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루만지다 -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고종석 지음 / 마음산책 / 2009년 1월
평점 :
일시품절


표지와 ‘어루만지다’라는 제목을 보고 어떤 책일까 궁금한 이들이 많을 듯하다.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이라는 부제가 그 의미를 풀어준다. 고종석은 일찍이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탐구해 온 이로 유명하다. 이 책에서는 40개의 순 우리말을 뽑아 ‘사랑’이라는 공통된 주제로 탐구하고 있다.

표제어는 ‘입술, 미끈하다, 혀놀림, 발가락, 꽃값, 어둑새벽, 스스럼, 한숨, 간지럼, 그대, 어루만지다, 버금, 엿보다’ 등 단어 자체만으로도 ‘사랑’과 연관이 있을 듯한 것도 있고 ‘켤레, 거품, 바람벽, 서랍, 비탈, 모름지기’ 등 사랑과 이 단어가 과연 어떤 관련이 있을까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말도 있다. 

읽고 나면 새삼 우리말의 뛰어난 표현력과 저자의 담백하고도 깔끔한 글쓰기에 감탄하게 된다. 한국어를 비롯한 다른 언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뿐만 아니라 전작인 <발자국>이나 <히스토리아>에서 보여준 저자의 박식함도 이 책에서는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 단어를 설명할 때 언어적 접근뿐만 아니라 문학 작품이나 영화, 음악 등 다양한 사례를 들어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표제어 ‘바람벽’을 설명할 때 예로 든 로맹 가리의 단편 ‘바람벽 - 짤막한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고종석이 적은 줄거리만으로도 충분히 매혹적이어서 꼭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시 및 시도 빈번하게 나오는데 예전에 참 좋아했던 시를 잊고 지내다 이렇게 다시 읽어보니 그 느낌이 또 새롭다.

이 책을 통해 고종석의 ‘사랑관’이랄까 이런 걸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는데, 그는 속전속결의 사랑은 절대로 못할 그런 사람 같다. 수줍어하고 설레이고 혼자 좀 뜸도 들이고, 고민도 하고 상대방 때문에 가슴도 앓아보고 그러다 다가서서 서서히 스며드는 그런 사랑을 좀 더 ‘사랑의 본 모습’에 가깝다고 보는 듯하다.

표제어 ‘어둑새벽’을 설명할 때 저자는 자신의 과거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다.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와 아내가 있던 시절 다른 여인에게 빠져버렸던 사연하며 이런 걸 이렇게 다 털어놓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적나라하게 고백하고 있어서 놀라웠다. 아내가 이 챕터를 읽으면 기분이 썩 좋지는 않겠다 싶더라(이 책에 언급된 내용을 보면 저자와 아내의 사이는 그다지 좋은 것 같지는 않지만).

어릴 때 문학작품을 읽다보면 뜻을 잘 모르겠는데 어쩐지 성적(性的)인 뉘앙스가 풍기는  단어가 종종 있었다. 그런 단어는 실제로 찾아보기도 했고 문맥상 그런 뜻이려니 하고 그냥 넘어갔다가 나중에 저절로 그 뜻을 알게 되기도 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그때 그랬던 야하고 은밀한 뜻의 단어를 내가 이제는 참 많이 아는구나 싶어져서 어른이 되긴 되었나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알 듯 모를 듯한 우리말을 사전 찾아가며 그 뜻을 헤아려 보는 일도 흥미로웠다.

한사코 주례 요청을 사양하던 저자가 어느 신랑 신부의 결혼식에서 읊었다는 주례사는 퍽 인상적이다. 표제어 ‘버금’을 설명할 때 이 사연이 나온다. 그 인상적인 주례사는 다음과 같다.



늘 같은 편이 돼라. 세상 모든 사람이 네 배우자에게 등을 돌려도 너만은 배우자 편이 돼라. 자기보다 상대방을 더 위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게 안 된다면 적어도 자기 다음 자리에는 상대방을 두어라. 두 사람이 서로에게 세상의 으뜸이 되는 것, 상대방에게 으뜸 자리를 내주고 스스로 버금으로 내려앉는 것. 2인 공동의 배타적 이기주의. 그게 내가 생각하는 연애고 사랑이다. (248쪽)



이 책은 결국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사랑’이라는 공통된 주제로 훑어보고 있지만 아무리 그 단어가 아름답다 하더라도 ‘사랑’을 하는 이의 마음가짐이 잘못되어 있다면 사랑의 의미는 빛바래고 말 것이다. 고종석이 읊은 저 주례사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한평생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면 사랑의 뜻을 간직한 단어들이 풍기는 향기가 더욱 은은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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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4 1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17-05-04 10:56   좋아요 1 | URL
그의 정치적 스탠스는 그다지 동의하지 않기에 최근 행보는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요, 지금 검색해보니 동일인물 맞는 것 같습니다. 같은 녹색당원으로서 왠지 싫은 느낌;;;; 하하하하하하.....

cyrus 2017-05-04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벽‘이라는 단어를 백석 시인의 ‘흰 바람벽이 있어‘를 통해 처음 알게 됐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