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리스의 단편집 <한잠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부인>과 캐서린 앤 포터의 단편집 <오랜 죽음의 운명>을 함께 읽고 있다. 캐서린 앤 포터의 단편집은 올해 초에 출간되었고, 진 리스의 단편집은 얼마 전에 나왔다. 둘 다 반가운 소식이었다. 두 권 모두 꽤 묵직하고(800쪽이 넘는 포터의 단편집이 더 두껍다), 작품마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읽고 난 뒤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한 두 편씩만 읽다 보니 올해 초에 샀음에도 포터의 단편집을 아직 다 읽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진 리스와 캐서린 앤 포터 두 작가의 공통점이 보인다. ‘고통받는 여성들, 언제나 타자인, 어쩌면 영원히 약자일 이들의 이야기’랄까. 그리고 이 고통의 근원은 캐서린 앤 포터와 진 리스, 그녀들의 삶이 순조롭지는 못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진 리스의 <한잠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부인>에 실린 단편의 면면을 보자. 이 책의 첫 작품 「환상」에는 금욕적인 여성이 등장한다. 5층에 자리한 작은 원룸에서 7년째 살고 있는 브루스 양은 초상화를 그리며 이따금 살롱에서 전시도 한다. 이따금 그림이 팔리기도 한다. 몽파르나스에서 그 정도 성취는 대단한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삶은 한없이 지루해 보인다. 고지식한 그녀의 차림새처럼 생활 또한 고지식하고 견고하다. 그런 그녀에게도 남다른 취미가 있다. 그녀를 겉으로만 아는 이들이 알면 깜짝 놀랄 만한 취미. 사실 그녀는 화려하고도 눈부신 온갖 드레스 및 화장품, 향수 등을 모으고 있다. 그러나 이 모두는 그저 수집 용도이다. 장롱 안 깊숙이 꽁꽁 숨겨두고 그녀 혼자 즐길 뿐이다. 그녀는 왜 드레스를 입지도 못하고, 화려하게 화장을 하지도 않는 것일까? 자기만의 환상의 세계를 왜 ‘장롱’속에 깊이 가둬둔 것일까? 이 화려한 옷을 살 수는 있지만 용기 있게 입을 수는 없는, 영국 여자 브루스 양. 자신이 꿈꾸는 화려하고 여성적인 삶은 장롱 속에 가둔 채, 그녀는 어쩌면 사회에서 바라는 어떤 지적이고 금욕적인 여성 이미지에 자기 자신을 가둔 것은 아닐까?

진 리스의 단편은 이렇게 당시 사회의 시선이나 제도 속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여성들의 삶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그러나 바로 그 담담함 때문에 고통스럽게 다가온다. 진 리스의 이야기 속 여자들은 대부분 의상 모델, 코러스 걸, 매춘부, 배우 등 주로 여성성을 상품화한 직업군에 속한다. 그렇지 않은 여자들이더라도 오직 결혼을 통해서만 사회, 경제적으로 안정된 지위를 차지한다. 하지만 그런 지위를 차지했더라도 남편 또는 애인의 상황으로 말미암아 한순간에 몰락하기도 한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불안하기 짝이 없다. 이런 단편들은 진 리스의 자전적 이야기로 느껴진다. 그중에서도 「빈」의 ‘프랜시스’(진 리스 자신으로 보이는 인물)가 특히 그렇다. 프랜시스는 현재 남편 ‘피에르’ 덕분에 삶은 공허할지언정 경제적으로는 꽤 넉넉하게 살며 인생을 즐기고 있다. 그러나 피에르가 불미한 일에 연루되면서 그녀의 삶 또한 나락으로 떨어지기 일보직전이다. 프랜시스는 말한다. ‘내 잘못이 아니다. 남자들이 망친 것이다. 늘 내 정신을 업신여기고 몸에만 온통 신경을 썼기 때문에. 여자들은 무분별한 잔인함과 어리석음으로 나를 망쳐 놓았다.’

진 리스는 영연방 도미니카에서 웨일즈 태생 아버지와 백인 크리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 자신은 백인으로 태어났지만, 그때부터 이방인이나 다름없었다. 16세 때 영국으로 건너갔으나 아버지의 죽음 뒤 경제적으로 쪼들리면서 코러스 걸, 마네킹, 누드모델 등의 직업을 전전하며 가난함과 궁핍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물질적으로 의지했던 연인과 이별한 뒤에는 더욱 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삶을 바탕으로 써내려간 그녀의 초기 단편에는 주로 여성들이 사회에서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희생자나 피해자로 그려진다. 그녀들은 대부분 사회 통념에 갇혀 가난과 멸시를 견디며 척박하게 살아간다. 그런 고되고 팍팍한 삶이 자조와 환멸, 자기 연민이 가득한 냉소적인 언어로 묘사된다. 그런데 문득, 이 단편집 속 여성들의 삶을 지켜보노라면 거의 100여년이 지난 오늘날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해진다.

캐서린 앤 포터의 단편집 <오랜 죽음의 운명> 속 여성들의 삶 또한 비슷하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진 리스가 주로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삶의 주변부로 밀려난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면, 포터의 작품 속 인물들은 폭력적인 남성들로 말미암아 삶이 부서진 여성들이 많다.「마리아 콘셉시온」이나「그 나무」,「정오의 와인」같은 작품에는 남편의 정서적, 육체적 학대에 시달리는 여성들이 등장한다.「꽃 피는 유다 나무」와 같은 작품에서는 남성적 신념이나 질서로부터 배신당하는 여인의 삶이 그려지고, 때로는 숨 막힐 정도로 여성 억압적인 사회에서 벗어나 여성 참정권 운동에 투신하는 삶이 그려지기도 한다(「오랜 죽음의 운명」). 그러나 포터의 작품은 사회적 약자를 단지 여성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식민 지배 아래 착취당한 인디오나, 공동체로부터 외면 받는 장애인, 남부의 가혹한 노예제 아래 착취당하는 흑인의 삶 등 좀 더 폭넓은 타자의 삶을 다룬다.

이러한 소재와 주제 또한 캐서린 앤 포터, 그녀 삶에서 고스란히 비롯된다. 포터는 지극히 보수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남부 사회에서 불우한 유년기를 보내고, 열여섯 어린 나이에 남부 출신의 남자와 결혼하지만 그로부터 무려 8년여에 걸쳐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학대를 당한다. 남편의 폭력으로 뼈가 부러지고 아이까지 유산했을 정도이니 그 고통이 어떠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결국 당시로서는 어려웠을 이혼을 감행하고, ‘캐서린 앤 포터’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 글을 쓰기 시작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고통스러운 삶을 바탕으로 빚어낸 글들이라 그토록 진솔하게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물론 진 리스도 마찬가지이다. 두 여성 모두 고통이 글쓰기의 원천이 되었다고나 할까.

두 작가 중 내가 조금 더 마음에 드는 쪽은 포터의 글이다. 그녀의 단편 속 여성들이 한결 강인하고 독립적인 느낌이랄까. 물론 초기 작품에 비해 진 리스의 단편 속 여성들도 중반 이후부터는 조금씩 변화를 보인다.「재즈라고 하라지」의 주인공은 모든 것을 다 잃고도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것, ‘노래’만큼은 지키고자 안간힘을 쓴다. 물론 그마저도 쉬워보이지는 않지만……. 진 리스의 단편집이 후반부로 갈수록 또 어떻게 달라질지 기대되기도 하고, 포터의 단편집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한잠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부인>과 <오랜 죽음의 운명>이 주로 다루는 대상은 여성, 사회적 약자 등으로 비슷하지만 그 이야기 방식은 사뭇 다르다. 그러나 한 가지, 커다란 공통점이 있다. 이 두 단편집에서 그려지는 여성의 삶은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거기에서 깊은 공감과 울림을 주지만 한편으로는 그 현실이 몹시 씁쓸하다. 차라리 이들의 작품을 읽고 ‘아니, 예전에는 여자들이 이렇게 혹독하게 살았단 말이야?’ 상상 불가능했으면 좋겠다. 여성의 지위가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대다수 여성들은 경제적으로 불안하고 남편이나 연인으로부터 맞거나 죽임 당한다. 그리고 진 리스, 캐서린 앤 포터과 같은 작가들마저 그런 고통스러운 삶을 바탕으로 작품을 창조했다는 사실은 더더욱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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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8-11-09 0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과 달라졌다고 해도 여성의 삶은 그렇게 달라지지 않았군요 여성은 여전히 여성이니까요 힘없고 남의 눈을 마음 써야 하니...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볼지 마음을 쓰는 건 사람이기에 그렇겠지만, 세상은 여성한테 더 엄한 잣대를 대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그건 여성 스스로도 그렇지 않을지... 여성이 먼저 이런저런 것에서 자유로워져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희선

잠자냥 2018-11-09 10:03   좋아요 1 | URL
네, 희선 님 말씀에 구구절절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