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성장 소설을 정말 좋아한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몇 번이나 읽으면서 펑펑 울어댔는지. 그 뒤로도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나 <수레바퀴 아래서>, <크눌프> 등을 읽으면서 또 가슴 찡했고 로제 마르탱 뒤가르의 <티보가의 사람들> 중 <회색 노트>같은 것을 보면서도 무척 감동했다. 어른이 된 뒤로는 그렇게 인상 깊은 성장 소설을 좀처럼 만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도 읽을 때도 좋았고,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작품들이 있다.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설명이 필요없을 듯.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성장 소설’이라는 문구가 눈에 가득 들어왔다. ‘성장 소설’인 데다가 슬퍼서 눈물이 펑펑 난다니. 정말 딱이구나 싶었다. 서른 살이 넘어 이 책을 읽고 펑펑 울었다.

주인공 모모(모하메드)는 열네 살 소년이다. 엄마도 아빠도 누구인지 모르는 버려진 소년. 심지어 자기 나이도 그냥 짐작해서 알뿐이다. 자신이 열네 살이라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된다. 그가 자라는 곳은 모모처럼 버려진 창녀의 자식들이 모여 사는 프랑스 파리의 빈민가. 거기서 모모는 창녀 출신의 유대인 로자 아줌마의 손에 의해 길러지면서 자기처럼 최하층의 삶을 사는 사람들과 함께 자란다. 파란 눈에 금발 머리 하얀 피부를 가진 진짜 ‘프랑스인을 보고 싶다’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모모가 사는 지역에는 아랍인, 흑인, 유대인만이 존재할 뿐이다. 모모는 자신도 언젠가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과 같은 책을 쓰리라고 늘 생각한다.

실제로 모모가 화자인 <자기 앞의 生>은 정말 불쌍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무척 우울할 것 같지만 웃기기도 하고, 엄청 슬프기도 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가슴에 따뜻한 불이 확 켜진다.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고 늘 생각한 소년 모모가 로자 아줌마를 통해 사랑의 진짜 의미, 삶의 진짜 의미를 깨닫는 과정이 눈부시게 펼쳐진다. 이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또 자신이 사랑할 사람이 있다면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이 책이 전하는 가슴 찡한 메시지다.

폴 오스터 <공중 곡예사>

제목 그대로 이 책은 공중부양능력을 지닌 월트라는 소년의 일생을 그린 작품이다. ‘공중에 떠다니는 능력을 지닌!’ 이라는 대목에서처럼 만화 같기도 하고 동화 같기도 한 환상적인 이야기를 폴 오스터는 허무맹랑한 느낌이 들지 않도록 잘 써내려간다. 물위를 걸어 다닐 수 도 있고 공중에 떠서 걸어 다닐 수 있는 원더보이 월트- 이 소년이 그렇다고 태어날 때부터 이런 능력을 지닌 것은 아니다.

월트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를 아무런 희망도 없는 가난하고 비참한 소년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어느 날 예후디라는 이상한 남자를 만나게 되고, 또 그를 사부로 모시면서 갖은 고생과 고된 훈련 끝에 공중부양능력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는 공중부양능력을 지닌 원더보이 월트로 서서히 이름을 날리면서 부와 명성을 거머쥐게 된다. 그래서 월트가 행복하게 살았냐고? 월트가 그 특이한 능력으로 부와 명성을 거머쥐고 계속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면, 아마 이 소설은 동화 혹은 만화 같은 소설로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인생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월트의 삶의 여정을 통해 담담히 보여준다.

대부분의 성장소설이 그렇듯이 이 책 또한 주인공이 살아가는 과정을 통해 내가 살아온 인생, 또 내가 앞으로 살아갈 인생들에 대해 다시금 되짚어 보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별다른 기대 없이 책을 들었다가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의 알 듯 모를 듯한 감동. 그게 바로 <공중 곡예사>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인생은 뜻하지 않는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고. 그렇지만 뜻한 방향으로 가도록 한번쯤은 노력해 볼 만 하다고 원더보이 월트는 말한다.

아멜리 노통브 <사랑의 파괴>

주인공은 일곱 살 난 꼬마다. 베이징의 외인지구에서 살기 시작한 꼬마는 그곳의 각국에서 날아온 아이들과 공동의 적을 만들고 전쟁놀이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데 어느 날 이탈리아에서 날아온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녀를 만나고 미친 듯이 사랑에 빠진다는 줄거리를 가진 성장소설이라 말할 수 있다. 처음엔 정찰병으로 전쟁놀이를 가장 즐기고, 말을 타며 이탈리아에서 날아온 소녀에게 한눈에 반하는 장면을 보고 이 꼬마가 분명 남자 아이려니 했는데, 그 꼬마 또한 여자 아이이다. 즉 이 소설은 아멜리 노통브의 자전적 이야기다. 노통브가 저자 후기에서도 밝혔지만 자신이 베이징에서 겪은 일을 한 치의 거짓 없이 쓴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성인이 된 소설 속 이탈리아 소녀는 노통브에게 ‘몇 가지 사실을 바로 잡아야겠다’고 항의했다는 후문도 적혀있다.

어린 시절에는 보통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주위 친구들을 동경한 경험이 한두번쯤은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꼬마 역시 이탈리아 소녀 엘레나의 황홀한 외모, 도도한 태도에 열을 올렸으리라. 이 일곱 살, 여섯 살 소녀들의 사랑의 역학관계를 살펴보면 어떻게 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지, 또 그와 반대로 잃을 수 있는지 등등 사랑에 관해 알고 싶고 정의내리고 싶던 모든 것이 들어있다.

사랑뿐만 아니라 전쟁에 대해서도 이 책은 상당부분을 할애하고 있는데, 연합군을 만들고 동독 아이들을 괴롭히는 것, 다시 동독 아이들과 연합하고 또 다른 적을 찾아 나서는 과정 등등이 어른들이 벌이는 진짜 전쟁의 모습 그대로를 축소하여 보여준다. 전쟁과 사랑에 관한 일곱 살 꼬마의 시선이 놀랍도록 통찰력 있고 영악해서 조금 거부감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노통브의 소설은 읽고 나면 뭔가 가슴이 쿵하는 강렬함이 있다


위기철 <아홉살 인생>

별 생각없이 읽었다가 좋은 기억으로 남은 책이다. 책장을 넘기면서 나는 막 웃었고, 또 한편으로는 주인공 여민이의 허풍쟁이 친구인 신기종의 뼈있는 거짓말에 공감하면서 이 소설의 매력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이 어린 시절 한 번쯤은 읽었을 법한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떠올리게 한다. 여민이는 제제처럼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제대로 성장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아이고, 또 제제의 라임오렌지 나무 같은 숲을 갖고 있다. 물론 제제의 현실이 더욱 비참하지만.....

이 작품에서 무척 마음에 드는 녀석이 있다면 주인공 여민이보다 그의 친구로 나온 허풍쟁이 신기종이다. 이 녀석이 하는 말은 거짓말 같고 유치해 보이지만, 사실 삶의 진실(사람들이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괴로운 진실)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선생님을 월급기계라고 부르거나, 이 월급기계가 하는 일은 부잣집 아이와 가난한 집 아이를 구분하는 일이라거나, 싸움은 늘 힘을 더 많이 가진 자가 이긴다거나 등등. 이 꼬마 허풍쟁이의 말에는 너무 뼈아픈 삶의 진실이 숨어있어 읽는 내내 가슴 한구석이 저려온다.

한편으로는 ‘얘야, 너도 어른이 되어 보면 세상에 화가 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이해하게 될 거야, 하지만 다른 사람한테 화를 내게 되는 일이 있어도 그건 결국 자신한테 화를 내는 거란다. 자신이 밉기 때문이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이 미워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라는 골방철학자의 말이 왜 그렇게도 가슴에 와 닿던지!

성장 소설들이 큰 감동을 주는 까닭은 어린 아이들의 눈에 비친 고달픈 삶의 현실이, 인생은 정말 살기 만만하지 않구나 하는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이 세상은 한 번쯤 뜨겁게 살아볼 만하다는 희망을 던져주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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