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
토니 모리슨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 읽기에도 슬럼프가 있다. 글쓰기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동안 내가 그랬다. 책을 아예 읽지 않은 것은 아니고, 읽기는 읽는데, 뭘 읽어도 그다지 감흥이 일지 않았다. 다른 때 읽었다면 분명 무척 좋았을 작품도 심드렁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뭔가를 읽고 글로 남겨두는 일도 시들해졌다. 그나마 최소한의 기록을 위해서 짧게 끼적대는 정도랄까. 이런 상태가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었다. 거의 한 달 넘게 그랬던 것 같다.

그때 토니 모리슨의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를 읽게 된 것은 축복이었다. 지난 봄 사두고는 과연 언제 읽게 될 지 알 수 없었던 이 책. 새로운 작품을 읽으면 이 무덤덤한 독서 생활에서 조금 벗어날까 싶어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새로운 작품’ 그렇다. 고백하건데, 나는 토리 모리슨의 작품을 이제야 처음 읽는다! 책을 많이 읽는 편인데도 토니 모리슨 그 이름과는 인연이 쉽사리 닿지 않았다.

책꽂이에 토니 모리슨의 작품이 몇 권 있는데도,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언젠가는 읽을 작가 정도로만 생각했다. 흑인 문제, 그러니까 인종문제를 다루는 작품들이 보여줄 수 있는 어떤 뻔한(?) 전개와 예측 가능한 내용이 펼쳐지는 것은 아닐까, 이런 편견 때문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었다. 그래도 왠지 죽기 전에는 꼭 읽어야 할 그런 작품이라고 생각해서 책은 사두었다.

곰곰 생각해 보니 참 재미있다.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는 2015년에 발표된, 토니 모리슨의 가장 최신작이다. 아흔을 바라보는 작가가 쓴 가장 최신작. 그것도 토니 모리슨의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21세기를 배경으로 한단다. 그런 작품으로 나는 처음 토니 모리슨을 만난 것이다. 그의 작품을 많이 읽어본 사람이라면 아마 내가 하는 말에 콧방귀를 뀔지도 모르겠다만, 나는 이 작품 하나만으로도 홀딱 반했다. 첫 페이지부터 완전히 몰입해서 읽게 되었다.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는 흑인의 삶, 그러니까 인종차별 문제를 다룬다. 그런데 그 방식은 사뭇 다르다. 일단 문장이 감각적이다. 쉽게 읽히고 몰입도가 대단하다. 화자가 직접 이야기하는 방식이라 그런 효과를 톡톡히 보는 것 같다. 화자 또한 여럿이다. ‘스위트니스’, ‘브라이드’, ‘브루클린’, ‘소피아’, ‘레인’ 등등. 물론 그 가운데 주요 화자는 스위트니스와 브라이드로 둘은 모녀 사이이다. 그런데 어쩐지 평범하지 않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스위트니스는 딸인 브라이드를 낳고 경악한다. 아이는 정말로 새카맸다. 한밤중 같은 검은색. 스위트니스 자신은 피부색도 연하고 머리도 그다지 곱슬거리지 않는데, 자신의 딸은 그와 달리 완벽하게 ‘검은’ 것이다. 자신도 흑인이면서 연한 피부 빛깔 때문에 흑인임을 그다지 인식하지 않고 살던 그 앞에 검은 핏덩어리가 태어났고, 그런 아이를 보자 그녀는 미쳐버릴 지경이 된다. 실제로 잠깐 미치기도 해서 ‘한 번-겨우 몇 초였지만- 아이 얼굴에 담요를 대고 누르는’(16쪽) 행동까지 하게 된다. 브라이드는 ‘끔찍한 색으로 태어’났으며 그 때문에 브라이드의 아버지마저 아내와 딸을 버린 채 떠나고 만다. 그토록 까만 아이는 자신의 유전자를 받은 자식일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스위트니스와 브라이드, 두 모녀 사이가 순탄할 리는 없다. 아마도 이렇게 엄마에게 상처 받으며 자란 딸 브라이드가 흑인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이 세상 온갖 풍파에 시달리며 가정과 사회에서 이중으로 고통 받는 삶을 사는가 보구나…. 라고 예상할 즈음, 이야기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흐른다. 성인이 된 브라이드는 자신의 검은 피부를 당당하게 드러내고 모두가 선망하는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로서 사회적으로도 성공하고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아가고 있다. 뜻밖의 전개인데, 이보다 더 예상치 못했던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 뜻밖의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은 누군가의 읽는 즐거움을 빼앗는 행위 같아서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그 이야기 속에서도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브라이드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준 사람은 그녀가 검다고 손가락질 한 사회가 아니라 그녀가 검다고 만지기조차 꺼려했던 그녀의 엄마, 같은 흑인인(그렇지만 연하기 그지없는 피부를 지닌) 스위트니스, 바로 그녀가 아닐까. 엄마 때문에 상처받으면서도 그런 엄마의 손길을 느끼고 싶어서 엄마를 위해 무시무시한 일을 저지르고 마는 브라이드. 그리고 그 일은 그녀 인생 전반에 씻을 수 없는 상처이자 트라우마가 된다.

스위트니스와 브라이드 두 모녀 말고도 또 한 사람의 중요한 인물이 있다. 브라이드의 남자 친구인 부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부커 또한 처음에는 베일에 가려져 있는데,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그의 숨겨진 상처가 드러나고 그 상처가 어떻게 브라이드의 삶과 얽히게 되는지 담담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결국 그 상처들이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또 극복하고 이겨내면서 치유하게 되는지도.

책을 다 읽고 나면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는 매우 의미심장한 제목임을 깨닫게 된다. 이 책에는 어린 시절 엄마로부터 가장 큰 상처를 받았던 브라이드 말고도 여러 가지 형태의 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이 여럿 등장한다. 그 아이들의 피부 색깔은 상관없다. 그저 어리고 약하고 힘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상처는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어떤 의미로든 평생을 지배한다.

그럼에도 새 생명, 아이는 또 태어난다. 이 책의 거의 끝 부분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아이. 새로운 삶, 악이나 병에 면역이 된, 납치, 구타, 강간, 인종차별, 모욕, 상처, 자기혐오, 방기로부터 보호받는, 오류가 없는, 오직 선(善) 뿐인, 노여움은 빠진.’ (237쪽). 그런 세상을 꿈꾸며, 그런 세상이 오기를 바라면서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241쪽)라고 끝맺는 이 작품. 아마도 이제 아흔을 바라보는 노작가의 희망과 바람이 여실하게 담긴 구절이 아닐까.

이 작품은 상처투성이 인간들이 여럿 등장하지만 그럼에도 희망적으로 끝난다. 물론 그렇다고 대책 없이 희망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모두 자신의 상처를 완전히 극복했다고도 볼 수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 작게나마 치유 받는다. 브라이드 그녀 자신이 ‘레인’에게 어떤 영향을 줬는지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르고, 검은 여인 브라이드를 보고 싶어 하는 ‘레인’이 나중에 정말 브라이드를 다시 만나게 될지도 알 수 없다. 끝끝내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레인은 브라이드를 아마도 평생 기억하리라. 가슴으로.


새카맣게 검다는 것, 한밤중처럼 검다는 것이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주고, 흑인이 언제나 피해자만은 아니며 때로는 가해자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 <하느님 이 아이를 도와주소서>는 평생 이 문제에 천착해온 작가가 그 나이 즈음에만 쓸 수 있는 작품일 것이다. 그것도 아주 너른 시선으로. 뒤늦게 만났지만 지금 만났기에 더 즐겁게 읽을 수 있었던 토니 모리슨. 나는 이제 그녀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책꽂이에 하나씩 하나씩 그녀의 작품이 들어서게 되리라. 토니 모리슨의 작품을 거의 다 읽은 사람들은 이런 내가 부러울 것이다. 이런 기분은 진심으로 책읽기만이 줄 수 있는 ‘축복’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18-06-12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요즘 뜸하실까.... 하는 찰나에 이 글을 읽습니다. ㅎㅎ
저도 잊지 말고 꼭 읽어봐야겠네요.

잠자냥 2018-06-12 15:53   좋아요 0 | URL
예 요즘 많이 뜸했지요? ㅎㅎ
저도 이달의 페이퍼로 뽑히신 폴스타프 님의 ‘미국 흑인 여성 작가‘에서 몇 권 읽어볼 요량으로 따로 적어두었답니다. ㅎㅎ

양철나무꾼 2018-06-12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뜸하시다 싶어 들락거렸는데, 저와 비슷한 지병(?)이 있으셨군요~^^
저는 토니모리슨이 쉽지 않던데 정영목 님이라서 트라이 투 해보려 했었습니다.
이렇게 님의 귀한 리뷰를 읽고보니 꼭 읽어봐야 겠습니다, 꾸벅~(__)

잠자냥 2018-06-12 17:12   좋아요 0 | URL
책 읽는 분들이 다 갖고 있는 지병이 아닐까요? ㅎㅎ
이 책은 번역도 그렇지만, 문장이 잘 읽힐 거예요. 내용도 흥미진진하고, 책 부피도 부담스럽지 않고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