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뒤에서>를 읽고 난 뒤, 조르조 바사니의 작품을 모두 사둔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조르조 바사니 선집은 <성벽 안에서>, <핀치콘티니가의 정원>, <금테 안경> 세 작품이 함께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나는 왠지 모르지만 그 세 권을 거의 동시에 구입했다.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시리즈를 믿는 까닭도 있었지만 그 깨끗한 책 표지와 ‘서정적 문체’라는 말에 이끌렸다. 어쩐지 첫인상이 무척 좋은, 선하고 단아한 사람을 보는 듯 했다고나 할까? 그 느낌은 어긋나지 않았다.

내가 처음 읽은 그의 작품은 <금테 안경>이다. 가장 분량이 짧았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도전했던 것 같다. 책을 덮을 즈음에는 마음 한 구석이 아릿해져왔다. 그 쓸쓸하고 먹먹한 기분은 뜻밖이었다. 그럼에도, 첫인상 좋은 사람과 실제로 대화를 나눠보니 예상대로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확인했던 작업, <금테 안경>을 읽은 느낌이 바로 그랬다. 무엇보다도 조르조 바사니의 서정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문체, 그렇지만 결코 화려하지는 않은, 담담하고도 고독한 문체에 흠뻑 빠졌다. 그러나 그가 다루는 세계는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다.

<금테 안경>의 주인공은 페라라에 정착한 성공한 의사 ‘파디가티’다. 그는 직업에 어울리는 교양도 갖추었고 예술을 사랑한다. 페라라 시민들은 그런 그를 존경한다. 그 자신 또한 여유롭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간다. 또 다른 주인공인 ‘나’는 파디가티의 삶을 관찰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가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의 삶이, 그리고 ‘나’의 삶이 조금씩 어그러져 감을 느낀다. ‘그’는 알고 보니 동성애자였으며, ‘나’는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당이 득세하는 이탈리아에서, 그것도 히틀러와 손을 맞잡은 상황에서 한 사람은 동성애자로, 또 다른 한 사람은 유대인으로서 서로 마주하게 된다.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그들은 비슷한 처지에 연민을 느끼고 친구가 되는데, ‘다름’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그 사회에서 그 둘이 나누는 우정은 쓸쓸하고도 서글프기 짝이 없다. 특히 ‘나’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파디가티의 삶은 애수 그 자체다. 물론 ‘나’ 또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정체성을 알게 된 처음에는 충격에 빠진다. 하지만 곧 그를 이해하게 된다.



안다는 것은 이해하는 것, 더는 궁금해 하지 않는 것. ‘내버려 두는 것’과 같았다. (<금테 안경>, 20쪽)


파디가티를 그 자체로 내버려 두는 것이다. 더는 그 무엇도 궁금해 하지 않은 채.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파디카티의 사생활을 궁금해 하며, 뒤에서 수군거리기 바쁘다. 그런 그들 모두가 파시스트와 무엇이 다르랴. 존경받던 의사에서 한 순간 가십 거리로 전락하고 마는 중년 남자, 이웃과 가족의 따스한 보살핌 아래 미래가 찬란했던 한 젊은이. 그런데 그 둘 모두는 이탈리아 사회에서 영원히 국외자가 되고 만다. 이 이방인들의 애잔하면서도 쓸쓸한 우정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름다운 이탈리아 풍경과 대비되는, 한없이 고독하고 서글픈 분위기가 오래 기억에 남는다.

<문 뒤에서>를 읽은 사람이라면, 아마 대부분 자신의 10대 시절, 꼭 10대 시절이 아니더라도 치기어린 젊은 날의 한때를 떠올리게 되리라. 그리고 그 기억은 행복이기보다는 그 행복이 산산이 부서지거나 때문에 고통으로 점철된 어떤 순간일 것이다. 나 또한 그랬으며, <문 뒤에서>의 주인공이 이야기하는 사연도 그렇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첫 문장부터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는 인생에서 여러 번 불행했다, 아이였을 때, 소년이었을 때, 젊은이였을 때, 어른이 되어서도. 돌아보면 여러 번 이른바 절망의 바닥에 다다랐다. 하지만 나에게 유독 암울하던 시기는 1929년 10월에서 1930년 6월 사이, 고등학교 일학년이던 몇 달로 기억한다. 그 후 흐른 세월은 결국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남몰래 피 흘리던, 온전히 비밀한 상처로 남은 그 아픔을 세월이 치유해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문 뒤에서>, 7쪽)


그 영원히 치유되지 않는 상처란 무엇일까? 주인공의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면서 그 비밀은 조금씩 드러난다. ‘나’와 ‘나’를 둘러싼 몇몇 친구들과의 관계. ‘풀가’와 ‘카톨리카’- 한 사람은 가난하고 약삭빠르며 모두가 기피하는 인물이고, 다른 한 사람은 언제나 1등에 모든 면에서 완벽한, 그래서 모든 아이들의 동경의 대상이다. ‘나’ 또한 그 선망의 대상인 ‘카톨리카’와 가까워지고 싶지만, 어쩐 일인지 ‘카톨리카’는 좀처럼 곁을 주지 않는다. 그에 비해 아이들이 기피하는 풀가는 ‘나’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우정을, 애정을 퍼부어주지만 어쩐지 풀가는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리고 나는 그 틈바구니를 위태롭게 오가다 결국 ‘문 뒤에서’ 어떤 가혹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 장면은 몹시 충격적이어서 주인공인 ‘나’가 느꼈을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것만 같다.

그런데도 ‘나’는 그 모든 진실을 알게 된 뒤에도 그 가혹한 상처를 안겨준 대상에게 어떤 항변조차 하지 않는다. ‘문 뒤에서’ 나서지 못했던 것처럼 결국 영원히 ‘문 뒤에’ 숨어 있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나’에게 그 일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씻을 수 없는 상처이지만, 그것을 통해 어떤 의미로든 성장한다. 삶이 언제나 찬란하게 빛나는 것만은 아님을 알게 되지 않는가. 그 일을 겪은 뒤 ‘나’는 어린 시절의 친구 오텔로에게서 그 진솔한 냄새의 밑바닥에서 언제나 다른 냄새, 역겹고 옥죄는 악취를 찾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듯이 삶의 이면에는 악취를 내뿜는 존재가, 그런 어두운 일은 꼭 있게 마련임을, 그 서글프고도 씁쓸한 진실을 깨닫게 된다.


오텔로는 수업이 많았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처럼 내가 다시 오텔로와 자주 만나려고 노력한다 해도, 그의 착하고 진솔한 냄새의 밑바닥에서, 나는 언제나 다른 냄새, 머릿기름의 역겹고 옥죄는 악취를 찾고 있게 될 것이다. (<문 뒤에서>, 144쪽)


10대 소년들의 우정 또는 뒤틀린 애정, 동경 또는 경쟁심, 혹은 열등감과 질투, 또는 그 모든 것이 어우러진 ‘그 사건’과 그것이 불러오는 파장을 지켜보노라면, 가족을 떠난 최초의  인간관계라고 할 수 있는 친구 사이에서 느꼈을, 그리고 그 안에서 때로는 고통 받고 상처 받았을, 자기의 지난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그 순간에는 그 상처로 인해 모든 관계가 부질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인생 자체가 어긋난 듯이 절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은 또 살아간다. 상처가 아물기도 하고 희미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사람은 어른이 되고, 늙어 간다.

조르조 바사니의 작품에는 그렇게 상처 받기 쉬운 예민하고 섬세한 성정을 지닌 인물들이, 하필이면 소외된 정체성(동성애자이거나 유대인이거나)을 지니고 살아가면서 더 가혹한 형벌 아닌 형벌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그들은 상처를 안고 묵묵히 살아간다. 아름다운 마을 ‘페라라’에서- 그 진실한, 그래서 눈부시도록 아픈 이야기가, 책을 덮을 즈음에는 언제나 마음을 울린다. 조르조 바사니 선집은 아껴서 여러 번 다시 읽어도 좋을 그런 작품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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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18-06-21 1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르조 바사니의 작품을 읽고 싶게 만드네요. <금테 안경>의 구절, ‘안다는 것은 이해하는 것, 더는 궁금해 하지 않는 것. ‘내버려 두는 것’과 같았다.‘ 란 말 너무 확 와닿아요. 좋은 작가를 소개해주셔서 감사해요. 늦더라도 꼭 만나보고 싶어요.

잠자냥 2018-06-21 11:28   좋아요 0 | URL
네, 그 구절에서 저도 참 많은 생각을 했더랍니다. 늦더라도 꼭 만나보세요. 아마 마음에 드실 거예요. ㅎㅎ

양철나무꾼 2018-06-21 16: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 님,
님의 서재에만 들어오면 장바구니가 빵빵해져서 들어오기가 무섭습니다~--;
그렇지만, 님의 이런 페이퍼를 읽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는 없죠.
잘 봤습니다~^^

잠자냥 2018-06-21 17:19   좋아요 0 | URL
ㅎㅎㅎ 조금씩 사두고 천천히 읽으시면 되지 않을까요? ㅎㅎㅎㅎ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