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소리 (무선) 웅진지식하우스 일문학선집 시리즈 6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신인섭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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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의 첫 문장이다. <설국>의 내용은 가물가물해졌어도, 이 첫 문장만큼은 잊히지 않는다. 아름답다. 어떻게 저런 문장을 쓸 수 있는지 감탄 또 감탄할 뿐이다. <설국>은 읽는 내내 그 담백한 아름다움이 마음 깊이 새겨지는 작품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을 읽을 때면, 언제나 그만이 빚어낼 수 있는 섬세한 아름다움에 마음이 정화되곤 했다.

<산소리>또한 감탄하면서 읽었다. 그의 작품 가운데 <설국>만큼 아름다운 작품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산소리>도 <설국> 못지않게 아름답다. 설국의 첫 문장처럼 강렬한, 잊기 힘든 문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책장을 천천히 넘기게 된다. 대단한 이야깃거리가 있지도 않다. 62세 노인이 주인공으로 하루하루 늙어간다는 것, 사그라지는 것에 몰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 잔잔한 ‘소멸’ 이야기에 왜 그토록 마음이 흔들리는 것일까? 나도 늙어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언젠가는 신고의 나이에 이를 것이며, 그때가 되면 나 또한 그처럼 사그라지는 생을 쓸쓸히 바라보게 될 것이기 때문은 아닐까?

신고는 올해 나이 예순둘. 몸이 늙어가고 있음을 실감한다. 흰머리는 말할 것도 없고, 이유 없이 피를 토할 때도 있다. 게다가 어느 날은 40년 내내 손에 익었던 넥타이 매는 법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하루하루 이렇게 쇠락해 가는 그에게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만 들린다는 ‘산소리’까지 들려온다. 신고는 불안하기만 하다. 친구들도 하나둘씩 세상을 떠난다. 장례식장에서 만나는 일이 낯설지가 않다. 그런데도 그 나이가 되도록 삶은 신고의 뜻대로 흐르지 않는다.

아들 슈이치는 자신이 꾸린 가정은 뒷전이고 외도를 일삼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딸 후사코마저 결혼에 실패하고 친정으로 내려온다. 알고 보니 사위는 술과 마약에 절어 자살 소동까지 벌인 판이다. 그렇다고 아내와 사이가 좋은가 하면, 애초부터 신고는 아내를 사랑해서 결혼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사랑했던, 마음속으로 연모했던 대상은 아내의 언니- 그러니까 처형이었다. 처형 대신 아내를 선택한 그였으니, 결혼 생활이 애틋할 리 없다. 게다가 이제는 신고도 아내 야스코도 모두 예순을 넘긴 나이라, 부부 사이에 육체 접촉이라고는 그저 코를 골며 잠든 아내 코를 잡고 뒤흔들 때뿐이다.

자식들도 불행해 보이고, 자신의 삶 또한 돌아보니 그다지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고 느끼는 신고에게 그나마 유일한 위로가 되는 사람은 며느리 기쿠코뿐이다. 신고는 또 한 번 금기의 대상을 향한, 자기도 미처 깨닫지 못한 욕망을 넘나든다. 오래 전에 처형을 연모했듯이 다 늙어버린 지금에 와서는 며느리에 대한 묘한 감정에 고개를 갸웃갸웃하는 것이다. 현실에서의 신고는 다정다감하기 짝이 없는 시아버지로 딸 후사코조차 아버지는 못생긴 자신보다 기쿠코를 아낀다고 불평을 토로할 정도이다.

아내 야스코 또한 신고의 며느리 사랑이 남다르다고 누누이 말할 정도이다. 다만 둔감한 탓인지 신고 마음속 깊이 감춰진 욕망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런데 아들, 그러니까 기쿠코의 남편인 슈이치는 모르는 척 눈 감았을 뿐이지 아버지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아는 눈치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 아내만을 아껴주지 못하고 외도를 일삼는지도 모르겠는 그. 그런 아들 때문에 남몰래 속앓이하는 며느리가 가엾기만 한 신고는 아들의 외도 상대를 떼어놓기 위해 홀로 애쓴다. 


자식의 아내를 위해서 자식을 감각적으로 미워하는 것이 신고에게도 조금 이상했지만 자신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야스코의 언니를 동경했기 때문에 그녀가 죽고 나서 한 살 연상인 야스코와 결혼한 신고였다. 그런 자신의 이상(異常)이 생애의 저변을 흐르고 있어서 기쿠코를 위해 분개하는 것일까? (165쪽)


며느리를 욕망하는 시아버지라니?! 소름끼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작품을 읽노라면 솔직히 그런 생각은 들지 않는다. 신고가 금기의 대상에게 느끼는 욕망은 곧잘 꿈속에서 형상화되곤 하는데, 꿈속에서도 신고가 욕망하는 바로 그 대상이 아닌 그 사람을 상징하는 다른 인물로 대치되어 등장하기 때문이다. 죽음과 삶, 꿈과 현실,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신고만이 기쿠코에게 묘한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닌 듯싶다. 기쿠코도 시아버지에게 남다른 감정이 있음을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치 챌 수 있다. 하지만 신고도 기쿠코도 금기의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서로를 위하고 챙겨줄 뿐이다. 이 알 듯 모를 듯한 관계, 그 여백을 채우는 것은 읽는 이의 몫이다. 이 조금만 넘어서도 ‘막장’이 될 수 있는 관계가 사뭇 쓸쓸하고도 애처롭게 보이고, 그런 일가의 풍경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모두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한없이 담백하고 아름다운 문장 때문이리라.

신고의 기쿠코를 향한 욕망은 잃어버린 젊은 날에 대한 욕망으로 읽히기도 한다. 기쿠코가 유부녀임에도 어린아이 같은, 덜 성장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종종 묘사되기 때문이다. 기쿠코는 젊은 날의 처형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리고 그 둘은 이토록 늙어버린 신고가 더는 다가설 수 없는 대상. 젊은 시절의 자기와도 같다. <산소리>는 이처럼 덧없이 사라져간 청춘, 늙어간다는 것의 고독과 상실감, 쓸쓸함, 그러면서도 그 나름대로 여전히 존재하는 욕망을 섬세하게 그린다.

슈이치와 기쿠코는 어떻게 될지, 큰딸 후사코는 영영 이대로 신고의 집에 눌러살지, 신고와 기쿠코의 관계는 또 어떻게 달라질지 이 작품은 선뜻 이렇다 할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다. 결코 밝지만은 않은 그들의 앞날이 어찌될지 아무도 모른 채, 평범한 오늘이 가고 내일이 오듯, 매우 일상적인 모습으로 잔잔히 끝맺는다. 다만, 그러는 사이에도 신고는 서서히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우리 인생이 모두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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