마음이 지옥이다라고 말하지 정신이 지옥이다/ 정신이 괴롭다같은 말은 잘 쓰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마음이라는 말을 정서와 감정에 연결해서 쓰기 때문이다. 반면 mens는 인식/지각/의지 작용에서 많이 쓴다. 이를테면 정신 똑바로 차려!“ (물론 조금 예외적인 쓰임새로 마음대로 해라가 있다)

 

anima: 영혼. 이때 영혼은 생명, 생명의 원리. 이런 것을 가리킴.

animata는 동사 animo의 수동형으로 animo : 생기를 불어넣다 활력을 주다

animata : 생기가 불어넣어졌다. 생명을 얻다. 생기를 얻다

 

스피노자가 여기서 anima를 쓸 때는 스콜라 철학 anima라는 말, 그러니까 이 단어의 원래의 뜻과는 좀 다른 맥락에서이다. ‘정신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영혼이라고 볼 수 있는 이 단어를 스피노자는 스콜라 철학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쓰는 것보다 훨씬 더 포괄적인 의미로 썼다. 그 뜻은 무생명체도 영혼을 갖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무생명체도 정신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스콜라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는 오직 생명체에만 아니마타를 결부시키는데 스피노자는 이 아니마타를 다른 모든 개체, 무생명체까지에도 다 결부시킨다.

 

- 스피노자는 anima라는 말을 딱 세 군데에서 쓴다. 2부 정리35의 주석, 3부 정리57의 주석, 5부 서문 데카르트의 정념론 이야기하면서. 그리고 그가 아니마라는 용어를 쓸 때 용법들을 보면 다 비판적이다. 그런데 2부 정리13의 주석에서는 비판적이지 않은 맥락에서 아니마타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왜 스피노자가 여기서 다른 표현을 쓰지 않고 아니마타라는 말을 썼을까. 그 이유를 한 번 생각해보면-

 

- 스피노자는 사실 신조어를 거의 쓰지 않는다. 아주 가끔 있다. 신조어라기보다 단어들을 가지고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테면 3부 부록에서 실망이라는 정의. conscientiae morsus. consicientiae는 양심, morsus라는 말은 흠집내다, 물어뜯다 같은 뜻이다. 이것을 스피노자는 conscientiae morsus는 희망했던 것보다 더 나쁘게 일어난 과거의 것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이다, 실망이라고 말한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스피노자를 언급하면서 이 용어를 쓰는데 스피노자가 만들어낸 말이기 때문이다. concientiae라는 말과 morsus라는 말을 합쳐서 쓴 것은 스피노자가 처음이다. 니체는 이 용어를 <도덕의 계보>에서 양심의 가책이라고 번역한다. 사실 이것이 원래 단어의 뜻에는 더 부합한다. 도덕률 도덕법칙 도덕적인 이상에 부합하지 못하거나 지키지 못했을 때 내면적으로 자신을 책망하고 자책하는 것을 두고 니체가 스피노자의 용어를 가져오면서 양심의 가책이라고 쓰는 것. 스피노자의 용법과 니체가 가져다 쓴 용법은 전혀 다르다. 어쨌든 스피노자가 만들어낸 표현이다. 단어를 만들어낸 건 아니고 기존의 단어를 새롭게 결합해서 새로운 뜻으로 만든 것.

 

이런 사례가 2부 정리44의 따름정리2에도 나온다. ”sub (quadam) aeternitatis specie“ 영혼의 관점. 이것도 스피노자가 만든 말이다. 우리말 번역본에서는 이것을 영혼의 상하라고 번역했는데 subunder라는 뜻이고 specie가 양상이라는 뜻이라서 그냥 그 말 그대로 조합해서 상하라고 했다. 스피노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고 상관없는 번역. sub specie는 사실 관용적인 표현이다. ~한 관점에서 ~한 측면에서라고 할 때 쓰는 말. 그런데 스피노자는 이것을 가져다가 영원의 관점에서라고 쓴 것이고 이 표현은 스피노자가 만들어낸 표현이다. 그래서 라틴어 사전에 sub aeternitatis specie를 찾으면 스피노자가 바로 나온다

 

- 어쨌거나 스피노자는 신조어를 거의 만들지 않고, 기존 철학의 용어를 가지고 와서 거기에 아주 다른 새로운 자신의 용법을 불어넣는다. 이게 스피노자의 아주 중요한 점이다. 기존의 용어를 가지고 와서 자기 철학의 용어를 불어넣는 것. 이런 관점에서 스피노자는 데리다와 아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deconstruction 기존의 철학담론의 해체하는 작업. 물론 데리다는 신조어를 굉장히 많이 만드는 철학자이지만. 실체, 속성, 양태 같은 용어들도 데카르트에게서 가져온 것이다. 스피노자가 볼 때 데카르트는 이 실체 개념을 쓰면서도 그것을 일관되게 끝까지 쓰지 못한 사람이다. 5부 서문에서 스피노자가 데카르트 비판을 하는 것을 보면, 데카르트는 스콜라 철학을 비판한다고 하면서, 사유속성과 연장속성이 전혀 다르다고 하면서, 정신은 사유속성에 속하고 신체는 연장속성에 속한다고 하면서, 어떻게 그 두 가지가 서로 상호작용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말한다.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본인 스스로가 사유속성 연장속성이라는 개념도 만들어냈고, 인간을 이야기할 때 사유속성과 연장속성이 서로 상호작용한다는 것을 도입한 사람인데 그런데 관되지 않다. 반면 스피노자는 그 원리를 아주 끝까지 밀어붙여서 데카르트 철학을 비판하고 홉스를 비판하고 해체하고 넘어선다. 이게 바로 스피노자의 용어법이 가진 중요한 특징이다.

- 이런 관점에 비춰보면 이 아니마타라는 개념도 스콜라 철학, 데카르트가 쓰는 용어를 가지고 와서 이들이 생각지 못했던 개념까지 이 단어를 아주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용어법을 쓰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다. 물론 그렇다면 도대체 인간하고 다른 개체들이 정신화되어 있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인간하고 비인간 무생명체 사이의 질적인 차이, 존재론적인 차이가 아니라 양적인 정도의 차이만 있다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더 많이 설명해야한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그걸 별로 안 하고 있다. 연구자들에게는 좋은 일이긴 하다. 논문 쓸 게 많아지니까ㅋㅋ 스피노자는 주석의 그 다음 부분에서 바로 이 문제에 대해 조금 부연한다.

 

*

하지만 우리는 관념들이 그 대상들과 마찬가지로 서로 다르며, 한 관념의 대상이 다른 관념의 대상보다 우월하고 더 많은 실재성을 지니고 있는 한에서 그 관념이 다른 관념보다 더 우월하고 더 많은 실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데카르트가 한 이야기). 이 때문에 어떤 점에서 인간 정신이 다른 정신들과 다르고 다른 정신들에 대해 우월한지 규정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말했던 것처럼, 필연적으로 그 대상, 곧 인간 신체의 본성을 알아야 한다.(<- 스피노자가 하는 이야기)” , 스피노자는 데카르트가 한 이야기를 가져와서 자기 이야기식대로 확 바꾼다

 

- 데카르트 철학에서도 볼 수 있는 표상적 실재성의 차이에 따라 관념으로서의 정신의 대상, 곧 신체의 실재성의 정도에 따라 실대성도 달라진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관념으로서의 정신들 사이의 차이는 정신들의 대상을 이루는 신체들(또는 물체들)의 차이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알 수 있다

 

1) 스피노자에게서 신체들 또는 물체들만이 아니라 정신들 내지 관념들도 서로 다르다는 것. 곧 서로 구별되는 개체성 내지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2) 정신들의 이러한 개체성 내지 독특성은 신체들의 차이에 의거해 있다.

 

스피노자 철학에 대해 제기되어 온 오래된 비판은 스피노자 철학에는 개체 내지 개체성이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자유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데(이는 피에르 벨Pierre Bayle에서 유래하며 18세가 반스피노자주의 저술가들(여기에는 라이프니츠주의자들, 말브랑슈주의자들, 뉴턴주의자들이 망라되어 있다)에 의해 널리 확산되었으며, 프리드리히 야코비Friedrich Jacobi와 헤겔에 와서 철학적 영향력을 얻게 된다. 17세기에서 19세기 전반에 이르는 스피노자주의와 반스피노자주의의 역사에 관해서는 많은 문헌들이 있지만 특히 Jonathan Israel, <The Radical Enlightenment: Philosophy and the Making of Modernity, 1650~1750>, 이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 2부 정리13의 주석의 이 대목 및 뒤에 나오는 [자연학 소론]이다.

 

- 스피노자에 대한 아주 유명한 전통적인 비판이다. 스피노자 철학에는 개체가 없다. 실체만 있다. 스피노자 철학에는 자유의 여지가 없다. 스피노자보다 약간 뒤에 나온 계몽시대 굉장히 중요한 철학자 중 하나인 프랑스의 피에르 벨 Pierre Bayle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가 <Historical and Critical Dictionary>라는 사전을 만든 것이다. 이 사전은 서양학문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 과거 사상가들에 대한 비평을 담은, 말 그대로 히스토리컬하고 크리티컬한 사전인데 당대의 베스트셀러였다. 스피노자에 대한 항목이 몇 십 페이지에 걸쳐 있는데 여기서 벨이 스피노자에 했던 비평이 후세에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친다. 이 벨의 핵심들이 바로 스피노자 철학에는 개체도 없고 자유의 여지도 없다는 것. 뭔가 어떤 아주 현명하고 자비로운 신 개념을 설정해야 어떤 개체들간의 차이도 설명할 수 있고 자유도 설명할 수 있는데, 스피노자 철학에는 맹목적인 필연성만 존재하고 자연 전체의 신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개체의 차이도 자유도 없다고 비판한다.

 

이 비판이 18세기에 상당히 널리 확산된다. 특히 라이프니츠 추종자, 말브랑슈의 후예들 심지어 뉴턴의 추종자들에 희애 반스피노자주의가 확산되는 것. 18세기 말이 되면 독일의 프리드리히 야코비Friedrich Jacobi라는 신학자가 독일에서 스피노자에 대한 비판을 정립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야코비의 책은 얼마 전에 한국에서도 <스피노자의 학설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이 야코비의 스피노자 비판은 독일관념론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헤겔의 정신현상학이나 대논리학이나 철학사 강의 등에 스피노자 비판이 제기되고 있고, 이것 역시 철학적으로 큰 영향을 미쳐 오늘날까지도 스피노자의 철학에 개체도 없고 자유의 의지도 없다는 비판이 종종 제기 된다.

 

17세기에서 18세기까지 스피노자주의 또는 반스피노자주의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보기에 가장 포괄적이고 제일 좋은 책은 조나단 이스라엘Jonathan Israel<The Radical Enlightenment: Philosophy and the Making of Modernity, 1650~1750>이다. 2002년에 이 책이 나왔는데 서평만 해도 수백편이 나올 정도로 서양학계에서 엄청나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계몽주의를 이해하는 아주 새로운 관점을 세운 책이다. 이 책의 중요한 논점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계몽주의는 반쪽의 계몽주의였다는 것. 조나단 이스라엘의 표현을 빌면, moderated enlightenment.

 

그의 주장은 이렇다. 우리는 온건한 계몽주의, 절충적인 계몽주의를 계몽주의의 본질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사실 moderated enlightenment의 기저에는 훨씬 radical enlightenment의 흐름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훨씬 더 급진적인 계몽주의의 중심에는 스피노자가 있었다. 스피노자 철학이 급진적인 계몽주의의 기원에 있었으며 동력을 제공해준 원천이었다. 그래서 이 책 전체는 어떻게 보면 스피노자주의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스피노자 철학이 어떻게 네덜란드에서 프랑스에서 독일로 영국으로 유럽 각지로 전파되어 영향을 미치고 어떤 반발을 불러일으켰는지의 과정을 따라간 것. 이 책은 서양철학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계몽주의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큰 화두를 던졌다.

 

우리는 그동안 스피노자라는 사람이 1677년에 사망한 이후에 스피노자의 책이나 글이 어떻게 수용됐고 어떤 영향을 미쳐왔는지는 사실 잘 몰랐는데 특히 최근에 들어서 이와 관련한 논문들이 많이 나오면서 예전보다 훨씬 그의 책이 어떤 영향을 미쳤고 어떻게 왜곡됐는지를 잘 알게 되었다. 그런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준 것이 바로 이 조나단 이스라엘의 책이다. 이게 번역된다는 이야기를 7-8년전부터 들었는데 아직 안 됐다. 900페이지의 상당이 두꺼운 책인데 어렵지 않고 소설 읽듯이 역사책 읽듯이 술술 넘어가는 아주 재미있는 책이다.

 

- <세 명의 사기꾼> 18세기 유럽의 스피노자주의 문헌을 대표하는 책 중에 하나다. 저자 이름이 스피노자의 정신이다ㅋㅋ 17세기, 18세기 검열이 아주 심했던 시기에 저자 이름 없이, 어떤 출판사에서 나왔는지도 모르게 내는 문헌들을 지하간행물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 중 하나며, 제일 유명한 문헌 중 하나기도 하다. 여기서 세 명의 사기꾼은 누굴까? 데카르트? 데카르트가 사기꾼은 아니지ㅋㅋ 바로 예수, 마호메트, 모세. 성경에서 나온 3개의 종교 창시자를 사기꾼이라고 칭한다. 아주 급진적인 종교비판론이다.

 

여기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책이 <신학정치론>이다. 물론 신학정치론의 논점과는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신학정치론에서 스피노자는 모세에 대해 신랄하게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세가 야만적인 히브리인들을 이끌어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를 오랫동안 번영시키고 안정되게 이끌었다고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또 신학정치론에서는 예수도 매우 대단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다른 예언자들은 다 상상력만 뛰어났지 지적으로 대단한 사람은 아닌데 예수는 철학적이기도 했고, 다른 예언자들과 다르게 신학으로 소통했던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세 명의 사기꾼>은 스피노자의 정신이라는 이름으로 신학정치론에서 많은 인용문을 가져오고 있지만 스피노자보다 훨씬 래디컬한 종교비판을 제시하고 있다. 읽어보면 재미있고 시원하다ㅋㅋㅋ 아주 신랄하고. 이 책이 워낙 유명해서 스웨덴의 여왕이 이 책을 구하려고 굉장히 애를 썼다는 일화가 있다. 검열도 심했고 발견 즉시 다 압수해서 불태워버리는 그런 책이었기 때문에 구하기 굉장히 어려웠는데 돈을 굉장히 많이 들여서 결국 구해서 봤다고.

 

- 아무튼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저 비판들은 그의 사후부터 계속 따라다녔던 비판들이다. 그런데 이런 비판과 관련해서 보면 바로 이 관념들이 그 대상들과 마찬가지로 서로 다르며, 한 관념의 대상이 다른 관념의 대상보다 우월하고 더 많은 실재성을 지니고 있는 한에서 그 관념이 다른 관념보다 더 우월하고 더 많은 실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데카르트가 한 이야기, 표상적 실재성). 이 때문에 어떤 점에서 인간 정신이 다른 정신들과 다르고 다른 정신들에 대해 우월한지 규정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말했던 것처럼, 필연적으로 그 대상, 곧 인간 신체의 본성을 알아야 한다.(<- 스피노자가 하는 이야기)부분의 이야기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다 이 부분을 부연하고 보완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 하지만, 인간 신체의 본성에 대해 알아야하지만, 이 책은 자연과학책이 아니라 윤리학책이니니까 여기서는 이 문제에 대한 자세한 논의를 피하겠다고 말한다. 스피노자 같은 사람에게 자연과학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이 또한 기하학적 방법에 의해 죽 논증하는 책 한 권을 따로 써야한다. 그래서 일단 이 <윤리학> 책에서는 자세한 논의는 넘어가고 이어지는 정도로만 말하겠다면서, 물체/신체의 우월성이 어떻게 정신의 우월성과 연결되어있는지 간략하게 자신의 논점을 제시한다.

 

1) 하지만 나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한 물체가 동시에 여러 방식으로 작용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그 능력에 의해 다른 물체들보다 우월할수록, 그 물체의 정신은 (여기에 상응해서 여기에 비례해서) 동시에 여러 가지 것들을 지각할 수 있는 그 능력에 의해 다른 정신들보다 우월하다고 말하겠다

 

- 능력에 의한 논변 :

물체/신체 : 동시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작용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그 능력.

작용하다” agere -> actio 악치오, ago 수용하다 pati > passio 파시오 patior

물체/신체의 정신: 동시에 여러 가지 것들을 지각할 수 있는 그 능력

 

, 한 가지로 작용하는 것보다 여러 가지로 작용하는 것이 더 우월하다. 아주 단순한 순환작용만 하는 생물체와 인간을 비교했을 때 여러 가지 작용을 동시에 하는 인간 쪽이 더 유용한 것처럼. 신체의 열등과 우월도 여기서 갈린다. 아기<어른.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스피노자가 작용만 이야기한 게 아니라 수용할 수 있는 능력도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스피노자가 볼 때 이 수용한다도 굉장히 중요한 능력인 것이다, 물체의 우월성을 규정하는 요소로. 그 물체/신체가 다양한 방식으로 무언가를 수용할 수 있으면 있을수록 그 신체의 정신은 거기에 상응해서 더 다양한 방식으로 지각할 수 있다. , 어떤 물체가 외부의 영향을 다양한 방식으로 수용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그 신체의 정신적 능력의 발전에도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2부 정리29에서 스피노자는 여기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다.

 

2) 그리고 어떤 물체의 작용이 그 물체 자신에게만 의존하면 의존할수록, 작용하기 위해 그 물체와 함께 협력하는 다른 물체들이 더 적어지며, 그 물체의 정신은 그만큼 더 판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

 

- 자기 의존에 의한 논변

물체/신체 : 어떤 물체/신체의 작용이 그 물체/신체 자신에게만 의존하면 할수록, 작용하기 위해 그 물체와 함께 협력하는 다른 물체들이 더 적어진다.

물체/신체의 정신 : 그 물체/신체의 정신은 그만큼 더 판명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능동적이면 능동적일수록 신체도 정신도 능동적. 하지만 스피노자 철학에서 능동” “수동의 의미는 3부에 가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여기에서는 아직까지는 스피노자적인 그 능동/수동이 아니다. 이 능동/수동을 잘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3부에 가면 더 보게 될 것이다.

 

- 1)2)과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반론. 하지만 1)은 어떤 물체/신체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작용 및 수용의 능력, 그리고 이것과 합치하는 정신의 지각능력을 가리키는 데 반해(cf. 2부 정리29 및 따름정리와 주석) 2)는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어떤 물체/신체 및 정신의 능동성과 수동성을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물체/신체는 수동적이면서도 1)과 같은 여러 가지 작용 및 수용의 능력을 가질 수 있지만 이는 물체/신체가 능동적이면서 1)과 같은 능력을 갖는 것보다 못하다. 더욱이 물체/신체는 수동적일 뿐만 아니라 1)의 측면에서도 작용 및 수용 능력이 다면적이지 못할 수 있다.

작용 및 수용이 다면적이지 못하고 수동적인 경우

작용 및 수용이 다면적이지만 여전히 수동적인 경우

작용 및 수용의 능력이 다면적이면서도 능동적인 경우

(여기에 작용 및 수용이 다면적이지 못하지만 능동적일 수는 없나? 다면적이지 못하면 수동적일 수밖에 없나?)

 

우리가 우리 신체에 대하여 완전히 혼동된 관념밖에 갖지 못하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으며, 내가 뒤에서 이로부터 연역해낼 다른 여러 가지 것도 이해할 수 있다2)에서 유래한다. cf. 2부 정리29와 따름정리, 주석, 2부 정리40의 주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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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6강은 형상적 본질의 의미를 찾아가는 작은 보물찾기 같은 시간이었다. 5부 정리2122와 연결해서 2부 정리8과 따름정리에 묻어있는 플라톤의 표식을 찾아내었지만, 바로 플라톤으로 향하지 않고 다른 길을 찾아가다가 라이프니츠를 다시 만나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독특한 실재가 실존하지 않는 이유를 찾기고 마음먹고 그래서 손에 쥐게 된 이미 먹어버린 아이스크림 속에서 마침내 형상적 본질의 의미를 찾아낸, 복잡하지만 근사하게 짜여진 보물찾기였다. 선생님을 비롯한 과거의 여러 탐사대들이 지도를 읽어내는 대로 그저 따라갔을 뿐이지만. 플라톤주의로 가버리거나 보물찾기를 주최한 스피노자의 일관성을 의심하지 않고 끈질기게 지도를 붙잡고 아주 작은 것들까지 실마리가 될 만한 것들을 모아 다른 방향을 찾아 걸어가며 스피노자 철학에 잘 맞는 길을 낸 누군가들의 학자적인 집념과 태도에 대해 걷는 내내 깊이 생각했다.

 

스피노자가 본질에 대해 분명하게 두 가지로 나눈 것처럼 보이는 흔적들을 앞에 두고 두 개념이 사실은 하나일 수도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들었을 때,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려면 몇 가지 중요한 측면을 해명해야만 한다는 것을 들었을 때 그게 어떻게 가능할지 전혀 감도 오지 않았다. 그런데 2부 정리4를 가지고 평범해 보이는 문장 뒤에 숨겨진 물음표들을 끄집어 올리셨듯이, 1부 정리8 주석2의 한 대목, “이 때문에 우리는 실존하지 않는 변양들에 대한 참된 관념을 가질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지성 바깥에서 현행적으로 실존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들의 본질은 다른 것 안에 포함되어 있어서 이 다른 것을 통해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에서 이미 답이 자명해 보여 그냥 자기가 할 소임을 다하고 제자리에 놓여져 있는 것 같던 다른 것이 사실 우리가 찾고 있는 그것일 수도 있다는 걸 시사하셨을 때 미미하게 소름이 돋았다. 2부 정리4때도 느낀 거지만 난 이런 방식으로 평범한 문장이 실마리로 바뀌는 논증의 과정에 약간 열광하는 것 같다(“이 다른 것이 실체, 또는 물체의 경우라면 연장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그건 너무 자명한 만큼 우리에게 해주는 이야기가 거의 없으니까, 우리는 약간 더 구체화시켜 명시할 필요가 있다라는 말이 되게 좋았다). 애드거 앨런 포의 도둑맞은 편지 같은 다른 것’.

 

그리고 이미 먹어버린 아이스크림(멋진 예시였다!)과 함께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이, 그렇게 틀림없이 다르게 보였던 두 개의 본질이 하나로 이어졌다! 이 순간 정말 마음속으로 박수칠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본질 개념이 다른 식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 그리고 지금은 현행적 본질이 존재하지 않지만 내가 형상적 본질을 갖고 있는 한, 적합한 관념에 따라 언제든지 현행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 형상적 본질이 갖고 있는 의미가 내 삶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내가 형상적 본질을 갖고 있는 한, 현행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말이 내가 찾은 보물이었다. 명백해 보이는 플라톤주의로 가지 않은 탐사대들의 노력의 흔적을 따라 풀숲을 헤치고 스피노자적인 길을 찾았던 이날의 여정 끝에서 기다리고 있던.

 

2. 조금 다른 길이지만 이런 식의 길도 좋았다.

 

-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해볼 수도 있다. 2부 정리8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은 신의 무한한 관념 속에 포괄되어/파악되어 있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뜻하려는 것은, 신의 무한한 관념 속에 포괄/파악되어 있는 이 관념들에 상응하는 (왜냐하면 이 관념들은 참된 또는 적합한 관념, 곧 그것에 상응하는 관념 대상을 가질 수 있는 관념들이기 때문이다) 실재들의 형상적 본질들이 신의 속성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 따라서 1부 정리17의 주석에서 스피노자의 반대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달리, 형상적 본질들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은 그것들이 신의 지성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이 신의 속성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의 지성 안에 있는 것은 형상적 본질이 아니라 표상적 존재이며, 신의 속성 안에 존재하는 것이 형상적 본질

- 또한 스피노자가 2부 정리8의 증명에서 언급하는 앞의 정리는 사실 정리7의 따름정리라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신의 무한한 본성으로부터 형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은 동일한 질서, 동일한 연관에 따라 신 안에 있는 관념으로부터 표상적으로 따라 나온다.” 2부 정리7의 따름정리가 말하는 것은 신의 지성 안에 존재하는 표상적 존재 또는 관념에 상응하는 형상적 본질이 신의 속성 안에 존재한다는 것.

- 따라서 스피노자가 2부 정리6의 따름정리, 2부 정리8, 2부 정리8의 따름정리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형상적 본질= 현실적 실재표상적 존재= 관념구별이다. 실재= 관념의 관계. 렇다면 스피노자가 형상적 본질이라고 말하는 것은 현행적 본질과 구별되는 또 다른 본질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3. 그동안 <에티카>에서 여러 번 봐왔던 스피노자의 플라톤주의 비판의 토대 위에서 <데카르트의 철학원리>에 부록으로 덧붙여진 <형이상학적 사유> 12장을 읽으니 플라톤주의와 스피노자 철학의 거리가 매우 명료하게 머릿속에서 정리되었다. “형상적 본질은 그 자신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창조된 것도 아니다라는 문장에서 그 자신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 플라톤적인 이데아, 영원진리를 가리킨다는 것이 명확해지고 나니 1부 정리17의 주석과 연결되어 그동안의 스피노자의 비판들이 머릿속 서랍 하나에 깔끔히 정리되는 느낌(저런 집약적인 한 문장을 만나게 되면 수사법적으로도 감탄할 수밖에 없다)

 

형상적 본질은 그 자신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창조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 양자는 실재가 현행적으로 실존함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형상적 본질은 신적 본질에만 의존하는데, 모든 실재는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실재들의 본질들이 영원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동의한다

- ”그 자신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플라톤적인 이데아를 가리킨다. 이것은 신이 창조하는 것도 아니고, 신의 창조와 독립해서 그 자체로 영원히 존재하는, 17세기 철학에서 영원진리라고 부르는 것이다. 반면 창조된 것이라는 것은 영원성을 지니지 않은 지속의 차원의 존재라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형상적 본질은이 양자와 다르다고 주장. 왜냐하면 형상적 본질은 신적 본질에만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에티카> 1부 정리25에 보면 신적 본질에만 의존한다는 뜻에 대해 스피노자는 정확히 이렇게 말하다. 신은 실재들의 실존의 작용인일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본질의 작용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본질이라는 것은 신이라는 원인과 무관하게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신이 생산하는 것이다. 사물들의 실존뿐만 아니라 본질까지도 신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다.

 

4. 피에르 벨이 스피노자를 두고 한 말, 텍스트로 하는 피에르 벨의 스피노자 성대모사ㅋㅋ를 듣고 크게 웃었다. 나도 가끔 봉이에게 말장난처럼 스피노자적 용어를 끌어다가 장난치기도 하고이를테면 어제도 퇴근하고 나니 피곤해서 죽을 것 같다는 말을 오늘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가 양태로서 소멸할 것만 같아라고 했더니 너는 나의 실체니까 본질적으로 실존을 포함하고 있어, 걱정하지 마라고 답을 했다ㅋㅋ- 넌센스 퀴즈처럼 문제를 내기도 하는데- ”신 안에는 어떤 관념의 독특한 대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는데, 이는 오직 신이 이 동일한 대상의 관념을 갖고 있는 한에서 그렇다가 무슨 뜻인 줄 알아?“ ”뭔데?“ ”인간 정신은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다“ ”그게 뭐야!(동공지진ㅋㅋ)“- 위대한 학자가 위대한 비평서에서 저 비슷한 방식으로 스피노자에 대해 비평했다니 어쩐지 반갑고ㅋㅋ 이유가 있는 스피노자의 저런 화법에 이제 익숙해졌는데 스피노자와 주디스 버틀러가 대화하는 거 너무 보고 싶다. 정말 외계어로 이루어지는 대화를 보는 느낌일 것 같아ㅋㅋ

 

- 이쯤에서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냥 인간 정신이라고 하지, 왜 굳이 간주된 한에서의 신” “변용된 한에서의 신신이 다 알고 있다, 그런 이야기를 왜 하는가ㅋㅋㅋ 그냥 인간 정신은 자기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다라고 이야기하면 되는데 대체 왜 신 안에는 어떤 관념의 독특한 대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는데, 이는 오직 신이 이 동일한 대상의 관념을 갖고 있는 한에서 그렇다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건가ㅋㅋ

- 스피노자보다 약간 뒤에 나온 계몽시대 굉장히 중요한 철학자 중 하나인 프랑스의 피에르 벨 Pierre Bayle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가 <Historical and Critical Dictionary>라는 사전을 만든 것이다. 이 사전은 과거 사상가들에 대한 비평을 담은, 말 그대로 히스토리컬하고 크리티컬한 사전이다. 그 사전에서 피에르 벨은 스피노자에 관한 해설과 비평도 썼는데, 거기서 벨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스피노자 철학체계에서 가령 독일군대 만 명과 투르크군대 만 명이 싸운다면 스피노자는 독일군 만 명으로 변용된 신과 투르크군 만 명으로 변용된 신이 서로 싸웠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니까 신과 신이 서로 싸웠다. 이게 얼마나 웃긴 이야기냐, 이런 표현이 나온다.

 

5. 하지만 스피노자의 화법은 난해하기만 한 게 아니라 시적이기도 하다. 사실 난해해 보이는 저런 표현도 가만가만 따져보면 매우 시적이다(그러니까 스피노자의 난해한 표현과 시적 표현은 두 개의 다른 개념처럼 보이지만 한 개념을 두 가지 상이한 측면으로 보는 것이다ㅋㅋㅋ). 이런 표현 좀 봐. 인간은 다른 자연 사물들을 뛰어넘는 특별한 존재자가 아니라 여느 자연 사물들과 동일한 지위를 가진 하나의 양태일 뿐이라는 말을 인간은 국가 속의 국가가 아니다라고 하다니 너무 좋잖아ㅠㅠㅠ 1부 공리1와 정리10을 연결해서 깔끔하게 나온 답은 인간은 국가 속의 국가가 아니라는 점. 게다가 인간은 자신을 압도하는 자연의 역량에 둘러싸인 수동적인 존재라는 점이 스피노자 윤리학의 출발점이라는 것도 너무 좋다. 

 

- 정리10과 증명, 주석으로부터 따름정리는 인간의 본질은 신의 속성들의 일정한 변양들에 의해 구성된다는 명제를 도출해낸다. 이 명제는 인간이 다른 자연 사물들을 뛰어넘는 특별한 존재자가 아니라(3부 서문의 표현을 빌면 국가 속의 국가가 아니라는 것) 여느 자연 사물들과 동일한 지위의 한 사물 내지 실재라는, 곧 따름정리의 증명에서 말하듯이, 신이 없이는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는 것이며, 신의 본성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하는 변용 또는 양태라는 것을 확립하고 있다.

- 인간이 이처럼 제한된 존재라는 것, 인간은 실체가 아니고 다른 자연 사물들에 비해 특별한 존재가 아니며 여느 변용 내지 양태들 중 하나라는 것, 따라서 인간은 자신을 압도하는 자연의 역량에 둘러싸인 수동적인 존재라는 것(4부 공리)이 스피노자의 인간학과 윤리학의 근본적인 출발점이다.

- 4부 공리는 4부에 딱 하나 있는 공리다. 자연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기를 압도하는 자기보다 강한 것에 둘러싸여 살아 간다 -> 이런 의미에서 유한한 존재. 정치학적으로 말하면 자연 상태무한하게 많은 타자에게 둘러싸여 실존하는. 인간이 실체라면 그럴 리가 없다. “국가 속의 국가에서 앞의 국가는 자연을 뜻하고 뒤의 국가는 인간을 뜻한다. 인간은 자연이라는 체계의 한 부분이지 별도로 왕국을 갖고 있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6. 사람들의 경험과 지각은 부정확할 수밖에 없기에 내가 어떤 상황에 대해, 사물에 대해, 사람에 대해 판단을 내릴 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짐작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팩트인지 정확하게 구별해보는 것이 그나마 오류를 가장 줄일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이런 구별을 미리 해놓지 않으면, 편견이 반영된 짐작으로 만들어진 허구위에 허구들이 쌓이면서 최초의 허구에 나의 주관적 심상에 불과한 짐작과 객관적 사실이 어느 정도 비율로 섞여있는지를 찾아보기 점점 힘들어지고, 그러다보면 그것을 팩트로 믿게 되고(“내 판단이 틀릴리는 없어”), 그 허구들이 어떤 사고의 틀로 굳어져버리면서 틀로 찍어낸 듯한 판단들만 계속하게 되어 진리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다. 특히 내가 싫어하는 것,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 믿으면 동요할 게 분명한 것들 앞에서 그렇게 되기 쉽다는 것을 경험적으로알기에, 가끔 매우 괴로워하면서도(싫은 걸 떠올리다못해 면밀히 들여다봐야하니까) 노트에 짐작과 팩트를 나누어서 정리를 해보곤 하는데, 그러다보면 내 두뇌와 마음이 그 대상을 나쁜 쪽으로, 내가 받아들이고 싶은 쪽으로 판단하려고 얼마나 노력들을 하고 있는지를 느끼게 된다.

 

이미 내 마음속에 호불호가 생겨버린 것에 대해 그 호불호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생각이 흐르는 것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에 이렇게 굳이 노력을 들이고 괴로움을 무릅쓰고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면 그렇게 계속 멋대로 흘러가버릴 게 분명하다. 많은 경우에 판단에 대해 짐작과 팩트로 엄정하게 나누어서 쓴 다음, 짐작- 내 생각에 아무리 예리하게 들어맞는 짐작인 것 같더라도!-을 다 날려버리고 팩트만 남기고 나면 싫어할 이유가 없잖아? 받아들일 만한 여지가 많잖아? 같은 반문이 생겨나면서 판단의 경계가 흐릿해질 때가 있는데 그러면 불필요한 감정들이 다 사라진다. 단언할 수 없고 단언해서는 안 되는 감정들. 감정의 노예가 되어 감정에 맞춰 감각하고 경험하고 판단하다보면 이성의 일부분이 마비되며 감정이 좋아할 만한 정보들만 모으고 모아서 감정에게 갖다 바치게 되는데 이건 정말 무서운 일이다. 신인동형론이나 별자리 같은 점성학 같은 것들 다 이렇게 체계화되고 일부분 과학의 형식까지 흉내내며 자리잡았을 테지.

 

그냥 정리10의 주석에서 자신의 (부분적이며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감각대상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들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것으로 세상의 많은 것들을 허구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목을 읽다가 반성이 되어서. 사고의 순서를 그렇게 거꾸로 해놓으면 어느 것이 올바른 관점인지 확실하고 일관되게 정하지 못하며, 자기모순들이 생겨나는 것 같다. “인간은 누구나 모순적인 존재다라는 말을 그러니까 나의 모순도 사랑하고 안고 가야지라고 너무 쉽게 자기위안으로 삼지 않고 왜 모순적인가를 계속 들여다보고 고민하며 사고의 순서를 조정할 줄 아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에티카>의 형식이 철학함의 순서그 자체라는 사실이 묘하게 마음을 다시 울렸다. 내용과 별개로 기하학이라는 이 책의 방식과 신에서 출발하는 이 책의 순서, 그러니까 형식에서부터 이미 우리가 나아가야할 바를 명확하고 단호하게 담고 있는 책이라는 것. 신에서 출발해서 실체와 속성을 지나 양태가 나오고 2부 정리10에 와서야 인간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게에 주는 메시지.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모르게 바뀌어가고 있을 보이지 않는 무언가.

 

과학적 지식의 누적이 진리를 인식하는 것과 별개라는 점을 짚어주신 것도 좋았다. 양자역학자 중에도 기독교 신자 있고 천문학자 중에도 별점 믿는 사람 있으니까ㅋㅋㅋ 과학책을 많이 읽는 것만으로 한 인간의 미신에 대한 신뢰에는 요만큼의 균열도 내지 못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몸이 이것을 믿고 싶다‘ ’이것이 좋다‘ ’이것이 위안이 되고 편하다같은 감정에 맞춰 조율되어 있다 보면 이성도 감정이 좋아할 만한 정보들만 모으고 모아서 감정에게 갖다 바치며 최선을 다해 복무하기 때문에 과학적 지식이 누적이 된다고 한들 감정에 조율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 지식들은 한쪽에 정보로서 힘없이 쌓여있을 뿐 모순의 괴리를 좁히는 데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할 테니까. 



* 철학함의 순서 ordo

- <에티카>의 부제는 기하학적 순서ordine에 따라 증명된이다. 그러니까 이 순서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말이다.

- ”신이 인식에 있어서도 본성에 있어서도 앞선다만물의 제1원인. 신이야말로 존재론적/물리적/인식론적 원인이다. 신을 알아야 거기서 양태도 나오고, 양태가 어떤 질서를 이루는지도 알게 된다. 바로 <에티카>신에 대하여에서 출발하고, 2부 순서도 따져보면 실체와 속성에서 시작하고, 그 다음부터 정리8, 정리9에서 양태가 나오고, 정리10에 와서야 인간이 나온다. 즉 신에서부터 인간까지의 순서대로 도출된다.

- 감각 대상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다른 모든 것에 앞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의 문제는 우리의 감각적 인식이 부적합하고 아주 부분적이며 혼동된 인식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감각적 지각이 정확하다면 문제가 없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이런 인식은 모든 걸 다 뒤섞어 버린다. 1부 부록에서 나온 목적록적 편견, 신인동형론처럼, 자연적 실재들은 곧 사라지는 유한한 것인데 불변하는 실체로 착각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양태에 불과한 것을 실체로 여기고 오히려 신을 인식할 때 자연사물을 통해 인식하는 잘못된 방식이다.

 

-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말하는 철학하는 순서는 사실 논리적인 순서다. 신에 대해 일단 안 다음에, 그걸 바탕으로 세계의 체계를 세우는 것. 발견의 순서는 감각-> 신이지만 철학하는 순서는 다르다. 신이 만물의 원인이구나-> 그럼 그 원인에서 따라 나오는 본질은 뭘까, 이런 순서로 시작해야 한다.

-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여기서 말하는 철학함의 순서와 발견의 순서는 다르다. 때문에 우리가 신의 본질, 신의 속성, 특성을 발견하게 되기까지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우리가 신을 발견해서 신이 만물의 제1원이구나 -> 그럼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뭘까 -> 그럼 신의 본질로부터 따라 나오는 것은 뭘까, 이것들을 논리적인 순서로 전개하는 것이 스피노자가 말하는 철학함의 순서다. 지금 하고 있는 것, 우리가 <에티카>를 읽는 것이 어떻게 보면 발견의 과정일 수 있다. 스피노자 자신은 철학함의 순서대로 에티카를 썼지만 우리는 스피노자처럼 발견의 과정을 아직 거치지 않았으니까.

 

스피노자는 오랫동안 히브리 공동체에서 유대인들이 받는 토라 같은 교육을 받았고 듣고 말하면서 세상물정을 알게 되고 친구들을 만나면서 철학이나 과학을 배우게 됐고, 자기가 배우던 히브리 유대교 전통과 단절하고 자기의 철학을 시작하게 된다. 스피노자 자신도 역시 발견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발견의 과정을 거쳐서 자신이 이 세상의 참된 원리라고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이 발견했다고 믿는 것들을 어떻게 철학적으로 순서 있게 구성할 수 있을까, 그것을 고민해서 쓴 책이 <에티카>. <에티카>라는 것이 결국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철학함의 순서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의 원리가 무엇인지 스피노자를 읽으면서 나름대로 각자 발견해가는 과정에 있다.



7. ”사람이 끌어안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나무를 enterndre 할 수는 있지만 comrehendre 할 수는 없다

  

데카르트에게 인간은 (유한해서) 신을 알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에 따르면 알긴 알되 두 개의 단어로만 안다. entendre comprendre. 데카르트는 저 두 단어를 구별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사람이 끌어안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를 entendre 할 수는 있겠지만, comprendre 할 수는 없다고. 그러니까 후자는 거대한 나무를 완전히 끌어안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신의 본질을 완전히 다 파악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8.아 ... 이 정리가 영혼불멸론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는구나... 아름답다...

 

정리13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신체 또는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연장의 어떤 양태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자연전체로부터 인간을 돌출해내는 마지막 정리이다.

- 스피노자는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신체 또는 물체(‘신체물체는 똑같이 corpus), 다시 말하면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연장의 어떤 양태라고 주장한다. 만약 신체 또는 연장의 어떤 양태가 현행적으로 실존하지 않는다면, 관념 역시 실존하지 않게 될 것이다(2부 정리11의 증명). 그러니까 정신의 대상을 이루는 것은 잠재적으로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신체다.

- 이것은 나중에 5부에 가면 신학적인 문제와 연결된다. 4부에서 정신과 신체는 어떤 관계인가, 신체가 사라져도 우리의 영혼은 불멸하는가라는 문제를 던지고 스피노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중에 5부에 가서 영혼불멸에 대해 비판한다. 스피노자가 유대인 공동체에서 쫓겨날 때에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던 바로 그 영혼불멸론에 대한 부정. 창조론과 영혼불멸론은 유대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니까. <에티카>에서도 스피노자는 신체와 분리된 영혼, 그런 것은 없다고 말한다.

- 흥미로운 것은 스피노자는 5부에서 영혼불멸론을 부정하는 동시에 정신에는 영원한 부분이 있다고 말한다. 정신에는 영원한 부분이 있다. 영혼은 불멸하지 않는데 정신에는 영원한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정신의 영원성과 영혼의 불멸성의 차이가 뭘까. 그런 질문이 많이 제기가 된다.

 

8. 들뢰즈의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와 바슐라르의 책이 매우 읽고 싶어졌다. 번역 괜찮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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