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갔어야 했다 쏜살 문고
다니엘 켈만 지음, 임정희 옮김 / 민음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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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켈만의 작품은 처음 읽는다. 짧은 분량에 강력한 서사를 자랑한다는 책 소개 문구에 혹해서 읽게 됐다. 쏜살문고가 그러하듯이 이 책 또한 정말 얇고 가볍다. 요즘 집에서 읽는 책들이 들고 다니기에는 무거운 편이라 이 가벼운 책을 어제 출근할 때 가방에 넣고 나왔다. 전철을 탄 뒤 읽기 시작. 12월 2일이라는 날짜와 함께 시작하는 ‘나’의 일기는 한 두 장만 넘기고도 금세 빨려 들어간다. 시나리오 작가인 ‘나’는 아내와 어린 딸과 함께 겨울 휴가를 떠나 이 별장에 도착했다. 며칠 동안 빌린 별장은 인터넷에서 사진으로 본 것보다 더 근사하다. 집 앞으로 100미터쯤 완만하게 비탈진 초원이 숲 가장자리까지 이어져 있으며 가문비나무와 소나무, 희끗희끗한 거대한 목초지가 펼쳐진다. 창문을 열면 바람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들리는 소리라곤 오직 그것뿐이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시작, 신선한 공기’ 완벽하다. 이렇게 한적한 곳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딸과 휴가를 보내며 작업 중인 시나리오를 완성할 꿈에 부푼 ‘나’. 그런데....... 


작품이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삐걱삐걱 불길한 전조가 보인다. 시나리오 몇 편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한 ‘나’는 아주 무명은 아니다. 그렇지만 대개 성공한 시나리오 작가들이 영화감독으로 변모하는 것과 달리 그는 아직, 여전히 시나리오 작가일 뿐이다. 그에게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의 아내 수잔나가 보기엔 그 점이 무척 못마땅하다. 그녀는 유명한 여배우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떠오르는 신예 작가였던 ‘나’와 잘 나가는 여배우의 결혼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도 남았는데, 지금 ‘나’는 이렇게 여전히 시나리오 작가로 멈춘 상태이다. 아내는 여전히 승승장구하는데도 말이다. 더군다나 아내는 대학에서 독문학과 어문학을 전공했지만 ‘나’는 대학에 다닌 적이 없다. 아내와의 대화 도중에 사사건건 열등감을 느끼는 ‘나’. <너는 갔어야 했다>는 이렇게 부부 사이의 미묘한 갈등과 함께 ‘나’가 작업 중인 시나리오가 교차하듯이 서술된다. 이런 점이 작품의 긴장감을 증폭시키면서, 무언가 곧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아마 23분쯤 읽었을 것이다. 80쪽이 조금 넘는 이 책의 절반에 해당하는 40여 쪽을 정신없이 읽었을 무렵, 역에 도착했다. 작품에 완전히 몰입한 바람에 아침의 정신없는 전철도, 불유쾌한 출근길도 잊었다. 하마터면 한 정거장 더 갈 뻔했다. 궁금한데? 역에서 내려 회사까지 걸어가는 동안 읽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다. 점심 때 읽을까 싶기도 했는데, 퇴근 후의 즐거움을 위해 아껴두기로 했다. 드디어 퇴근. 전철을 타고 다시 책을 펼쳤다. 와우, 아침의 몰입은 예고편이었다. 출근길에 읽은 부분에서는 별장에서 기이한 일들이 일어나리라는 전조가 보였다면 퇴근길부터(그러니까 한 40쪽 이후부터는) 그 께름칙한 일들이 스멀스멀 현실화된다. 퇴근길 전철 안, 인간들이 내는 온갖 소음(통화, 잡담, 벨소리 등등)과 삶에 찌든 냄새를 모조리 잊을 정도로 책에 빠져든다. 아니, 벌써 내리라고? 잠깐만! 한 페이지 남았어! 한 장! 그래도 집에는 가야했기에 전철에서 내려, 표를 끊고 나가기 전에 서서 그 마지막 한 장을 읽었다. 심장이 두근두근하고 알 듯 모를 듯한 공포로 목덜미가 서늘하다.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읽었는지 뒷목이 뻣뻣하다. 전철로 23분. 다니엘 켈만은 어느 인터뷰에서 독자들이 이 책을 다 읽는 데 45분이 걸릴 것이라고 예측했단다. 출퇴근 전철로만 46분. 내려서 읽은 한 장까지 합치면 47분쯤 되려나? 거의 정확하다. 그 50분 남짓한 동안 롤러코스터 타듯이 재미와 두려움, 짜릿한 공포를 동시에 느꼈다. 


전철에서 읽었으니 망정이지, 만일 집에서 혼자 어두운 밤에 읽었다면 어땠을까? 주인공처럼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을지도 모른다. 아니, 집이 아니라 그와 그의 가족들처럼 인터넷으로 집을 빌리고는 한가로이 휴가를 즐기면서 이 책을 읽었다면 정말 끔찍한 두려움에 휩싸였을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도 말 못할 갈등이 숨어 있지만 겉보기에는 남부러울 것 없는 가족, 근사하지만 낯설고 어딘가 기묘한 별장, 슈퍼마켓 주인을 비롯해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의 묘한 태도, 자꾸만 일어나는 이상한 일들……. 이 모든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는지, 아니면 ‘나’의 불안정한 심리에서 기인한 착각 또는 환상인지, 아니면 그가 쓰는 시나리오의 일부분인지 이 모두는 읽는 이가 어떻게 풀이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다만 그에게서 복잡한 삶의 무게 속에 출구를 잃어버린 현대인의 모습이 엿보이기에 이 모든 일들이 그저 남일 같지는 않다. 게다가 인터넷을 통해 집을 빌려서 휴가를 떠난 가운데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더욱 오싹하다. 물론 이 나라에선 휴가를 떠나 에어비앤비로 집을 빌리든, 펜션을 예약하든 호텔에서 지내든 몰카 때문에 더 오싹하지만 말이다.


한 겨울, 작가인 주인공이 가족과 함께 낯선 공간에서 지낸다는 점에서 스티븐 킹의 <샤이닝>, 아니 이 작품을 영화화한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이 떠오르기도 한다. 아내와 아들과 함께 겨우내 호텔을 관리하며 느긋하게 소설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잡은 ‘잭’- 그런데 소설은 쓰지 못하고 매번 시작 부분만 맴도는 잭. 폭설로 호텔이 고립되자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서서히 미쳐가는 잭. 스티븐 킹의 원작을 읽지 못한 터라 이 두 작품을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영화 <샤이닝>은 시작부터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려오고, 죽은 영혼이 보이는 잭의 아들, 흐르는 피 등등 오감을 자극하는 공포로 가득하다. 그에 비해 다니엘 켈만의 <너는 갔어야 했다>는 좀 더 은밀하고 조용한 방식으로 공포를 자아낸다. 이 작품은 낯선 별장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밀실 공포물이자 밀실 미스터리로 한 시간 동안 완벽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표지의 쓰인 책 제목이 매우 의미심장하게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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