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책에서 울리는 소리에 깨는 일. 전날 밤 늦게까지 쥐고 있던 책은 침대 옆에 떨어져 있고 언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피곤한데도 도통 잠이 오지 않아 편의점까지 나가서 사온 맥주를 혼자 마시며 이 책 저 책 뒤적이다 잠이 든 건 같다.

  처음 그를 만난 건, 아니 본 건 3년 쯤 전이다. <달의 궁전>에서 혼자 술을 마시던 R은 누군가 얼굴을 훔쳐보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옆 테이블의 그가 드로잉북에 그어놓은 선들은 누구의 것이라고 하기 어려운 얼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시선을 들키자마자 그는 드로잉북을 닫았다. 그리고는 이어폰을 끼고 혼자 술을 마시는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때 마침 R의 친구가 도착하여 그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몇 주 후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 R은 잠시 데자뷰인가 의심했다. R과 그가 앉은 자리, 그가 입은 옷, 드로잉 북, 들켰을 때의 행동, 모든 것이 동일했다. 이번에는 R도 혼자였으므로 그에게 다가가 질문을 할 수 있었다.

  뭘 그리시는 거예요?

  그리다니요, 뭘.

  그러면서 드로잉북과 연필을 들고 일어서는 그를 R이 대범하게도 잡았다.

  괜찮으니 제 얼굴 한 번 그려주실래요? 기꺼이 모델이 되어 드리죠.

  그가 놀란 듯하여 가능한 한 부드러운 목소리를 말을 건넸으나 그는 굳이 뿌리치고 도망치듯이 술집을 나간다. 계산도 안 하고 가나 싶어 카운터 쪽을 봤는데 주인이 입모양으로 '계산했어요'라고 말한다. 자리를 정리하러 와서 설명을 해주기를, 이 손님은 늘 주문하면서 계산을 한다는 것이다.

  단골이세요?

  그런 셈이죠. 주인과 말 한 번 섞어보지 않은 단골이랄까.

  하고 주인은 씩 웃는다.

  뭐 그런 사람도 있는거죠.

  여기서 끝냈어야 되는데, 평소 궁금한 건 참지 못하는 R은 그를 만나기 위해 <달의 궁전>에 자주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가 입은 옷 때문인지도 모른다. 검은색 스웨터 양 팔꿈치에 동그랗게 덧댄 천에는 노란색 스마일 문양이 있었다. 황급히 문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은 그리하여 스마일로 남게 되었다. 대학 시절 실종된 뒤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도 없는 R의 친구도 늘 그렇게 귀여운 문양의 천으로 팔꿈치를 덧대고 다녔다. 친구의 어머니는 아들을 찾고 찾다가 나중에는 어느 무당을 찾아갔는데, 걱정 말어, 이쁜 색시랑 살림차리고 잘 살어. 찾아서 데려올 생각은 말고, 라고 당부했다는 것이다. 졸업한 지 10년이 넘어가면서는 얼굴도 가물가물해진 그 친구를 갑자기 떠올리게 한 스마일 팔꿈치의 그는 한동안 <달의 궁전>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나타나지 않은 날은 주인에게라도 이것저것 묻곤 했는데, 주인도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손님들 눈치 안채게 얼굴을 그리는 것 같긴 했는데, 드로잉북을 펼쳐놓은 적도 없고 보여준 적도 없으니 뭘 그리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두 달 쯤 지났을 때, R은 다시 그를 볼 수 있었다. 이번에도 옆얼굴 쪽으로 관찰하는 시선을 느꼈으나 일부러 못 본 척 했다. 그에게 그림 그릴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이 정도면 됐겠지 싶어 얼굴을 돌렸는데, 아뿔싸, 그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드로잉북은 열지도 않은 모양새였고, 그가 R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뭐가 궁금하세요?

  아, 그게, 그냥, 그림 그리시는 것 같아서...제 얼굴을 어떻게 그리시나, 보고싶달까...

  더듬더듬 겨우 대답을 하고 있는데,

  궁금해하지 마세요!

  단호하게 말하고는 그가 일어서서 자리를 옮겼다. 이 날 그는 드로잉북을 열지도 않고 심각한 얼굴로 술만 몇 잔 마시다 갔다. 머쓱해진 R도 혼자 몇 잔 마시다가 일찍 술집을 나섰다.

  다음 주, R은 먼저 와 있는 스마일 팔꿈치의 그를 보았지만 모른 척 하고 일부러 멀찍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사건이 일어났다. 술집 문이 열리자마자 들어와서 이미 취해서 얼굴이 벌개진 손님 한 명이 스마일 팔꿈치의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어깨를 툭 친 것이다.

  혹시 오작가님 아니신가? 어디 숨어계시나 했네. 잘 지내세요? 아니 어디 그렇게 잘 숨어계셨대요? 

 오작가라고 불린 그는 얼굴이 하애져서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서둘러 나가려는데 좀 전에 아는 체를 한 손님이 그의 팔을 잡았다. 얼마나 꽉 잡았는지 스마일이 구겨졌다. 그가 팔을 빼내려고 애를 썼다.

  아이고, 왜 이러시나. 제가 잡아먹어요? 오랜만에 회포나 풀자구요. 얼마나 궁금했는데요.

  그러나 그는 손님과 눈도 마주치기 싫은 눈치였다. 팔을 빼내는데 온 힘을 쓰더니 결국 문 쪽으로 튕겨져 나가 머리를 부딪혔다. 놀란 R이 일어나 문쪽으로 급히 걸어왔다.

  괜찮으세요?

  절 좀 내버려두시라구요. 제발.

  오 작가라 불린 스마일 팔꿈치의 그는 거의 절규하듯이 말을 내뱉고는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는데, 그에게 아는 체한 손님에게는 별로 들을만한 이야기가 없었다. 예전에 주로 인테리어용으로 쓰이는 그림들을 그리던 그는 솜씨가 좋아서 제법 수입을 올리는 편이었는데 어느 날 진짜 작품을 해보겠다면서 그 시장을 떠났다고 한다. 오작가라는 것도 그냥 부르는 이름이고 실제 이름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어쩐지 쓸쓸해져서 더는 그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그를 떠올릴 때마다 닫힌 드로잉북을 누르고 있던 손과 좀 내버려두라는 말이 빙글빙글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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