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 존재하는 수많은 언어 가운데 하루에도 여러 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단어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사랑이라는 단어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지 않을까? 이 순간에도 사랑은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와 어떤 이를 행복하게 만들고, 또 어떤 이를 절망에 빠트리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사랑을 말하는 이는 많아도, 그 사랑은 어딘가 비틀어져 보인다. 사랑불능의 시대. 지금 이 세계는 그런 곳이 아닐까. 연인에게 폭력을 가하고 그것도 모자라 목숨까지 빼앗는 일이 날마다 일어난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혐오하고 증오한다. 결혼이 꼭 사랑의 증거는 아니지만, 결혼식 비율도 줄곧 최저치를 갱신한다. 이 땅에서 사랑은 점점 소멸해가는 게 아닐까? 사람들이 연애는 할지언정 사랑은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런 이들이 이 책들을 읽는다면 조금은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을 텐데,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몽테를랑의 <소년들>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숱하게 책장에서 쏟아진다. 소년들이 다니는 학교의 규칙은 많이 사랑하기, 많이 포옹하기, 많이 기도하기일 정도이다. 거기에 충실하려는 듯이 알방세르주를 끔찍이도 사랑한다. 사랑불능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고작 어린 소년들의 사랑을 다룬 책을 처방한다니, 실망하는 이도 있으리라. 그러나 <소년들>의 사랑은 그 어떤 어른의 사랑보다도 순수하고 숭고하다. 그리고 뜨겁다. 세르주와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만 하는 순간에 알방은 그를 포기할 줄 안다. 오직 사랑하는 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걸음 물러날 줄 안다. 알방은 그전부터 세르주를 향한 생각과 욕심을 버리려고 했으며, 그가 올바른 길로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간절히 기도한 바 있다. 그리고 그 마음을 행동으로 실천한다.

 

많은 연인들이 헤어지고도 그 사람을 포기하지 못해서, 미련을 거두지 못해서 상대를 괴롭힌다. 헤어지기 전부터 자신만의 고통과 괴로움에 사로잡혀, 그 욕심과 뒤틀린 욕망 때문에 이별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런데 열여섯 살 소년 알방은 내가 아닌 다른 존재더 훌륭하게 만들고싶은 마음에 그 존재를 위해 자기 인생의 가장 귀한 보물을 희생할 줄 안다. 그런데도 그저 이 사랑을 고작 십대 소년들의 풋내기 사랑이라고 가볍게 볼 수 있을까.

 

이토록 숭고하게 희생정신이 빛나는 사랑의 모습 말고도 <소년들>에서는 사랑과 관련한 주옥같은 말들을 만날 수 있다. ‘애정은 무슨 선물꾸러미처럼 피에르에게 줄 걸 다시 가져가서 폴에게 주는, 그렇게 주문에 따라 옮길 수 있는 게 아니’(119)라는 말이나, ‘우리의 사랑은 얼굴에 대한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이 강렬함과 영속성, 그리고 자아에 대한 망각으로 어느 정도 절대적이 될 때, 그 사랑은 신의 사랑과 매우 가까워지고 피조물은 우리를 창조자에 이르게 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듯 느껴지지요.’(281) 이런 말들을 읽노라면 당신과 나, 우리 모두의 사랑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으며, 또 어떤 모습인지 돌아보게 한다.

 

<소년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사랑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면, <세기아의 고백>은 이렇게 사랑하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재능 넘치는 시인이자 낭만주의자였던 뮈세와 사랑의 여신 조르주 상드의 실제 사랑을 바탕으로 쓰인 이 작품에서 뮈세는 열정적이면서도 광기 어린 사랑을 한 편의 시처럼 절절히 고백한다. 뮈세의 페르소나인 옥타브는 첫사랑 여인의 배신으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방황한다. 그러나 다시는 사랑이 없을 것만 같던 그의 인생에 또 한 번 사랑이 들이닥친다. 두 번째 연인 브리지트’. 어렵사리 사랑을 시작한 두 사람이지만, 순탄하지만은 않다. 첫사랑에 실패한 옥타브이기에, 그 사랑의 그림자가 쉽사리 걷어지지 않는다. 의심과 질투, 불안이 그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첫사랑 연인을 완벽하게 믿었으나 그 신뢰가 깨져버리자 이제, 연인을 온전히 믿기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행복 속에서도 질투와 의심이라는 망상이 그의 뇌리를 파고든다. 의심에 빠진 모든 사람들처럼 그 또한 감정과 생각을 따로 떼어놓고는 사실과 다투고, 의미 없는 말에 집착하면서 자기 사랑의 대상을 분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의심과 질투는 찬란했던 사랑을 파국으로 몰아간다.

 

브리지트의 말처럼 사랑은 행복이거나 고통이다. ‘사랑이 행복이라면 사랑을 믿어야한다. 그러나 의심과 질투와 망상으로 깨져버린 이 사랑은 아무리 애정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더는 지속하기 어려울 것이다. 옥타브는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행복을 스스로 포기한 셈이다. 신뢰로써 사랑하는 그 행복을. 브리지트의 저주와도 같은 예언처럼 아마도 그는 이제 영원히 누군가를 오롯이 믿고 사랑하는 순수한 사랑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저 눈에 보이고 손가락으로 만져지는 사랑만이 그에게 남겨지리라. 그런데, 이 모습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서로 연인이 되고, 연애하는 오늘날 사람들의 사랑과 닮았다. 연인을 완벽하게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 얼마나 존재할까? <세기아의 고백>아름답긴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꿈꾸며 오늘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 이들에게 사랑의 의미를 되짚어보게 한다. 인간에게 사랑은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나의 사랑은 어떠한지.

 

<아르세니예프의 인생>에서 그려지는 사랑은 <소년들>의 순수함과 <세기아의 고백>의 열정적인 모습을 두루 갖추고 있다. 아르세니예프가 리카를 처음 만난 날은 주위의 모든 것이 달라 보인다. 그날 그는 모든 것에 반한다. 땀 흘린 작은 소년에게까지……. 그녀와 함께한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간다. ‘사랑의 시작은 항상 괜히 즐겁고 에테르에 취한 것과 비슷’(285)하므로.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결혼으로 하나의 결실을 본다. 그러나 결혼이 사랑의 끝이 아니기에, 오히려 또 다른 삶의 시작이기에 그 삶을 잘 가꾸지 못하면 사랑은, 그 새로운 삶은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많은 이들이 사랑을 얻은 뒤로는 한때 간절히 바랐던 열망을 쉽게 잊고는 자신만의 삶이 더 소중해지고 자유를 꿈꾼다. 그렇지 못한 다른 한 사람은 상대에게 원망 서린 한숨을 내쉬며 그의 삶에서 빠져나간다. 사랑을 계속 유지하기란 그토록 어렵다. 아르세니예프와 리카의 사랑도 그런 수순을 밟는다. ‘어리석은 희망과 꿈에 대한 환멸과 모욕이 극에 다다랐음을 깨닫고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 곁을 떠나는 것이다.

 

<아르세니예프의 인생>에서 사랑은 곧 삶이다. 사랑 없는 삶은 죽음이며, 산다는 것은 곧 사랑함을 뜻한다. 끊임없이 누군가를 사랑했던 아르세니예프는 아침이슬이나 저녁놀, 고요한 어스름, 흰 눈, 끝없는 평원처럼 부드럽고 여성적인 것들을 사랑한다. 아름답지만 영원할 수 없는 것들을 유난히 사랑한다. 사라지기에 더 아름다울 것들을……. 아르세니예프는 말한다. ‘나는 나의 삶이나 다른 이들의 삶이 낮과 밤, 일과 휴식, 만남과 대화, 이따금 사건이라 불리는 기쁨과 불쾌함의 교차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삶이란 인상, 장면과 형상들의 무질서한 축적이고, 이 가운데 가장 하찮은 것들만이 우리 마음속에 남는다는 사실을 알았다.’(235). 사랑은 그 모든 것들 가운데서도 우리 마음속에 가장 강력한 흔적을 남길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물을 수도 있으리라. 그토록 순수하고, 그토록 뜨거우며, 또 그토록 깊고 향기 그윽한 사랑이 현실에서도 존재할 수 있느냐고, 문학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니냐고. 그러나 알방과 세르주, 옥타브와 브리지트, 아르세니예프와 리카 세 쌍이 그리는 저마다 다른 사랑의 풍경은 모두 작가 자신의 삶에서 비롯되었다. 그렇기에 뒤늦은 회한이든 깨달음이든 읽는 이의 마음을 더없이 진솔하게 울린다. 순수한 마음으로 상대를 먼저 생각하면서 사랑할 것, 사랑받기보다 사랑할 것, 그 사랑을 의심하지 말 것, 그 사랑을 잘 가꾸어 나갈 것, 누군가의 마음을 얻은 일 자체가 끝이 아니므로. 그 사랑이 생활의 때가 묻어 조금씩 빛바래져가는 듯해도 그것을 그 나름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영원함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사랑은 퇴색한다하더라도 형태와 애정의 모양을 달리해서 삶에 여전히 머물 것이므로. 사랑불능의 시대를 넘길 지혜가 이 책들에서 조용히 빛을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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