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그런 편이 좋아요. 산뜻한 게 오래가죠.” (27p)
”플랫폼에는 들어가지 않을래요. 안녕”하고 고마코는 대합실 안 창가에 서 있었다. 창문은 닫혀 있었다. 기차 안에서 바라보니까 초라한 한촌(寒村) 과일 가게의 뿌연 유리상자 속에 이상한 과일이 달랑 하나 잊혀진 채 남은 것 같았다. (75p)
“알 수 없어, 도쿄 사람은 마음이 복잡해. 주변이 어수선하니까 마음이 흩어지는 거죠?”
“모든 게 흩어지고 말지.” (102p)
두 번째로 이 책을 읽다. 처음 읽은 것은 10대. 처음 읽은 이 작품은 기억에 잘 남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설국>은 플롯 중심의 소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장과 묘사의 치밀함이 돋보인다.
설국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이미지는 눈(雪)-
눈은 이 작품에서 정화나 순수를 상징한다. 눈은 모든 것을 순백으로 하얗게 덮는다. 깨끗하게 감춘다. 세상의 속된 것, 더러운 것을 일순간 덮는다. 일 년에 한번쯤은 이 설국을 찾는 ‘시마무라’는 세상의 속된 것, 번거로운 것, 때 묻은 것을 피해 이 설국에 오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곳에는 ‘고마코’가 있다. 이 여자는 눈의 고장에 사는 여자로 시마무라가 일 년에 한 번쯤은 꼭 봐야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녀는 점점 뜨거워진다. 설국. 차가운 눈(雪)과는 어울리지 않게 시마무라를 향해 뜨거워지고, 바로 그럴 즈음 시마무라는 더 이상 눈의 고장에 오지 말아야 한다고 느낀다.
마지막에 불이 나는 장면은 바로 그런 고마코와 시마무라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눈 속에서, 불이 나고 그 불에 타죽는 ‘요코’는 시마무라가 동경했던 또 하나의 여인이다. 고마코보다 순수하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눈의 고장에서 드물게 난 화재로 말미암아 목숨을 잃는다.
차가움과 뜨거움, 순수와 정열, 허무와 욕망, 그 사이에서 요코는 숨지고 고마코는 남고, 시마무라는 다시는 이 고장을 찾지 않게 되리라.
그런 오늘은 눈 대신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