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혁명이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
문제는 '탈(脫)-정치'가 아니라 '포스트(post)-정치'이다! 

 

 

▷ 타흐리르 광장의 한 순간: "People demand removal of the regime." 우리는 '다른' 체제를 원하는가, 아니면 체제 자체의 '제거'를 원하는가? 바꿔 말하자면, 우리는 단지 정권의 '교체'를 원하는가, 아니면 보다 근본적으로 '정권'이라는 개념 자체의 교체를 원하는가? 아마도 우리는, 이집트의 인민들 앞에서, 그들과 함께, 가장 먼저 이 질문에 답해야 할 것이다.

 
1) E(verybody) G(reets) Y(our) P(eople's) T(riumph)! 이것은 이집트 시민혁명의 승리를 축하하는, 이집트 인민들을 위한 나만의 메시지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 '승리'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문제를 가장 철학적이고 정치적으로, 따라서 가장 실천적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많은 이들이 이집트 '시민'혁명의 성과를 칭송하고 찬양하며, 동시에 포스트-무바라크, 곧 혁명 이후 '권력'의 향방에 주목한다. 그러나 그 주목의 방식은, "과연 다음 '대권'을 누가 잡을 것인가"라고 하는 지극히 환원적이고 협소한 정치[주의]적 질문에 결박되듯 제한되어 있다. 그들에게 시민혁명 이후의 '정치'라는 문제는 결국 '대권'을 잡을 '권력자'라는 개념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고, 여전히 그런 협소한 의미의 정치-사유 구조 안에 갇혀 있다는 말이다. 

 

 

▷ 그들의 어떤 '연대 의식': 사이좋게 손을 꼭 잡고, 역사 앞에 한 점 부끄러움도 없이, 해맑게.

 
2) 한국에서 87년 '시민혁명'의 결과가 결국 '대권'의 차원에서(그리고 정신분석적 의미에서) '노태우 체제'라는 기이한 절충(타협)형성으로 결론[결딴]났던 과거를 돌이켜본다면, 무바라크 이후 누가 대권을 잡을 것인가 하는 권력-환원적인 제한적 사유로부터 벗어나 권력과 정치의 형태 자체를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해야 할 어떤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진다. 우리는 지금 바로 이 지점으로부터 우리의 사유와 실천을 추동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전두환 이후에 노태우가 [그것도 소위 '직선제'로] '권력'을 잡았던 한국의 기이한(?) 전례를 떠올리며, 이집트에서 무바라크 이후에 [오히려 소위 '민중'들 혹은 '우민'들에 의해] 그를 계승하는 반동적인 정권이 다시 출현하게 될 상황을 걱정한다. 곧 어떤 정권이 등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정치적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로 보는 것이다. 

 

 

▷ '개발도상국'들이여, 그저 '도상'에만 있지 말고, 부디 '선진국'이 되거라(될 수만 있다면 어디 한 번), 그렇게 멍청히만 있지 말고, 소위 '녹색 성장(Green Growth)'을 해보란 말이다, 그것도 무럭무럭!

 
3) 하지만 우리가 정작 걱정해야 할 것은 이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가장 근본적으로 걱정하고 또 사유해야 할 것은, 이집트 시민혁명 이후 권력의 형태가 다시금 환원적으로 '최종적 권력자'라는 개념 틀만을 고집스럽게 추구하게 되는 정치-환원주의의 현상일 것이다. 이집트 시민혁명이 세계시민들에게 열어젖히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환원주의로부터 벗어나 정치를 새롭게 사유하고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의 지점이다. 이집트 시민혁명의 '이후'를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이러한 사유의 실험대 위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집트 시민혁명이 어떤 '역사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과거 유럽사회나 아시아의 소위 '개발도상국' 일부가 겪었던 시민혁명의 뒤늦은 '반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듯 앞으로 새롭게 전개되고 사유되며 실험되어야 할 '정치'의 장소와 향방에 있을 것이다. 이 가장 미묘하면서도 절실한 문제의 지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집트는 서구 중심의 민주주의 개념과 헤겔주의적 정치-역사의식의 개념 아래에서 소위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에 마치 당연히 통과해야 할 역사적 경험처럼 부과되었던 어떤 과정, 곧  '마땅히 가야 할' 어떤 것으로 상정된 '정치의 정도(正道)'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집트는 그들 자신의 혁명 자체가 지니고 있는 어떤 독특성(singularité)이라는 문제를 통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정치의 길을 열며 동시에 그 가능성을 되묻고 있는 것이다. 

 

 

▷ 아마도 레닌을 바라보고 있을, 트로츠키의 모습: 영구 혁명(permanent revolution)은 여전히 가능한가?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여전히' 가능하지 않은 것이라면, 우리가 그것을 계속하여 '영구' 혁명이라고 부를 이유는 전혀 없지 않은가?

 
4) 우리는 어쩌면, 저 이집트 인민들이 열어놓은, '영구 혁명이 가능한가'라는 일견 지극히 트로츠키주의적으로 보이는 하나의 질문을, 혁명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둘러싼 현재의 모든 정치경제학적 의미나 상황들과 더불어, 다시금 재-사유하고 재-정립해야 할 기로에 놓여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에 문득, 저 흔하디흔한 자동차의 백미러에 각인되어 있는, 일견 무심하게만 보이는 한 '유명한' 문구를 다시 읽어보게 된다(참고로 나는 운전면허가 없다): "Objects in the mirror are closer than they appear." 이집트의 상황도 우리에게 정확히 이렇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문구와 정확히 '상동적'인 의미에서 말이다. 그들은, 그들이 '그렇게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 가까이에 있다. 그리고 아마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우리의 또 다른 '거울'일 것이다(그리고 이는 동시에,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더 가까이' 있는 그들을 위해, 우리가 어떤 '상상적 거울상'을 깨트려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집트가 던진 이 사유의 물음들에 답해야 한다. ['자랑스러운 한국인' 따위로 환원되어 버리는 국민국가의 노예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세계시민(cosmopolitan)으로서,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또한, [소위 '책임 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스스로 강조하는 '국격(國格)'에 전혀 걸맞지 않게 이 이집트 혁명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않고/못하고 있는 저 모든 '한국적'인 것을 부정하고] 가장 '국제적으로(internationally)'!

— 襤魂, 合掌하여 올림. 

 

 

▷ "사물들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더 가까이 있습니다(Objects in the mirror are closer than they appear).": 이 문장이 더 이상 단순한 '경고문'이 아니라, 익숙하면서도 낯선 하나의 깨달음을 위한 어떤 '격언'이 되기 위해서. 

 

 

 

 

 

 

서지 검색을 위한 알라딘 이미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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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3 14: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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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3 14: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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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2 17: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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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2 21: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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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밀린 일들을 미처 끝마치지 못하고 오늘 유럽으로 공연 투어를 떠난다. 한 달 정도의 시간 동안 독일 뒤셀도르프(Tanzhuas nrw, 11월 7일 공연)와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Mousonturm, 11월 26일 공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Melkweg, 11월 10일 공연), 스페인 엘 페롤(Jofre Theater, 11월 21일 공연)과 마드리드(Madrid Dance Festival, 11월 23/24일 공연), 포르투갈 파로(Devir Capa Black Box, 11월 13일 공연), 아일랜드 더블린(Pavilion, 11월 18일 공연) 등의 도시들을 돌며, 내가 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하는 무용 <몇 개의 질문>의 순회 공연을 하기 위함이다(뉴욕 공연과 싱가포르 공연에 이어 세 번째 해외 공연을 하게 되는 <몇 개의 질문>은 '공연 복'이 많은 무용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마쳐야 할 일들을 다 끝내지 못한 관계로, 나는 공연을 위해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조차 영락없이 글을 쓰고 다듬고 고치고 있을 운명이다. 하지만, 10시간이 넘는 지루한 비행 시간 동안, 그것도 지극히 '경제적인' 이코노미 클래스 좌석에 꼼짝없이 '경제적으로' 앉아, 그렇게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게 그리 나쁠 것 같지만은 않다, 그렇게 나쁠 것만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한다, 생각해 본다. 편치 않은 마음을 애써 편하게 갖고자 한다. 이것이 내가 나만의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한 변태적인 방식인 것.

 
<몇 개의 질문>(안무: 장은정/ 출연: 이소영, 이윤정, 최진한, 한승훈/ 작곡, 연주: 람혼)
2007년 10월 21일,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초연 공연 영상:
http://blog.naver.com/sinthome/40044551630

 

2) 지난 11월 1일에는 프랑스 문화원에서 프랑스의 젊은 철학자 엘리 뒤링(Élie During)과 독대하여 대담을 가질 기회가 있었다. 이 인터뷰는 『자음과모음』 2011년 봄호 지면을 통해 엘리 뒤링의 다른 글 한 편의 번역과 함께 소개될 예정인데, 나로서는 재작년에 가졌던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와의 인터뷰(http://blog.aladin.co.kr/sinthome/2476931) 이후 오랜만에 어떤 한 '정신(esprit)'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알차고 소중한 자리였다. 엘리 뒤링은 그 '멋진 외모'만큼이나 성실한 자세로 대담에 임해 주었다. 지극히 일반적인 철학적 주제들을 통한 평범한 대담을 예상했던 엘리 뒤링은, 그 자신의 모든 저작과 개념들에 기초한 질문들을 제시한 내게 매우 고마워했다. 나 또한 그에게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엘리 뒤링은—베르그손(Bergson) 등의 형이상학에 대한 그의 연구와 푸앵카레(Poincaré), 아인슈타인(Einstein), 스티글레르(Stiegler) 등의 과학철학/기술철학에 대한 그의 천착 등을 통해내게 개인적으로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젊은 시절'을 연상케 하는 철학자이기에, 앞으로의 이론적 행보가 더욱 기대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언젠가 그의 독립적인 저작을 번역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기대한다. 

 

     

▷ 프랑스 문화원에서, 람혼과 엘리 뒤링과의 대담. 

 

 

엘리 뒤링이 내가 갖고 있는 자신의 책들 중 한 권에 해 준 사인:
"정우에게, 서울에서의 감동적인 토론의 추억, 엘리 뒤링"

 

3) 사막의 우물 '두리반'의 어려움이 여전히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전기 공급 문제에 관해서 마포구청은 아직도 묵묵부답이며, 한때 두리반 문제 해결의 실낱같은 희망처럼 여겨졌던 국가인권위원회도 이미 '인권'이 아니라 '국가'를 강조하는 집단이 된 지 오래이다. 그러나 그런 두리반에는 '정치적인 것'과 '음악적인 것'의 만남이 있다. 그래서 두리반이라는 공간은 그 자체로 특수하며 또한 그러한 '특수성'을 통해 어떤 하나의 '보편성'을 현시하고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 '편안한' 느낌 속에서, 또한 우리는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저 익숙한 '불편함'을 직시하게 된다. 이 불편함의 느낌을 확장해 보자면, G20 포스터에 대한 하나의 위대한 도발인 저 유명한 '쥐 그림'이 한껏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그 그림에 대해 "정부 행사를 방해하려는 음모"라고 말하는 공안 검찰은 그 스스로 지니고 있는 치졸하고 야비한 '쥐'의 속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에, 국민을 계몽의 볼모로 업신여기는 G20의 진정한 본색을 생각해 볼 때이다. 정부가 'G20의 성공적 개최'라는 헛된 미명 아래 국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희화화한다면, 국민 역시 그런 정부를 마음껏 비웃을 권리가 있다. 정부가 '국격(國格)'이라는 번지르르한 허명 아래 국민을 개조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국민은 그런 정부에게 '국격' 이전에 먼저 '인격'이나 갖추라고 당당히 요구할 수 있다. 우리는 'G20'이라는 허상 아래, 그러한 요구를 제대로 하고 있는가, 비웃어야 할 때 제대로 비웃어 주고 있는가,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화려한 홍대의 어두운 한쪽 구석, 하나의 상징적 공간이 된 두리반에서, 'G20'이라는 거대한 환상을 다시 생각하게끔 되는 이유이다. 

 

 

▷ 레나타 수이사이드, 두리반에서.

 

레나타 수이사이드(Renata Suicide), <깊은 베개>(람혼: 보컬, 기타/ 반시: 베이스/ 파랑: 드럼),
2010년 10월 30일 두리반 공연 영상:
http://www.vimeo.com/16348589

 

4) 내가 한국에 없는 동안 나의 음악은 내가 없는 곳에서도 조용히 울릴 예정인데, 올해 초 내가 음악을 작곡했던 화제의 연극 <루시드 드림>이 두 번째 앙코르 공연을 진행하기 때문이다. 11월 4일부터 21일까지 대학로 선돌극장에서 상연되는 이번 공연에 아직 이 연극을 보지 않은 많은 관객들이 찾아주기를 고대해 본다. 내가 한국을 벗어나 다른 곳에서 연주하고 있을 때 동시에 한국에서 내 음악이 극장 안을 울리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하는 건 기이한 동시성의 경험이다. 나는 이곳에 없고 저곳에 있지만, 동시에 나는 또한 이곳에 있고 저곳에 없기도 하다. 

 

 

▷ 세 번째 앙코르 공연에 들어간 연극 <루시드 드림>.

 

5) 지난 10월에는 두 개의 공연을 위한 음악들을 작곡했다. 정유정 소설가의 원작 연극 <내 심장을 쏴라>(남산 드라마 센터)를 위한 음악, 그리고 세 명의 젊은 안무가/무용가 공영선, 박성현, 허효선의 신작 무용 <내일의 어제(The Day after Yesterday)>(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서강대 메리홀)를 위한 음악이 바로 그것이었다. 두 공연 모두, 작곡 과정은 참으로 어려웠지만, 돌이켜 보면 너무 소중한 작업이었다. 특히 <내일의 어제>를 위한 음악 작업을 통해서 나는 지금까지의 내 작곡 어법들을 총결산해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가졌다. 앞으로 나의 음악은 또 다시 어떤 방향을 향해 나갈까, 나조차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암중모색의 불편한 느낌이 그리 불편하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아마도 이것이 내가 나만의 '혼란'을 유지하고 소화하고 즐기는 또 다른 변태적인 방식일 것. 나는,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것이다. 돌아왔다가, 다시, 떠날, 것이다. 처음에 떠나지 않았던 장소로, 마지막에 돌아올 수 없었던 공간으로, 그렇게. 그러기를 바란다.

—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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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11-05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다녀오세요. 저는 그동안에 루시드 드림을 보고 있겠습니다.

람혼 2010-11-17 21:18   좋아요 0 | URL
<루시드 드림>은 재미있게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현재 아일랜드 더블린에 와 있습니다. 거센 비바람이 위협하는 숙소 창가에서 글을 남깁니다. 그 비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여러 아일랜드 작가들의 면면이 자연스레 떠오르면서, 그들이 왜 '그런' 글들을 남길 수 있었는지 [지극히 '환경결정론적'인 관점에서] 이해가 되고 있는 중입니다.

blanca 2010-11-05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언가를 창조하고 그것을 들어줄 사람들을 지닌 람혼님이 진심으로 부럽군요. 요즘은 데모할 거리가 없으니 데모를 안 한다던 어른들 앞에서 대꾸하기도 귀찮았던 심정이 조금 부끄러워집니다. 잘 다녀오세요.

람혼 2010-11-17 12:22   좋아요 0 | URL
응원 감사합니다. 저는 독일과 네덜란드, 포르투갈을 거쳐 현재는 아일랜드의 더블린에 와 있답니다. 매번 새로운 관객과 만나는 즐거움이 있는 유럽 순회 공연 일정입니다. 좋은 에너지 많이 받고 축적해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2010-11-06 0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17 12: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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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6 23: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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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7 12: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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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5 19: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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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6 06: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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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6 16: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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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7 01: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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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7 08: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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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8 18: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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柄谷行人, 『 思想はいかに可能か 』, 東京: インスクリプト, 2005.

 

1)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의 초기 비평집 『사상은 어떻게 가능한가(思想はいかに可能か)』를 주섬주섬 읽다가, 문득 내가 몇 개월 전에 썼던 글 한 편이 생각났다. 이에 『텍스트』 2010년 3월호에 기고했던 글을 뒤늦게 이곳에 옮겨 놓는다(이런 식으로 업로드 준비만 해놓고 아직 이곳에 따로 올리지 못한 글들은 점점 쌓여만 가는데─이러한 '축적된 지연'의 이유는 무엇보다 내 글에 대한 나 자신의 지독한 '결벽증' 때문이겠지만, 나는 최근 나의 '조급한 무력증'으로부터도 탈출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나는 다만 조만간 이 모든 글들을 이곳에 차곡차곡 풀어놓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 글은,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의 주류(!) 출판사들이 경쟁적으로 펴내고 있는 소위 '세계문학전집'의 성격을 일별해보고, 그를 통해 '세계문학'이라는 개념을 문제적이고도 논쟁적인 방식으로 살펴보고자 했던 글이다. 나는 이 글이 좀 더 많은 이들에게 그만큼의 많은 논의들을 불러일으키기를 바랐지만 실상은 그러하지 못했다(그 이유는 아마도 물질적으로는 매체와 그 파급력의 문제 때문일 것이고, 이론적으로는 내 글이 지닌 이론적 아포리아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몇몇 출판사들은 나의 이러한 논의 자체를 불편하게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나는 그 출판사들에게 오히려 묻고자 하는 것이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세계문학'이란, '세계'와 '문학'의 개념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 가장 간단한 질문 하나에도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면 '세계문학'이라는 이름의 책을 수백 권, 수천 권 낸들 그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일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그러나 이에 관해 여전히 누군가는 대답하고 있으며, 또한 누군가는 계속 질문하고 있다). 모든 '세계문학전집'들은 바로 이러한 질문에 자신만의 대답으로 응답한 후에 책을 팔아야 할 것이고, 또한 독자들은 이 질문에 대한 그들의 대답을 들은 후에(혹은 독자 스스로 자신만의 질문을 물은 후에) 비로소 책을 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무언가를 '팔고 사는' 일이 대저 그러할진대, 말하자면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순수한 [듯 보이는] 정의(定義, definition)의 문제는 곧 '세계문학은 어떤 형태와 방식으로 판매되고 유통되는가'라는 어떤 정의(正義, justice)의 문제가 되는 것이며, 따라서 이러한 '정의'의 문제는 이러한 관점에서, 그리고 오직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만 유효하다. 가장 '문제적인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이하의 글은 무엇보다 '세계문학'이라는 개념을 둘러싼 '우리 시대의 희극론' 같은 것으로 가장 먼저 읽혀야 하지 않을까, 일단은 그렇게 생각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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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텍스트 』, 2010년 3월호(통권 44호) 



세계문학의 이름으로: 낯선 '세계'와 낯익은 '문학'


최 정 우 (작곡가/비평가/번역가)


1. 오래된 책장을 넘기며:
'세계문학'은 무엇이었나?


 

누렇게 빛이 바랜 책장을 열어 20년 전의 글을 다시 읽어본다. 1990년─그러니까 이제 1990년대도 어느새 20년 전의 시간이 되었다는 이야기인데─금성출판사에서 간행되었던 『세계문학대전집(世界文學大全集)』(전120권)의 발간사에서 편집위원들은 이 전집의 출간을 위한 변을 다음과 같이 다소 거창하고 고색창연한 어투로 밝히고 있었다. 

"말이 있어 생각이 표현되니, 비로소 노래가 있고 사상이 있고 문명이 발달할 수 있는 것이다. 국가와 역사, 종교와 사유의 기원을 말에서 찾는 것도, 말 속에 인간의 본향이 있기 때문이리라. '세계문학'은 그 말의 바다요, 생각의 하늘과 땅이요, 역사의 형상이요, 미래의 비전이다. […] '세계문학'은 말의 편린이 아닌 총합이며, 집대성인 까닭에 인간의 전영역이다. 인간이 지향하는 사랑과 평화와 구원의 기원이 담긴 또 하나의 바이블이다."

다 읽고 나니 실로 숨이 턱까지 차오를 정도로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이보다 더 원대하고 더 이상적인 인류의 기획이 또 있을까? 이 발간사 속에서 '세계문학'은 창해와 천지의 규모를 가뿐히 뛰어넘어 인간적 사유와 실천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엄청난 개념이 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문학은, 그리고 세계문학은, 마치 한 권의 바이블을 짓는 것과 같은, 한 벌의 세계를 짓는 일과도 같은, 일종의 '창조'와 맞먹는 중량감을 지닌 무엇이 되고 있는 것.

그런데 이러한 거대한 개념의 '세계문학'은 우리에게 두 가지 종류의 거대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먼저 역사적이고 분류법적인 관점에서의 착각이 있다. 인류 문명의 작은 일부분에 불과한 '문학'이라는 영역 혹은 장르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서 인류의 행보를 전체적으로 규정짓는 문화사적 보편개념이라고 침소봉대해 생각하게끔 할 수 있는 사상적 폭력의 위험이 바로 그것이다. 다음으로, 첫 번째 착각의 당연한 귀결로서, 상업적인 혹은 경제적인 관점에서의 착각이 있다. 이 전집들만 완벽히 독파한다면 전 인류의 보편적 사유를 곧바로 체득하리라 믿게끔 만들 수 있는 과장된 광고의 폐해가 바로 그것이다(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세계문학전집'이라는 근대적 편제가 지닌 가장 '보편적'인 믿음이자 소망일 것이다). '세계문학'의 거대하고도 보편적인 중요성을 강변하고 강권하고 있는 저 발간사는 말 그대로 지극히 상업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광고 문구임과 동시에 지극히 상징적인 의미에서도 일종의 '경제적인' 프로파간다가 되고 있는 것인데, 이는 바로 여기서 '세계문학'이라는 개념이 지닌 가장 지독한 근대성의 징후가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보편적이고 예술적으로 조탁해낸 언어적 구성물의 '최고정점'이 세상을 포착하고 재현하며 지배한다는, 그리고 세계는 문학으로써 주어지고 해석되며 다시금 갱신된다는, 저 유서 깊은 근대[문학]성의 거대서사. 괴테(Goethe)가 이른바 국민문학의 특수성과 인류적 보편성의 이상적 합일로서 일반적 '세계문학'의 개념을 제시한 이래, 우리에게 '세계문학전집'은 우리 가정의 가장 '내밀한' 정신적 영토인 책장의 안 보이는 저 구석 끝까지 파견된 근대성의 특파원, 우리 삶의 근대성이 지닌 알리바이의 적극적 옹호자이자 변호자의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세계문학전집' 한 질(帙)은 곧 그러한 근대적 담론과 생활의 풍경을 잉태하고 재현하며 애도하기 위한 하나의 질(膣)이기도 했으니.  



▷ 괴테, '세계문학'의 창시자? 

2. 우리의 몇몇 '세계문학전집'들: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


 

그러나 '불과' 20년 전인 1990년대까지도 '잔존'했던 저 고색창연한 근대[문학]성의 거대서사는 포스트모던이라는 사상적 광풍을 거친 우리 시대에 과연 완전히 사라지기만 했던 것일까? 오히려 세계문학은 '여전히' 하나의 유령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유령은 단지 유령으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에 다시 새로운 옷을 걸치고 익숙한 몸을 입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세계문학'이라는 이 유령을 기억하고 다시 바라봐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죽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그것이 '유령'이기 때문에, 곧 그 유령이 부활하여 다시금 우리 주변에 출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국내의 여러 굵직굵직한 출판사들이 경쟁적으로 '세계문학전집'을 다시 내놓고 있는 현상이 바로 그러한 출몰의 풍경일 터. 물론 이 세계문학전집들은 기존 전집들의 관행과 타성을 타파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있으며 그러한 의지는 몇몇 참신한 목록들을 통해서도 강조되고 있는 바이다. [여기서 잠시 '세계문학전집'에 대한 개인적인 취향을 밝히자면, 민음사 전집에서는 곰브로비치(Gombrowicz)의 『페르디두르케』와 『포르노그라피아』, 콜테스(Koltès)의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 핀천(Pynchon)의 『제49호 품목의 경매』, 케루악(Kerouac)의 『길 위에서』 등이(왜 이 전집의 42권이 그람시(Gramsci)의 『감옥에서 보낸 편지』에서 릴케(Rilke)의 『말테의 수기』로 바뀌게 되었는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문학동네 전집에서는 로스(Roth)의 『휴먼 스테인』이, 대산 전집에서는 스턴(Sterne)의 『트리스트럼 샌디』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행인』 등이, 창비 전집에서는 폴란드 편 『신사 숙녀 여러분, 가스실로』가, 펭귄 전집에서는 가르시아 로르카(García Lorca)의 『인상과 풍경』, 버로스(Burroughs)의 『퀴어』와 『정키』 등이 특히 반가운 목록들이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전집들이 권두나 권말에서 제시하고 있는 출간의 변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출사표'야말로 그 전집의 출간이 기반하고 있는 문학적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를 가장 잘 읽을 수 있는 직접적이면서도 은밀한 징후이기 때문이다. 



 

▷ 비톨트 곰브로비치, 『 포르노그라피아 』(임미경 옮김), 민음사, 2004.
▷ 베르나르-마리 콜테스, 『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 』(임수현 옮김), 민음사, 2005.
▷ 안토니오 그람시, 『 감옥에서 보낸 편지 』(린 로너 엮음, 양희정 옮김), 민음사, 2000.

 

먼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 밝히고 있는 출간의 변을 읽어보자:

"세대마다 문학의 고전은 새로 번역되어야 한다. […] 오늘에는 오늘의 젊은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오늘의 번역이 필요하다. 「두시언해」가 단순한 번역 문학이 아니고 당당한 우리의 문학 고전이듯이 우리말로 옮겨 놓은 모든 번역 문학은 사실상 우리 문학이다. 우리는 여기에 우리 문학을 자임하며 오늘의 독자들을 향하여 엄선하여 번역한 문학 고전을 선보인다. 어엿한 우리 문학으로 읽히리라 자부하면서 새로운 감동과 전율을 고대하는 젊은 독자들에게 떳떳이 이 책들을 추천한다."

먼저 이 발간사가 힘주어 이야기하고 있는 번역의 문제와 세대의 문제는 여기서는 잠시 건너뛰도록 하자(그러나 이렇게 건너뛴 번역과 세대의 문제는 바로 뒤에 이어지는 의문 속에 녹아들어가 있다). 이 문장들 속에서 나의 주목을 가장 강렬하게 끄는 것은, 일견 너무나 당연하게 보이는, 그래서 오히려 일부러 눈여겨보지 않는다면 결코 '보이지 않을' 그런 사소한 단어들이다. 그것은 곧 "당당한", "어엿한", "떳떳이" 등, 일견 부차적으로 보이지만 단연 이 발간사의 핵심적인 어조를 담고 있는 단어들인 것. 이 말들은 '세계문학'과 '우리문학' 사이에 놓인 어떤 시차(時差/視差), 어떤 알리바이를 드러내면서도 또한 동시에 감추고 있다. 왜 그러한가? '세계문학'에 동참하지 않는 한 '우리문학'은 한없이 초라하고 피폐하며 수치스러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발간사가 전제하고 있는 것은 '세계'와 '문학'의 개념에 관한 하나의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복속되어 있는 어떤 '희망사항'에 다름 아니다. 그 '소박한' 희망에 따르자면 '우리문학'은 어엿하게 '세계문학'과 당당하고 떳떳하게 어깨를 겨루어야 하는 것이며, 이러한 대의를 위해 '세계문학'은 '우리문학'의 바깥에 있는 어떤 거대한 타자가 되어야 함과 동시에 그로 회귀하고 귀속되어야 할 하나의 절대적 동일자로서 등장하고 있는 것.



▷ 필립 로스, 『 휴먼 스테인 1 』(박범수 옮김), 문학동네, 2009. 

   

▷ 로렌스 스턴, 『 트리스트럼 샌디 1 』(홍경숙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1.
▷ 나쓰메 소세키, 『 행인 』(유숙자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1. 

이번에는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이 밝히고 있는 출간의 변을 읽어보자(이는 '세계문학'에 대한 일종의 '확인사살'이 되고 있는데):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의 변방에서 누리던 고요한 평화는 곧 아득한 과거의 추억이 될 것입니다.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의 중심부로 진입할수록 세계문학은 우리와 멀리 떨어진 이방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는 타자로서 반성적 거울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 세계문학전집은 한국문학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고 문학의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열어젖힐 것입니다."

자, 이 문장들 속에서 '세계문학'의 개념을 둘러싸고 가장 첨예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른바 '중심부로의 진입'이냐 '변방에의 낙오'냐 하는, 문학적이고 역사적으로 지극히 실존적이면서도 생존적인, 선택적이면서도 결코 선택적일 수 없는 하나의 '선택적' 물음이다(그리고 이러한 생존과 선택의 물음은 또한 우리가 왜 해마다 노벨문학상 수여 소식에 관심을 기울이는가라는 의문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 되기도 한다). 곧 여기서 세계문학의 문제는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수행되는 세계체제의 대리전, 정치-문화적 헤게모니 투쟁의 장이 되고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발간사의 이러한 문법대로라면, 오히려 발간사의 저 문장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로, 사실 '세계문학'의 변방에 머물러 있던 [것으로 생각되는] '우리문학'은 결코 한 번도 "고요한 평화"와 "아득한 추억"의 아련하고 느긋한 느낌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 되어야 한다). 이 발간사가 말하고 있는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새로운 시야"란, 그것이 이미 그 자체로 세계문학의 보편성과 특수성이라는 특정한 패러다임을 전제하고 있는 한에서, 결코 새로운 것이 될 수 없다. 중심부와 변방의 대립/해소란 곧 보편성과 특수성의 대립/해소라는 전제로부터 바로 도출될 수밖에 없는 지극히 '근대적인' 문제의식이기 때문이다. 



▷ 타데우쉬 보로프스키(外), 『 신사 숙녀 여러분, 가스실로 』(정병권, 최성은 옮김), 창비, 2010.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 인상과 풍경 』(엄지영 옮김), 웅진씽크빅, 2008.
▷ 윌리엄 버로스, 『 정키 』(조동섭 옮김), 웅진씽크빅, 2009. 

창비 세계문학전집의 경우는 이러한 도식의 보다 직접적인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하겠는데, 아예 문학의 국가별 분류법을 당연하게 전제하고 있는 듯한 편제(영국 편, 미국 편, 독일 편, 스페인/라틴아메리카 편, 프랑스 편, 중국 편, 일본 편, 폴란드 편, 러시아 편)가 그러하다. 바로 여기서 이 세계문학전집이 전제하고 있는 '세계'와 '문학'의 의미나 범위가 드러나고 있는 것. 대산 세계문학총서의 경우 국내에 잘 소개되지 않은 '고전'의 초역을 목표로 한다는 변별점이 있지만, 그렇다고 이 총서가 앞서 내가 문제 삼았던 '세계', '문학', '세계문학'의 개념을 새롭게 사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소위 '정전(正典)'으로서의 고전이라는 기준은 여전히 유효하며 권장되고 발굴되기까지 하는 것이다). 곧 현재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세계문학'의 이데올로기란 어쩌면 언제부터인가 계속 동일하게 유지되어온 하나의 유서 깊은 '편견'일지 모른다. 그러한 '세계문학'이란 '우리문학'이 민첩하게 포착하고 근원적으로 귀속되어야 할 어떤 "본향(本鄕)"으로 상정된 영역, 특수성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러한 특수성을 넘어서 도달해야 할 하나의 보편성으로 설정된 지점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현재의 '세계문학전집'들이 담고 있는 담론의 기본적 내용은 20년 전의 문법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며(오히려 '문학적'이라기보다는 더욱 '정치적'이고 '경제적'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텐데), 더 넓게는 그 20년 전의 문법 또한 보다 광범위한 '근대문학'의 규범과 분류법으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문학전집'을 구성하는 '진정한 고전'의 형식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바로 그 전집의 발간사 속에서 발견되는 무엇이다. 그래서 그 '고전'들은 국가의 역사와 민족의 문학이 어떤 특수성에서 출발하여 하나의 세계적 보편성으로 나아가는 근대적이고 변증법적인 길에 대해 실로 주옥같은 '명대사'들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동시대의 역사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서 동참하고 있다는 거대한 역사적 환상을 불러일으켜주는 저 명대사들에, 우리는 아마도 거의 모두 깜빡 속아 넘어갈 것이다. 우리는 지금 '세계문학'을 읽고 있다는, 그래서 우리는 변방이 아니라 중심에 있다는, 또한 그래서 우리는 저 '세계'와 '문학' 앞에서 비굴하지 않고 떳떳하고 당당할 수 있다는 하나의 거대한 환상. 내가 '세계문학전집'에서 목격하고 체감하는 것은 바로 이 거대한 환상의 거스를 수 없는 매력과 위험이다. 따라서 지금 나에겐, 가장 오래되었지만 또한 가장 절실한 하나의 질문을 다시 묻는 일이, 더욱 시급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근대, 국민, 국가, 문학을 둘러싼 물음들:
'세계문학'이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따라서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그 자체로 근대적인, 너무나 근대적인 물음이다. 그러나 그 질문은, 그것이 '세계'의 개념과 '문학'의 개념을 동시에 다루고 있는 것이기에, 또한 그 자체로 근대를 넘어서는 물음이 되고자 한다. 따라서 결국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그 자체로 근대적이면서도 탈근대적인 지극히 '문제적'인 물음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이 하나의 질문을 구성하는 세 가지 부속적 질문들을 다시금 지극히 '새삼스럽게' 던져보고자 한다. 첫째, '세계'의 개념이란 무엇인가? 이는 외견상 '세계'의 정의를 직접적으로 묻고 있는 물음이지만, 그렇기에 동시에 또한 국가, 민족, 국적의 의미를 그 배음으로 깔고 있는 물음이기도 하다. 세계의 개념과 정의는 현재의 국민국가 체제와 세계화라는 패러다임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둘째, '문학'의 개념이란 무엇인가? 예를 들어 왜 '세계문학전집'의 주요성분을 이루는 것은 시나 희곡이 아니라 소설인가? 이 문제는 근대의 문학적 형식과 세계문학의 개념이 탄생하게 된 문화사적이고 경제사적인 문제와 그 궤도를 같이하는 것이다. 셋째, 따라서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 이 세 번째 물음은 다시 세 개의 물음으로 나뉠 수 있다. 첫째, 우리는 국가, 민족(국민), 국경, 국적의 개념을 넘어서는 비(非)-장소(비-국가), 난민(비-국민), 경계(사이), 무국적의 문학을 설정하고 상상하고 실행할 수 있는가? 둘째, 소설이라고 하는 지극히 '근대적'인 장르를 넘어서는 또 다른 장르, 또 다른 형식, 또 다른 문학적 지형을 우리는 '세계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창출할 수 있는가? 셋째, 세계문학의 '진정한' 형태는 과연 존재하는가? 곧, 우리는 '문학'을 통해 어떻게 '세계'와 만날 수 있는가, 혹은, 우리는 '세계'라는 개념을 어떻게 '문학'을 통해 변혁하고 쇄신하며 따라서 새롭게 창안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세계문학'이라는 개념과 '세계문학전집'이라는 편제는, 우리에게 이러한 근대성의 물음들을 첨예하게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만, '보편적' 문제의 형식일 수 있다. '우리'는 '세계'를, 그리고 '우리문학'은 '세계문학'을, 어떤 정치 아래에서 어떤 미학으로 정의하고 재현하며 추구하고 있는가? 곧 이러한 '문학적' 물음은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정치적' 물음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우리의 '세계문학전집'이란 그 자체로 '제3세계적'인 형식의 대표적 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구미(歐美)에서는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세계문학전집'의 체제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구조의 문제이며 더 적확하게는 세계체제와 헤게모니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비유적으로 그리고 극단적으로 말해, 구미에서 '세계문학'이 문학적 보편성의 알리바이를 완성시키고자 하는 '인류학적' 사례들의 어떤 수집벽(蒐集癖)을 의미한다면, 한국에서 '세계문학'이란 그러한 보편적 알리바이에 조급히 동참하고 동일화되고자 하는 '식민지적' 사후약방문의 어떤 도벽(盜癖)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문학'이란 그 자체로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민국가별로 특수하며 차별적인 체계를 갖는 것이며, 우리의 '세계문학전집'은 그 자체로 '세계문학'인 것이 아니라 '우리문학'의 특수성과 그 특수성에 대한 어떤 근대적 열등감이 드러나고 있는 징후인 것이다. 세계문학은 만국공통의 언어도 아니고 국제표준의 분류체계도 아닌 것. '우리의' 세계문학 개념이 하나의 '징후'이며 또 그런 '징후'로 읽힐 수 있는 이유는, 첫째, 그러한 세계문학이 '세계적으로' 국민국가들 사이의 위계와 서열과 헤게모니 관계가 어떤 순서로 어떻게 정렬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국가적' 투시도이기 때문이며, 둘째, 또한 그러한 세계문학은 '국내적으로' 그러한 투시도가 특정한 '민족적' 방식으로 왜곡되고 곡해되어 변형/전유된 하나의 '이식문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세계문학전집'이란, 말 그대로의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광범위한 대외용/국제용이 아니라, 우리문학의 '보편적 알리바이'를 위한 편협한 대내용/국내용의 '세계문학'일 뿐이다('세계문학전집'이 지닌 이러한 '국내성'의 문제는 바로 그러한 '고전'들이 '학생들의 논술시험에도 좋다'는 식으로 선전되는 '교육적' 광고 문구에서 가장 천박한 형태로 드러난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물어야 할 질문은, 이러한 '세계문학전집'이 과연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재생산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2008년 홀베르그 국제기념상 수상 강연에서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이러한 '세계문학'의 대외성과 국내성 혹은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를 "세계문학은 외무부를 두고 있는가(Does world literature have a foreign office)?"라는 다소 도발적인 물음으로 정식화한 바 있다. 문강형준 옮김, 「세계문학은 외무부를 두고 있는가?」, 『자음과모음』, 2009년 가을, 1109-1124쪽 참조.] 

 

▷ 강연 중인 프레드릭 제임슨. 

이를 위해 먼저 서로 성격이 전혀 다른 몇 가지 질문들을 두서없이 던져보도록 하자(그런데 이 질문들의 '성격'들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를 포착할 수 있다면, 그래서 이 질문들이 그렇게 '두서없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간파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저 '세계문학'이라는 거대한 근대성의 문제가 지닌 '문제적' 지평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박경리의 『토지』와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세계명작소설'인가 아니면 '한국대표문학'인가? 박상륭의 문학은 '세계문학'인가 아닌가, 혹은 그의 문학은 그 자체로 '세계적'인가 아니면 '한국적'인가? 바로 어제 갓 등단한 한국작가의 소설은 '세계문학'의 범주에 속할 수 있는가?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사드(Sade)의 『소돔 120일』은 동일한 위계에 놓일 수 있는 '세계문학(들)'인가? 바로 이러한 질문들이 곧 세계문학이 지닌 보편성과 특수성, 세계전체와 국민국가, 국제 언어와 민족 언어, 고전의 정의와 시대의 성격 등 모든 '세계-문학적' 물음들의 부분-전체인 질문들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세계문학전집'들은 이러한 물음들을 묻고 있는가? 아니, 그러한 물음들을 물을 수 있는 체제와 편제를 그 자체로 갖고 있는가? '세계문학'이 무엇인지 묻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이 질문들에 대답해야 한다. 하지만 또 다른 질문들이 있다. 



Sade, Œuvres complètes du Marquis de Sade, tome 1, Paris: Pauvert, 1986. 

       

▷ 박지원,『 열하일기 1 』(김혈조 옮김), 돌베개, 2009.
▷ 박지원, 『 연암집 上 』(신호열, 김명호 옮김), 돌베개, 2007.

말하자면, '사드와 함께(avec Sade) 박지원을...'이라는 '세계문학적' 설정은 과연 가능할 것인가? 


4. 차이와 불일치들의 '전집'을 위하여:
어떠한 '세계문학'을 요청해야 하는가?

 

그리하여 묻자면, 우리의 '세계문학'은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격렬히 반대했던 시애틀 시위와 함께 행동할 수 있는가? 우리의 '세계문학'은 아이티의 비극을 함께 아파할 수 있는가? 우리의 '세계문학'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과 코펜하겐 기후협약의 문제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그런데 만약 우리의 '세계문학'이 이러한 문제들에 답할 수 없다면, 아니 이러한 문제들을 물을 수조차 없다면, 우리에게 그러한 '세계문학'이란, 아니 그저 '문학'이란, 도대체 어떤 보편적 의미를 띨 수 있는가? 나는 여기서 저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테제에 관한 논쟁을 새삼 반복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이 세계문학이라는 거대서사가 지닌 어떤 '보편성'을 건드리는 것이라면, 동시에 우리는 그 세계문학의 '특수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되물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저 '당당하고 떳떳하며 어엿하기까지 한' 세계문학은, 용산참사에서 죽어간 영혼들을 함께 애도할 수 있는가? '법치(法治)'라는 이름을 참칭하여 외려 '법치(法癡)'와 '법치(法恥)'의 나라를 만들고 있는 현재 우리의 '국민국가'에 대해, 우리는 '세계문학'의 이름으로 묻고 또 답할 수 있는가?

물론 누군가는 이 지점에서 내가 세계문학이 지녀야 할 어떤 '현재성'을 너무 즉물적으로 사고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사회 반영적 문학이나 현실 참여적 문학의 중요성 또는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당연하게도 문학은 단순한 물리적 실천이나 프로파간다가 아니며 또 그렇게 될 수도 없기에. 다만 내가 바라는 '세계문학'이란, 내가 소장하고픈 '세계문학전집'이란, 이러한 물음들에 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 않을까, 혹은 최소한 이러한 물음들을 물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문학이란 어쩌면 일종의 비교문학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비교문학'이란 일반적 학제로서의 다국적 문학들 사이의 비교연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 '비교'란 허구적 보편성의 완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잡다하고 불편한 차이들의 확인을 위해 필요한 무엇이다. 그리고 만약 세계문학이 존재할 수 있고 또 존재해야 한다면, 그 이유는 바로 이 불편한 차이들과 불일치들의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요청될 수 있고 또 요청되어야 하는 이 차이와 불일치의 '세계문학전집'이란 어쩌면 그 자체로 불가능의 기획을 가리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세계문학은 없다' 따위의 부정적이고 확정적인 언사를 내뱉으며 어설픈 포스트모던의 몸짓을 취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계문학은 존재하며, 그러나 동시에 지금 존재하는 방식이 아닌 어떤 다른 형태로 존재하기를 요청받고 있다. 문제는 그 '세계'가 어떤 세계이며 또한 그 '문학'이 어떤 문학이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계적'이고도 '문학적'인 요청으로부터 한 순간이라도 자유로울 수 있을까? '세계문학'이 우리에게 불편하게 묻고 있는 물음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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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리 이글턴, 『 문학이론입문 』[구판](김명환, 정남영, 장남수 옮김), 창작과비평사, 1986.
▷ 테리 이글턴, 『 문학이론입문 』[개정판](김현수 옮김), 인간사랑, 2001.

 

     

▷ 테리 이글턴, 『 우리 시대의 비극론 』(이현석 옮김), 경성대학교 출판부, 2006.
▷ 피에르 마슈레, 『 문학 생산 이론을 위하여 』(배영달 옮김), 백의, 1994.

 

   

Jacques Rancière, Politique de la littérature, Paris: Galilée, 2007.
▷ 자크 랑시에르, 『 문학의 정치 』(유재홍 옮김), 인간사랑, 2009. 

2) 그러므로 내게는 몇 가지 '다시 읽기'가 가능하고 또 필요할 것이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의 문학론, 피에르 마슈레(Pierre Macherey)의 문학론,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의 문학론 등이 그러한 읽기의 재료가 될 터. 이는 또한 일반화된 문제설정으로서의 '문학의 정치'를 다시 읽기 위한 작업이 되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다시 읽기'의 작업이란, 가장 먼저 '문학'의 개념 바로 그 자체를 직접적인 목표로 삼는 것이겠지만, 또한 무엇보다 저 '문학'이라는 개념의 주위를 에둘러 가는 우회(détour)와 귀환(retour)의 작업이기도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말하자면, 이택광 선생은 최근 자신의 블로그(http://wallflower.egloos.com/3416668)에 내 글이 지닌 성격과 전망에 관해 소중하고 감사한 고견을 제시한 바 있는데, 내가 항상 경계하며 혐오해 오고 있는 부분이 바로 그가 염려하는 저 '문학비평으로의 흡수'라는 지점임을 생각해보면, 그의 견해는 상당히 날카로운 데가 있다고 하겠다. 이택광 선생의 말 그대로, "사유의 형식으로서 현실을 드러내는 에쎄(essai)의 본령을 장르화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그 자체로 글쓰기가 내게 의미하고 제시하는 어떤 절체절명의 문제이다. 이 점을 알아주는 이가 있다는 사실은 내게는 참으로 감사하고 소중한 일이다(子曰, "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라 했거늘, 역시 나는 '군자'가 되기에는 아직 한참 모자란 모양이다). 이에 그의 글에 힘입어 다시 내 신발끈을 조여 묶는다.

─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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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9-08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읽고 나니 꼭 몰래 도강한 느낌이 드네요...
많은 생각거리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계문학에 대한 밀도 높은 문제제기를 하신 데 대한 댓글치곤 엉뚱하고 형편없지만,
정교하고 명징한 사유가 그에 걸맞은 두께를 갖는 문체에 담긴 에쎄, 우리말로도 그런 에쎄가 가능하다는 걸 람혼님의 글을 통해 (지금도 그렇지만) 조만간 다시 확인할 수 있겠군요^^

람혼 2010-09-08 13:49   좋아요 0 | URL
모두가 자신의 서재를 통해 자신만의 '강연'을 펼치고 우리는 모두 그런 강연들을 마음껏 '도강'할 수 있는 게 이 마을의 매력이 아닐까 합니다. 저도 손창섭의 죽음이 지닌 의미와 맥락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후와님의 좋은 글을 적절한 때에 만나 '도강'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할까요.^^ 말씀해주신 그런 '가능성'에 대한 의지로 앞으로도 勇猛精進 하겠습니다.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0-09-08 0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08 1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최원 선생님이 제기하신 '정의론 비판', 특히 세 번째 장('철로를 이탈한 전차')과 관련하여: 

 

샌델이 제시한 저 딜레마의 질문들 속에 '자신의 의지를 갖는 단 하나의 주체'가 너무 당연하게 전제되어 있고 또 그렇기에 거기서 누락되고 있는 '주체'와 '결정'과 '권리'의 문제를 가장 근본적으로 제기해야 한다는 최원 선생님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러한 주장이 샌델 자신이 제기한 첫 번째 물음과 두 번째 물음 사이의 어떤 '미묘한' 차이에 의해 도출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책을 읽은 것은 아니고 샌델의 하버드 강의를 동영상으로 본 것인데요, 거기서 그는 두 번째 물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의도적 살인행위라는 한 학생의 지적(따라서 이 학생은 최원 선생님이 제기하시는 문제와 정확히 같은 맥락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죠)에 대답하며, 두 번째 질문을 이렇게 바꿀 것을 제안합니다. 곧, 내가 물리적으로 그 뚱뚱한 사람을 손으로 밀어 떨어뜨리는 게 아니라 첫 번째 질문에서와 비슷한 상황으로 그 상황을 바꿔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내가 그 뚱뚱한 사람을 밀 수 없고(예를 들어 그 사람과 나 사이에는 칸막이가 있고) 단지 핸들을 돌림으로써만 그 사람을 철로로 떨어뜨릴 수 있다는 식으로 가정해보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첫 번째 질문에서도 한쪽 철로의 다섯 사람 대신 다른 쪽 철로의 한 사람을 죽인다는 결정 역시 이런 입장에서 보자면 '의도적 살인행위'라고 이야기할 수 있으며, 그 반대로 두 번째 질문의 경우 또한 첫 번째 질문의 경우처럼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 아래에서 내린 결정'으로 [수학적이고 원리적으로] 환원해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보기에 샌델의 입장에서 최원 선생님이 말씀하신 그 '미묘한' 차이는 이 두 질문 '사이'에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샌델이 이 두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 두 질문 모두에서 주체와 권리의 문제를 너무나 당연시하고 타자의 권리와 결정을 누락시키고 있다고 비판할 수는 있어도, 그 두 질문 '사이'의 어떤 '미묘한' 차이점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다고 비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최원 선생님 말씀처럼, 일단은 이 두 딜레마의 질문들이 샌델이 자신의 논의를 위해 고안한 하나의 논리적/윤리적 연산이기 때문이고, 또한 그 두 질문은 사실 '의도'와 '행위'와 그 '결정성'의 문제에 있어서는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차이가 없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비판점은 그 두 질문이 모두 '공통적'으로 기대고 있는 전제 자체, 그리고 그 전제에서 누락되고 있는 주체와 권리의 '자연적' 성격에 맞춰져야 하는 것이지, 샌델이 제시하고 있는 두 질문 '사이'에 그런 '차이'가 있다는 지적으로부터 그런 비판을 도출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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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4 02: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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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5 06: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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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바깥, 바깥의 연극: 알튀세르와 브레히트
알튀세르의 서명과 자서전의 (불)가능성

 

 

▷ 칠판 앞에 앉아 있는 루이 알튀세르의 모습.

 
1) 2010년, '맑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 타계 20주년을 맞이하여 그를 '다시 읽는' 심포지엄이 서울의 한 [대학교가 아닌] '유흥가' 한복판에서 열린다(그리고 나는 사실 개인적으로 이 점이 참 마음에 든다). 일시는 2010년 8월 25일 수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이고, 장소는 홍대 상상마당 4층 아카데미이다. 나도 여기서 '알튀세르의 예술론'에 관한 발표를 한 꼭지 맡게 되었는데, 발표문 제목은 「미학으로 생산되지 않는 미학 ─ 알튀세르 예술론의 어떤 (불)가능성」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알튀세르 미학은 구성될 수 있는가',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형태와 어떤 방식으로 구성될 수 있는가'라는 다소 해체적인 물음들로써 알튀세르의 '미학' 혹은 '예술론'을 (되)돌이켜보고 또한 (탈)구성해보려고 한다. 그런데 묻자면, 이러한 '해체적' 시도는 과연 가능한 걸까, 혹은 과연 성공적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또한 답하듯이 묻자면, 바로 이 질문에 대한 긍정의 대답은 바로 저 질문들 자체에 대한 부정이 되어버리지는 않는가? 그리하여 다시 묻듯이 답하자면, 이것이 알튀세르의 예술론을 말하는 데에 있어 가장 본질적인 아포리아가 아닐까? 알튀세르 미학에 대한 나의 관심은 바로 이 가장 (불)가능한 쟁점들 위에 놓여 있다. 어쨌든 나는 현재 우리가 알튀세르를 '다시 읽는' 일이 바로 이러한 '해체적 공정'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고, 또한 그럼으로써 비로소 바로 그 '다시 읽기'가 가능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하 알튀세르 심포지엄 <알튀세르 효과: 사망 20주년, 알튀세르를 다시 생각한다>의 포스터를 첨부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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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알튀세르 심포지엄을 위한 블로그가 현재 '성업(盛業)' 중이다(http://althusser.greenbee.co.kr). 현재 서관모, 서동진, 서용순, 진태원 선생 등 발표자들의 릴레이 인터뷰 연재와 함께 관련 자료들(알튀세르의 연보와 저작 목록, 발표자들의 다른 알튀세르 관련 글들 등)도 함께 선보이고 있는데, 내용은 심포지엄 당일 전까지 계속 업데이트 예정에 있다. 나는 이곳에 인터뷰와 함께 이전에 발표했던 알튀세르 관련 글 두 편(「음악의 바깥, 바깥의 연극: 알튀세르의 '유물론적' 연극론과 연극음악의 '소격효과'」, 「자서전을 위반하는 자서전: 알튀세르의 서명과 자서전의 (불)가능성」)도 다시 올려 놓았는데, 이하에서는 그중 인터뷰만을 옮겨 싣는다(인터뷰 원문: http://althusser.greenbee.co.kr/11): 

 

 

 

람혼 인터뷰: 

알튀세르, 예술과 정치의 만남

1. 알튀세르뿐만 아니라 어떤 학문적 관심사를 갖고 계신지, 현재는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지 알고 싶습니다.

─ 기존의 이상적/역사적 '코뮤니즘(communism)'과는 다른 형태를 띤 '공동체(community)'의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주목하고 있는 이론적 계보는 바타이유(Bataille), 블랑쇼(Blanchot), 낭시(Nancy), 아감벤(Agamben) 등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느슨한 선'인데, 이들이 공통적으로 혹은 다각적으로 논의한 공동체(들)의 모습은 어떤 것이며 또한 그것은 어떤 미래를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현재 저의 가장 큰 이론적/실천적 관심사입니다. 그러한 공동체는 어떤 '불가능성'을 자신의 존재/부재 조건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상당히 독특하고 개별적이면서도 매우 전복적이며 집단적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전체성으로 통합되지 않으면서도 개별적인 것으로 전락하지 않는 독특성(singularity)의 총체성이 어떻게 가능할까 하는 문제가 이러한 관심의 중핵입니다. 현재 문예계간지 『자음과모음』의 편집위원을 맡고 있고, 철학, 문학, 음악, 연극 등에 관해 다양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올해 출간을 목표로 첫 비평집과 연극음악에 대한 책을 함께 다듬고 있는 중입니다.

2.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서 알튀세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 또는 알튀세르를 처음 공부할 당시의 느낌 같은 것들을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고등학교 1학년 때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의 첫 국역본(돌베개, 1993)을 지극히 '우발적으로' 읽게 된 일이 알튀세르와 처음 만나게 된 계기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암울한 고등학교 시절, 어설픈 이해와 지난한 독해를 반복하며 읽었던 계간지 『이론』은 제게 맑스주의의 '현재'를 둘러싼 최신의 이론적 동향들을 학습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어주었습니다. 알튀세르와 관련된 책들이 많이 부족한 상황에서 고등학교 3학년 때 때마침 출간되었던 윤소영의 『마르크스주의의 전화와 '인권의 정치'』(문화과학사, 1995)는 저의 목마름을 어느 정도 해소해주었습니다. 그 이후 대학에 들어와 알튀세르의 원전들과 관련 글들을 하나둘씩 읽기 시작했습니다. 알튀세르는 맑스를 단순히(?) 실천의 입장에서 '정치경제학적'으로가 아니라 이론의 맥락에서 '철학적'으로 읽는 방법을 제게 제시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러한 '독서의 방법'이 별로 새로울 것은 없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알튀세르를 통해 맑스를 하나의 '철학자'로 온전히 인식하게 된 것 같습니다.

3. 지금 한국에서 알튀세르 심포지엄을 연다거나, 알튀세르를 재조명하는 것의 의미, 알튀세르 사유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 알튀세르의 '유산' 안에는 그의 이론적 공과(功過), 곧 그가 열정적으로 추구했던 맑스주의 쇄신의 방향과 그가 고통스럽게 부딪쳤던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아포리아들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이론과 실천의 영역에서 최근 '새삼스럽게' 주목받고 있는 이른바 '정치철학의 귀환' 안에는, 그러한 알튀세르의 유산에 대한 반성과 회고, 그에 대한 희망과 절망의 흔적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점에 비춰볼 때 우리는 어쩌면 알튀세르의 이름과 그 유령(들)을 '너무도 빨리' 망각했거나 '너무도 늦게' 소화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다소 비약적인 비유를 하자면, 개체발생이 계통발생을 반복하는 것과 비슷한 형상으로(혹은 그와 정반대로), 알튀세르 개인의 이론적 행보가 겪었던 좌절과 영광은 일정 부분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 안에서 맑스주의가 걸어온 길과 어떤 '동시성'을 공유한다고 생각합니다. 드디어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맑스주의의 위기가! 우리는 이 전혀 새삼스러울 것 없는,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새삼스러울 정도로 유효한 이 탄식의 문장을 또 다시 발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우리는 이론적일 뿐만 아니라 정세적인 위치에서도 다시금 알튀세르를 요청하고 또 필요로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향후 유물론적 사유의 나아갈 길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관해 알튀세르의 이론은 여전히 많은 점들을 시사하고 있는데, 그가 말년에 정식화했던 우발성 혹은 마주침의 유물론이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또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가, '주체'란 무엇인가, '혁명의 무기로서의 철학'이 가능할까 등등(이 모든 질문들에는 '여전히'와 '새롭게'라는 부사어구들이 동시에 첨부되어야 합니다), 이 가장 오래된, 하지만 동시에 아직도 가장 신선한 질문들은 우리가 다시 알튀세르의 이름을 소환할 수밖에 없는 한 이유가 됩니다. 더불어 맑스 이외에 알튀세르가 주목했던 많은 정치사상가들, 곧 마키아벨리, 스피노자, 몽테스키외, 레닌 등에 대한 그의 글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최근 우리의 정치적 아포리아에 관해 사유할 수 있는 이론적 동력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최근에 최장집은 한 일간지(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한국에 필요한 사상은 맑스의 것이 아니라 마키아벨리의 것이라는 취지의 주장을 펼친 바 있는데, 맑스와 마키아벨리 둘 모두에 주목했던 알튀세르가 이 말을 듣는다면 어떻게 반응할지 개인적으로 상당히 궁금합니다).

4. 우발성의 유물론, 맑스주의 철학, 국가장치 분석 등 알튀세르는 '정치'를 사유한 철학자의 이미지가 강합니다(『맑스를 위하여』에 실린 베르톨라치와 브레히트 연극에 관한 노트도 있고, 90년대 문예비평에서 알튀세르 사상이 활용된 바도 있지만 말이지요). 알튀세르 속에 '문학예술'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요소가 있는지, 있다면 그것은 어떤 유의미성을 가지고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또 그러한 요소들이 알튀세르의 여러 작업들 속에서 어떤 위치를 가지고 있는지 말씀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현재 한국에서 (특히 시와 관련하여) 이뤄지고 있는 예술의 어떤 '정치성'에 대한 활발한 논의들은 과거의 것과는 전혀 다른 지형과 맥락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요컨대 현재의 '예술-정치'가 지닌 문제의 틀은 예술이 지닌 정치적 배경과 기원에 대한 분석(예술사회학)도 아니고 예술 안에 잠복해 있는 협의의 정치성에 대한 재발견(참여예술론)도 아닙니다. 예술을 소진하고 정치를 남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예술이 정치와 어떤 방식으로 결합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현재 더욱 첨예한 문제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과 관련해 우리는 알튀세르의 연극론을 다시 참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알튀세르는 직접적으로 예술에 관해 그렇게 많은 글을 남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특히 그의 연극론은 유물론적 연극 혹은 유물론적 예술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여전히 많은 시사점들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또한 알튀세르가 브레히트의 연극론을 이야기하면서 말했던 ('새로운 예술'이 아닌) '새로운 실천'의 문제의식은 레닌과 철학에 대한 그의 논의, 더 나아가 철학 그 자체의 역할과 입장에 대한 그의 일반적 논의와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공명하고 있으며, 연극적으로는 '소격효과', 정신분석적으로는 '이동/전위', 정치적으로는 '자리바꿈' 등의 의미로 해석되는 'déplacement'은 특히 알튀세르의 예술론 또는 그의 사상 전반과 관련하여 새삼 깊이 천착해야 할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알튀세르가 맑스를 독해하는 주요한 방법으로 밝혔던 '징후적 독해'는 현대 예술이 그 자신의 표현과 수용 방식에 관련하여 여전히 숙고해야 할 하나의 문제적 방법론으로 남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알튀세르를 통해 현대 예술 안에서 '당파성'에 관한 논의를 증폭시키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5. 다양한 활동을 하고 계신 걸로 아는데, 향후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 앞에서 밝혔듯이 첫 비평집과 함께 연극음악에 대한 책을 준비 중입니다. 그리고 제가 몸담고 있는 밴드 Renata Suicide의 정규 1집 앨범에 수록될 곡들을 녹음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껏 해왔던 대로 연극과 무용을 위한 무대음악 작곡과 연주 작업도 계속 병행해나갈 계획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알튀세르의 연극론/예술론은 제게 어떤 예술적/정치적 지침으로 작용한다기보다는 끊임없이 물음들을 생산하는 일종의 질문지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철학과 예술 사이의 접점과 긴장, 이론과 실천 사이의 왕복과 동요는 알튀세르가 여전히 제게 '새삼스럽고도 끈질기게' 제기하는 문제들이며, 아마도 이는 예술적 실천들이 지속되는 한 제게 '창조적 아포리아'들을 계속해서 제공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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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is Althusser, Pour Marx, Paris: Maspero, 1965.
Louis Althusser, É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tome II, Paris: Stock/IMEC, 1995.

 

3) '예고편'과도 같은 가장 기본적이며 서지적인 힌트를 하나 남기자면, 알튀세르의 예술론을 가장 직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책은 크게 두 권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맑스를 위하여(Pour Marx)』이고 다른 하나는 『철학 정치 문집(É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2권인데, 전자에는 알튀세르 연극론의 핵심을 [거의 유일하고도] 결정적으로 드러내는 글 「피콜로 극단, 베르톨라치, 그리고 브레히트: 한 유물론적 연극에 관한 노트」가 수록되어 있고 후자의 말미에서는 알튀세르가 생전에 예술에 관해 직접적으로 쓴 글들을 따로 한 장(章)으로 묶어내고 있다(그중 대표적인 글은 「브레히트와 맑스에 대하여」와 「크레모니니, 추상적인 것의 화가」등을 꼽을 수 있겠다). 

 

 

▷ 서재 바닥에 '차곡차곡' 널브러진(?) 알튀세르의 '시체'들.

 
4) 절판되었든 유통 중이든 여하간 기존에 번역되었던 알튀세르의 책들 외에도, 알튀세르가 발리바르(Balibar), 에스타블레(Establet), 마슈레(Macherey), 랑시에르(Rancière)와 함께 저술했던 그의 대표적인 저서 『『자본』을 읽자』, 그리고 1955년에서 1972년 사이 알튀세르의 고등사범학교 강의록인 『정치와 역사』 등이 현재 번역 중이라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온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그의 『철학 정치 문집』 1, 2권 전체가 가장 빨리 번역되어 소개되었으면 하는데(물론 이 중 일부의 글들은 이미 다른 책들을 통해 번역된 바 있다), 이 두 권의 책들 속에는 앞서 언급한 예술에 대한 글들 외에도 「레비-스트로스에 대하여」(1966), 「포이어바흐에 대하여」(1967), 「인간주의 논쟁」(1967), 「철학에 관한 노트」(1967-1968), 「자신의 한계 안에서의 맑스」(1978),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1982), 「유물론적 철학자의 초상」(1986) 등, 알튀세르의 사상 전체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텍스트들이 산재해 있다. 

 

 

▷ 현재까지 Stock/IMEC에서 출판된 알튀세르의 '남겨진' 저작 여섯 권의 표지들.

 
5) 이번 원고를 준비하게 된 덕분에 실로 오랜만에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알튀세르의 전 저작들을 방바닥에 늘어놓은 채 그 논의들을 전체적으로 일별하고 인용문들을 골라내는 '사치스러운' 작업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 여름의 열기가 최절정에 도달했던 시기에 나는 알튀세르와 '함께'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느낌이 든다. 그래서 어쩌면 저간의 작업이 내게는 개인적으로 더욱 '뜨겁게' 느껴지고 기억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밤으로는 어느덧 가을 바람이 불어오는 때가 되었지만, 나는 저 열기를 오래 간직하고 싶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라는, 이 역시 어느덧 진부해지고 만 한 '유명한' 결어 대신에, 시험적으로 나는 저 '미래'라는 단어를 '열기'로 한번 대체해 본다. 미래는 여전히 뜨겁다.

─ 襤魂, 合掌하여 올림. 

 

 

 

 

 

서지 검색을 위한 알라딘 이미지 모음(알튀세르 저서들과 연구문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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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7 13: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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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7 21: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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