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예술이다 - 가장 우아한 반려동물, 인간의 화폭을 점령하다
데즈먼드 모리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은행나무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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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나왔을 때 단연코 눈에 띈 것은 책 표지 때문이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무척 귀여운 표지에 눈이 꽂히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이 고양이는 내가 키우는(?) 아니, 모시는 냥 님과 매우 닮으신 게 아닌가. 그럼에도, 고양이를 다룬 그렇고 그런 수많은 책 중의 하나이리라 생각하고는, 책 표지를 즐겁게 바라보며, 고 녀석 참 귀엽게 생겼네 하고  웃고 넘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책 저자를 보니, 어라? ‘데즈먼드 모리스’ 아닌가. 데즈먼드 모리스라면, <털 없는 원숭이>라는 매우 흥미진진한 책의 저자가 아니던가? 나는 저자를 믿고, 이 책을 읽어보기로 결정했다.

저자의 이름을 보니, 이 책은 아마도 고양이 관련 예술 작품을 해박하게 살펴보지 않을까 기대가 되었다. 실제로 이 책의 부제는 ‘가장 우아한 반려동물, 인간의 화폭을 점령하다’이다. 그렇다면 이 책 표지로 쓰인 저 귀여운 고양이 그림 또한 어떤 예술작품일 것이리라. 책을 받아들고는 전체적으로 넘겨보다가, 표지로 쓰인 그림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림과 관련한 정보를 읽다가 깜짝 놀랐다. 그림만 보면 유럽 어느 화가의 작품이려니 싶은데, 웬걸 일본 화가의 작품이다. ‘가와이 도쿠히로’의 ‘길든 고양이의 환상’이라는 작품으로 제작년도는 2006년이다.



가와이 도쿠히로, '길든 고양이의 환상', 2006



데즈먼드 모리스는 이 작품에서 동양의 미술 전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며 매우 특이한 작품이라고 말한다. ‘길든 고양이의 환상’은 고양이 품종부터 일본 전통에서 어긋난다. 가운데를 차지한 녀석은 스코티시폴드 종으로 그 자체가 유럽적이다. 화가는 이 그림을 “세상의 왕이 되고 싶은 고양이의 영원한 만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단다. 저자는 이 그림이 고양이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만한, 고양이의 품성을 잘 나타낸다고 말한다. 개는 주인에게 복종하지만, 고양이는 복종을 거부한다. ‘사람은 개를 소유하지만 그 사람은 고양이가 소유한다’(244쪽)는 말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고양이의 거만하고 독립적인 정신을 동화 형태로 보여주는 독특한 그림이라고 평가한다. 고양이 주인으로서, 아니 집사로서 매우 공감 가는 설명이다.

이 책은 이렇듯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구석기시대 벽화부터 시작해서 중세, 18~19세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고양이가 담긴 여러 나라의 예술 작품을 바탕으로 고양이와 인류의 관계를 살펴본다. 전통 회화만이 아니라, 중세의 동물우화, 거리 미술인 그라피티에서 현대의 만화, 남아메리카 부족의 문화와 아시아의 수묵화, 일본의 우키요에까지 장르와 지역, 시대를 가리지 않는다. 냥덕후들에게는 그야말로 읽는 내내 미소가 떠나지 않을, 흥미진진한 책이다.

그러는 한편, 고양이는 어쩌다 박해 받는 존재가 되었으며, 검은 고양이는 왜 유독 불길한 이미지로 그려지는지, 그런 어두운 이미지에서 또 다시 어떻게 사랑받는 존재가 되었는지,  인류에게 고양이가 어떤 의미였는지도 세밀하게 살펴본다. 이를테면 고대 그리스에서 고양이는 설치류를 잡는 기특한 녀석으로 사랑 받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인기를 잃어버리는데, 그리스 신화에서 고양이는 어둠과 마녀들의 여신인 헤카테와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박해받는 기나긴 역사의 초창기부터 이렇듯 불운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마녀들과 친숙한 존재이자 악의 화신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로마군 병사들은 고양이를 행운의 동물로 여겨서 데리고 다녔다. 들끓는 쥐와 생쥐를 잡아먹으면서 번성하던 야생 고양이들 말고 애완용으로 길러지는 고양이도 많았다고 한다. 수녀원과 수도원에서 특히 그랬는데, 6세기에는 교황도 고양이를 길렀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고양이를 매우 아꼈는데, 그의 전기를 쓴 부제 요한네스 히모니데스에 따르면 ‘고양이를 쓰다듬는 일을 가장 좋아하셨다.’할 정도이다. 예언자 무함마드도 고양이를 무척 사랑해서 옷소매를 깔고 자던 고양이를 깨우지 않으려고 기도하러 갈 때면 소매를 잘라냈다고 한다. 이런 까닭으로 코란에 고양이는 순결한 동물로 그려지며, 무슬림 세계가 초기에 고양이에게 애착을 보인 것이 나중에 수 세기 동안 기독교 교회가 고양이를 증오하게 된 숨은 요인 중 하나가 되었으리라고 저자는 추측한다.

중세가 저물 무렵 고양이에게 본격적으로 악마 숭배자들의 사악한 친구라는 꼬리표가 붙게 되는데, 이 견해는 널리 퍼지면서 수 세기 동안 굳어졌다. 그즈음 예술 작품에서는 흔히 마녀의 친구로서 고양이가 등장한다. 데즈먼드 모리스는 고양이를 악마와 관련지은 것을 몇 가지로 정리한다. 고양이는 고대 이집트에서 신성시된 존재였다. 때문에 고양이를 기독교에 반하는 이교도에게 중요한 존재라고 여기게 되었다. 또한 고양이는 집에서 키울 때조차도 고집스럽게 독립심을 간직했는데, 그래서 고양이는 동물계에서도 이단적인 존재가 되었다. 더욱이 고양이는 보통 새까맸고,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고양이를 죽음과 연관 지었다. 또 이교에서는 검은 고양이가 행운을 가져온다고 여겼는데, 이는 당연히 기독교인에게는 나쁘게 보였다. 게다가 야행성인 고양이가 어두운 밤에 돌아다니면서 울부짖는 소리는 당시 사람들에게 악마가 깃들어서 내는 섬뜩한 소음으로 들렸다. 이런 모든 요인들이 불합리하게 작용함으로써 고양이는 악마와 한 통속이 틀림없다고 여겨지게 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18세기에 접어들면서 고양이는 더 이상 박해받지 않았다. 마네, 모네, 르누아르, 고갱, 마티스, 파울 클레, 피카소, 호안 미로 등 여러 거장들이 고양이를 직접 기르면서 고양이의 매력을 담뿍 담아낸 그림들을 선보였고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 된다. 이 책에서 처음 접한 그림 가운데 파울 클레의 ‘신성한 고양이의 산(Der Berg der heiligen Katze, 1923)’과 호안 미로의 ‘머리 하얀 고양이(Tete Le Chat Blanc, 1927)’나 ‘작은 고양이(Le Petit Chat, 1951)’와 같은 그림은 소장하고 싶은 생각이 들 만큼 마음에 쏙 들었다. 루이스 웨인(Louis Wain)의 고양이 그림 또한 그렇다. 앤디 워홀이 자신의 고양이 그림들을 엮은 <샘이라는 이름의 고양이 스물다섯 마리와 파란 야옹이 한 마리>라는 작은 책자는 자비로 190부만 한정판으로 찍어서 가까운 친구들에게 선물하는 용도로 쓰였다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인 1988년에야 새로 찍어서 서점에서 판매했다는데, 이 책을 구하고 싶어서 찾아보니 절판이구나. 허허허.



Paul Klee, 'Der Berg der heiligen Katze', 1923



Joan Miro, 'Tete Le Chat Blanc', 1927



Joan Miro, 'Le Petit Chat', 1951



Louis Wain, 'Electric Cat'


 Andy Warhol, '25 Cats Name Sam and One Blue Pussy', 1954



이렇듯 이 책은 나처럼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한 번 더 고양이에 대한 애정이 샘솟게 해주며, 꼭 그렇지 않은 사람이더라도 고양이를 그린 예술 작품을 통해 인류와 고양이의 관계를 흥미진진하게 읽어나갈 수 있다. 무엇보다 <고양이는 예술이다>를 읽노라면, 고양이는 그저 고양이일 뿐인데, 고양이에게 때로는 좋은 의미를, 또 때로는 나쁜 의미를 덧붙인 것은 결국 인간. 인간의 필요에 따라 고양이의 목숨이 좌지우지된 역사가 너무나도 많았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인류 역사가 지속되는 한 고양이의 지위가 인간의 이기에 따라 또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는 없지만, 그저 고양이가 또 다시 박해받는 존재가 되어 학대당하거나 목숨을 잃는 잔혹한 역사만은 되풀이 되지 않기를 조용히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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