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주 가끔 어린이 책을 읽는다. 주로 어른에게도 알려질 만큼 유명한 동화이긴 하다. 조카에게 선물하려고 산 김에 휘리릭 넘겨보다가 뜻밖에도 깊은 감동을 받기도 한다. 그럴 때면 조카에게 선물하고 나는 또 그 책을 사둔다. 그런 책 가운데 하나가 <사자왕 형제의 모험>이다.


어른인 내가 <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읽고 마지막 책장을 넘길 때쯤 눈물을 뚝뚝 흘렸다면 상상이 가는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실제로 그랬다. 마음이 무척 무겁고 슬퍼서, ‘이 세상이 참 슬픈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서글픈 눈물이 뚝뚝 흘렀다. 아니, ‘서글프다’라는 단어만으로는 어쩐지 부족하다.


이 작품은 열세 살, 열 살인 요나단과 카알 두 형제의 이야기다. 가족이라고는 엄마와 두 형제뿐인데 형인 요나단은 생김새도 반듯하게 잘생기고 의젓하고 여러모로 주변의 칭찬을 받는 그런 아이다. 그렇다고 동생 카알이 못된 말썽쟁이라거나 그렇지는 않다. 단지 형에 비해 몸이 많이 약하고 형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할 정도로 형에 대한 애정과 의존이 큰 그런 아이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가 집을 비운 사이 집에 불이 나고, 형 요나단은 몸이 아파 행동이 자연스럽지 못한 동생 카알을 불길 속에서 구하고 죽게 된다. 카알은 죽은 형을 하염없이 그리워한다. ‘사자왕’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요나단이 죽고 난 뒤 요나단이 다니던 학교 여교장이 신문에 그의 죽음을 기리는 뜻으로 실은 글에서 처음 시작된다(원제 ‘The Brothers Lionheart’ 를 보면 그 뜻이 더 명확해 질 듯).


사랑하는 요나단 레온. 이제 너를 ‘사자왕 요나단’이라고 불러야겠구나. 역사 시간에 영국의 리차드 왕에 대해 배웠던 날을 기억하니? 젊고 용감했던 리차드 왕을 ‘사자왕 리차드’라고도 부른다니까 너는 말했지. ‘역사책에 이처럼 훌륭하게 기록될 만큼 용맹스러웠다니! 난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을 거야’라고. 사랑하는 요나단. 넌 비록 역사책에 남지는 않았어도 위험한 순간에는 언제나 용감했고 누구보다도 훌륭했어. 다정한 네 친구들은 결코 너를 잊지 못할 거야….


하염없이 형을 그리워하는 카알에게 어느 날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와 죽음 후의 세상 ‘낭기열라’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고 그곳에서 형 요나단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전한다. 낭기열라에는 ‘사자왕 형제’라고 쓴 집이 있는데 그곳에서 요나단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카알은 형을 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주저 없이 ‘낭기열라’로 떠나게 된다. ‘낭기열라’에서 카알은 형과 똑같은 성인 사자왕 카알로 불리게 된다.


요나단이 말했듯 ‘낭기열라’는 정말 좋은 곳이었다. 늘 몸이 아프고 허약했던 카알의 잔병도 감쪽같이 사라지고 아름다운 경치만큼이나 착한 이웃들…. ‘천국’을 상상한다면 아마 ‘낭기열라’가 그런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이 천국에도 배신자가 있고, 악의 세력이 있어 ‘전쟁’이 불가피하다. 그리고 형 요나단과 동생 카알은 악의 세력을 처단(?) 하기 위해 긴 모험을 하게 된다.


이렇게 설명하자니 좀 시시한, 그렇고 그런 영웅 모험담 같이 들리겠지만, 이 작품의 무게는 그리 가볍지 않다. 내가 이 작품이 다른 어린이 동화와 참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부분은 악의 세력과 전쟁을 벌일 때 형 요나단의 모습에서였다. 보통 어린이 동화를 보면 나쁜 사람을 벌하기 위해서는 전쟁은 필수고, 전쟁 중 싸움을 하면서 나쁜 사람을 해하는 것도 불가피하다는 이유로 어떤 식으로든 ‘폭력’이 등장하게 된다.


그런데 요나단은 ‘악의 세력’과 싸우는 장면에서 그들을 헤쳐야 한다는 이야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어떤 식으로든 상대를 죽이는 행위, 상처를 주는 행위에 그는 동참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요나단은 ‘전쟁’ 자체에 끼고 싶어하지 않는데, 마을 주민들이 상징적인 의미로라도 꼭 참여하기를 바라자 마지못해 그는 말을 타고 마을 주민들의 용기를 북돋아주는 역할만을 하게 된다. 이런 장면에서도 이 작품은 기존의 어린이 동화와는 좀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작품의 분위기 자체가 무척 슬프고, 읽고 난 뒤 하염없이 눈물이 날 정도로 서글프다는 사실이, ‘밝고 명랑한, 결국 착한 사람이 복 받는다’ 류의 어린이 동화와는 퍽 다르다는 느낌이다. 보통의 동화라면 천국 같은 ‘낭기열라’에서 전쟁에서 이겨 ‘나쁜 세력’을 몰아낸 뒤 영웅 요나단과 카알은 ‘그리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로 끝나야 하는데 이 책은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요나단과 카알은 ‘낭기열라’에서 또 ‘죽어’ 다음 세계인 ‘낭길리마’로 향한다. 천국이라고 생각했던 ‘낭기열라’도 완벽한 천국이 아니기에 싸움도 전쟁도 없는 ‘낭길리마’로 다시 한번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 하지만 정말 ‘낭길리마’가 진정한 천국일까? 이 책을 덮으면서 생각해보면 어쩐지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요나단과 카알은 ‘낭길리마’에서 또 다른 세상으로 다시 한번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느낌이 든다. 그래서 슬프다. 이 세상 어디에도, 그리고 다음 세상 그 어디에도 완벽하게 행복한 곳은 없을 것 같다는 느낌, 그렇다면 계속 죽을 수밖에 없다는 느낌, 세상에 살아가야 할 유일한 이유인 ‘형’이 죽어 다른 세상으로 간다면 그를 따라 똑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카알’의 슬픈 운명…. 이런 것들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누군가는 이 작품을 읽고 어린 시절 가졌던 막연한 죽음에 대한 공포를 어느 정도 극복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 하는데,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뭐랄까 나는 ‘낭기열라’ 같은 세상을 꿈꾸며 다른 세상으로 간다 한들 똑같이 또 다른 좀 더 완벽한 ‘낭기열라’를 찾아 떠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불행한 운명 같은 것이 느껴져 서글퍼졌다. 다른 면에서 생각해 본다면 요나단과 카알처럼 이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음 세상을 향해 함께 나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행복한 슬픔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요나단과 카알이 서로 꼭 껴안고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장면이 한없이 슬프면서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처음에 이 책을 샀을 때에는 아홉 살 조카에게 선물할 생각이었는데, 내가 먼저 읽고 나니 살짝 고민되기도 했다. 이걸 주고 나면 조카가 읽고서는 자기 동생을 껴안고 펑펑 우는 건 아닐까 이런 걱정도 들고, 세상살이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할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결국 선물하고 말았다. 이 책을 어린 시절에 읽고 '영원히 잊지 못할 동화책'으로 꼽는 어른들이 내 주위에 이따금 있는데, 조카에게도 그런 책이 되길 바라면서 말이다. 



 내가 또 무척 좋아하는 동화책은 <헨쇼 선생님께>이다. 이 책 또한 조카 주려고 샀다가 내가 먼저 읽어봤는데 어느 사이엔가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 책을 선물하면서 나는 읽고 울었다고 하니 조카는 아직 자기는 슬픈 부분을 발견 못했다고 했다;;


 이 작품은 리 보츠라는 소년이 좋아하는 동화작가에게 편지를 쓰면서 성장해 가는 이야기다. 처음에는 편지로 쓰던 내용이 점차 일기로 변한다. 리 보츠 소년의 일기 또는 편지를 읽다 보면 친구와 놀기보다는 혼자 끼적거리거나 책을 읽거나 하던 내 어린 시절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래서 소년의 마음이 절로 공감이 간다. 그리고 또 그렇게 비슷하게 글을 끼적이기를 좋아하는 조카의 모습도 자연스레 떠올라 왠지 미소가 번지기도 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글이라는 건 이렇게 쓰는 게 아닐까’ 무릎이 탁 쳐지는 부분이 있다. 글쓰기가 주는 치유의 능력에도 무척 공감이 간다. 진솔한 글은 그런 글을 쓰는 행위나 읽는 행위 모두 사람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순기능을 한다. 그건 정말 틀림없는 사실이다. <사자왕 형제의 모험>도, <헨쇼 선생님께>도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이 보기에도 좋은 동화다. 그리고 두고 두고 가끔 열어보면 어른용 책에서는 쉽사리 느끼지 못하는 또 다른 감동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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