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인의 책마을 - 책세이와 책수다로 만난 439권의 책 
김용찬.김보일 외 지음 / 리더스가이드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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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관한 온라인 활동에 적극적이다. 가입한 관련카페만10여군데 되고 온라인서점마다 제공하는 블로그를 개설했다. (지금은 한군데만 업데이트 중이다) 책읽기 관련카페, 온라인서점, 블로그등을 누비며 마음에 드는 의견에 댓글다는 것이 큰 즐거움이다. 내 생각과 닮아있는 책쟁이들(책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면 반갑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의견을 전하고 싶어서 글을 쓰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거의 드물다. 가금은 초보(?)들에게 조언하는 것도 내가 샇은 작은 경험을 적극적으로 나눈다는 생각을 가지고 참여한다.




어느날은 다소 황당하지만 중요한 문제를 이야기하는 질문을 받았다.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책을 읽으면 졸음만 쏟아집니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책을 잘 보지도 않는 이가 책읽기 카페에 가입해서 이런 쪽팔리는(?) 질문을 했을까. 거의 비슷하지만 좀 격이 다른 질문도 있다.

‘책을 부지런히 사서 읽는편입니다. 막상 선택한 책이 잘 읽히지 않아 중도에 그만두고 책장에서 썩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책선택의 요령이 있다면 조언좀.....’




고민까지는 아니지만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좀더 성심껏 조언을 시작한다. 책을 읽는 것은 의무와 책임을 요구하는 과제가 아니다라고. 좀 더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분야나 관심을 가지고 흥미로워하는 주제를 택해보라고. 그리고 정성스럽게 한권을 골라 푹빠져보면 그 책에서 새로운 가지가 돋아날 것이라고. 그 가지들을 따라가다보면 점점 즐겁게 책읽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것이고 처음에 한정되어있던 분야도 점점 영역이 넒어져서 책을 고르는 것도 즐거움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고.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처방이 안될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최소한 책을 즐기는 이들이 도대체 어떻게 저런 상태(?)가 되었는지에 대한 궁금함을 조금이나마 해소할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더불어 책읽기는 즐기는 것이 되어야 하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즐기는 책읽기는 읽는자의 자아를 이루어간다. 한권, 또 한권 수백권, 수천권의 책중에 단 몇권으로 꼽히는 책들이 오늘의 나를 말할수 있게 된다.




<100인의 책마을>을 읽었다. 오늘의 책문화를 받치고 있는 힘을 가장 적절하게 풀어낸 책이라 생각된다. 순수한 아마추어들이 참여한 책읽기에 관한 조언. 조언은 딱딱하고 형식적인 강연이 아니다. 자신의 삶속에 녹아있는 책들을 가볍고 즐겁게 툭 던져놓는다. 읽는이의 마음은 가볍고 경쾌하다. 각 분야로 나눈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내 이웃, 친구와 이야기 나누는 것처럼 편안하게 요즘 어떤책을 읽고 있는지를 나누는 대화와 같다.




동시에 왜 읽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한 답과 어떻게 읽을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들려준다. 이것이 가지는 강점은 편안함이다. 무겁고 현학적인 전문가들의 일부가 공유하는 죽은 정보가 아니라 살아있는 경험과 지식이다. 그들의 삶과 그와 관계를 진하게 맺고 있는 책에 관한 이야기다.




오늘날의 출판문화는 독자중심에 있다. 소설의 경우 온라인 연재를 하고 온라인 독자의 반응이 좋으면 바로 출판한다. 많은 수의 조회로 이미 읽었던 독자들은 종이매체의 매력을 버리지 않는다. 출판과 함께 구매하는 독자들의 일부는 이미 온라인을 통해서 글을 읽은 이들이다. 팬을 형성하고 있는 외국의 작가는 과거 전례가 없는 어마어마한 선인세를 부담하고서라도 출간한다. 인터넷 서점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유통의 일부는 독자가 부담한다. 이미 읽고 리뷰한 이들의 블로그에 붙은 배너를 통해서 구매한다. 이때 리뷰는 어떤 마케팅보다 위력적이다. 남의 경험을 나도 경험해보고자 하는 충동을 출판사와 온라인서점 모두가 이용한다. 그래서 과거 일부 문학인들에게 돌리던 책들이 이젠 대부분 열성 독자들에게 돌아간다. 그들이 읽고 쓴 글들이 책에 관한 정보에 올라가고 이를 본 독자들이 구매단추를 누르기 때문이다.




독서리뷰포탈 리더스 가이드가 리뷰어들을 모아 직접 만든책은 공모나 심사를 통한 것이 아니다. 자발적으로 참여한 독자들의 흥겨움, 즐거움이다. 다소 어색하고 깔끔하게 다듬어지지 못한 문장들도 그런 이유로 ‘날것’에 대한 유쾌한 경험이 될 것이다.



 
 
2010-09-03 12:21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0-09-11 01:52   댓글달기 | URL
'고기를 뱉어라' 아주 급진적인 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아내가 채식주의자라서(저는 불행히도 육식의 쾌락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 공감가는 내용이었습니다!

미국의 '슈퍼사이즈 미' 한국판을 찍기 위해 노력했던 한국 활동가의 에피소드도 함께 소개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모건 스퍼록 감독은 1달동안 버티는 데 성공했지만, '환경정의' 소속의 그 활동가는 결국 대략 2주만에(오래전일이라 정확하지 않습니다.) 건강이 너무 악화되어 결국 포기하고 말았지요.
 
이야기 동양신화 중국편 - 신화학자 정재서 교수가 들려주는 
정재서 지음 / 김영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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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존재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교과서적인 답변 말고, 단군신화 말고...외계생명체의 이식같은 스토리...끌리지 않는가. 서유기를 모르는 이는 많아도 손오공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껄. 삼장법사와 저팔계, 손오공, 사오정. 참 좋은 캐릭터들로 국내에선 허영만님의 만화로 더 인기를 끌었던 캐릭터들. 우리 단군신화 중에 호랑이와 곰의 캐릭터가 좀더 입체적이고 좌충우돌의 성장기를 담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지금쯤 수많은 글쟁이들과 그림쟁이들이 이를 훌쩍 키워서 오늘 캐릭터산업에 한 획을 그엇을지도 모른다. 신화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가 우리 신화에 관한 책에 이어 동양신화 이야기를 들려준다. 애들은 가라. 어른들에게 들려주는 신화는 학자의 자의적인 해석도 포함되지만 방대하기 짝이 없고 제도권 밖에서 고군분투하여 얻어낸 성과임이 짐작이 되는바. 기립박수를 보낼참이다. 짝.짝.짝. 이 책은 과거 등장했던 각종 신들과 성적인 내용, 화장실 유머 같은 이야기들이 과거 우리가 짐작하기도 힘든 조상들의 정치경제사회에 관한 힌트같은 것이다. 퀴즈를 풀듯이 과연 어떤 생활을 하고 있었고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는지 구전신화를 바탕으로한 역사서들을 들추어보고 다른 곳의 것들과 비교해봐야 짐작이 가능하다. 그런의미에서 단군신화를 이해하기위해 동양신화, 그리고 서양신화와 설화들을 비교해본다면 어떤 미세한, 떄로는 너무 닮아서 화들짝 놀랄정도로, 차이와 닮음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신, 그리고 신화라면 아프로디테, 제우스 등의 섬씽. 메두사가 등장하는 활극. 그리고 감독의 창작물에 가까운 각종 영화들에서나 본것들 뿐이다. 우리의 것, 그리고 우리와 닮은이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그래서 중요하다. 내가 우리 할아버지가, 우리 머나먼 이땅에 살던 선인들이 어떤 생각과 행동을 했으며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는지. 한번 들어볼까. 좀 두꺼우니...천천히 한챕터씩 정복해 나가는 것이 좋을듯하다.

 
 
 
엘라의 계곡 - 아웃케이스 없음 
폴 해기스 감독, 샤를리즈 테론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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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모여 공동체 생활을 시작한 것은 ‘편의’를 위함이었다. 혼자서 하면 도저히 못해낼 일들도 여럿이 모이면 쉽게 해낼 수 있다는 점은 팀을 이루어 경기하는 스포츠를 경험한 이라면 누구나 경험했을 일이다. 조직이 힘을 발휘하게 되어 경지에 이르게 되면 조직에 속해있다는 것은 그 조직에 속한 개개인에게 커다란 위안이 된다. 내가 못하는 일들은 다른 이가 해줄 수 있으며 남이 못하는 일들은 내가 맡아서 처리함으로써 주고받는 관계의 돈독함이 조직의 결속력을 다지게 만든다.




조직, 공동체가 필연적으로 가지게 되는 좋지 않은 점은 조직의 자부심이 지나쳐 폐쇄성을 띠게 될 경우이다. 이렇게 되면 다른 조직과의 교류도 원만하지 못하고 조직 내의 교류조차 경직성을 띠게 되어 내외부에서 일어나는 복잡다단한 요구를 수용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도 조직을 이끌어야겠기에 가장 쉽게 도입되는 조직경영법의 대표적인 예가 통제다. 통제는 점점 폐쇄적이고 폭력적으로 변질되어가며 이를 통해서 개인의 자아는 집단의 이익이라는 미명하에 매몰되어 버린다.




그 속에 속한 ‘우리’는 행복할리 없다. 폐쇄와 폭력이 부르는 결과는 점점 희생을 요구하게 되고 희생하는 개체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는 것이다. 이런 집단과 집단이 서로 의견이 충돌하고 서로의 우위를 겨루게 된 전통이 전쟁이다. 전쟁은 미숙한 집단의 통치자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도 명료한 내부결속법중의 하나이다. 피를 부르고 생명이 사그라지는 지옥의 순간을 맛보는 순간 싸움에 있는 이들은 내가 죽지 않기 위해 팀워크를 발휘해야 상대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결국, 전쟁은 ‘이김’이 아니라 통치자와 그의 주변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명령만 내릴 줄 아는 일부에게 커다란 이익을 안겨줄 뿐이다. 전쟁에서 이기든 지든 수많은 생명은 죽게 마련이며 이를 위해 동족을 찌르거나, 베거나, 쏘거나 터뜨려서 죽이는 것을 목도하고 즐길 줄 아는 비인간성을 애국심이라는 그럴듯한 허울아래 감춘다.




전쟁에 참여하여 살인을 경험하게 되는 병사들은 살아 돌아오면 온갖 혜택을 누리게 되지만 정작 자신의 경직되고 획일화된 사고와 자아는 공동이 누리는 문화와 성취감 행복과는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




며칠 전 논란이 되던 한 문학교사의 군대비하발언을 난 이렇게 이해한다. 군대라는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기관에 모두 ‘억지로’ 2년간 소속되어 누군가를 죽이는 훈련을 받는 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그래서 낳는(생산하는) 여성들과 사회적 언어가 달라지는 것이다. 지금은 실상 분명하지 못한 적(통일의 대상이라면)을 ‘지키고’ 있을 뿐이지만 그 목적은 결국 언젠가 있게 될 전쟁을 대비하는 것이 아닌가. 일부는 미국이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벌인 전쟁에 참여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군에서 얻는 혜택도 있을 수 있다. 수직화된 기업, 학교, 기관에서의 직장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예비훈련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고, 명령에 생각 없이 따르는 것이 편안한 정신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근본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엘라의 계곡은 이라크에 참전한 아들이 실종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사관으로 전역한 아버지는 두 아들 모두를 군대에 입대시켰다. 큰아들을 전투에서 잃고 둘째아들마저 참전이후 복귀해서 실종되었다는 소식에 난감해한다. 군 시절 수사기관에 근무하던 실력을 바탕으로 아들의 행방을 추적하지만 어느 날 부대 주변에서 발견된 토막 나 불에 탄 주검이 아들의 것으로 발견되면서 충격에 빠진다. 찾는 것이 아니라 누가 죽였는가를 수사하는 아버지와 경찰 형사과의 말단 수사관은 결국 전쟁에 함께한 동료들이 그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한다.




마약과 관련한 갱이나 싸이코패스가 벌인 살인사건을 추정하는 관람객은 ‘전우’의 배신이라는 반전에 배신감을 금치 못한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영화는 중간 중간에 삽입되는 흐린 핸드폰 동영상과 아들이 찍어 보낸 이메일의 사진만으로 전쟁을 묘사한다. 영화 막바지에 이를수록 동영상의 내용은 복구되어 흐릿하지만 명료한 내용으로 다가오고 불확실한 사진 속 풍경의 정체도 드러난다. 이유 없는 전쟁에 투입된 젊은이들은 내가 나라를 지킨다는 명제아래 노인, 여자, 아이 등을 포함한 민간인들의 살육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다. 그런 비인간적이고 극대화된 폭력의 경험은 결국 ‘정신병’을 앓게 만들며 내가 죽이지 않으면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게 한다.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분열하는 부대원들의 자아는 무시한 채 사건을 덮기에만 급급한 군 당국의 모습은 집단이익을 표방해 개인을 희생하는 데에 아무렇지도 않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일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놀랄 만큼 차분하고 내면의 변화까지 잘 표현한 토미리존스의 연기는 나무랄 데 없고, 그의 아내로 분한 수잔서랜든이 자식을 잃은 소식을 듣고 오열하는 통화 장면과 토막 난 자식의 주검을 블라인드로 가려진 창을 통해 바라보고 망연자실해 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다. 자식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동감하게 만드는 신(scene)을 가진 <엘라의 계곡>은 영화가 얼마나 큰 메시지를 표현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장이 된 교수, 전원일기를 쓰다 
강수돌 지음 / 지성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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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강수돌은 전국적으로 꽤 유명한 농촌 이장이다. 농부가 대부분인 이장 중에 대학교수를 겸업으로 하는 이는 흔한 일이 아니다. 그가 이장이 된 사연은 드라마틱하다. 마을 앞에 초고층아파트가 건설된다는 사실을 그가 동네에 알렸고 이를 감추는 동시에 허가에 필요한 주민들의 동의서를 조작한 이장의 비리가 드러났다. 이장은 자연히 물러났다. 당연히 재선거가 불가피했고 주민들은 마을을 아끼는 마음과 ‘똑똑한’ 그에게 이장을 맡기게 된 것이다. 그것이 2005년 이었다. 그는 올해 6월까지 임기를 성실히 마쳤다.(보통 2년인 임기를 고려하면 3번 연임한 것이다)




시골에 사는 교수라 하면 보통 호기심 어린 눈으로 관찰하게 된다.(그래서 이 책도 나왔을 것이다) 마을사람은 더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을 밝히면 동네에서 처음 보던 어른들도 “아, 위에 새로 집짓고 산다는 교수양반”한다는 것이다. 처음 그가 이장을 만났을 때 시골에서 자연과 더불어 농사지으면서 사는 것이 최고라 맞장구쳤다 한다. 그런 이장이 돈을 앞세운 개발의 광풍 앞에서 문서를 위조하는 모습을 보고 실망하였다 한다. 허나 우리 주변에 흔한 모습이다. 그를 손가락질하기 전에 나를 다시 돌아봐야 할지 모를 일이다.




개발은 한적하고 고요한 시골마을에 커다란 상흔만 남겨놓는다. 내가 시골로 들어오기 전에 인근 동네에 골프장을 건설한다고 했다. 농사짓는 곳의 땅을 팔아서 골프장을 지으면 그곳을 터전으로 살던 사람은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 그들은 골프 치러오는 사람들의 왕래가 주변 서비스업의 활기를 가져올 것이고 지역에 지원하는 세금으로 생계에 지원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감언이설이 실현된 경우는 거의 없다. 골프장을 짓는 이가 지역주민을 생각해서 짓겠나. 자신의 이익에 방해가 되지 않으라고, 건설 이후에도 거치적거리지 말라고 인심 쓰듯 하는 지원이 있을 뿐이다.




도시의 재개발이나 골프장건설, 경마장 건설, 카지노 건설 모두 시작단계에서 찬성과 반대로 편을 갈라서 사이좋던 이웃을 원수로 만들어 놓고 건설이후엔 주민들은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정해진 수법이다. 언제 그 시설들이 지역민에게 풍성한 일자리라도 주던가. 농사짓던 노인들이 할일이 또 무엇이 있을 것인가. 기껏 꽃 심고 풀 뽑고 하는 일들은 연속적이지 못하고 중간 브로커가 끼면 노동단가도 낮아서 농사짓는 것보다 낫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개발을 반대하는 논리엔 자연을 존중하는 마음이 있다. 작물을 재배하는 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땅과 하늘이 하는 일이고 이에 사람이 어우러져서 사는 것뿐이다. 다양한 문화적 체험을 자신의 삶과 연관해서 풀이하는 지은이는 이 책을 통해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이 아니라 깃들어 사는 것’이라 한다.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연을 대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위대한 자연을 존중하는 마음이 별로 없다.




그에게서 받아먹기만 하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대할 줄 모르는 태도다. 그래서 깃들어 산다는 말을 택했다고 한다. “똥이 밥이 되고 밥이 똥이 되는” 자연의 순환과 지속가능함에 대한 철학을 몸으로 실천하고자 시골에 터전을 잡았다. 아이들 셋도 모두 그곳에서 키운다. 교육은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자연 안에서 내면과 인간성, 다양성을 자연에서 키워나가는 교육이다. 이것을 화학농교육과 유기농교육으로 비유한다. 유기농법이 “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처럼 자녀에 대한 부모의 조건 없는 사랑이 충분한지를 핵심으로 삼는다. ‘나는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속에서 자신의 내면적 욕구나 느낌에 솔직하게 반응하게 된다.




자신도 일류대학을 나와 교수를 하지만 이렇게 반문한다.




만약 자녀들이 ‘무조건’ 일류 대학에 가기를 원한다면 이렇게 물어 보자. 과연 일류 대학 나온 사람들 중 자기 자신이나 가족의 안위를 넘어 온 사회가 행복해지도록 진지하게 노력하는 이들은 도대체 몇 퍼센트나 될까? 나아가 우리나라를 망가뜨리는 사람들 중 일류대 출신의 많은가,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많은가? 대답이 뻔하다면 도대체 왜 우리는 아이들이 무조건 일류대에 가기를 갈망하는가? 대답을 찾자면 두 가지다. 하나는 일류대 출신이 갖는 기득권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그걸 갈망하는 부모 자신이 가진 열등감 때문이다.




욕심을 버리고 내려놓아야 더 만족할 수 있다는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직접 집짓기에 동참했다. 작은 귀틀집을 짓고 흙 속에서 산다. 이반 일리치를 인용한다. “우리가 평생 동안 끊임없이 수집하는 가구나 기타 물품들이 우리에게 내면적 힘을 주지는 않는다. 이 물건들은 불구자의 목발 같은 것이다. 우리가 편의품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그 물건들에 대한 우리의 의존도는 더욱 커진다.”그의 말은 더 많이 큰 것을 가지고자 하는 이들, 마음과 몸과 생활 방식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일갈한다.




그가 추구하는 삶은 결국 ‘소박한 자연속의 삶’이다.




사람은 대개 자신의 삶을 마감할 때 세 가지를 후회한다고 한다. 첫째 다른 사람들에게 좀 더 따뜻하게 해 줄 걸 하는 후회, 둘째, 인생을 좀 여유롭게 살 걸 하는 후회, 셋째,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걸 하는 후회가 바로 그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만을 위해 아등바등 사는 사이에 평생이 다 흘러버린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나뿐인 이 소중한 인생을. 경쟁과 시기, 질투등에서 조 비껴서 내면을 성찰하고 보다 큰 만족과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삶의 기쁨과 관계의 즐거움을 일상적으로 느끼며 날마다 작은 행복을 만들며 살아가는 인생, 그런 삶과 그렇게 사는 삶들이 필요하다. 그런 사람들이 자연 속에서 겸손하고 건강하게 더불어 사는 공동체, 전국 방방곡곡, 세계 구석구석마다 창조하는 일이야말로 간디와 장지오노의 철학이 우리에게 던지는 숙제가 아닐까?




농촌의 삶은 국가가 버린 농업을 ‘새로보기’ 한다.




한국의 식량 자급률은 25%내외다. 나머지 75%는 외국에서 수입해 해결한다. 대단히 위험한 구조다. 그나마 자급률 중 90% 이상은 쌀농사이고, 그것도 100% 수입에 의준하는 석유를 이용해야 가능한 수치다. 따라서 석유 빼고 쌀빼고 보면 진짜 자급률은 5%밖에 안 된다.




지금부터라도 농민을, 존중하는 정책을 써야 한다. 진정으로 우리가 스스로 먹고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연구하는 정책자들이 되어야 한다. 핸드폰과 자동차를 팔아서 매분기 기록을 경신하는 대기업에 몰아주기위해 농업을 희생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책은 그의 시골생활을 총괄하는 일기다. 현재 학교에서<녹색평론>을 읽고 토론하는 수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매주 마을 아이들과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는 그가 과거 치열한 경쟁을 통해서 얻은 기득권을 내려놓고 시골 흙집에서 살게 된 것은 시대흐름에 대한 ‘저항’이다. 몸소 실천하고 행동하는 지성의 삶의 본질에 대한 성찰, 모순된 경제시스템과 그릇된 가치관에 대한 지적, 올바른 삶에 대한 생각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루쉰 현대의 지성 118 
다케우치 요시미 지음, 서광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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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게 쓰는 역사 이야기.

 




쓰라린 과거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슬퍼할 것 없어. 역사가 주는 교훈을 제대로 인식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디딤돌로 삼는다고 생각하면 되지. 현실이 꼭 그렇게 보기좋게 나아가지만은 않지만 비틀대면서도 걸을 수 있는 것이 삶이라면 공동체의 그것이 곧 역사 아니겠니.




가장 아픈 기억을 떠올리자면 막 20세기를 열던 때지. 한일합방으로 이어지는 굴욕의 역사는 한 세기가 흐르고 두세대가 교체된 지금도 주변국인 일본과 중국에게 적지 않은 견제심을 갖게 한단다. 올림픽, 월드컵 자국의 선수들이 활동하는 것을 가지고 국가의 자부심을 들먹이는 국민들을 보면 그냥 생긴 의식이 아니라 뿌리깊은 과거의 영향이다 라는 생각이야.




당시 한국은 러·일·미·독·영 등의 열강에게 휘둘려서 주권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시기였어(지금도 그리 다르진 않아. 미국에게 전시작전권을 좀더 가지고 있으라고 국군 통수권자가 미국대통령에게 아양을 떨고 있잖아) 결국 주도권을 잡게 된 것은 일본이었지. 일본은 한국을 합방함으로써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다리’를 확보하게 된 거지. 일본군이 중국에 들락거리면서 크고 작은 ‘사건’들이 터지고 막 왕조에서 개혁을 꾀하는 세력달의 주도권다툼으로 외세에 제대로 대항하기는커녕 어떤 나라를 잡을까 눈치보는 위인들이 넘쳐났지.




그중에서 돋보이는 삶들이 있게 마련이야. 그런 사람들을 위인이라고 하지. 하지만 그 속은 알 수 없어. 역사는 역사를 쓰는 사람마다 틀린 시각을 가지거든 그래서 한권의 책을 읽고 그안에 푹 빠질 필요는 없어. 여럿의 관점을 잘 관찰하고 나의 주관으로 판단하는 것이 ‘나의 역사’가 될 수 있는 것이지.




사설이 길었네. 사실 루쉰이라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배경을 설명하고 있었어. 교과서에 한번씩 등장하지 ‘아Q정전’이라는 소설로 유명하지. 그 외 몇 유명한 소설과 시, 그림들이 전해지고 있고 그가 쓴 글을 통해서 당시의 중국을 개혁하는 사상을 전파한 이로 기억되고 있어.




당시 중국 국내사정을 잠깐 언급해볼까.




19세기 말에는 한반도도 마찬가지였지만 봉건제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중국에서도 일고 있었어. 일종의 국가개혁운동으로서 ‘양무운동’이 그것이었지. 어느정도 성과가 있을만 할대 청일전쟁의 패배로 한계에 다르지. 역시 봉건적 청나라가 가진 한계라고 생각한 세력들이 “변법자강운동”을 벌여. 캉유웨이, 량치차오등이 광서제와 손잡고 한 개혁은 서태후에게 막히고 결국 이것도 100일 만에 막을 내리지.




그래도 과거제폐지와 대학설립 등은 신해혁명의 자양분이 되었다고 하지. 당시 전통 청군대는 약화되고 있고 이홍장의 신식군대가 커나가는데 ‘북양군’이라고 해. 그 뒤를 이은 위안스카이가 강화하고 각 지방 군사학교 세워 장교도 양성하는 등 힘을 쓰지. 위안스카이는 기억해두는 것이 좋아.




1900년을 갓 넘기는 시기였어. 해외유학생 중심으로 화홍회라는 조직이 생겨나고 상해 차이위안페이, 장빙린등이 광복회를 결성하는 등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었지. 결국 1905년에 단체들을 통합해 ‘중국동맹회’가 성립해. 유명한 쑨원 알지? 그양반께서 대표를 맏게 되는데 4대강령이 뭔지 알아?




“만주족 축출, 중화회복, 공화국창립, 토지 소유의균등”




짜잔, 급진적이지. 왜냐구. 모든 사람이 똑같이 토지를 나누어 가지는 것을 생각해봐. 지금 어디서 가능하겠어. 만주족 축출이야 당시 청나라가 만주족이 집권한것이니까 축출한다는 것이고 중화는 정권교체의 정당성을 위한 허울이지. 화이사상에서 나온것인데 오랑캐가 정권을 잡을때에도 중화회복을 내건다니까. (애초에 한족이 약하고 오랑캐인 오호족이 세상을 호령하던 때에 나온 말이니까)




아들, 공화국이 뭐야? 모른다고. 우리 헌법에도 나온 말인데.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민주는 알고 공화국은 모르지. 공화국은 공화제를 채택한 나라야. 공화제(共和制)는 공화주의의 정치 체제를 가리키며, 형식적으로 또는 실질적으로 국가주권이 그 구성원에게 있는 정치 체제야. 기본적으로 입헌제이고, 이에 따라 법을 기반으로 구성원이 정치적 의사 결정에 차별 없이 평등하게 참여하는 사회로 운영되는 정치 체제지.




어찌보면 민주와 서로 중첩되는 의미가 있지. 애초에 등장은 군주제에 반대해서 나온 것이야. 대통령제, 의원내각제, 공산체제 등이 모두 공화국이 될 수 있다구. 우리가 북한이라고 부르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라 하쟎아.




참, 그래서 이러한 시기에 1911년 무창이라는 곳에서 우연히 충돌이 발단이 되어 혁명이 일어났어. 신군병사들이 주축이되어 순식간에 남부일대를 점령했지. 중심축이 없는 무조건적인 봉건반대가 이유였기 때문에 효율적인 관리가 어려운 실정이었지. 청나라 입장에서는 진압군이 필요했어. 망해가는 청군대로는 힘들었지. 위안스카이. 그가 등장해. 전권을 등에 업고 혁명군을 무력진압하지. 타격을 심하게 입은 혁명군입장에서는 협상을 제안하게돼.




쑨원이 총통직을 양보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데 이 협상을 통해 청나라의 마지막황제 부의가 궁을 떠나게 되고 2,132년에 이르는 중국 황제의 역사는 점을 찍게 되지. 위안스카이가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에 취임하게 되는 과정. 이것을 신해혁명이라고 해.




자, 다시 루쉰을 떠올려봐. 이런 급변하는 시대에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하게 되는 루쉰은 신해혁명에 적지 않은 기대를 가지고 있었어. 하지만 외세가 워낙 강하고 국가기반을 다지기에 충분한 숙성기를 거치치 못한 어설픈 국가로서의 중화민국은 어려운 시기를 맞게 되고 외국세력에 휘둘리고 국민들은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핍박받고 이유없는 죽음을 맞기도 하는 시기야. 지식인 입장에서 얼마나 답답하겠어 (요즘 같은 시대에도 답답함을 느끼는데 말이지) 그것을 글로 푸는 거지. 소설, 잡문, 시 등으로 말이지.




전쟁의 포화가 한창이던 때에 그가 남긴 글은 독특해. 요즘이야 워낙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글을 써서 웬만큼 특이한 표현력이 아니면 주목받기 힘들지만 당시에 그의 글들은 시대의 아픔을 몸으로 느끼는 이들에게 불을 당겼다고 할까.




여러분은 실제로 전투하는 사람이며, 혁명의 전사입니다. 지금 단계에서는 아직 문하게에 마음을 뺏기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문학을 배워도 전쟁에는 슬모가 없습니다. 기껏해야 군가 하나쯤 지을 정도이고, 잘하면 전투하는 짬짬이 휴식할 경우 등에 즐거움은 되겠지요. 더 격식을 차린 비유를 든다면 마치 버드나무를 심는 것과 같습니다. 나무가 성장하여 짙은 그림자가 햇빛을 가로막게 되면 농부가 점심때 나무 아래 앉아서 도시락을 먹거나, 숨을 돌리는 것쯤은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중국의 오늘날의 사회 정세는 실제의 혁명 전쟁이 있을 뿐입니다. 한 수의 시는 쑨촨팡을 위협할 수 없지만, 한 발의 포탄은 쑨촨팡을 달아나게 할 수 있습니다. 물로 문학이 혁명에 대하여 위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로서는 아무래도 믿을 수 없다는 느낌이 듭니다. 역시 문학은 일종의 여유의 산물이고, 한민족의 문화를 나타낸다는 것이 진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글의 느낌이 어때? 당시 상황을 상상하면서 읽어봐. 패망의 국민으로 살아가는 허망함이 느껴질 정도지. 총을 들고 나가서 싸우는 이들이 없다면 혁명을 이루는 일조차 불가능하겠지만 이를 위해 지식인들의 후방 지원(일제시대때의 이광수처럼, 근대문학의 선구자로서 비교해보자면 재미있을 듯 하구나)의 역할을 결코 작게 보아서는 안돼. 총과 칼만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펜’도 무서운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이라구. 그러므로 위의 글은 다소 현실에 대한 ‘조롱’을 의도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하긴, 저런 글조차 쓰기 힘든 상황이 오고야 말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눈앞이 캄캄해져 버리는 것이지. 표현의 자유라는 것도 자유와 인권의 가치가 성숙된 나라에서나 보장이 가능한 것 아니겠니. 오늘날이라고 해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야 억압된 상황속에서 용기있는 행동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겠어.




제작년의 오늘, 나는 여관에 숨었지만 그들은 형장으로 끌려갔다. 작년의 오늘, 나는 포성 속에서 영국 조계로 피신했지만 그들을 이미 어딘지도 모를 지하에 묻혀 있다. 금년 오늘, 나는 비로소 나의 집에 있고 사람들은 모두 잠들어 고요하다. 내 아내와 자식들까지도. 나는 새삼스럽게 내가 좋은 친구를 잃었다는 것, 중국이 좋은 청년을 잃었다는 것을 통감하고 비분 속으로 침잠했지만, 뜻밖에도 여러 해 쌓인 버릇이 다시금 침잠의 밑바닥에서 머리를 쳐들고 이상의 글을 엮게 한 것이다.

써나가고 싶어도 현재의 중국에는 역시 쓸 장소가 없는 것이다. 젊은 시절 향자기의 <사구부>를 읽고 쓸쓸한데다 몇 줄에 불과한 부를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끝을 맺는 것은 왜 그럴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야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젊은이가 늙은이를 위해 기념을 적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요 30년동안 내가 목격한 것은 청년의 피뿐이었다. 그 층층이 쌓인 피가 나를 묻어, 나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이렇게 필담을 사용하여 몇 구절의 문장을 엮음으로써 간신히 진흙 속에 작은 구멍을 뚫어 거기서 간간이 헐떡일 뿐이다. 이것은 어떠한 세계일까. 밤은 길고, 길 또한 멀다. 나는 다 잊고 아무 말도 않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설령 내가 아니더라도 언젠간 꼭 그들을 행각해내고, 다시금 그들에 관해서 이야기할 날이 오리라는 것을. (<망각을 위한 기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