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호퍼, <맹신자들>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불복하는 일부 박사모 집단을 보면 차라리 그들이 돈을 받고 움직이는 것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돈을 받지도 않았는데 정말 자발적으로 여전히 그렇게 광신자들처럼 행동한다면 오히려 더 문제가 아닐까 싶다. 저들의 그 광신적인, 맹목적인 눈먼 애정이랄까, 빗나간 사랑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에릭 호퍼의 <맹신자들>이 떠오른다. 


이 책의 부제는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으로 광신적인 종교주의자, 나치즘 신봉자, 극도의 마르크스주의자, 파시즘 등등 ‘광신’적이고 맹목적인 대중 운동에 가담하게 되는 인간들의 심리에 대한 에릭 호퍼의 탁월한 견해가 돋보인다. 호퍼는 샌프란시스코 부두 노동자로 일하던 1951년 이 책을 출간했다고 하는데 이 책은 나치즘과 2차 세계대전 후 황폐해진 유럽 상황과 맞물리면서 당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평생 떠돌이 노동자로 살아온 에릭 호퍼. 그는 방대한 독서를 통한 독학으로 뛰어난 사상가의 반열에 올랐다.

<맹신자들>은 그런 호퍼의 탁월한 시각을 모았다. 그의 주장에 따르자면 인간은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좌절하고 개인적인 일에서 가치를 찾지 못할 때 맹신자가 되기 쉽다. 나치즘에 맹목적으로 투신한 사람, 종교에 광신적으로 빠지는 사람, 파시즘에 깊이 개입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현실에서 깊이 좌절했으며 자기 자신에 대해 가치를 못 느끼는 이들이었다. 어떻게 보면 한국에서 기독교가 크게 부흥하는 이유 중 하나도 이런 게 아닐까. 어디에서도 대접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는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 그럼으로써 서서히 광신적 신도의 길로 들어서는…. 종교뿐만 아니라 국가나 정당 등 어떤 집단에 광적으로 빠지는 인간들의 공통점이 이 책에는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사람은 자신의 우월함을 뒷받침할 근거가 빈약할수록 자신의 국가나 종교, 인종 혹은 자기가 지지하는 대의가 우월하다고 주장하기 쉽다.’ ‘사람은 자기 일이 신경 쓸 가치가 있을 때라야 신경 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무의미한 자기 일은 팽개쳐두고서 남의 일에 신경 쓰게 마련이다. 남의 일에 신경 쓰는 것은 험담하거나 꼬치꼬치 캐묻거나 참견하는 형태로 나타나며, 또한 공동체나 국가, 인종 문제에 대한 열띤 관심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기 문제는 회피하면서 이웃의 어깨에 매달리든 목을 조르려고 덤벼들든 하는 것이다.’ 등등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구절들이 여기저기서 빛난다.




토마스 베른하르트, <몰락하는 자>
<몰락하는 자>는 두 가지 이유에서 눈길을 끌었다. 우선은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작품이라는 점, 그리고 두 번째는 ‘글렌 굴드’라는 실존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 출간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나중에 읽어보려고 적어두기는 했는데 클래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부쩍 더 이 작품에 호기심이 생겼다. <몰락하는 자>는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등장한다고 해서 출간 당시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 그렇다면 굴드가 주인공인가? 그렇지는 않다. 이 작품에는 화자인 ‘나’와 그의 오랜 친구 ‘베르트하이머’ 그리고 ‘글렌 굴드’가 나온다.

이들은 오래전 대학에서 함께 피아노 공부를 했던 사이로 그때 처음 인연을 맺었다. 작품은 ‘나’에게 베르트하이머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시작된다. ‘나’는 베르트하이머의 자살 이유를 밝히고자 그가 죽기 전 머물렀던 별장과 근처 여관을 찾아간다. ‘나’는 이런 저런 이유를 추측해보다가 베르트하이머가 글렌 굴드 때문에 자살했으리라 짐작하게 된다. 베르트하이머는 우연히 굴드가 연주하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고 자신은 도저히 그와 같은 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피아노 대가로서의 꿈을 접는다. 그때부터 서서히 ‘몰락하는 자’가 되어버린 그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 베르트하이머는 영원히 2인자일 수밖에 없는 자신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몰락하는 자>를 통해 굴드로 대변되는 완벽한 예술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한없이 나약해지며 좌절할 수 있는지 베르트하이머라는 인물로 극명하게 보여준다. 줄거리만 보면 꽤 흥미 있어(?) 보이지만 읽기 수월하지는 않다. 전형적인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였기 때문에 이야기가 매끄럽게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베른하르트 특유의 길고 거친 독설을 견디기 힘들 수도 있다. 물론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나름의 통쾌함으로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한편 작품에 그려진 굴드의 모습은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사실이리라 짐작하다가는 굴드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얻을 소지도 있어 보인다.

사람을 바라볼 때 우리 눈에는 병신밖에 안 보여, 라고 언젠가 글렌이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전부 병신이야. 병신 아닌 사람이 없어. 오래 바라볼수록 더 병신으로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평소에 그 사람이 얼마나 병신인가를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세상은 병신 투성이야. 거리에 나가면 병신들만 만나게 된다고. 집에 누구를 초대하면 병신을 맞이하는 셈이야., 라던 글렌의 말이 떠올랐다. (34쪽)



조르주 페렉, <W 또는 유년의 기억>
이 작품은 시간이 지난 후 더 기억에 남는다. 실험적인 글쓰기를 하는 것으로 유명한 조르주 페렉은 <W 또는 유년의 기억>에서는 또 다른 글쓰기 형태를 시도했다. 한 작품 안에서 두 개의 이야기를 나란히 전개한 것이다. 하나는 조르주 페렉의 자전적 이야기로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그의 ‘유년에 대한 기억’이다. 또 다른 하나는 ‘W'라는 가상의 섬에서 일어나는 일로 이 두 개의 이야기는 한 챕터씩 교차되면서 진행된다.

초반에는 대체 두 가지 이야기가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하고 도저히 감이 안 잡힌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 될수록 ‘아아...’하다가 마지막에는 쿵, 하고 뒤통수를 때린다. 이 두 가지의 전혀 다른 이야기가 전하는 바는 크다. 인간은 광적으로 전쟁(혹은 남을 짓밟는 경쟁을 통한 승리)을 좋아하는 종족이며 그러한 잔인한 전쟁으로 인해 유년의 기억(추억)은 온전하게 보존될 수 없다는 진실. W섬의 이야기가 마지막에 ‘유년의 기억’과 병치되면서 그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해진다. 다음에는 두 개의 이야기를 번갈아 가면서 읽지 말고 ‘유년의 기억’과 ‘W' 섬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씩 쭉 읽어서 비교해봐야겠다.




미셸 우엘벡, <지도와 영토>

우엘벡의 작품은 읽고 나면 항상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어떤 작품은 쓰레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도 나는 왜 이 사람 작품을 계속 읽는 것일까? <지도와 영토>가 번역되어 나왔을 때도 솔깃했다. 게다가 이 작품은 우엘벡에게 2010년에 공쿠르 상을 안겨주기도 했으니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도와 영토>는 그의 전작에 비하면 폭력적이거나 노골적인 성묘사도 없고 등장인물들도 참 착해진(?) 편이다. 우엘벡에 대해 비난을 일삼던 평론가들도 이 작품에 대해서만은 찬사를 늘어놓았다던가. 그럼에도 역시 책장을 덮고 나면 뭔가 그 ‘개운하지 않은 뒷맛’은 여전히 남는다. 조금 덜하기는 하지만....

우엘벡은 <지도와 영토>에서도 전작들처럼 ‘소비’와 ‘물질’로만 구성되어 있는 서구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한다. 오늘날 서구에서 예술작품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지, 그리고 그 예술작품은 또 어떻게 사람들에게 ‘소비’되고 ‘평가’되는지 보여준다. 모든 것은 결국 ‘돈’이다. 서구에서 인간은 이제 생식으로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지 못한다. ‘서구사회에서 인간을 규정짓는 것은 생식의 소임이 아닌, 무엇보다도 생산과정 속에서 점하는 위치(189쪽)’다. 그 안에서 인간은 한없이 고독한 존재로 서서히 늙고 병들어 죽어갈 뿐이다. <지도와 영토>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꼼꼼하고 세세하게 묘사한다. 때문에 어떻게 보면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의 2000년대 버전으로도 보인다. <사물들>에서 그려지던 사회와 비교해보면 <지도와 영토> 속 현대 사회는 물질적으로 비교할 수 없이 더 풍요로워졌지만 그때보다 인간은 한층 더 빈곤해진 느낌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이 작품을 읽었을 때는 ‘오오오오!’ 감탄하고 ‘어서 이 감동을 글로 남겨야지!’했는데 시간이 좀 지나니 그때의 감동의 살짝 희미해졌다. 어릴 때 <노인과 바다>를 읽었을 때는 이렇게 좋은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어요’. 왜 고전은 나이 들어서 다시 읽어야 하는지 <노인과 바다>를 읽으며 새삼 또 깨달았다. 하긴 세상물정 모르는 10대 때, 바다에서 물고기와 사투를 벌이는 노인의 이야기가 절절하게 와 닿을 리가 있겠는가. 그저 그냥 그러려니 추측할 뿐이지.

물론 지금도 노인의 심정을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거대한 물고기를 드디어 낚고 그 물고기를 지키고자 바다 위에서 벌이는 노인의 사투를 보고 있노라면 삶에 대한 인간의 강인한 의지가 느껴져 나도 모르게 숙연해진다.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야.”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 거야.”(96쪽)라는 문장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함께 실린 단편 <킬리만자로의 눈>과 <프랜시스 매코머의 짧고 행복한 생애>,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도 무척 좋았다. 헤밍웨이 작품을 읽노라면 어떤 면에서 참 마초 같고 그가 작품 속에서 여자를 그리는 방식은 불편하고(어이없기도 하고) 동의할 수 없지만, 그래도 작품이 좋은 건 어쩔 수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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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3-14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릭 호퍼의 책은 죄지은 민간인을 끝까지 옹호하는 세력들을 이해하고 비판하기 위해서 읽어야 할 책이군요. 잠자냥님이 인용한 문장을 보자마자 이 책 읽고 싶어졌어요. ^^

잠자냥 2017-03-14 15:51   좋아요 0 | URL
네 지금의 그 맹신자들의 사태와 견주어 읽으면 이 책이 더 흥미롭게 다가오리라 확신합니다. ㅎ cyrus 님의 명리뷰 기대하겠습니다.

cyrus 2017-03-14 18:50   좋아요 0 | URL
제 글은 명리뷰 수준이 아닙니다. 그냥 책을 보면서 느낀 걸 정리하고, 자랑하고,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인정하고, 수정할 뿐입니다. ^^

munsun09 2017-03-14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며칠 전부터 맹신자들이 계속 생각나서 오늘 드디어 읽기 시작했는데! 신기하고 반갑습니다.

잠자냥 2017-03-14 15:52   좋아요 0 | URL
하하 그러셨군요! ㅎㅎ 요즘의 사태와 비교해가면서 읽으면 더 쏙쏙 들어오리라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