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가난한 사람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11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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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의 친구이시여! 불행은 전염병입니다.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 전염되지 않도록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의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앗! 했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아, 내가 예전에 읽은 책이구나. 그런데 왜 까마득하게 잊었을까?’ 그럼에도 이 문장만큼은 생생하게 기억났다. 이 한 구절만으로 내가 이 책을 예전에 읽었구나, 기억해낼 정도로. 황급히 이 책을 언제 읽었는지 찾아보았더니, 오래전 <분신/가난한 사람들> 한 권으로 되어 있던 무렵에 읽었던 게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새로울 수가. 나의 기억력이란 대체. 허허허. 읽을 책이 쌓였는데도 나쁜 기억력 때문에 예전에 읽은 책을 마치 처음처럼 읽다가, 어느 순간 아, 전에 읽은 책이구나, 깨닫게 되면 뭔가 억울해진다. ‘다른 책을 더 읽었을 텐데, 아깝다!’하는 심정이랄까. <가난한 사람들>을 이미 읽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도 처음에는 그랬다. 그런 줄도 모르고 전자책까지 구매했으니, 어이없어 웃음이 나왔다. 그럼에도 끝까지 읽었다. 왜냐하면 도스토예프스키, 도선생 작품이니까. 분량이 그리 부담스럽지 않고, 서간체 소설이라 술술 읽힌다는 장점도 한몫했다.

예전에는 이 작품에서 ‘물질적 가난함’이 어떻게 사람들을 생활은 물론 정신적 궁지로 몰아넣는가에 집중해서 읽었던 것 같다. 그런 부분이 눈에 더 잘 들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물질적 빈곤보다는 정신적 빈곤이 인간을 어떻게 파멸로 몰아가는지가 더 두드러지게 다가왔다. <가난한 사람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첫 작품이라 그런지 분량도 짧고, 등장인물도 많지 않으며, 줄거리도 단순하다. 중년의 가난한 하급 관리 ‘제부쉬낀’과 가난함과 병약함으로 인해 늘 세상 풍파에 시달리는 여인 ‘바르바라’ 사이의 우정(또는 애정)을 편지 형식으로 그려나간다. 그 둘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며, 그들 주위 이웃들 또한 대부분 물질적으로 빈곤하다.

제부쉬낀과 바르바라가 주고받는 편지를 보면 둘 사이 감정의 온도 차이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제부쉬낀이 자신을 늙은 사람이라 칭하며 자기가 바르바라에게 쏟는 애정은 ‘아버지로서의’ 애정과 같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건 하나의 안전장치로써, 바르바라를 안심시키기 위한 핑계와도 같음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제부쉬낀은 바르바라를 한 여인으로서 사랑하고 흠모한다. 그러나 그 사랑을 진솔하게 표현하면 둘의 관계를 망가뜨려버릴 수 있기 때문에 ‘아버지와도 같은 보호와 우정’을 그 스스로 운운한다. 바르바라 또한 제부쉬낀의 도움의 손길과 우정과 애정을(때로는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고맙게 여기며 받아준다. 그도 제부쉬낀에게 ‘사랑’을 말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제부쉬낀과 달리 이성적인 애정은 아니다. 둘 사이에 왜 이러한 온도 차이가 생겼을까? 단순히 나이 때문일까?

독자는 바르바라의 편지 속 ‘수기’를 통해 그 비밀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어느 날, 제부쉬낀에게 자신이 어쩌다가 부모를 다 잃고, 이토록 가난하고 병약한 신세가 되었는지를 털어놓게 된다. 그 이야기 속에는 그녀의 첫 사랑 ‘보끄로프스키’가 등장한다. 첫 사랑과의 일화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부분은 바르바라가 그의 방에 몰래 들어가서 수많은 책을 보고 전율하는 장면이다. ‘그는 많이 배운 사람이었고 나는 어리석은 아이였다. 아는 것도 없었고, 책은 한 권도 읽은 적이 없었다. 나는 책의 무게로 인해 금방이라도 꺾어질듯 휘어 있는 기다란 선반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화가 나고 슬펐다. 어떤 광기 같은 것이 나를 엄습해왔다.’ 바르바라는 책 앞에서 왠지 모르게 한없이 초라한 느낌을 받는다. ‘그의 책을 마지막 한 권까지 전부 다 읽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에 휩싸인다. ‘그가 아는 것을 나도 다 알아야 그와 우정을 나눌 자격이 생기는 거라고 생각했었나 보다.’라는 그녀의 고백으로 미루어보건대 바르바라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호감을 느끼는 행위에서 정신적인 면, 즉 지적인 의사소통에 크게 의미부여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처음부터 바르바라가 보끄로프스키에게 끌렸던 이유도 그가 그녀에게는 없었던, 지적인 면을 소유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그와 의사소통하기 위해서는 ‘책 읽는 행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녀가 보끄로프스키의 생일 선물로 ‘푸시킨 전집’을 사주려고 애쓰는 모습에서도 두 사람 사이 애정의 밑바탕이 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실제로 이 둘은 책을 통한 교류로써 가까워지고 정신적으로 의지하는 사이가 된다. 바르바라는 이때의 경험으로 가난할지언정 정신적으로는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런 바르바라에게 제부쉬낀의 취향은 저속하게만 느껴진다. 물론 제부쉬낀은 보통의 하급 관리와는 달리 책을 읽으려 노력하고, 문학을 논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신도 언젠가는 작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꿈을 꾸기도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부쉬낀이 어울리는 문학가들이란 ‘라따자예프’처럼 저급한 연애 소설을 쓰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더욱이 이 라따자예프는 푸시킨을 낡아빠진 작가로 취급할 만큼 문학적 감각은 결여된 인물이다. 푸시킨 전집을 갖고 싶어 하던 보끄로프스키와 완벽하게 대조되는 인물인 셈이다. 그런데 제부쉬낀은 이런 라따자예프를 칭송하며 그가 추천한 작품들을 여과 없이 받아들인다. 제부쉬낀이 자신이 감동한 작품이라면서 편지에 써 보낸 통속 연애 소설은 민망하기 그지없다. 심지어 그는 고골이나 셰익스피어를 저주하기도 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그가 사랑해마지 않는 바르바라와 정신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므로 그 둘 사이에 ‘사랑’이 싹틀 가능성은 더더욱 없어 보인다. 때문에 바르바라가 작품 끝 무렵에 내리는 ‘선택 아닌 선택’은 비극적이기는 하지만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차피 똑같이 정신적으로 빈곤한 사람이라면, 물질으로라도 풍요롭게 해줄 사람을 만나는 게 낫지 않겠는가.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은 제부쉬낀과 바르바라 두 사람의 대비를 통해 정신적 빈곤함이란 과연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하는 한편, 물질적 가난함이 인간을 어떻게 궁지로 몰아넣는가도 놓치지 않고 세밀하게 그려낸다. 제부쉬낀이 분에 넘치게 바르바라에게 돈을 쏟아 부으며 궁핍할 대로 궁핍해지자 그의 편지는 점점 거칠어지고, 세상에 대한 불만도 커지며, 생활도 태도도 엉망진창이 되어 간다. 마치 바르바라의 아버지가 생전에 가난함에 몰리자 성격마저 변해버린 것처럼 제부쉬낀 또한 비슷한 전철을 밟아간다. ‘수많은 근심, 걱정, 슬픔, 거듭되는 불운들’이 가엾은 그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며 바르바라의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제부쉬낀 또한 ‘의심도 많아지고 신경질적인 사람으로 변해’가며 ‘점점 더 절망 속으로 빠져 들면서 건강을 무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성마르게 변한 제부쉬낀이 바르바라에게 보내는 편지 속 서명마저 무성의해진다. 예전에는 ‘당신의 충복이자 성실한 친구 마까르 제부쉬낀, 청렴결백한 당신의 친구, 한결같이 진실한 당신의 친구, 당신의 손가락 하나하나에 키스를 보내며’ 등등 온갖 수식이 난무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마까르 제부쉬낀’, ‘M. 제부쉬낀’, ‘M.D.’ 등으로 변한다. 실제로 사람이 낭떠러지로 내몰리는데 저런 휘황찬란한 표현이 자연스럽게 나올 리가 있겠는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런 세심한 설정에도 감탄하게 된다.


가난한 사람은 까다로워요. 가난한 사람은 보통 사람과 다른 눈으로 세상을 쳐다보고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곁눈질로 쳐다봅니다. 주변을 항상 잔뜩 주눅이 든 눈으로 살피면서 주위 사람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을 씁니다. 누가 자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 혹은 다른 사람들이 <뭐 저렇게 꼴사나운 놈이 다 있어!>, <대체 저렇게 가난한 사람은 무슨 느낌을 갖고 살까?>, 아니면 <이쪽에서 보면 어떤 꼴을 하고 있고 저쪽에서 보면 또 어떤 꼴일까?> 등등의 말들을 할까 봐 남의 말에 일일이 신경을 씁니다. 모두 알고 있듯이 가난한 사람들은 발닦개만도 못한 인생이고 아무도 그들을 존중해 주지 않습니다. 누가 책에 뭐라고 쓰든 엉터리 3류 작가 족속들이 뭐라고 끼적이든 가난한 사람의 인생은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제부쉬낀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만큼, 타인의 눈을 지나치게 신경 쓴다. 위 구절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극도로 궁핍해진 그는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 그들의 시선 때문에 빈곤 상태가 더욱 견디기 힘들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제 목을 조이는 것은 사람들이에요. 그렇죠? 제 목을 조이는 것은 돈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느껴지는 불안감, 사람들의 수군거림, 야릇한 미소, 비웃음입니다.’ ‘외투도 없이 다니는 것을 보고 저의 적들은, 그의 사악한 혓바닥은 뭐라고 지껄여 댈까요? 외투를 입고 신발을 신고 다니는 이유는 바로 사람들 때문이에요. 신발은 제 이름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랍니다. 구멍 난 신발을 신고 다니면 명예도 이름도 땅에 떨어지고 마는 거죠.’ 술을 마시면 신발 밑창에 대한 생각도 나지 않는다면서 그는 점점 술에 취한 날이 많아져 간다. 극도의 물질적 가난과 정신적 가난 상태에 내몰린 제부쉬낀은 이젠 아예 책을 저주하기까지 한다.


그놈의 책, 책, 책! 도대체 책이 뭡니까? 책은 밑도 끝도 없이 헛소리를 늘어놓는 것에 불과합니다! 소설도 다 엉터리예요. 헛소리나 지껄이려고 쓴 거죠. 하릴없는 사람들이나 읽으라고 쓴 거라고요.

제부쉬낀의 상태를 보면 그 스스로 자존감이 없기 때문에 심한 빈곤에 시달리자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 전전긍긍하면서 더 급격하게 무너져감을 알 수 있다. 그가 좀 더 굳건했더라면, 스스로 자존감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풍요로웠더라면, 저 물질적 빈곤 상태를 조금은 의연하게 견디지 않았을까 싶어진다. 정신적 빈곤이 물질적 빈곤과 맞물리자 걷잡을 수 없이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악순환이다. 물론 이렇게 물질적으로 궁핍함에 내몰렸을 때 정신적으로 버티기 쉬운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리 많지는 않으리라. 이어지는 불행에 대개는 의기소침해져서 모든 의욕을 상실해버릴 것이다. 가난함도 부유함도 타인의 시선에 민감한 사회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제부쉬낀이 각하의 선의로 다시 일어서게 되는 장면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 스스로 각하가 건넨 1백 루블 때문이 아니라 각하처럼 높은 사람이 친히 ‘지푸라기 같이 하잘것없는 주정뱅이의 손을, 이 천한 손을 잡아주신 것이 감동스러울 따름’이라고 말하듯이, 자신을 한 사람으로 존중해준 행위에서 그는 다시 의욕을 되찾는다. 각하는 제부쉬낀의 ‘영혼에 새 숨을 불어넣어’준 것이나 다름없고 ‘그의 삶이 오래도록 달콤할 수 있도록’ 다시 이끌어준 것이다. 돈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존중해준 태도 때문에 그의 영혼이 다시 눈을 뜬다. 마침내 제부쉬낀은 떠나는 바르바라에게 푸시킨 책 한 권은 주고 가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무척 흥미로운 변화이다. 이런 ‘존중’은 스스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어떤 상태에서도 자기를 존중하는 길, 정신적 빈곤으로 내몰리지 않는 길, 그 길은 곧 책 읽기라는 행위에 있다고 도스토예프스키는 <가난한 사람들>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저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서로 전염되지 않도록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구절은 정신적으로 빈곤한 이들이 함께 있으면 더 쉽게 구렁텅이로 내몰릴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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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18-11-05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스토예프스키와의 만남은 늘 뒤로 미뤄집니다. 꾸준하게 세계문학을 읽는 잠자냥 님의 리뷰를 통해 도전을 원하지만 시도했다가고 덮고 마네요. 최근엔 <지하 생활자의 수기>가 그러했어요. ㅠ.ㅠ 지인은 고비를 넘기면 괜찮다고 하는데 말이에요. 불행이 전염되는 대신 도스토예프스키 읽는 일이 전염되기를 바라봅니다. ㅎ

잠자냥 2018-11-05 13:27   좋아요 0 | URL
저도 10대 때 <죄와 벌> 읽은 뒤로는 도스토예프스키 안 읽다가 서른 넘어서 제대로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요, 엄청 재밌더라고요? ㅎㅎ 지인분 말씀처럼 어떤 고비(도스토예프스키가 좀 장황하죠?)만 넘기면 흥미롭게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언젠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자목련 님에게도 전염되길 빌어봅니다! ㅎㅎ

북깨비 2018-11-05 15: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강렬한 구절이네요. 잠자냥님의 마지막 말씀 역시 절절히 공감합니다. 정신적인 빈곤 상태에서는 동병상련보다는 마음이 건강한 이들과 함께 하는 편이 멀리 봤을때 좋은 것 같아요.

잠자냥 2018-11-05 16:02   좋아요 1 | URL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에는 이런 강렬한 구절이 참 많지요. ㅎㅎ 북깨비 님 말씀대로 정말 정신적으로 수세에 몰린 상태일 때는 마음이 건강한 이들과 함께 하는 게 치유나 회복의 힘이 큰 것 같습니다.

카알벨루치 2018-11-05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갈까요???첩첩산중이라

잠자냥 2018-11-05 20:06   좋아요 1 | URL
그 길은 들어서기가 어렵지 한 번 가면 쭉쭉 가게 될 길임은 확실합니다! ㅎㅎ

희선 2018-11-09 0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난한 사람들, 하니 빅토르 위고 소설 불쌍한 사람들(레 미제라블)이 생각납니다 지금 생각하니 두 사람은 다른 나라 사람이군요 빅토르 위고는 가난하고 힘든 사람을 불쌍하게 여겼군요 가난해도 책을 본다면 그 가난을 버틸 수 있을까요 돈이 없어도 마음은 넉넉하면 좋을 텐데, 그런 사람은 세상에 그렇게 많지 않을 듯합니다 그걸 도와주는 게 책일지도 모르겠네요


희선

잠자냥 2018-11-09 10:05   좋아요 1 | URL
말씀하신 것처럼 돈이 없어도 마음은 넉넉하면 좋을 텐데, 사실 돈이 없으면서 그러기는 쉽지 않죠. 이래저래 가난한 이들에게 이 세상은 살아가기 힘든 곳 같습니다....

얄라알라 2018-12-15 14: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잠자냥 2018-12-15 18:2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당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