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도 슈사쿠의 작품을 처음 읽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한 10년 전 일이다. 공교롭게도 나는 그의 마지막 작품인 <깊은 강>으로 처음 그를 만났다. 이 책은 여전히 내 책꽂이에서 때때로 그 푸른빛을 조용히 내뿜는다. 그즈음 이 책에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꽤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기대하지 않았던 까닭은 종교적 색채가 짙다는 소개 글 때문이었고, 그럼에도 강렬하게 뇌리에 남은 것은 내가 예상했던 종교적인 내용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나처럼 신의 존재를 믿기 어려운, 그렇다고 완전히 부정하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어쩌면 신을 열렬히 믿는 이들에게 엔도 슈사쿠는 이단처럼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깊은 강> 한 작품만으로 나는 그에게 반해서 그 뒤로 이런저런 작품을 찾아 읽어보았다. 국내에 소개된 책들이 더 많으면 좋겠는데 그리 많지는 않다. 우리나라에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침묵>인 것 같다. 이 작품은 아끼느라 아직 읽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는 만큼 <깊은 강>에 견줄만한 감동을 줄 듯 싶다. <침묵>을 읽기에 앞서 <엔도 슈사쿠 단편 선집>을 읽었다. 나지막이 읊는 고해성사처럼 몇 장 넘기지 않았는데도 가만히 마음을 울린다. 첫 번째 작품인 「그림자」를 읽다가 마지막 순간에는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져왔다. 눈물이 살짝 맺힌다. <깊은 강>을 읽었을 때의 그 느낌이다.


이 단편집에 실린 거의 모든 작품은 어찌 보면 ‘수필’ 같기도 하다. 등장하는 거의 모든 ‘나’는 엔도 슈사쿠 그 자신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그 ‘나’의 이야기들을 통해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 손에 이끌려 가톨릭이라는, 일본 사회에서는 어찌 보면 낯선 종교를 갖게 되는 계기와 그로 인한 갈등. 그 갈등을 극복하면서 종교를, 신을 자기만의 관점을 갖추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세밀히 살펴 볼 수 있다. 특히 「그림자」에서는 그의 어린 시절, 처음으로 가톨릭 종교에 들어서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림자」의 ‘나’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가게 되면서 한 신부를 알게 된다. 그 신부는 어머니가 무척 존경하는 사람으로 어머니는 전적으로 그에게 모든 것을 의지한다. 어린 시절의 ‘나’와 어른이 된 ‘나’의 시점이 교차하면서 어머니와 신부의 관계가 그려지는데, 어머니의 맹목적인 그를 향한 믿음은 어떤 면에서는 단순히 종교적인 것을 뛰어넘어 이성적 호감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에 주인공인 ‘나’ 또한 왠지 모르게 그 신부에게 반발심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닐까. 어머니는 ‘나’의 교육마저도 신부에게 맡긴다. 강인함과 단정함, 절제를 두루 갖춘 그는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존재 같다. 병약한 ‘나’는 그가 바라는 일 가운데 포기하는 것이 많다. 신부는 그런 ‘나’를 정신이 나약한 사람 취급하면서 때로는 경멸의 눈빛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죽고, ‘나’는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다. 아버지는 ‘나’에게서 어머니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그가 종교를 믿는 것도, 그 신부와 연락하는 것도 못마땅해 한다. 아버지와의 생활은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정신적으로는 빈곤하다. 때문에 ‘나’는 죽은 어머니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되고, 그 죄책감을 덜어내고자 신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그렇게 인연을 이어가면서 성인이 된 ‘나’는 결혼을 앞두고 신부를 찾아가기에 이른다. 그런 그에게 뜻밖의 소식이 들려온다. ‘나’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신부가 신학교를 그만두었다는 소식이었다. 신부가 그를 믿고 따르던 한 여자와 연애를 하게 되어 결국 신학교를 떠나고 말았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나’는 그 올곧던 신부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겨 더욱 충격을 받는다. 자신의 어머니와도 어쩌면 그런 사이가 아니었을까 의심까지 하게 된다.


또 시간이 흐른다. ‘나’는 어느 백화점 옥상에서 그를 우연히 목격한다. 예전의 단아하고 강직했던 모습은 찾을 수 없고 평범하게 늙은 초라한 모습이다. 그때, 한 여자가 아이의 손을 끌고 그에게 다가가고, 그들은 맞은편 출입구로 사라진다. 평범하고 초라해진 그. 그는 정말 신에게 버림받은 것일까? 「그림자」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나’가 우연히 어느 음식점에서 신부를 만난 장면이다. 그 신부임이 틀림없는 한 남자가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그를 몰래 지켜보다가 어떤 광경을 맞닥뜨린다. 음식이 나오자 그가 재빨리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성호를 긋는 모습이다. 그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감동에 차오르면서,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 작품을 읽던 나 또한 그랬다.


단호하기 그지없는, 투철한 신부였지만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그녀와 결혼하고, 그럼으로써 신의 가르침에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성직자. 그는 한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정말로 신에게 버림받아 마땅한 것일까? 그는 한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신을 저버린 것일까? 그 모든 의문은 그가 음식을 앞에 두고 조용히 성호를 긋는 모습에서 자연스레 풀린다. 그는 신을 버린 적도 없으며, 신 또한 그를 버리지 않은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죄라면, 이 세상에 신이, 종교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림자」에서는 결혼과 함께 교회를 떠나게 된 가톨릭 신부의 내면에 감춰진 고독과 외로움이 그려지면서 그런 그를 지켜보는 ‘나’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와 나와의 관계, 그와 신과의 관계를 통해 ‘나’는 일종의 깨달음을 얻는다. 아마도 이런 고민의 과정을 지나왔기에 엔도 슈사쿠가 신의 존재와 인간의 구원 문제를 일생의 화두로 삼게 되는 작가가 된 것은 아닐지.


나로 하여금 당신 테이블로 다가서지 못하게 가로막은 힘, 그것을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내 삶을 형성해 온 중요한 흐름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 나는 소설가가 되고 나서 당신의 이야기를 세 차례나 썼는데, 그때마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변형시켜 썼습니다. 당신은 그 사건 이후 오랫동안 내 작품 속의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당신을 소재로 한 소설은 거의 실패했습니다. 이유는 내가 아직 당신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을 소재로 한 작품이 계속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존재를 내 마음속에서 떨칠 수 없었습니다. (「그림자」, 11~12쪽)


엔도 슈사쿠가 생각하는 신은 <깊은 강>의 인물 ‘오쓰’가 생각하는 신과 가장 가깝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가톨릭 신자였던 ‘오쓰’는 미쓰코의 파괴적인 본능 때문에 여러 번 상처를 입는다. 미쓰코에게 신을 버리라는 강요까지 받는다. 신이라는 단어조차 듣기 싫다는 말에, 신을 양파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는 “내가 신을 버리려고 해도…. 신은 나를 버리지 않습니다.”(<깊은 강>, 61쪽) 라고 말한다. 그리고 결국 오쓰는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신의 모습과 닮은 삶을 살아가게 된다.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범신론적 세계관을 가진 오쓰는 그가 속했던 세계에서 이단으로 취급 받지만 이 세계에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면 오쓰가 생각하는 ‘신’의 모습과 가장 닮지 않았을까. 「그림자」의 그 신부의 모습에서 ‘오쓰’의 모습이 겹친다.


오쓰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신이란 당신들처럼 인간 밖에 있어 우러러보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있으며, 더구나 인간을 감싸고 수목을 감싸고 화초도 감싸는 저 거대한 생명입니다.” (<깊은 강>, 177쪽)


“신은 존재라기보다 손길입니다. 양파는 사랑을 베푸는 덩어리입니다.” (<깊은 강>, 94쪽)


「그림자」의 신부는 원칙에 철저하게 자기주장을 펼치던 성직자로서보다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 평범하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더 인간적이며 종교적으로 다가온다. 음식점에서 홀로 남몰래 기도를 올리던 그. 그러한 모습이 더욱 신을 받드는 듯하다. 아마도 이렇게 ‘인간을 감싸고 수목을 감싸고 화초도 감싸는 거대한 생명’이자 ‘사랑을 베푸는 덩어리’로서의 신, 그리고 그런 태도로 종교를 받아들일 때 그것이 더욱 인간에게 가치 있는 게 아닐까. 엔도 슈사쿠의 작품은 이런 보편타당한 깨달음을 주기에 언제나 묵직한 감동을 준다. 이제 <침묵>을 읽음으로써 그 깊은 감동에 더욱 빠져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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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3-15 14: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은 엔도 슈사쿠의 책은 <침묵>과 <바다와 독약>
인데, 아무래도 대표작인 <침묵>을 더 높게 평가하고
싶네요.

일본 작가로는 특이하게 가톨릭 신앙인이어서 그런지
그의 작품에는 종교인으로서의 그런 면모가 곳곳에
배어 있다는 느낌입니다.

잠자냥 2018-03-15 15:02   좋아요 1 | URL
저는 <침묵>말고 <바다와 독약>은 읽었는데 아무래도 종교적 색채가 짙은 작품들이 더 와닿기는 하더군요. ㅎㅎ 조만간 <침묵>을 읽어야겠습니다.

2018-03-29 1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29 1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29 1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