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자 -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
로베르트 발저 지음, 배수아 옮김 / 한겨레출판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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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또 다른 작품인 <벤야멘타 하인 학교- 야콥 폰 군텐 이야기>를 ‘알아야만’ 한다. ‘알아야만’에 강조를 두는 까닭은 그렇지 않고 서는 이 어쩌면 기이한 작품집인 <산책자>를 또는, 로베르트 발저 그 자체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몇 해 전인가 <벤야멘타 하인학교- 야콥 폰 군텐 이야기>를 읽고 난 뒤의 가벼운 충격을 기억한다. 애초에 ‘하인학교’라는 설정 자체가 인상 깊다. 누구나 무엇인가 위대한 존재, 큰 존재가 되기 위해 학교에 간다. 꼭 직업적 성공이나 사회적 성공이 아닐지라도 적어도 ‘훌륭한 사람’ 그러니까 ‘훌륭한 존재’가 되기 위해 학교라는 곳을 간다. 그런데 야콥 폰 군텐은 그와 반대로 아무것도 아닌, 완전히 미미한 존재가 되기 위해 스스로 ‘하인학교’에 입학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자 자신을 갈고 닦는다. 철저한 반 성장, 반 영웅의 이야기이다.

<벤야멘타 하인학교>를 읽고 난 뒤 이런 세계도 존재할 수 있구나, 놀라웠다. 왜 사람은 꼭 더 나은 존재, 앞으로 더 나아가는 존재여야만 할까, 꼭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존재 그 자체로서 살아 숨 쉴 수도 있을 텐데. 세계는 꼭 앞으로 나아가야만, 진보하고 발전하고 성장해야만 아름다운, 쓸모 있는, 존재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쉽사리 결론내리기 어려운 물음을 안고 생각에 빠져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이런 작품을 쓴 사람, ‘로베르트 발저’라는 이름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곧바로 국내에 출간된 발저의 다른 작품을 찾아보았으나 이렇다 할 작품은 없었다. 안타까웠다. 그를 더 알고 싶었다. 헤세가 말하기를 ‘로베르트 발저의 책을 수십만, 수백만의 사람이 읽었다면 세상은 보다 나은 곳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하는 사람, 카프카가 사랑한 작가, 수잔 손택이 말하기를 ‘발저의 작품에 나타나는 윤리의 핵심은 권력과 지배에 대한 저항이다. 발저의 힘은 고도로 세련된 예술의 힘이다. 그는 진실로 놀라움과 저릿함을 느끼게 하는 작가이다.’라고 하는 사람, 로베르트 발저. 그가 더 알고 싶고 궁금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고 그의 작품집이 두 출판사에서 거의 동시에 출간되었을 때 나는 진심으로 기뻤고, 그 두 가지 책을 모두 샀다. 민음사에서 나온 <산책>은 작품 수가 얼마 되지 않아 안타까웠는데 한겨레출판에서 나온 <산책자>는 그 아쉬움을 충분히 채워주고도 남았다. <산책자>를 받아들고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로베르트 발저를 몇 년 만에 다시 만났고, 이제야 그를 제대로(하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부족한) 마주하는 기분이 들었다.

<산책자>를 통해 만난 로베르트 발저는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고독한 시인이었고, 작고 미미한 것들, 보잘것없는 것들의 아름다움과 그 가치를 누구보다 제대로 볼 줄 아는 세심한 영혼의 소유자이며, 그러므로 발전과 진보와 성장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 지구라는 세계와는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그렇기에 결국 미쳐버리고만 가엾은 영혼이었다. 그래서 나는 <산책자>를 덮을 즈음에는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 수잔 손택의 말처럼 ‘저릿함’이라는 그 단어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한 번이라도 가난하고 고독한 신세를 경험해본 자는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타인의 가난과 고독을 더 잘 이해한다. 우리는 타인의 불행, 타인의 굴욕, 타인의 고통, 타인이 무력함, 타인의 죽음을 조금도 덜어주지 못하므로 최소한 타인을 이해하는 법이라도 배워야 한다. (<산책자>, ‘빌케부인’, 15쪽)

내 주변에는 방임과 방탕과 모순이 특정 분량과 무게만큼 꼭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숨쉬기가 고통스럽습니다. 만약 고상하고 훌륭하고 우아해져야만 한다면, 삶은 고통 그 자체로 변합니다. 세련됨은 내 적입니다. 우아하게 절을 해야 하는 무모한 상황에 얽혀 들어가느니 차라리 사흘 동안 굶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 내가 나 자신으로 있지 못하고 내가 아닌 것이 되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내가 나일 때, 나는 나에게 만족합니다. (.....) 예를 들어 새 양복을 입는 것만으로도 나는 심히 불만스럽고 불행해집니다. 그런 사실로 추측하건대 나라는 인간은 새롭고 보기 좋은 고급 물건은 뭐든지 다 싫고, 오래되고 낡은 중고품은 뭐든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 만약 세상 모든 사물들이 새것이고 말끔하기만 하다면 나는 살고 싶지 않을 겁니다. 자살이라도 해버릴 거예요. (.....)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일. 그건 어떤 의미에서건 어느 정도는 노동입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이미 밝혔듯이, 나는 전적으로 편한 것이 좋습니다.(<산책자>, ‘한 시인이 한 남자에게 보내는 편지’, 73쪽~75쪽)

내 해석에 따르면 로맨틱하다는 것은 절반쯤만 살아 있다는 의미와 같다. 결함, 파손, 질병, 예를 들면 낡아빠진 성벽 같은 것, 그렇듯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 아무도 모르게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아름다운 것, 그것이 바로 로맨틱한 것이다. 물론 나도 그런 것들을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꿈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 중에서 가장 로맨틱한 것은 심장이므로, 감수성 강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에 오래된 성벽으로 둘러싸인 오래된 도시를 가지고 있는 셈이니까. (<산책자>, ‘작은 베를린 여인’, 261쪽)


귀족 가문 출신이면서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기 위해 하인학교에 들어간 ‘야콥 폰 군텐’처럼 로베르트 발저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미미한 것들, 쓸모없는 것들을 예찬한다. 그런 존재에서 ‘로맨틱’함을 발견하기도 한다. 고상하고 훌륭하고 우아해져야만 한다면 삶은 고통 그 자체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산책자>에 실린 42편의 그의 글들. 단편 소설일수도 있고 산문일수도 있고 때로는 시일수도 있는 그 모든 글들에서 발저는 이렇게 일관된 세계관을 보여준다. ‘작고 미미한 것으로 돌아가라’

그러나 이 세계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존재하는 것들을, 그런 사람들을 몰아세우기 마련이다. 쓸모 있게 되어라! 더 크게 되어라! 더 큰 권력을 지녀라! 이 세계를 위해 뭔가를 하라! 그렇기에 일반적인 관점, 이 세계의 관점에서 보자면 발저는, 또는 발저가 그리고자 하는 작품 속 인물들은 이 세계와는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을 너무도 또렷하게 알고 있다.



시민적 지위, 시민적 명망, 어느 것 하나 나는 갖추지 못했습니다. 이건 너무도 자명합니다. 나와 같은 인간을 필요로 하는 자리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산책자>, ‘산책’, 338쪽)


그래서 그는 걷고 또 걷는다. 자연 속으로 방랑하고 떠돈다. 오직 산책만이 그를 숨 쉬게 한다. 산책하는 동안 그는 홀로이지만 자유롭고 그가 마주하는 이 세계의 보잘것없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누구도 그를 방해하지 않고, 좋은 옷차림이나 훌륭한 지위나 쓸모 있는 노동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발저는 실제로 눈을 뜨고 있는 거의 모든 시간은 걷거나 글을 썼다. 사람들은 그의 글조차도 이상하다고 여겨, 제대로 대우해 주지 않았다. 그는 철저히 홀로 산책하거나 다락방에서 홀로 글을 쓰고 살았다. 그러다 마침내 세계와의 불화는 그를 정신병원에 스스로 가두게 한다.

산책은.... 나에게는 무조건 필요한 겁니다. 나를 살게 하고, 나에게 살아 있는 세계와의 연결을 유지시켜주는 수단이니까요. 그 세계를 느끼지 못하면 단 한 글자도 쓸 수가 없고, 단 한 줄의 시나 산문도 내 입에서 흘러나오지 못할 겁니다. 산책을 못하면 나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고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내 일도 무너져버릴 겁니다. (......) 멋진 산책길에는 형상, 살아 있는 시, 마법, 그리고 온갖 아름다운 자연물들이, 비록 작은 존재들이라고 해도 꿈틀거리며 차고 넘치는 것이 보통이죠. (.....)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남루한 것, 가장 진지한 것과 가장 유쾌한 것, 산책자에게는 이 모두가 마찬가지로 마음이 끌리며 아름답고 소중합니다. (<산책자>, ‘산책’, 339쪽~341쪽)

끝내 발저는 그토록 그가 사랑하던 행위, 즉 산책을 하던 중 심장마비로 죽었고, 어느 자연의 일부로 그가 그토록 예찬하던 보잘것없는 한 세계로 돌아갔을 것이다. 지금도 어디선가 그런 존재로 그의 영혼은 떠돌고 있을까? 죽은 뒤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그의 ‘이상하다’던 글들은 새롭게 조명을 받고, 그의 반 영웅주의적 세계관도 여러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과연 로베르트 발저 그 자신이 그렇게 되기를 바랐을까? 그건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는 걷고 싶었기에 걸었고, 쓰고 싶었기에 썼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이었기에 누군가, 어떤 독자들에게는 영원히 ‘이상’할 수밖에 없는 글을 썼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 고백들은 무척 아름답고 진실로 가득하다. 그의 삶과 그 삶을 고스란히 닮은 42편의 글들에서 ‘저릿함’을 거듭 느낀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열린 창으로 무엇인가 위대한 존재, 이 땅의 최고 권력자가 되기 위해 대통령 선거 유세를 벌이고 있는 이들의 목청 드높은 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그토록 큰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일까? 그런 이들은 절대로 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기 위해 애쓰던 한 남자, 새 양복을 입으면 불행해지고, 우아하게 절을 해야 하는 무모한 상황에 얽혀 들어가느니 차라리 사흘 동안 굶겠다던 이 남자의 삶을, 세계를 도저히 이해할 수는 없으리라. 그러나 나는 그의 삶에서, 한 인간으로서 그 누구에게서도 얻을 수 없는 감동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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