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내가 <그것>을 손꼽아 기다린 까닭은 순전히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는 <그것> 예고편에 나 또한 홀딱 반했고, 그 예고편이 전부는 아닐 것이라는 믿음, 그러니까 아무리 영화를 못(?) 만들어도 웬만큼은 하겠지 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티븐 킹이 원작자이니까. 지난 주말, 매우 늦은 시각, 고작해야 열 명 남짓한 관객들이 띄엄띄엄 앉아서 공포를 더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극장으로 향했다. 마침내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스티븐 킹의 <그것>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사실 나는 이른바 장르 소설에 크게 재미를 못 느낀다. 내가 소설을, 문학을 읽는 이유는 단순히 스토리, 그러니까 이야기를 즐기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야기가 흥미진진해도 이야기 밖의 것들이 엉망이면 그런 작품에는 도무지 재미를 못 느낀다. 그래서 나는 로맨스라든지, 추리라든지, 공포라든지 SF라든지 특정한 장르에 ‘충실’한 소설들을 (끝까지) 잘 읽지 못한다. 물론 그런 장르를 쓰는 이들 가운데 빼어난 작품으로 대중성과 문학성을 두루 갖춘 작가로 꼽히는 사람도 있다. 또 그런 작가들 가운데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들도 꽤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랫동안 ‘장르 작가’ 또는 ‘대중 작가’ 쯤으로 치부되어온 스티븐 킹도 아마 그런 작가 중 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현재도 그렇지만 앞으로는 더 나은 평가를 받을 그런 작가. 대중문학, 장르문학과 순수문학의 ‘장르’ 구분 자체가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몸소 보여준 작가. 물론 나는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읽은 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내 주제에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우습기도 하다.

그런데도 생각해보면 그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참 많이도 봤다. 공포 영화를 잘 보지 못하는 심약한(?) 성격임에도 스티븐 킹 원작이라는 이유만으로 <캐리>와 <샤이닝>을 봤으며(심지어 몇 번이나!), 지금 그냥 떠오르는 영화들만으로도 <스탠 바이 미>, <쇼생크 탈출>, <그린 마일>, <미저리>, <돌로레스 클레이본> 등등 엄청난 작품들이 많다. 이 글을 읽는 당신 또한 이 작품 리스트를 보고 아니, 이게 다 스티븐 킹 원작이란 말이야? 놀랄 수도 있다. 공포 영화 계열인 <캐리>와 <샤이닝>은 일단 제외하고서라도 <쇼생크 탈출>은 이제까지 몇 번이나 봤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다. 신기한 점은 이 영화는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걸 보면 마치 처음 보듯이 또 빠져든다는 것이다.

<캐리>와 <샤이닝>에 압도되었던 나는 <그것>에 대한 기대감을 품고 드디어 극장에 갔다. 중간 중간 으악! 소리를 지르고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영화는 대체로 슬프고 매혹적인 성장영화였다. 말더듬이, 책벌레, 바이러스를 두려워하는 천식 환자, 유대인 소년, 소문이 좋지 않게 난 소녀 등 학교에서 ‘왕따’에 속하는 아이들, 루저라고 서슴없이 불리는 그 아이들의 모습이 아직도 떠올라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무시무시한 공포 영화를 기대하고 간 이들이라면(공포 장르에 충실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그것>은 무척 시시할 것이다. 영화를 본 뒤 인터넷 관객 평을 보니 이게 무슨 공포 영화냐고 불만을 쏟아내는 평도 많았다. 하지만 나처럼 ‘성장영화’에 방점을 두고 좋은 평을 내린 사람도 보였다. 나는 공포영화로서도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이 영화를 ‘무시무시하게 매혹적인 성장영화’라고 부르고 싶다. 나처럼 공포 영화를 잘 못 보는 친구들에게 ‘공포 때문에 <그것>을 보지 않는다면 아름다운 영화를 놓치는 것’이라며 꼭 보라고 권하고 있다.

어찌 보면 이 말은 영화 <그것>의 주제와도 어떤 면에서는 통한다. 두려움, 공포 등을 극복해야만 인간은 한 단계 나아갈 수 있다는, 한 걸음 성장할 수 있다는. 그럼으로써 예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느끼지 못했던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인생의 또 다른 아름다움(물론 이 아름다움은 ‘미(美)’적인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것 자체를 알게 되고 느끼는 것 자체가 하나의 아름다움 일 수 있다)을 만날 수 있다는….

영화 <그것>에서 아이들이 두려워하는 대상은 저마다 다르다. 읽어버린 동생(에 대한 죄책감)이기도 하고, 아버지로부터 성추행을 당하는 게 틀림없는 소녀에게는 성적 성숙을 의미하는 모든 징후들-이를테면 초경 등-이 공포 그 자체이다. 이 소녀가 목욕탕에서 피를 뒤집어쓰는 장면은 그런 의미에서 의미심장하며, 한편으로는 돼지 피가 담긴 양동이를 뒤집어썼던 ‘캐리’가 떠오르기도 한다. 엄마의 과보호 속에서 이 세상의 온갖 바이러스가 위험하다고 배워온 아이에게는 문둥이가 가장 두려운 대상이고, 책벌레인 아이에게는 책에서 읽은 어떤 내용이 공포로 다가온다. 공포를 느끼는 대상은 이렇게 각각 다르지만, 그 공포의 근원에는 모두 ‘광대’가 자리한다. 아이들은 왜 ‘광대’가 무서울까? 어른들에게는 우스꽝스러운 존재인 ‘광대’가 아이들에겐 가장 큰 공포의 대상 중 하나라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이 세상에는 아이들에게 ‘만’ 보이는 공포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광대’로 상징화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두려움을, 공포를 이겨낼 때 인간은 왠지 ‘슬프지만’ 어른의 세계로 나아간다.

영화 <그것>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아이들 캐릭터의 생생함이다. 어디서 그런 아이들을 캐스팅 했는지 궁금할 만큼 하나 같이 귀엽고 사랑스럽다. 영화 속에서는 다들 ‘루저’에 ‘왕따’로 그려지지만, 다들 마음이 약하고 소심하고 악하지 못한 아이들일 뿐이다. 스티븐 킹이 창조한 아이들은 주로 이렇게 왕따를 당하는 루저인 경우가 많은데, 그렇기 때문에 그 아이들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캐리’처럼 초능력을 가진 아이도 있다. 영화 내내 루저 아이들을 못살게 굴며 괴롭히던 ‘헨리’조차 실은 나름의 사정이 있다. 이렇게 나약한 아이들 하나하나 아픈 사연이 있고 그 사연을 풀어가는 연민어린 시선도 무척 좋다.

충격적이게도(?) 이 영화가 끝날 즈음 이런 자막이 나온다. ‘그것: 1장 (IT: Chapter 1)’ 그러니까 이 영화는 이 단 한편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원작은 국내 판본으로 총 3권 장장 1800페이지에 달하지 않는가. 어쨌든 다음편이 나온다니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그러는 한편 속편에서는 이 사랑스러운 꼬마들이 어떤 모습으로든 달리질 테니, 그 사실이 벌써부터 안타깝다. 기대보다 더 좋았던 영화 <그것>- 영화도 이 정도인데, 원작은 또 얼마나 무시무시하게 매혹적일까? 다가오는 추석에는 스티븐 킹의 <그것>을 완독해야지. 드디어 마침내, 스티븐 킹을 제대로 읽어보는구나.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7-09-18 1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쇼생크는 채널 돌리다 나오면 무조건 끝까지 보게 되는 마력의 영화죠. ㅎㅎ

잠자냥 2017-09-18 13:47   좋아요 1 | URL
공감합니다. 정말이지 볼 때마다 그 자리에 그냥 앉아서 끝까지 보게 만드는 대단한 영화입니다.

cyrus 2017-09-18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씩 헌책방에 가면 절판된 (고려원출판사의) 스티븐 킹 번역본을 만납니다. 그런데 낱권만 있는 경우가 많아서 포기합니다.. ㅎㅎㅎ

잠자냥 2017-09-18 22:10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헌책방에서는 시리즈 제대로 모으기 참 힘들죠. ㅎㅎ 그래서 저도 그냥 포기하고 온 책이 종종 있어요.

레삭매냐 2017-09-21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전에 <언더 더 돔> 보면서 스티븐 킹의 실력을
좀 짐작해 봤었는데 <그것>이 다시 영화화되면서
새로운 표지로 나온 모양이네요.

영화가 아쉽게도 소설의 전반부만 다루고 있다니
우선 책부터 읽어야 싶네요.

잠자냥 2017-09-21 15:01   좋아요 0 | URL
영화 한 편에 모두 담기에는 아무래도 원작이 훨씬 방대한 것 같더군요.

지지 2017-09-27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영화를 먼저 보고 너무 매혹되어서 이번에 원작으로 읽고있는데 스티븐 킹 필력이 어마무시하네요 ,,

잠자냥 2017-09-27 17:07   좋아요 0 | URL
네, 영화가 참 좋았죠. 전 아직 원작은 시작 못했는데 기대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