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 열린책들 세계문학 52
A.스뜨루가쯔키 외 지음 / 열린책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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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나는 책을 감당하지 못해 드디어 이북리더기(크레마 사운드)를 마련했다. 사둔 종이책이 많아서 그것부터 읽느라 이북리더기에 이렇다 할 작품을 구매해서 다운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처음으로 산 책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이다. 전자책 시장은 종이책에 비해 아직은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아서 사고 싶은 책이 드문데, 다행히 열린책들 세계문학시리즈에서는 좀 구매하고 싶은 책이 있더라.

이북리더기로 한참 재미나게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을 읽고 있을 때였다. 3분의 2쯤 읽었을 때였나? 그러니까 거의 발단-전개-위기를 지나 절정에 이르렀을 즈음이었는데, 책을 읽던 중 잠시 딴 짓을 하다가 다시 리더기를 집어 들었더니, 기계가 화면 보호 상태에서 멈춰버렸다. 단추란 단추는 모두 눌러보면서 기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하려고 온갖 애를 썼는데도 먹통이다. 아아아아- 이것이 바로 시스템 다운이란 말인가.

리셋 버튼을 누르기 위해서는 바늘이 필요했다. 아주 작은 그 구멍 안에 바늘을 집어넣어야만 했다. 아니, 그런데 집에 바늘이 없다! 아아아아. 이 무슨 날벼락인가. 그날 밤 나는 리셋 버튼을 누르기 위해, 그리하여 굳게 봉인된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의 절정에 다시 접속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강구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궁금증을 가득 안은 채 잠들어야만 했다. 내일 꼭 바늘을 준비하리라…….

다음날, 옷핀을 구해서 리셋 버튼을 누르는 데 성공했다. 크레마 사운드가 다시 작동한다. 자, 이제 다시 읽어볼까! 기쁜 마음으로 읽던 페이지를 찾는다. 아니,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기기가 읽던 페이지를 찾아가는가 싶더니 배터리가 0%라면서 아예 전원이 나가고 말았다. 화면 보호 상태로 밤새 켜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배터리가 방전된 것이다. 하아. 거참, 나는 이북리더기를 충전하느라 몇 시간을 또 기다려야만 했다.

이런 이야기를 구구절절 하는 까닭은, 바늘을 찾고, 충전하는 동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절정, 드디어 진실에 닿을 무렵, 잘 작동하던 기기가 난데없이 다운되고, 가까스로 리셋에 성공하니, 이제는 충전을 해야만 그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사태. 바로 이 상황이 혹시, 이 책, 이 작품의 진실에 닿지 못하게 하려는, 아니면 그 시간을 최대한 지연시키려고 하는 어떤 거대한 세력이 기획한 하나의 음모가 아닐까 하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의 진실에 닿기까지 ‘아직 10여 쪽’- 그런데 그걸 이 지구의 어떤 거대한,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세력이 방해하는 것이다.

망상이 지나치다고? 그러나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그래서 흠뻑 이야기에 빠졌던 사람이라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도 남지 않았을까? <세상이 끝나기까지 아직 10억년>이 바로 그런 세계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에 몰두하던 천문학자 말랴노프에게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일이 시작된다. 아침부터 전화가 계속 잘못 걸려오고, 주문하지도 않은 식료품이 배달되지를 않나, 급기야 아내의 친구라면서 낯선(그렇지만 미모의) 여인이 찾아오기도 한다. 게다가 그 여인은 좀처럼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런 일로도 모자라, 이웃에 살던 스네고보이가 말랴노프를 만난 뒤로 시체로 발견된다. 이런 모든 정황은 말랴노프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형사는 그를 범인으로 단정 짓는 분위기이다. 그런데다가 이게 웬일인가? 알리바이를 증명해줄 여인, 아내의 친구는 그새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이 모든 상황이 그저 운 나쁜 어느 하루의 해프닝일까? 만일 당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지독하게 운이 나쁜 하루, 그렇지만 결국 다 좋게 해결될 일이라고 생각할 것인가? 혹시 이 모든 게 모종의 세력이 당신에게 가하고 있는 암묵적인 협박이라면?

동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진실에 점차 다가가는 말랴노프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우주에 존재하는 어떤 4차원 문명이 오래전부터 말랴노프를 비롯해 바인가르텐, 구바르, 스네고보이, 글로호프 등을 관찰(명백히는 감시)하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천문학자, 정밀 공학자, 물리학자, 생물학자 등등 그들 모두는 ‘학자’로 지적 업무에 종사하면서 모두 현재 어떤 중요한 실험이나 발견을 마무리 짓는 단계에 와 있다는 점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그 4차원 문명은 그들의 연구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봐왔다.

그들의 연구가 어떤 지점에 이를 것 같으면(그러니까 절정에 이르러 어떤 결론을 도출할 과정에 다다를 즈음이면!), 4차원 문명은 그 연구를 저지하기 위해 최대한 자연스럽게 연출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예를 들어 바인가르텐에게는 어느 날 문득 연구소 소장 자리가 제의되거나 연구소에서 바캉스 스캔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의 주의를 흩트리기 위해 희귀한 동전이 담긴 동전함의 발견되기도 한다.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4차원 문명이 정한 대로 작동하는 것이다. 4차원 문명은 그들이 만일 협조한다면 모든 속물적 욕망을 기꺼이 충족시켜 줄 것이라고 약속한다. 그러면서 당장 바인가르텐에게 선물을 주는데, 그것은 직업 우표 수집가가 아니면 가치를 상상도 못할 정도로 희귀한 우표가 가득 담긴 꾸러미였다.

혹시 이런 일이 당신에게도 일어난다면 어떨까? 당신이 하는 어떤 일을 누군가가 내내 감시하다가, 그 일을 견제하기 위해 당신의 온갖 속물적인 욕망을 채워주겠다고 제안한다면? 당신은 자신이 하던 그 위대한(?) 일을 계속해나갈 것인가 아니면, 속물적 욕망이 가득 채워진 안락한 삶을 선택할 것인가? 이 책에는 그런 선택의 기로에 선 인물이 등장한다. 물론 이미 보이지 않는 존재인 ‘그들’의 협박에 굴복해 속물적인 욕망을 받아들이고 안락하게 살아가는 인물도 있다. 여전히 눈앞에 펼쳐진 그런 유혹에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인물도 있고, 끝까지 그들에게 맞서 싸우기로 결심하는 인물도 있다.

그렇지만 그 4차원 문명,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존재했던 ‘9인 연합’이라는 존재에 맞서 싸우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인류의 모든 과학 업적을 수집하여 자신들이 지배’하고 ‘인류가 과학 기술의 진보를 자기 파괴의 목적에 이용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일에 목적이 있는 그 전지전능한 이들에 맞서 싸우기는 쉽지 않다. 말랴노프의 말처럼 ‘만일 그들이 어떤 전투적인 외계인이거나 아니면 4차원의 세계로부터 온 흡혈귀 같은 침략자들’이었다면 상황은 훨씬 편했으리라. 그러면 ‘적어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운명 공동체’였을 테니까. 그러나 이들은 아무도 모르게, 철저하게 혼자서 파멸할 운명이다.
 
때문에 4차원 문명에게 항복하고 ‘변절자’와도 같은 삶을 살고 있는 한 인물에게는 비난의 감정보다는 연민이 든다. 나라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그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다. ‘항복한다는 것은 과히 유쾌한 일이 아니죠. 과거에 사람들은 항복한다기보다는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쪽을 택했죠. 무슨 고문이나 감방 생활, 아니면 처형당하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수치스러워서 그랬지요.’라고 말하는 그. ‘용감한 자들 가운데서 자기만이 비겁한 게 수치스러’워서 다른 이들도 모두 똑같이 비겁하길 바라는 그. ‘자신의 추한 모습을 마주 대할 용기가 없는’ 그. 하지만 그가 안락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그리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아직 목숨은 부지하고 있지만 더 이상 예전의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서진 육체, 부서진 영혼…….

거의 모든 SF 작품이 그렇듯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 또한 SF 외피를 입었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소련 사회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억압적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자행되는 감시와 처벌. 체제에 위협이 되는 학자나 과학자 같은 지식인 무리, 협박과 회유. 그 속의 변절자 등등. “우리 앞에는 전쟁이 기다리고 있는 셈이야. 그들의 무기는 은폐야. 그러므로 우리의 무기는 폭로야.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동포들에게 이 사건을 폭로하는 거야. 우리의 말을 믿을 정도로 상상력이 있고 또 한편 학계의 고위층 간부들을 설득할 만한 권위가 있는 동료들을 먼저 선정해야 해.”라는 베체로프스키의 말은 이 모든 일들이 그저 전지전능한 우주의 어떤 존재와 나약한 지구인의 싸움이 아니라, 공고한 체제와 그 체제를 위협하는 인물들과의 싸움임을, 그것의 은유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인류는 자신들도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이 미지의 4차원 문명의 주의를 끌게 되었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4차원 문명의 영역으로까지 침범했고, 따라서 그들은 인류의 진보를 통제’하기로 결정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인간은 모두 어떤 위대한 일을 하기로 태어났는데, 대개의 인간이 그저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다 죽고 마는 것은 모두 저 거대한 우주. 4차원 문명, 9인 연합이 그려놓은 ‘큰 그림’의 하나가 아닐까. 우주의 항상성을 지키기 위해 보통의 인간들은 소시민으로 살다 죽는 것이다. 그리하여 ‘선의 이쪽 편에 남아 차를 마시거나, 맥주를 마시거나, 맥주와 보드까를 섞어 마시’며 ‘승진이나 소문 등에 관해 주절거리고, 자동차를 사기 위해 저축을 하고, 가사에 보탬이 되기 위해 따분하고 시시한 공식 연구에 손을 대며’ 그저 그렇고 그런 삶을 살다 가는 것은 아닐까.

물론 말랴노프에게는 사랑하는 아내 ‘이르까’와 토끼 같은 자식 ‘보브까’가 있고 그의 그런 소시민적 선택으로 아이는 무사히 자랄 것이다. 그러나 말랴노프가 생각하듯이 아이는 절대로 그가 바라던 유형의 청년으로 자라지 못할 것이다. 그에겐 이미 ‘자식이 그래 주길 바랄 권리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시민으로서 살게 될 자신을 그리면서 혼자 중얼거리는 말랴노프의 마지막 말은 무척 쓸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글프다. ‘그리고 그 아이는 절대로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중대한 발견을 할 수도 있었지만 너를 위해서 ....... >한 아빠일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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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18-09-14 14: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근 1년 고민하고 크레마 사운드 구매했어요. 전자책이 가벼워서 정말 좋긴한데 말씀하신 것 처럼 작동이 멈추는 일이 엄청 자주 생긴답니다. ㅜㅜ 그래서 저는 리셋버튼용 클립을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녀요. 안정적으로 작동하진 않지만, 대체로 만족하고, 지금은 전자책 구매량이 실제책 구매량보다 훨씬 많아요.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억년‘ 은 학자들끼리 대화할 때 학자들 속마음 유추할 수 있게 서술된 부분이 재밌었어요. 술 다 떨어져서 아쉬워 하는 장면 특히 좀 기억에 남아요. 온 우주가 저지할만큼 대단한 학자인데도 너무나 소심한 밀랴노프한테도 좀 정이 갔고요.
저는 공상과학영화를 무지 좋아하는데, 결국 내가 봤던 무수한 영화도 이런 소설같은 훌륭한 선행 텍스트(?)가 있어서 탄생했구나... 란 생각하면서 읽었어요. 억압된 체제에서도 많은 소련 예술가들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 활동인 ‘창작‘ 을 했구나!! 란 생각에 잠시 좀 가슴이 벅차기도 했어요. (ㅋㅋㅋ 너무 거창해버려)

잠자냥 2018-09-14 15:44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그 옷핀을 크레마 사운도 보관하는 가방에 넣어두었습니다. ㅋㅋ
전자책은 무엇보다 밤에 불끄고도 읽을 수 있어서 편리하더라고요. 암튼 저도 야금야금 전자책을 사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일단 보관과 휴대가 편해서 ㅎㅎ

말랴노프 참 인간적이라서 저도 정이 가더라고요. 마지막 선택도 짠하고... 맞습니다. 억압된 체제에서도 소련 예술가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창작 활동을 했지요! ㅎㅎㅎ


희선 2018-09-15 0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보기까지 이런저런 일이 있었군요 그래도 끝까지 보셨으니 누군가의 방해는 물리쳤네요 누군가는 누굴지... 어떤 책은그 책과 비슷한 일을 일어나게도 하지 않나 싶어요 그건 그저 우연이고 잠깐 기계가 잘못 움직인 것일 뿐이겠지만... 오싹한 일은 아니지만 도서관에서 빌려본 책을 돌려줬는데 그게 처리가 안 된 적 있어요 그 책에 무서운 이야기가 담겨 있었는데, 그 책에는 이 책을 보면 이상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말이 쓰여 있기도 해요

많은 사람이 4차원 문명, 9인 연합을 안다면 함께 싸우기라도 할 텐데, 몇 사람만 감시 당하고 하던 걸 그만둬야 한다면 힘들겠습니다 동료 찾기 어렵겠지만 아주 없지 않겠지요 소련에 살던 지식인이나 예술가 살기 어려웠겠습니다 그렇다 해도 다 사라지지 않은 걸 보면 사람, 인류한테 중요한 게 뭔지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희선

잠자냥 2018-09-15 10:02   좋아요 1 | URL
네, 하하하. 끝까지 무사히 잘 읽었습니다. 아니 그런데 도서관에 반납한 책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일 왠지 오싹하네요. 심지어 그 책에 무서운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니 더... ㅎㅎ 말씀하신 대로 책에 몰입하다 보면 정말로 그 책과 비슷한 일이 일어나거나, 일어나는 것처럼 착시효과가 생기는 것 같아요. 그것도 다 독서병의 하나일까요? ㅎㅎ

진지하게 써주신 댓글 보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