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어느 오후, 대형 쇼핑몰에서 나는 본다. 부부가 아이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음식점은 이미 만원이고 그들은 번호표를 받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중이다. 아내는 전화 통화를 하느라 바쁘고 아이는 아이대로 제 또래와 노느라 정신이 없다. 바로 그때, 나는 남편의 눈,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눈을 보고야 말았다. 그는 세상의 모든 권태와 짜증, 분노와 증오가 뒤섞인 눈으로 아내의 뒤통수를 쏘아보고 있었다. 아내는 통화중이라 남편의 시선을 알지 못한다. 그렇게 남자는 아내를 더없이 증오하는 눈으로 흘겨보았다. 통화가 끝날 때까지. 그 눈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미워하는 사람을 바라봐도 그럴 수는 없으리라. 그들도 한때는 사랑을 했겠지. 그러니까 아이도 낳으며 함께 살고 있겠지. 그래, 그들도 한때는 사랑했을 것이다. 그들만이 간직한 하나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테니스코트. 하필이면 테니스코트다. 폴과 수전은 테니스코트에서 만난다. 나는 슬쩍 미소 짓는다. 문득 내 이야기가, 나의 단 하나의 이야기, 아니 너와 나 사이에만 존재하는 하나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내가 너를 테니스코트에서 만났듯이, 폴과 수전도 테니스코트에서 서로를 발견한다. 여름날의 뜨거운 햇살, 테니스공을 쫓느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그럼에도 유독 너만은 눈에 들어왔던 그 기억을 떠올린다. 함께 팀을 이룬 폴과 수전은 게임을 하며 서로를 알아간다. 게임하는 방식, 포핸드 백핸드 공을 치는 법, 상대를 배려하는 자세, 코트에서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서로를 파악한다. 너와 내가 그러했듯이. 테니스코트에서 너 같은 사람을 만나다니! 폴과 수전처럼 우리는 ‘개별적이고 자신들에게 특수한 것’을 본다. 나와 너의 사랑은 얼마나 놀라운가! 그에 비하면 폴과 수전의 사랑은 조금 뻔해 보인다. 그런데 폴과 수전 또한 그들 나름대로 경이로워한다. 그들에게는 우리의 사랑이 진부해 보이리라. ‘모든 연인이 자신들의 관계를 두고 하는 착각일 것이다. 자신들은 범주와 표시를 다 벗어나 있다’(27쪽)고 생각하는.


줄리언 반스의 <연애의 기억 The Only Story>은 읽는 이의 머릿속에 절로 사랑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아니, 마음이라고 해야할까? 사랑이 실패로 끝났을지언정, 흐지부지되었을지언정, 또는 애초에 시작도 못했거나 자기 혼자만의 마음속에서만 있는 일이었을지언정, 이 세상에 존재했던 자기만의 사랑 이야기, 그 단 하나의 이야기를 돌아보게 한다. 그것도 ‘압도적인 일인칭’으로. 지금 여전히 사랑을 지속중인 사람이라면 그가 떠올리는 장면들은 대개 장밋빛이리라. 사랑에 빠진 폴처럼 그 또는 그녀의 웃음, 웃는 방식에 주목하고, 폴에게 수전의 이빨이 남다르게 다가왔듯이 남들은 잘 알지 못하는 사소한 신체적 특징 또는 결점(다른 이에게는 결점으로 보이더라도 나에게는 더할 수 없는 매력인!)에 열광할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이미 끝났거나,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채 사랑이 자기 삶에서 빠져나간 사람이라면 그 기억은 고통스러울 것이다. 한 사람이 “우리 참 행복했는데”하고 말할 때 다른 한 사람은 “우린 진짜로 행복했던 적이 없어.” 말하듯이, 끝난 사랑은 대개 서로 다른 기억을 공유한다. 그렇다면 ‘행복한 기억과 불행한 기억 가운데 어느 게 더 진실할까?’(289쪽). 이 질문에 누구도 쉽게 답할 수는 없으리라. “사랑에서는 모든 것이 진실인 동시에 거짓”(331쪽)이기 때문에. 감정적 기록은 역사책과는 달리 그 진실은 항상 변하며, 양립할 수 없을 때도 진실이기 때문에(289쪽). 


<연애의 기억>에서는 ‘사랑’이라는 단어 못지않게 ‘기억’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인간의 부정확한 기억이 빚어내는 생의 희비극에 대한 반스의 통찰은 이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빛을 발한 적이 있다. 한때는 서로 사랑했고, 어쩌면 사랑에 빠졌었다고 기억(착각)하는 남자의 제멋대로 부풀려지거나 또는 축소된 기억, 즉 윤색된 기억. 진실을 알 수 없는 모호한 기억의 엉킴으로 인한 삶의 비극에 관한 이야기들……. 그러고 보니 폴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토니와 닮았다. 철저히 폴의 관점에서 그려진 수전은 토니가 묘사한 베로니카를 떠올리게 한다. 그때, 젊은 토니는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라고 했고 그런 그에게 토니의 선생은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라고 말했다. 에이드리언은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고도 했다. 그들의 이런 말들은 한 사람의 일생, 즉 개인의 역사에도 고스란히 투영할 수 있다. 역사와는 달리 한 사람의 일생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때문에 나이 든 토니가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고 이야기할 때 그 역사는 곧 한 사람의 생이 된다. 누군가의 삶은 주로 그의 기억에 의존해서 만들어지는, 결국 평범한 이들의 회고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게 <연애의 기억>속 폴의 사랑 이야기가 된다. 진실일 수도 있고 때로는 완전한 기만일 수도 있는 어느 사랑의 역사….  


폴이 기억하는 그의 첫사랑은 처음에는 눈부시다. 도발적이다. 열아홉과 마흔여덟이라는 나이 차이도 그렇지만 부모의 잔소리 또는 암묵적인 협박, 미스터 매클라우드와 그 사이에서 낳은 두 딸의 존재 등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까지. 첫사랑의 역사에 어울릴만한 모든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폴의 관점, 폴의 처지에서 그렇다. 폴보다 삶을 많이 보았고, 그것을 이해한 여자, 그래서 곧잘 웃음을 터뜨리는 수전, 그녀에게는 폴이 첫사랑도 아닐뿐더러 처음부터 비극의 씨앗을 품은 위험한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수전에게 사랑이란 그녀가 희미하게 언급했던 첫사랑이 사라진 뒤 미스터 매클라우드를 거쳐 폴에 이르는 동안 내내 어떤 고통을 싹틔울 수밖에 없는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매클라우드와 함께할 때부터 있었던 음주벽이 그녀의 그런 쓸쓸한 심정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어쨌든 수전의 이야기는 그녀의 입을 통해 듣지 못했으므로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럼에도 수전이 폴을 바라보며 ‘내 평생 어디 있었어?’라고 할 정도로 사랑했던 것만큼은 진실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게 잘못되어버렸을 때 수전은 도저히 이겨내지 못한 게 아니겠는가. 


인생의 황혼기에 폴은 첫사랑의 눈부신 기억을 쫓는다. 거기에는 행복한 기억도 괴로운 기억도 존재한다. 그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행복했던 순간보다도 고통스러운 사랑의 흔적으로 사람들과 거리를 둔 채 고독하게 지낸 한 남자의 인생이 보인다. 그의 사랑을 받았던 존재 수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그는 그 단 하나의 이야기를 구구절절 말한다. 폴처럼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사랑에 빠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한다. 사랑이 끝난 뒤라면 더욱 그렇다. 비탄에 잠겨 자기의 역사, 이제 끝나버린 어느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그 생생한 고통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기를 바란다. ‘자신의 이야기에, 그것이 식어버린 뒤에도 오랫동안, 집착하는 것’이다. 끝이 좋지 않아서 ‘나쁜 사랑’일 수밖에 없는 그 사랑에도 여전히 좋은 사랑의 잔재, 기억은 포함된다. 수전을 기억하는 폴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나쁜 사랑’은 존재할 수가 없다. 그렇지 않은가? 


사랑은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한 사람의 삶에 자국을 남긴다. 좋은 쪽에 남기기도 하고, 나쁜 쪽에 남기기도 한다. 하나의 사랑 이야기를 간직한 사람도 있을 테고 저마다 개별의 하나하나의 사랑 이야기를 여러 개 간직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사랑이 이어져 하나의 삶이 된다. 아내를 더없이 증오에 찬 눈으로 쏘아보던 남자. 그 남자에게도, 그 여자에게도 분명, 사랑은 있었을 것이다. 서로 지독하게 따분해하는 것을 넘어서서 극도로 증오하는 듯한 한 쌍.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을 거라고는, 그들이 아직도 함께 사는 확실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한 쌍. 그러나 ‘그들이 함께 사는 건 단지 습관이나 자기만족이나 관습이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다 ‘한때, 그들에게 사랑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75~76쪽)이다. 그리고 이런 사랑이야기는 모두에게 곧 단 하나의 사랑 이야기이자, 단 하나의 인생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폴이라는, 그리 호감 가지 않는 인물이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에, 팔짱을 낀 채 조금은 관조적인 자세로 책을 읽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가슴이 저려왔다. 폴이 늙고, 수전은 더 늙고, 그들의 사랑이 어긋나기 시작한 무렵이었을 것이다. 찬란했던 사랑이, 자신들은 틀림없이 영원하리라고 믿었던 그 사랑이 뒤틀리는 순간. 그래서 특별함을 잃어버리고 그저 그렇고 그런, 흔한 사랑이 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모든 사랑은 끝이 있다는 참혹한 진실을 알려주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쓸쓸하고도 비통했다. 사랑이 그렇듯 사랑을 하는 모든 사람들의 삶 또한 그렇기 때문이다. 찬란하리라고, 나의 사랑과 삶만큼은 타인과 다를 것이라고 믿고 살아가지만 진실은 친절하지 않다. 어떤 식으로든 연인들은 시간의 밖에 있다는 망상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오듯이, 인생 또한 그렇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 닳아버린 세대’가 될 즈음에 그런 깨달음은 더 깊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폴과 수전은 사랑했고, 사람들 또한 사랑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랑 때문에 행복하거나 또는 괴롭거나 할 것이다. 나와 너의 기억이 어떻게 다르든 모든 연인은 진실을 말하며, 사랑과 진실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 속에 사는 것은 진실 속에 사는 것’(243쪽)이기에 멈추지 않고 사랑하고 살아갈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10-18 1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18 1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