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뜸과 눈멂의 계보학:
하나의 시점, 두 개의 시선, 세 개의 시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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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두 개의 시선: 모든 것을 볼 수는 없는 눈(들)
 

1) 그러나 아무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모든 것이 되기란 어떻게 가능한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계속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 동어반복적 재생산의 장치(파놉티콘), 그 유일무이한 절대적 시점으로부터 벗어나, 위에서 아래를, 아래에서 위를, 그렇게 함께 보는 또 다른 하나의 시점은, 그 또 다른 유일무이한 (그러나 '절대적'이지 않은) '전능한 무능'의 시선은, 그 '거리의 관계성'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앞서 밝혔던 하나의 알레고리를 통해 말하자면, 오디세우스와 동류(아무개)인 우리는, 어떻게 저 외눈박이 폴리페모스의 눈을 찔러 '눈멀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또는, 침소봉대(針小棒大)와는 정확히 반대되는 의미와 몸짓으로, 그렇게 '축소'하여 빗대자면, 마치 '양식화'하듯 비유하자면, 이는 마치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거나 낙타를 바늘 구멍 안으로 빠져나가게 하는, 실로 '마법'에 가까운 일이 아닌가? 다시 말하자면, 마지막으로 묻자면, 나와 당신은 이 하나의 근본적 '불가능성'을 어떻게 마주하여야 하는가? 하여 나는 이번에는 두 개의 이미지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아주 예전부터 몰래 짝사랑해 오고 있는(그런데 '짝사랑'이란 언제나 '몰래'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일 텐데, 그리고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이가 나의 사랑에 응답할 리가 만무하므로, 나의 이 짝사랑은 그렇게 '불완전'하기에 무엇보다 가장 '완벽'한 것일 텐데, 게다가 나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 17세기 이탈리아어로 사랑을 고백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는데)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가 그린 두 장의 그림, 부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는 두 장의 그림이 바로 그것이다. 

  

▷ 카라바조가 마태오를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

2) 이 두 장의 그림은 모두 마태오(Ματθαίος)가 그의 복음서(마태오 복음서)를 기술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같은 소재를 그리고 있음에도 이 두 그림은 서로 전혀 다른 그림이다. 이 두 그림 사이의 '결정적' 차이를 열아홉 살의 내게 처음으로 가르쳐준 책은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Gombrich)의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였다. 이 그림들에 대한 그의 문장을 읽으면서 볼을 타고 뜨겁게 흘러내리던 그때의 눈물을 나는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왜 나는 시나 소설이 아니라 소위 '이론서'를 읽을 때 엄청난 눈물을 흘리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내게 개인적으로 하나의 '변태적 신비'이지만, 이러한 '신비'는 단순히 내가 지닌 어떤 '변태적' 취향만으로는 [그렇게 쉽게 분리되어] 설명될 수 없을 것이란 묘한 확신을 갖고 있기도 하다). 하여 곰브리치의 그 문장을 여기에 그대로 옮겨본다, 열아홉 살 때의 열정을 그대로 추억하며, 하지만 동시에 그때와는 전혀 다르게 읽히기를 또한 희망하며: "사실상 성서에 나오는 사건들을 마음속에 전혀 새롭게 그려보기 위해 비상한 정열과 주의력을 가지고 성경을 읽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미술가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과거에 보아온 모든 그림들을 잊어버리려고 노력했으며, 아기예수가 구유에 누워 있고, 목자들이 그를 찬미하러 찾아들고, 한 어부가 복음을 전도하기 시작하는 당시의 정경이 과연 어떠했을까 하고 상상하려고 노력했다. 오래된 성경을 아주 참신한 안목으로 해독하려는 위대한 미술가들의 그러한 노력이 분별없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분노케 한 경우가 수없이 발생했다. 이러한 물의의 전형적인 예로서 1600년 전후로 작품 활동을 한 매우 대담하고 혁명적인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가 있다. 그는 로마의 한 교회 제단을 장식하기 위한 성 마태의 그림을 부탁받았다. 그가 받은 주문은 성 마태가 복음서를 기술하고 있는 장면과, 그 복음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을 보이기 위해 그가 글을 쓸 때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한 천사를 그려넣는 것이었다. 매우 상상력이 풍부하고 타협을 거부하는 젊은 화가 카라바조는 한 늙고 가난한 노동자이며 단순한 세리(稅吏)가 갑자기 책을 저술하려고 쭈그리고 앉은 모습을 그리기 위해 깊이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대머리에 먼지 낀 맨발로 커다란 책을 어색하게 붙들고 있으며 손에 익지 않은 필기(筆記)를 하기 위해 애써 이마를 찡그리고 있는 <성 마태>[첫 번째 그림]를 그렸다. 마태의 옆에 있는 젊은 천사는 방금 천상으로부터 날아와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선생처럼 그 노동자의 손을 우아하게 인도하고 있다. 카라바조가 이 그림을 제단에 모실 교회로 가져가자 사람들은 이 작품 속에 성 마태에 대한 경의가 들어 있지 않다고 분개했다. 사람들은 이 그림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카라바조는 성 마태를 다시 그려야 했다. 이번에는 그에게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다. 그는 천사와 성자의 모습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엄격하게 준수했다[두 번째 그림]. 그 결과로 나온 작품은 카라바조가 생생하고 흥미있게 보이도록 노력했으므로 지금도 명화에 속하지만, 우리에게는 이 작품보다는 첫번째 그림이 더 정직하고 진실해 보인다."(곰브리치, 『서양미술사(上)』, 열화당, 23-24쪽)

3) 하여 나는 당신과 함께 다시 저 두 개의 그림, 두 개의 시선을 마주 바라본다. 그림이라는 것에 대해, 곧 하나의 '재현 방식'[에 불과한 것]에 대해 우리는 무엇이 더 정직하고 진실하다는 '도덕적' 술어의 형식들을 [여전히] 사용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말하게 만드는 힘, 어떤 재현이 더 정직하고 진실하다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그 힘의 효과는 무엇인가? 이 일견 가장 '도덕적'으로 보이는 물음들은 사실 가장 '미학적'인 질문들이며, 또한 일견 이 가장 '미학적'으로 보이는 질문들은 오히려 가장 '정치적'인 물음들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점이 가장 예민하게 인식되어야 한다. 왜 그런가? 무엇이 더 '진실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진리의 물음이 아니라 무엇을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의 물음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우리의 정치란 바로 그러한 미추(美醜)의 분류법과 판단법 위에 위치하고 있는 지극히 감성적이며 감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카라바조의 저 두 그림, 두 시선을 마주하며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의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게다가 그 진실 역시 '구성된' 진실인데) 치열하게 자신의 작업에 임했던 한 예술가의 영혼이라기보다는, 왜 당시 사람들은 저 첫 번째 그림을 거부했는가, 그들은 무엇을 더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무엇을 더 옳다고 생각했는가 하는, 미학-정치의 고고학과 계보학이라는 문제이다. 천사의 손에 이끌려 어물쩡 어설프게 펜을 잡는 마태오의 어리어리한 모습은 어째서 그 시대의 그들에게 전혀 아름답지도 옳지도 않다고 여겨졌는가, 그리고 그 같은 모습이 어째서 이 시대의 '우리'에게는 어떤 시작의 설렘을 간직한 지극히 진실하고 정당하며 심지어 '아름다운' 것으로 보이는가? 우리가 관통해야 하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4)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마치 여담처럼, 하나의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다시 저 두 시선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나는 아주 슬픈 이야기로 시작할 생각이다(그러므로, 당신은 각오해야 한다, 슬퍼할 것을 미리 각오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슬픈' 이야기 앞에서 오히려 전혀 슬퍼하지 않을지도 모를 당신 자신에 대해,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 저 두 개의 마태오 그림 중에 첫 번째 것이 흑백 사진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는 데에는 아주 슬픈 이유가 있다. 그 그림이 컬러 사진으로 찍힐 기회를 갖기 전에 전쟁 중 불타서 파괴되어버렸기 때문이다(하여, 넘겨짚자면, 우리의 시대는 만약 '우리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성이 있다면 바로 우리 시대에 가장 결정적일 아름다움을, 미리, 앞서, 파괴하는 기이한 시대일지도 모른다). 왜 두 번째 것이 아니라 첫 번째 것이 파괴되[어야만 했]었을까: 나는 이렇게, 가정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되는 역사를 향해, 실로 지극히 가정적인 질문을 던지며, 무언가를 힐난하거나 질책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을 향해? 누구를 향해? 역사를 향해? 가정 자체를 용납하지 않는다고 이야기되는 견고한 하나의 역사, 대문자로 쓰인 역사(History)를 향해? 그 역사라는 거대서사, 그 거대한 바퀴에 매달리고 짓이겨지는 무수한 벌레들로 비유되곤 하는, 우리들, 아무개들, 아무것도 아닌 자들을 향해? 나는 인격적 실체로서의 신(神)을 믿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러나 분명 '신적 질서'에 관한 일종의 '믿음'은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고 오직 이러한 의미에서만, 나는 내 자신을 '무신론적 신학자' 혹은 '종교적 유물론자'라는 자기-모순적인 언사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일 텐데), 이는 분명, 곰브리치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이른바 "분별없는 사람들"에 대한 신의 경고이자 분노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이렇게 생각하고 믿는 것이 나의 종교-유물론적 양생술, 무신론적 신학의 건강법이기도 하다.

5) 진정한 '여담'이란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미술사'라는 것은 하나의 개념이다. 그리고 개념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역사적인 성격을 띤다. 우리 모두 목격하고 주지하다시피, '미술사'라는 개념은 '미술'과 '역사'라는 두 개의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다(마치 '세계문학'의 개념이 '세계'와 '문학'이라는 두 개의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그렇게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또한 전혀 당연하지 않은 것처럼). 문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미술사가 일견 선사시대 미술부터 현대의 미술까지를 아우르고 또 그렇게 아우를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선사시대에는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미술'이라는 개념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또한, 말할 것도 없이, 그 '시대'에는 '역사'라는 개념조차 불분명한 것으로 남아 있다). 이것이 바로 미술사라는 체계의 허상이고 빈틈이다. 다시 말해서 선사시대에는 우리가 현재 '미술'이라고 부르는 것도, '역사'라고 부르는 것도 없었다(따라서 흥미로운 것은, [문헌화된] 역사 이전의 시대를 의미하는 '선사(先史)시대'가 소위 '역사'라는 [문헌적] 술어와 체계 안으로 포섭되고 포착되는 몸짓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것들을 우리 시대만의 역사적인 개념인 '미술(fine arts)'로써 아우르고 그렇게 쉽사리 '미술사'라는 근거 없는 역사 속으로 편입시키는 작업을 매우 당연한 것으로 상정한다. 그러므로 사실 미술사는 바로 자신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전제 조건 자체, 곧 자신의 서술 방식과 방법론에서부터 일종의 불가능한 문제를 끌어안고 있는 것(따라서 미술사 또한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이 불가능성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이 있다: 하나는 그 불가능성을 '없는 문제'로 덮으며 완전한 체계와 닫힌 역사를 꿈꾼다. 또 다른 하나는 바로 그 자신의 존재조건이자 가능조건 자체인 그 불가능성을 열어젖힌다. 미술사의 대표적인 '교과서'로 오랜 시간 인정받고 있는 잰슨(Janson)의 『미술사(History of Art)』는 바로 그러한 미술사의 아킬레스건, 그 불가능한 가능조건을 아무런 회의 없이 그대로 안고 가는 책이다. 그런데 곰브리치 '미술사'의 원제는 'Story of Art'이다. 곰브리치 또한 이미 언급했던 그릇된 전제로부터 출발하는 미술사의 서술 방식으로부터 크게 자유롭지는 못하다(그러나 우리는 이후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와 관련하여 다시 이 문제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다소 부박하게 말하자면, 그는 역사(History)라는 체계로 도배하려 하지 않고 단지 담담히 이야기(Story)를 전해줄 뿐이다. 그리고 이 두 단어, 두 개념의 차이는, 어쩌면 카라바조의 저 두 개의 마태오 그림들 사이의 차이, 그 두 개의 시선들 사이의 차이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넘겨짚는다, 가정이 불가능한 곳에서, 그렇게 가정적으로, 확언한다.

 

 

▷ '예술작품'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얼굴을 조각한 러시모어(Rushmore)산과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새겨넣은 바위가 있는 금강산, 이 두 개의 사진, 두 개의 시선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본다. 이 두 개의 '예술작품'들은, 양각과 음각이라는 조각 방식의 차이를 제외한다면, '미학적'으로 서로 어떤 차이를 지니는가(최정우, 『사유의 악보』, 자음과모음, 2011, 500-501쪽 참조). 예를 들어, 어떤 이가 금강산 바위에 붉은 글씨로 새겨진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자연에 대한 만행'이라고 비난하면서 러시모어산에 웅장하게 조각된 미국 대통령들의 얼굴에는 침을 뱉지 않는 이유란 과연 무엇인가. 다시 묻자면, 이 둘 중에서 무엇이 더 "정직하고 진실해" 보이는가, 아니, 무엇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가.

6) 이 두 개의 시선은, 말하자면, 그 각각, 모든 것을 볼 수 없는 눈(들)이다. 아마도 그리하여 우리는 두 개의 눈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연과 진화에 대한 목적론적이고 인과론적인 전제 때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라는 원인의 문법으로 이야기되는 모든 것들 또는 '그럴 수 있기 위해서'라는 목적의 어법으로 이야기되는 모든 것들 때문에 우리가 두 개의 눈을 갖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여기서 완벽한 아름다움의 동의어로 상정된 '대칭성'의 테제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곧, 왜 하나의 절대적인 시점에서 벗어나 두 개의 상대적인 시선으로 내려가는 길이 결코 대칭성에 대한 소위 '보편적'이고 '균형적'인 추구와는 다른 것이 될 수밖에 없는가를 밝히고 물어보고 있는 것. 조화와 비례에 대한 심미적/미학적 태도에 기반한 대칭성은 그것이 어떤 진리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칭성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미학적 태도 자체가 우리의 진리와 정치를 구성하는 것이다. 나와 당신은 다시 카라바조의 두 그림을 함께 바라본다. 저 두 개의 시선은, 그 시선들이 각각 모든 것을 볼 수는 없다는 바로 그 불완전성과 불가능성 때문에, 오히려 전체에 대한 비-전체(pas-tout)를 가능케 한다. 하여 저 두 개의 시선이란, 둘 중의 하나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선택 가능한' 대상들이 아니라, 우리가 그 둘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고 왕복해야 하는 두 개의 극, 그 자체가 일종의 가능조건이 되는 불가능한 하나의 극성(polarity)이다. 우리는 바로 이 두 극, 하나의 극성 안에서 가장 불완전하게 완전하며 매순간 그렇게 미완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완성한다. 그러므로 양생술과 건강법에 대한 나의 말들이 단순한 농담이나 여담은 아니었음이 여기서 [쑥스럽게] 다시 확인되는바, 어쩌면 나는 그런 농담과 여담들로 나의 진담과 본심을 토로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것도, 도래할 것으로 기대되는 다른 어떤 시간에서가 아니라, 계속해서 도래하고 있는 중인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우리의 두 눈은 모든 것을 바라볼 수는 없는 눈(들), 일견 대칭적이고 균형적으로 보이는 그 두 개의 눈은 실로 당파적이고 편파적이며, 그렇게 당파적이고 편파적인 불균형 위에 설 때에만 우리의 두 눈은 비로소 바로 그렇게 '두 개'로 기능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 두 개의 시선을 실제로 '선택'하는 지점과 방법은, 이렇듯 가장 불균형적인 어떤 선택 불가능성의 지점, 가장 생물학적인 비유를 통해 오히려 가장 물질주의적이지 않은 어떤 곳에 가닿는, 역설적 유물론의 방식이다.

─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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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뜸과 눈멂의 계보학:

하나의 시점, 두 개의 시선, 세 개의 시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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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의 시점: 모든 것을 보는 눈    

 

▷ 모든 것을 보는 첫 번째 눈: 타워크레인 위에서 이불 빨래를 널고 있는 김진숙.
(ⓒ<경향신문>, 정지윤 기자)

1) 그리하여 나는 다시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할 것이다, 이 사진에 덧붙일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물음을 던지면서: 저 높은 곳(위)에서 바라보는 이 세상(아래)은 어떤 모습일까? 그러나 나는 이 물음을 통해 전지적 능력을 지닌 신(神)의 시점을 경외롭게 전제하거나 낭만적으로 상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부산 영도조선소 크레인에 올라가 '고공 투쟁'을 한 지 174일째가 되었던 지난 2011년 6월 28일,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은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6월 10일 희망 버스가 올 때 용역을 투입해서 조합원들을 끌어내리는 장면을 본 이후로 지금까지 잠을 한 시간도 못 잤다. 신경이 예민해져 있다. 위에서 그 광경을 다 봤으니 오죽하겠나."(<프레시안> 기사 「"회사에 버림받고 노조에 버림받아 죽고 싶은 생각뿐"」 참조: http://j.mp/jUkFsT) 이 말들의 마지막 문장이 나를 붙잡는다(그리고 이것이 바로 내가 그의 저 마지막 문장을 진하게 강조한 이유이다). 그러나 나는 알지 못한다, 저 위에서 이 아래의 그 모든 광경을 다 바라볼 수 있는 경험이 어떤 것인지를. 그러나 나는 또한 알고 싶어진다, 그 위에서 저 아래의 모든 움직임들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를. 이 단 하나의 절대적 시점이란 또한 얼마만큼의 절대적 고독을 전제해야 하는 것인지를, 나는 알지 못하며, 또한 그렇기에, 알고 싶어한다.

2) 그러므로 이러한 어떤 '무지'에서 촉발되고 또 그에 바탕하는 이 '선망 아닌 선망'이란, 신의 시점을 갖고 싶다는 전능함에 대한 열망과는 전혀 다른 것, 그러한 전지적 시점에 대한 갈망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다(여전히 '현재적'인 소설일, 그러나 그것이 여전히 현재적이라는 사실 그 자체가 가장 '불행한' 소설이기도 할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속의 한 제목을 빌리자면,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오히려 이러한 선망 아닌 선망은 이 아래의 '모든 것'을 바라보는 저 위의 전지적 시점이 지닌 어떤 절대적 고독감, 그 단 하나의 절대적 시점이 지닌 절대적인 무력감을 '선망'하고 있는 것. 그러므로 여기서 내가 왜 이러한 감정을 '선망 아닌 선망'이라는 역설적 언어로 표현했는지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혼자다, 그리고 우리는 여럿이다(이러한 수적(數的) 대비는 [단순히 '연대의 열정과 포부'를 표현하는 일 외에]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는 그에게 가닿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아래의 우리들을 바라본다(이러한 위계적 대비는 [단순히 '전능한 무력감'을 노출하는 일 외에] 또한 무엇을 뜻하는 걸까). 이 아래의 우리가 그에게 개미들 같은 존재일까, 아니면 저 위의 그가 우리에게 한 마리 개미 같은 존재일까(그리고 이 생물적 은유의 물음은 [단순히 '존재의 절대적 왜소함'을 비유하는 일 외에] 또한 과연 무엇을 뜻해야 하는 것일까)? 하여, 다시 사진을 바라본다. 그는, 어쩌면 너무나 '진부하게도', 그저 이불 빨래를 널고 있다. 그는, 말하자면, 저 위에서, 여전히,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 살아가야만 하는 것. 삶은 저 위에서도, 아래의 모든 광경을 다 바라볼 수 있는 저 높은 전지적 장소에서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어떤 것, 삶은 저 위에서라고 해서 결코 유예되거나 지연되거나 면제되지 않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위에서 그 광경을 다 봤으니 오죽하겠나"라는 문장이 전해주는 하나의 불편한 진실의 가장 중요한 정체는 바로 이 어쩔 수 없는 삶의 지속성이며, 또한 그가 저 위에서 고독하게 맞서 싸우는 동시에 또한 바로 그것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 역시 바로 이러한 끈질긴 삶의 지속성인 것. 이러한 삶의 성격을 우리가 새삼 알게 되고 되새기게 되는 것은, 바로 저 전도된 전지적 능력 때문, 곧 그 능력이 전지적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히려 단순히 '신적(神的)'일 수만은 없는, 바로 저 무능의 전능성 때문이다.  

 

▷ 모든 것을 보는 두 번째 눈: 제러미 벤담이 고안한 파놉티콘의 설계도.

3) 이와는 다른 또 하나의 '익숙한' 전능의 시점이, 전혀 다른 의미에서의 '단 하나의' 시점이, 저 크레인의 반대편에 존재한다. 이 시점은 일견 위계적 상하를 나누지 않는 수평적인 시점인 듯 보이지만, 오히려 상징적인 위와 아래를 내면화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말하자면, 그 힘은 '알아서 기게' 만드는 힘이다). 게다가 이 단 하나의 시점은 어쩌면 우리가 속한 시대 자체를 규정할 만큼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이 또 다른 절대적 시점은, 크레인 위의 김진숙이 그 아래의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눈과는 전혀 다른, 하나의 중심부에서 모든 주변부들을 일별하고 감시하는 또 하나의 전지전능한 시점인 것. 그 시점은 바로 파놉티콘(Panopticon)의 시점이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에서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이 구상했던 이 파놉티콘, 곧 '일망(一望) 감시 시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수감자는 권력의 자동적인 기능을 보장해주는 가시성의 의식적이고 영속적 상태로 이끌려 들어간다. 비록 감시 작용이 연속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 효과는 영속적이 되도록 하며, 또한 권력의 완성이 그러한 감시가 실제로 행사되는 일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든다. 이러한 건축적 장치는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어떤 권력 관계를 창출하고 유지하는 한 기계가 된다. 요컨대 수감자 스스로가 권력의 전달자가 되는 어떤 권력적 상황 속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 '일망 감시 장치(le Panoptique)'는 '봄-보임(voir-être vu)'의 짝을 분리시키는 하나의 기계이다. 즉, 주위를 둘러싼 원형의 건물 안에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완전히 보이기만 하고, 중앙부의 탑 속에서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결코 보이지는 않는다."(Michel Foucault, Surveiller et punir: naissance de la prison, Paris: Gallimard, 1975, pp. 202-203 / 오생근 옮김, 『감시와 처벌』, 나남, 2003[개정판], 311-312쪽, 번역은 일부 수정) 파놉티콘은 그 말 그대로 '모두를 볼(pan-opticon)' 수 있으나 그 자신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그러나 반대로 그것이 감시하는 대상은 오직 자신이 누군가에게 보이고 있다는 시선만을 느낄 뿐 그 자신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이고 효과적인 감시의 장치(dispositif)인 것.

4) 이러한 파놉티콘의 시점과 기능은 통상 권력 작용의 내면화로 해석되고 또한 그러한 점에서만 강조되거나 반대되어 왔다. 그러나 여기서 그러한 '내면화'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물론 흔히 논의되듯 '권력의 시선'을 내면화하는 것을 뜻하며, 그러한 의미에서 그 시선의 대상이 되는 개인은 또한 바로 그 스스로가 저 권력적 시선의 전달자이자 담지자이자 실행자가 된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방법으로 근대적 권력의 작용은 가장 '완전'하게 '완성'된다는 것. 그러나 이 개인은 어떻게 '그러한 개인'이 되는가? 다분히 자기-관음증적 시점을 통해, 곧 가장 뒤틀린 나르시시즘의 시점을 통해, 다시 말해 일종의 폐안(閉眼)에 기초한 또 다른 개안(開眼)을 통해, 눈멂에 의한 눈뜸을 통해 그렇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시선의 내면화는 소위 권력자가 그 권력이 적용되는 자들에게 가하는 인격화된 '억압'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권력적 시선의 작용이 권력을 실행하는 자와 그 권력이 적용되는 자를 명확하게 가르는 표층적 '정치'와 표피적 '권력'의 층위에서 작동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푸코가 파놉티콘이 지닌 이러한 '시선'의 성격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권력을 실행하는 자가 권력이 적용되는 자에 비해 갖는 어떤 실체적인 우월성이 결코 아니다. 그 시선은 장치와 구조의 효과이다. 이 기계-장치의 바깥은 없으며, 그것을 '위'에서 조종할 수 있는 메타적인 자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푸코는 지나치듯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하기야 이 건축적 장치의 한복판에 감금되어 있는 셈인 관리자 역시 이 장치와 연결된 부분적 존재가 아닐까? 전염이 확산되는 것을 방치하는 무능한 의사나, 서투른 관리를 하는 감옥이나 작업장의 관리자는, 전염병이나 폭동이 발생할 경우 첫 번째 희생자가 될 것이다. 일망 감시 장치의 경영자는 말한다. "나의 운명은 내가 고안할 수 있었던 모든 속박에 의해 그들(수감자들)의 운명과 함께 묶여 있다." 일망 감시 시설(le Panopticon)은 일종의 권력의 실험실로 기능한다."(Michel Foucault, Surveiller et punir: naissance de la prison, p. 206 / 오생근 옮김, 『감시와 처벌』, 316-317쪽, 번역은 일부 수정) 이 부분은 파놉티콘의 정의와 기능에 대한 푸코의 가장 유명한 언급들에 비할 때 우리가 결코 자주 인용하거나 주목하지 않는 부분인데, 그러나 나는 당신과 함께 이 부분을 다시 읽어야 한다. 크레인 위에서 아래의 모든 것들을 바라보며 난감하고 착잡한 마음을 품었던 김진숙의 저 시점과, 주변부의 모든 것들을 감시하며 정작 그 자신은 결코 보이지 않는 파놉티콘 중심부의 시점 사이에 놓여 있는 어떤 괴리에 주목하기 위하여, 다시 말해, 둘 사이의 구조적 상동성과 차이점,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감성적 거리와 대립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5) 왜 이 둘은 구조적으로 상동적인가? 모든 것을 한눈에 바라보는 '일망(一望)'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왜 그 둘은 구조적으로 차이가 나는가? 파놉티콘의 중심부는 모든 것을 보면서 그 자신은 보이지 않는 반면, 우리 모두는 크레인 위의 김진숙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여기서 다시 묻자면, 우리는 과연 그를 바라볼 수 있는가, 그의 모습과 정말로 마주할 수 있는가). 이 둘의 차이란 정치적인 감성의 차이가 아니라 감성의 정치라는 차이의 모습을 띤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어떤 정치를 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어떤 미학을 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맞닥뜨리게 되는 것. 이 두 미학적 시점은 공히 '모든 것을 보는 눈'의 형태를 띤다. 그러나 파놉티콘의 시점은 그 자신은 마치 '중립적'으로 '관조'하는 듯한 시선을 흩뿌리며 그 시선의 대상이 되는 개체를 관음증적 주체로 만드는 반면, 크레인 위의 시점은 그 모든 아래의 것들을 그저 관조할 수만은 없는, 위의 눈과 아래의 눈들이 모두 서로를 바라보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어떤 '거리의 관계성'을 만들어낸다. 만약 신의 시점이 있다면, 그리고 만약 그러한 시점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신의 시점이란 이 둘 중 어떤 것이 되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아마도 답할 수 없을 것이지만, 또한 아마도 분명히 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선택적'으로 한쪽이 될 수 있는 것일까? 혹은, 나는 이 두 개의 선택지가 마치 '선택 가능한' 것처럼 말했지만, 이 선택은 정말로 그 자체로 '선택적'인가? 우리는 어쩌면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선택 가능한 선택지들의 '선택 불가능성'과 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폴리페모스의 눈을 찌르는 오디세우스.

6) 따라서 우리는 선택이 자유로운 두 가지 미학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여 나는 여기서 김진숙이 올라가 있는 저 크레인 자체를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리겠다는 사측의 발상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미학' 위에서 가능했는지,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우리는 저 크레인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바다 쪽으로 옮기려는 어떤 시도가 있었음을 알고 있다. <한겨레> 기사 참조: http://j.mp/oYdoZP) 그러한 발상을 떠올리게 한 사고의 바탕에 깔려 있는 미학적 의식과 무의식은 무엇인가? 감시할 수 없는 것, 오히려 모든 아래의 것들을 내려다보며 그 자신 역시 아래에 의해 보여지는 단 하나의 눈, 단 하나의 시점을 어떻게 다루려 하는가? 시야에서 치워버리는 것, 바다 쪽으로 보내서 그 역시 아래를 내려다 보지 못하게 하고 아래의 사람들 역시 그 위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 곧 저 위와 이 아래의 모든 '거리의 관계성' 자체를 제거하면 된다는 것. 모든 것을 바라보는 단 하나의 눈은 말 그대로 단 하나만 있으면 족하다는 것. 비록 그 눈의 자리가 텅 비어 있는 중심, 공동화된 핵심이라고 하더라도, 어쩌면 오히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누군가에게 그 자신 외에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다른 눈 따위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것. 말하자면, 아래를 볼 수 없는 위와 위를 볼 수 없는 아래는 서로에 의해 잊힌다는 것, 그러한 망각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감시하고 규율하겠다는 것. 자, 그렇다면 여기서 오히려 저 파놉티콘의 눈에는 가장 강력하면서도 취약한 하나의 결정적 약점이 생기지 않는가? 마치 오디세우스에 의해 박탈당하는 외눈박이 폴리페모스의 눈처럼. 오디세우스 스스로가 폴리페모스에게 들려줬듯, 그는 '아무도' 아니다. 크레인 위의 김진숙도, 그 아래에 있는 우리도, 파놉티콘의 시점에서는 정말 '아무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가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에서 썼던 말을 다시금 떠올린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이어야 한다(Ich bin nichts, und ich müßte alles sein)."(Karl Marx, "Zur Kritik der Hegelschen Rechtsphilosophie, Einleitung", Marx Engels Werke, Band 1, Berlin: Dietz, 1981, p.389 /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1권, 박종철출판사, 1991, 13쪽) 우리는 아무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모든 것이 되고, 또 모든 이가 되어야 한다.

─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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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1-08-07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점, 시선, 시각. 눈이 매개체지만, 셋은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듯한 소제목들입니다. 그 첫번째인 하나의 시점에 대한 글, 잘 읽었습니다. 그네들은 왜 저 높은 곳에 있는 김진숙을 끌어내리지 못해서 안달일까, 심지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리려고 할까 궁금했었는데 유일해야 의미가 있는 파놉티콘 이야기를 읽고 나서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 파놉티콘이란 개념은 너무 무시무시한데 얼마전 슬프게 읽었던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도 이런 개념이 들어 있는듯해서 서늘해집니다.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김진숙의 시점과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다수의 눈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의 관계성이란 말에 작은 희망의 씨앗이 있는 것인가..생각해봅니다.

람혼 2011-09-11 16:33   좋아요 0 | URL
달사르님, 제 글의 결을 너무 섬세하고 꼼꼼하게 읽어주셔서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바로 그 '거리의 관계성'이야말로 제가 희망 아닌 희망을 걸게 되는 정확한 지점입니다. 그 작은 희망을, 커다란 내기를, 함께 걸어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오늘부터 네이버 <자음과모음> 카페(http://cafe.naver.com/cafejamo)에서 "드물고 고귀한, 헤프고 남루한"이라는 제목으로 제가 새 연재를 시작합니다. 부제는 "미학과 정치의 풍경들을 위한 불가능한 지도 제작법"입니다. 주 2회(화요일, 금요일) 연재라는 형식을 빌려 실로 오랜만에 '규칙적으로' 써 나가게 될 글인데요, 저의 까칠하고 엉망인(!) 성격 때문에라도 이러한 규칙성이 과연 앞으로 잘 지켜질 수 있을까 제 스스로도 걱정이고 의문이지만, 아무튼 힘을 내서 써 보려고 합니다. 독자 제현의 많은 관심과 질정 바라 마지않겠습니다. 이에 襤魂, 合掌하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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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동에서, 2011년 여름, 동시대의 한 풍경.


시작의 가능조건들:
미학과 정치의 풍경들을 위한 불가능한 지도 제작에 착수하며

1) 나는 위의 저 작은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나의 이 기약 없는 연재를 시작하려고 한다. 그리고 또한 나는, 내가 바로 저 한 장의 작은 사진으로부터 이 연재를 시작하려고 한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 이 글을 막 읽기 시작한 당신에게 먼저 용서를 구하려고 한다. 이 글은 이렇듯 하나의 용서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무엇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생각하면서 존재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여기서 무엇을, 나의 어떤 부분을 용서해야 하는가? 내가 이 한 장의 사진으로써 당신이 당신의 안락한 의자에 앉아 안락한 화면을 통해 안락하게 글을 읽는 일을 방해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또한 내가 이 한 장의 사진으로써 당신이 당신의 그 안락함에 수치심을 느끼게 했다는 사실을, 당신은 가장 먼저 용서해야 한다. 

2) 당신이 소위 '용역 깡패'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라면, 이 한 장의 사진을 통해 그들의 외형과 분위기를 잘 숙지하기 바란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당신이 언젠가 저들을 바로 당신의 생활공간 안에서 맞닥뜨릴 수 있다는 '희박한' 가능성을 거론하며 당신을 겁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의도는 오히려 그 반대이다. 당신이 지금 당신이 앉은 곳에서 누리고 있는 어떤 안락함의 느낌은 바로 저 덩어리의 외형과 바로 저 질감의 분위기 위에서 비로소 유지될 수 있는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가 누구 때문에 [잘] 살고 있는지를 매순간 확인해야 하며 그와 동시에 저 덩치들에게 깊이 감사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 당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안락함이 가능한 이유는, '민중의 지팡이'라는 농담 같은 별명을 지닌 경찰이 밤낮없이 지켜주는 경찰국가 대한민국의 안정된 치안 때문이 아니라, 사유 재산 보호와 무한 이윤 창출이라는 세계화된 자본주의적 원리를 수호해주는 저 든든하고 건장한 용역 깡패들 덕분인지도 모른다는 것. 그러나 문제는, 이 모든 자본의 평화가 그들 때문도, 그들 덕분도 아니라는 것. 오히려 이 한 장의 사진 안에서 발견되는 저 커다란 덩어리들은 어쩌면 조악한 조연인지도 모른다는 것. 그러므로 나는 다시 말해야 한다. 나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고, 구하지 않고, 나는 그러한 용서를 당신에게 요구한다고.  

3) 다시 말해 이 글은 이렇듯 하나의 용서를 '요구하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무엇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생각하면서 존재한다, 그러나 또한 그렇게 존재하면서 부재한다. 왜 그런가? 이 나의 존재는 근본적이고 결정적으로 어떤 부재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안락하게 채워지는 나의 존재란 저 사진 안에서 왜소하게 일그러진 한 부재의 존재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우리의 확고한 존재란 실은, 저 사진을 가득 채운 채 한 사람을 윽박지르고 있는 덩치들에 의해서 말소되고 삭제되고 있는 하나의 부재, 그 불편한 진실의 구심점이라는 존재 아닌 존재에 결정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저 한 장의 사진은, 곧 미감(美感)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 한 장의 거친 사진은, 그 자체로 가장 외설적인 이미지이다(그러나 오히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더더욱 우리는 이 사진 안에서 현재 우리의 '정치'가 발 딛고 서 있는 하나의 특정한 '미감'을 발견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사진을 결코 똑바로 바라볼 수 없다. 위압적인 복수(複數)와 위협 받는 단수(單數), 윽박지르는 다수(多數)와 구석으로 몰린 소수(少數)가 가장 거칠고 즉물적인 상징으로 드러나고 있는 이 한 장의 사진을(그러나 이 '상징'이란 또한 상징이 되기엔 너무도 적나라하고 직접적인 '현실'이 아닌가), 이 너무도 확실하고 확연한 한 장의 사진을, 우리는 결코 똑바로 바라볼 수 없다. 한 번 더 반복해서 말하자면, 이 사진은, 그 자체로, 딱 그만큼의 의미에서, 가장 외설적이기 때문에. 내가 당신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고 '요구하는' 이유, 마치 쉬운 용서를 베풀듯 이 외설적 장면으로부터 결코 고개를 돌리지 말고 이 외설 자체를 직시하라고 당신에게 요구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묻는다: 당신은 이 폭력적 외설의 장면을 마주할 수 있는가?
 

4) 그러므로 저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시작된 이 글은, 어쩌면 미약한 것, 가장 나약한 것일지 모른다. 그렇게 미약하고 그렇게 나약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 끝이 결코 창대하지도 않을 것이다. 인민과 노동자들을 향해 그리도 쉽게 발설되는 저 모든 권력의 헛되고 위선적인 약속들에 반대하듯, 나는 미약하기 그지없는 시작을 미끼로 어떤 창대한 끝을 허황되게 보장하는 저 속류 기독교주의로부터 결연히 단절할 것을 또한 당신에게 요구한다. 그러나 어떻게? 다시 한 번 사진에 주목해보자. 저 하얗디하얀 순백의 티셔츠를 단체로 맞춰 입은 덩치들이 약속하고 대변하는 사유 재산의 천년왕국과 이윤 창출의 창대한 끝을 어떻게 거부할 것인가? 나는 이러한 불가능을 당신에게, 그리고 당신과 함께 요구한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가능하게(자연스럽게) 보이는 것들이 어떤 불가능성(부자연스러움) 위에 있는지를, 이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어떤 부재하는 것 위에 있는지를, 끈질기게 물으려 한다. 그러나 이 끈질김은 아마도 지난한 길을 따라가야 할 것이다. 내가 또한 당신에게, 당신과 함께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지난한 여정이다.

5) 그러나 동시에 또한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나는 정치에 대한 글, 곧 좁은 의미에서의 '정치적' 글은 쓰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정치만을 위한 정치적인 글은 결코 쓰지 않을 것이다. 저 한 장의 사진을 가장 외설적으로 파악하는 우리의 미감은 그 자체로 이미-언제나 가장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하나의 취향이자 취미판단으로서의 미학이 특정한 정치의 '문화적' 반영이라고 역설하지도 않을 것이며, 하나의 이미지와 그 이미지가 지니는 미학을 반드시 정치적으로 해석해야 함을 종용하고 강변하지도 않을 것이다. 문제는 전혀 다른 것이다. 하나의 미학이 특정한 정치적 체제의 반영인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의 정치가 특정한 미학적 체제의 효과인 것. 나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 연재가 현재적 세태의 일단을 포착하여 분석하고 평가하는 시평(時評)이나 시론(時論) 형태의 칼럼이 되는 것을 경계하고 지양한다. 또한 같은 관점에서 나는 이 연재가 일반적 의미에서 일종의 대중문화비평이 되는 것 역시 경계하고 지양한다. 나는 노래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시를 쓸 것이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소설을 쓸 것이며, 평가하거나 분류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비평을 쓸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텍스트로써 (미)완성될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만, 그 문자들이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모종의 깊은 해석적 의미를 담지하는 [것으로 상정된] '내용'이라는 글이 아니라, 우리의 미학적 체제가 어떤 식으로 구획되어 있고 포진되어 있으며 분할되어 있는지를 가리키는 지도라는 '형식'이 될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이 연재가 그러한 불가능한 지도를 제작하는 하나의 작도법이자 기호학이 되기를 바란다. 잇고 끊고 덧대는 것들의 미학, 느끼고 즐기고 고통 받는 것들의 정치. 우리가 몸담고 있고 또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러한 정치적 시대와 미학적 세계에 대한 물음들이 바로 내가 이러한 지도 제작법의 시도를 통해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나의 방법론을 '이데올로기적 지도 제작법(cartographie idéologique)'으로 명명할 것이다.
 

6)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지도 제작법'의 모습이 지극히 이념적인 것이 되리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렇듯 어떤 것이 이념적이 될 것이라는 일종의 예언적 규정을 단지 '고백'이라는 수세적인 이름으로만 부를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념이란, 생각하지 않는 자에게는 가장 고루한 유물이겠지만, 생각하는 자에게는 가장 물질적이고 가장 구체적인 무기이다. 말하자면, 나의 질문은 가장 소박하면서 동시에 가장 거대하며(그러나 우리의 삶이 정확히 그렇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아마도 지독하게 이념적인 어떤 물음일지 모른다. 그 질문은 정확히 다음과 같다: 우리는 어느 정치적 시대를, 어떤 미학적 세계를 살고 있는가? 그러나 이 시대/시간에 대한 물음과 세계/공간에 대한 물음은 동떨어진 두 개의 다른 질문들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시공간에 관한, 곧 미학과 정치가 교차하고 있는 풍경들에 대한 단 하나의 질문이다. 나는 이 단 하나의 질문이 지닌 여러 개의 얼굴들을 또 다른 여러 개의 질문들로 되바꿔 물어보려 한다. 아마도 이러한 중첩되고 교직되는 질문들의 구름이 내가 원하고 바라는 하나의 지도를 제작해줄 것이며, 나는 그러한 믿음 아래에서 이 연재를 시작한다.
 

7) 그러므로 나는 앞으로 잇고 끊고 덧대는 것들의 미학, 느끼고 즐기고 고통 받는 것들의 정치, 그 미학-정치의 지도를 그리고자 한다. 그 지도는 결코 촘촘하지 않을 것이나, 오히려 그 성긴 구조와 구멍들을 통해 어떤 불가능성 위에서야 비로소 그려지는 하나의 지도를 의도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미학이란 단순한 [현대]예술론이 아니며 또한 여기서의 정치란 단순한 [실천]철학이 아니다. 지고의 미학은 드물고 고귀한 것, 지상의 정치는 헤프고 남루한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자연스러운 위계, 당연한 이분법 아래에서 우리는 무언가 많은 것들을 착각해 왔고 또 착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드물고 고귀한 것은 헤프고 남루한 것과 만난다. 그리고 그렇게 드물고 고귀한 것은 그렇게 헤프고 남루한 것을 통과할 때에만 비로소 바로 그 자신이 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고의 것은 지상의 나락으로 처박힌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몰락이나 전락 혹은 추락이 아니다. 나는 저 드물고 고귀한 것이 이 헤프고 남루한 것과 교차하고 충돌하는 '유물론적 미학'의 한 불가능한 형태를, 다시 말해, 시도하는 동시에 사라지지만 바로 그러한 사라짐 속에서만 오히려 가장 결정적이고 적극적으로 감행될 수 있을 미학-정치의 한 형태를, 이미지와 글쓰기가 병치되는 하나의 시공간 안에서 제시해보고자 한다.

8) 하여 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는 것이다, 그렇게 돌아가서는, 다시금 저 마주할 수 없는 사진을 마주하며 재차 물어보는 것이다. 저 사진은 어떤 종류의 공포를 유발하는가? 또한 저 사진은 어떤 종류의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가? 그리고 저 사진은 어떤 종류의 행동을 요구하는가? 그러나 이 모든 물음들에 앞서 무엇보다 나는 가장 먼저 저 사진을 말 그대로 한 장의 '사진'으로 보기를 또한 요구한다, 당신에게, 그리고 당신과 함께. 이 일견 가장 '중립적'으로 보이는 요구 안에 어쩌면 가장 미학적이며 동시에 가장 정치적일 하나의 시선이 놓여 있을 것이며, 나는 바로 이러한 시선의 자리로부터 시작해서 또한 바로 그 자리로부터 이탈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이탈하면서 시작한다. 나는 지금 당신과 함께 바로 이러한 시작점 위에 서 있다. 

─ 연재를 시작하며.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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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7-20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가 되는데요..무더운 여름날..건필하시길.

람혼 2011-07-20 15:06   좋아요 0 | URL
아, 감사합니다. 한 번 봬야 하는데요...! ^^ 힘내겠습니다. 함께 파이팅!

달사르 2011-08-02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그림 잘 그리시는건 눈으로 봤고, 음악은 언젠가 기회 닿으면 들어봐야지, 하고 있었는데요. 글까지 쓰시다니욧! 와우!

미학이 살아있으려면 어떻게해야하나..이런 주제의식을 살짝 엿봤어요. 연재, 잘 보겠습니다~

람혼 2011-09-11 16:34   좋아요 0 | URL
달사르님, 감사합니다. 말씀해주신 대로 제가 너무 여러 일을 하느라 머리가 폭발할 지경이지만, 제게는 참으로 즐겁고 신나는 폭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어주시길! ^^
 

 

말 그대로, '회고전' 한 자락.

중학교 때 그렸던 몇 장의 그림들, 사실 거의 잊고 있었는데, 실로 오랜만에 베란다 정리를 하다가 발견하고 말았다(아니, '발굴하고 말았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옛 추억들이 새록새록 밀려온다. 그래서 달콤하면서도 고통스럽다. 예전에는 그림 그리는 걸 참 좋아했는데, 요즘은 너무 오래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말하자면, 다시 그리고 싶은 거다. 그림들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면서, 그림에 대해 품고 있던 그때의 열정들도 다시 되살아나고, 그게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회한도 밀려오고,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그저 그리고 싶은 거다. 

 

   

▷ 람혼, <담배를 쥐고 있는 노인>(1991).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그렸던 그림으로 기억하고 있다. 화면 좌측 상단의 커다란 붉은 손톱(?) 같은 것은 붉은 그믐달을 그린 것이다. 기억 속에만 어렴풋이 존재하던 그림인데, 무엇보다 이 그림을 '발굴'할 수 있어서 가장 좋았다고 말해야겠다. 이 그림을 그렸던 당시 김호석 화백님이 이 그림에 대해 한 마디 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 말씀의 정확한 내용은 지금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중학생이 이런(?) 그림을 그린 걸 신기하게 생각하시면서도 왠지 안쓰럽게(?) 여기신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때의 내 느낌이 정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김호석 화백님은 그때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약간은 착잡한 표정을 머금으셨던 것도 같다. 당시 화백님의 작품들은 실사(實寫) 화면을 한가득 채운 슬픈 은유들로 내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다. 그러나 그러한 아픔의 느낌은 내가 당시 김호석 화백님의 작품들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계기이자 이유이기도 했다. 이 그림에는 어쩌면 그런 영향들이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 람혼, <無題>(1991년경).

 
역시나 중학교 때 그린 그림. 커다란 탱화 한 점을 그려보고자 시작했으나 결국 미완성으로 남은 작품이다. 실로 오랜만에 '발굴'하고 정말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고운 주황색 종이가 완성되지 못한 그림을 곱게 숨긴 채 그렇게 곱게 접혀 있었다. 나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펼치고 사진을 찍었다, 어둡게, 어두운 마음으로. 

 

 

▷ 람혼, <침 흘리는 여인>(1990년경).

 
이것도 중학교 때의 그림. 데생 시간에 시키는 그림은 안 그리고 이런 짓을 하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 스스로 평가해보자면, 전체적으로 피카소(Picasso)의 영향이 강력하게 느껴지는 그림이라고 하겠는데, 왜 의자에는 저렇게 많은 금들이 가 있는지, 왜 저렇게 빈틈없이 균열되어 있는지, 지금의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 람혼, <야, 우리도 돈 좀 벌자!>(1991년경).

 
위의 <담배를 쥐고 있는 노인> 그림과 비슷한 시기의 그림으로 추정된다. 오른편에 '야, 우리도 돈 좀 벌자!'라는 글이 쓰여 있다. 난 그때 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알 수 없다. (또한 '美史'라는 단어는 어떤 의미로 썼던 것일까? 모르겠다. 그 시절의 아호였던가?) 갱지에 붓 가는 대로 마구 휘갈겼던 그림, 그래서 오히려 더 소중하다, 순간을 담고 있어서. 섬섬옥수, 악의와 허약함을 동시에 가득 담고 있는 듯한 손가락들이, 지금에 와서 뒤늦게, 아찔하고도 아름답게 느껴진다. 

 

 

▷ 람혼, <얼굴-연작>중 일부(1992년경).

 
중학교 3학년 때쯤의 그림으로 추정된다. 그때 난 점점 '표현주의적'이 되어 가고 있었나 보다. 이때쯤 '얼굴 연작'을 구상했던 기억이 난다. 다양한 모델들을 바탕으로 변조된, 다소 위악적이고 거친 화면 구성을 통한 몇 백 장의 얼굴들을 그리는 연작을 구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결국 완성은 하지 못했다. 이 연작의 일부들도 모두 미완성으로 남은 것들.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 얼굴들은 모두 내 마음속에 있다, 하지만 찾을 수는 없다, 그저 그렇게 있을 뿐. 

 

 

▷ 람혼, <莊子, 應帝王, 第七에 대한 한 해석>(2006).

 
이건 2006년 첫날에 쓰고 그린 것인데, 현재 내 서재의 한쪽 벽에 부착되어 있다. 말하자면 『莊子』의 한 장면에 대한 작은 형상화를 의도했던 것. 그러나 그림은, 글은, 언제나 그 의도를 가볍게, 그러나 또한 무겁게 벗어난다. 이성복 식으로 말하자면, 입이 없는 것들, 들뢰즈 식으로 말하자면, 기관 없는 신체들, 그런 것들(사실 이 모든 것들은 말이다, 말일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구멍 뚫리고 찔리고 당하는 것들, 그런 것들(그러나 말은, 여기서, 말의 무게를 벗어난다, 혹은 말이 아닌 것의 무게를, 마치 말처럼, 덧입는다). 돌이켜보면, 이렇듯 20대 때의 그림은 저 10대 때의 그림보다 뭔가 좀 더 '미니멀'해진 그런 느낌이다. 30대의 그림은 어떤 모습을 띠게 될까? 그게 궁금하다. 그러니 다시 그릴 수밖에.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모든 그림들을 실로 오랜만에 갑자기 베란다에서 '대량 발굴'하고 나니, 그리고 이렇듯 들쑥날쑥 다양한 스타일의 그림들로 구성된 때아닌 회고전(?)을 열고 나니, 정말 새롭게 그림을 시작해보고 싶은 욕망이 치솟는다. 다시 그림을 그려야겠다, 가능하다면, 치열하고 탐욕스럽게, 어쩌면 그저 탐욕스럽게만, 그렇게, 지금은 다만 그러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라고 말한다, 불가능하겠지만, 이라고 말하지만,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불가능이 아니라면, 다른 무엇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라는 물음을 남기며. 노파심에서 다시 말하자면, 이는 '불가능은 없다'는 식의 순진한 희망에 대한 예찬이 아니다, 결코 아니다. 어쩌면 오히려 기쁜 절망 같은 것에 가까울 터.

— 襤魂, 合掌/合葬하여 올림.

 

 

 

 

알라딘 서지 검색을 위한 이미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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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9 1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09 1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09 1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09 1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09 14: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10 0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바다 2011-05-11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정 이것이 중학생의 그림이었단 말입니까? ㅎㅎ

람혼 2011-05-12 22:48   좋아요 0 | URL
뭐, 부끄럽지만, 일단은 그렇습니다.^^
멀리 출장을 가셨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잘 돌아오신 건가요? 남극! ^^

푸른바다 2011-05-14 16:49   좋아요 0 | URL
첫번째 그림을 보고 든 인상을 말씀드리면, 담배를 피다가 선생님께 들킨 학생의 심리가 표현되있는 것 같네요.^^ 담배피다가 들키는 순간에는 내가 어른이었으면 하는 아쉬움, 벌거벗겨진 당혹스런 느낌, 동정을 바라는 마음이 복합적으로 느껴지겠지요. 어른이었으면 하는 것은 '노인'으로, 벌거벗겨진 당혹스러움은 수세적인 노인의 표정과 자세 그리고 벌거벗은 웃통으로, 동정심은 노인 앞에 놓인 동냥 그릇으로 표현된 것 아닌가요?ㅎㅎ 그리고 이런 복함적인 감정을 '실사'라는 수법을 통해 그림의 사실성을 강조함으로써 숨기는 것이 이 작품의 장점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세번째 작품 "침흘리는 여인"의 경우는 침이 다른 신체부위들 즉 머리카락, 귀 등과 같이 신체와 분리되는 양상이 아닌 일체되는 것으로 동일하게 그려지고 있다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사물의 존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인습적 태도를 중지하고 그것을 괄호 안에 넣는 "현상학적 판단 중지"를 수행하고자 하는 치열한 의지가 드러나고 있는 것 같군요.^^ 신체는 의자와도 분리되지 않는데 의자에서 보이는 균열은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전제하는 소박한 존재론의 취약성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침흘리며 의자에서 자는 여인은 우리의 인습적 태도에서는 매우 천박한 것으로 인지될 수 있으나 여인의 표정에 나타나는 행복한 표정은 이것 역시 인습적 편견일 수 있다는 주제의식을 표출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탱화는 이러한 인식론적 단절에서 느껴지는 고독감을 불교의 무차별적이고 정갈한 세계에 대한 지향을 통해 벗어나고자 하는 의도를 그린 것이요, "야 우리도 돈좀 벌자"는 불교의 정갈한 세계를 동경하다가도 이내 냉혹한 현실을 자각하게 되는 것을 표현한 것 같습니다. 잠에서 막 깬듯한 표정, 말라빠진 신체 등등을 통해 이를 잘 표현하고 있네요.^^ 제 생각에 美史는 아마도 '앗싸'를 나타낸 것으로 추측됩니다.^^ 美-> 아름다움 -> '아'를 취하고 史는 사 ㅎㅎ 앗싸의 가벼움을 한자를 통한 음차로 치환함으로써 승화시키려는 의도가 보입니다.^^ 즉 '앗싸'는 현실의 냉혹함을 자각하는 순간에 대한 감탄사로 보입니다.^^

결국 이 그림들은 람혼님의 중학교 학창시절의 방황을 상징하고 있는 흔적들인 것 같습니다. 마지막의 완성되지 못한 그림은 그 방황을 최종적으로 요약하고 있는 것 같네요.^^

람혼 2011-05-14 13:54   좋아요 0 | URL
이 놀라운 정신분석적 해석에 읽는 내내 너무 즐겁게, 크게 웃었답니다! ^^
특히 미사에 대한 해석은 정말이지...! 아싸! ^^
저는 '美史'가 혹시 'mass/messe'가 아닐까도 생각했죠.
그런데 요약하고 나니, 너무나 우울하고 문제 많은 중학생이었군요. 크하하! ^^

푸른바다 2011-05-15 12:20   좋아요 0 | URL
ㅎㅎ 큰 근거 없이 즉흥적으로 해본 해석을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작품이 작가의 손을 떠나면 이미 작가의 것이 아니겠지요. 저자의 죽음이라는 바르트의 말을 새기며 사는 요즈음입니다. 사실 담배는 구체적으로 피는 담배라기 보다는 이미 그 당시 정신이 어른만큼 성숙해 있었음을 상징하는 것이겠지요. 물리적 나이나 외모는 어린이인데 마음은 이미 어른인 복잡한 심경이 그림에 나타나 있는 것 같습니다.^^

람혼 2011-05-21 16:45   좋아요 0 | URL
그때도 피웠다면, 어떻게 되는 거죠? ^^

푸른바다 2011-05-23 14:16   좋아요 0 | URL
안 피우셨었나요?^^

람혼 2011-05-25 15:17   좋아요 0 | URL
네, '그때'는 안 피웠어요.^^

2011-06-13 1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4 0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사르 2011-06-26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호석 화백님의 작품집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와우~ 란 말을 먼저 하고 싶네요. 감정선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 과연 람혼님만의 세계관이 가득 들어있는 그림이네요. 중학생때 저 멋진 그림을 그리셨다니요. 그림을 들여다보는 관객들에게도 한아름 영감을 안겨주는 그림같애요.
배란다가 정말 '유적지'로군요! 저런 멋진 작품들이 '대량발굴'되는 곳이니까요. ㅎㅎ '회고전' 잘 봤습니닷! 전시회를 하시게 되면 꽃다발이라도 들고 찾아뵙고 싶어집니다. ^^

람혼 2011-07-06 12:33   좋아요 0 | URL
김호석 화백님의 작품집을 갖고 계시군요.^^ 저도 어릴 때 너무 너무 좋아했던 작가이십니다. 더욱 반갑습니다, 달사르님.^^ 베란다는 유적지라기보다는 거의 폐허죠, 요즘에는 거의 정리를 다 했지만요. 기회가 있을 때 다른 회고전(?)도 한번 다시 열어보겠습니다. 세심하게 관심 가져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starover 2011-07-06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람혼의 과거를 기억하겠습니다.

람혼 2011-07-09 02:0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저는 그 과거와 현재 사이에 끊임없이 다리를 놓겠습니다.

책사랑 2011-07-14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메일 보내놓았습니다. 선생님!

람혼 2011-07-20 15:14   좋아요 0 | URL
앗, 어떤 이메일인지요...?

책사랑 2011-07-21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티글러 번역관련...

2011-07-23 1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5 16: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하의 글은 '1만 사회주의자 선언'이라는 제목으로 http://blog.jinbo.net/wethesocialists에 올라와 있는 글이다. 동참과 지지와 응원을 강력히 표명하며 전문을 옮겨놓는다. 1만 사회주의자 선언. 혹자는 이러한 [단순한] 선언이 [현실적인] '실용주의'와 '탈-이데올로기'의 시대에 얼마나 큰 효과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를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념의 종언을 발언하고 유행시키려는 이들 자신이 지닌 저 커다란 '이념적 편향성'에 대해서 이미 나 또한 언급했던 바 있거니와(『사유의 악보』, 「종곡」 참조), 소위 '제도적 민주주의'와 '현실적 선거공학'이라는 참혹한 '미명' 아래 '이념의 타협'를 구가하고자 했던 '정치적' 행동들의 한계는 이미 불을 보듯 명백해졌다. 이념이란, 생각하지 않는 자에게는 가장 고루한 유물이겠지만, 생각하는 자에게는 가장 물질적이고 가장 구체적인 무기이다. 이대로라면 우리의 상황은 더 악화되면 악화됐지 결코 더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반동의 피로 붉게 도색할 수는 없을지라도, 언제나 도래하고 있는 현재로서의 사회주의를 지금 바로 여기에 함께 소환하기 위해, 타협 가능한 조직이 아니라 환원 불가능한 단수(單數)의 이름으로, 문화적 다양성이라는 알리바이 아래 희석되는 복수(複數)의 이름이 아니라 절멸 (불)가능성의 미덕/악덕을 꿈꾸는 복수(復讐)의 이름으로, 함께 선언하자.

람혼의 보유(補遺):

그러나 '1만 사회주의자 선언' 제안의 전문을 옮겨놓기 전에, 나는 여기에 내 나름의 보유(補遺)를 덧붙인다(그러므로 일견 집단적 본문에 앞서 개인적 보유를 덧붙이는 이러한 행위 자체는 매우 착종되고 모순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무엇보다 먼저 이것은 이론으로 투쟁하고 예술로서 실천하고자 하는 나의 가장 소박한 몸짓일지도 모른다). '1만 사회주의자 선언' 제안문이 제시하고 있는 복지, 노동, 교육 등에 관한 처음 세 가지의 기본적 선언들을 넘어 더욱 발전시켜야 하는 것은 오히려 네 번째 선언이라고 생각한다. 이제까지 스스로 '사회주의자'임을 두려워한 사회주의자는 없었지만, 이념을 두려워했던 이론가들은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실천적' 문제란 어쩌면 이념을 두려워하지 않는 가장 '이론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이와 관련하여 함께 생각해봐야 할 몇 가지 쟁점들을 제시한다:

1. 나는 현행 양당제(말이 좋아 '양당제'이다)의 철옹성이자 그들만의 리그인 '제도적 민주주의'와 그 기형적/기생적 파생상품인 '민주적 선거'를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우리는 항상 차악과 최악 사이에서 고민해야 하는 것인가? 그들이 스스로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 시대와 모순되게도, 왜 우리 정치-소비자들은 항상 차악의 상품과 최악의 상품 사이에서 불합리한 선택만을 강요받고 있는가? 고로 현재의 가장 '반민주주의적 민주주의'를 어떻게 전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우리에게 가장 '이념적'이고 가장 '실용적'인 절체절명의 문제로 제기된다. 우리가 스스로를 국민의 지배자라고 생각하는 권력의 개들에게 표와 세금까지 바쳐가면서 그들의 살을 찌워줘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2. 나는 국가보안법의 철폐를 '현실화'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고로 가장 전략적이고 전술적인 이론과 실천들이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헌법의 정신으로 적시된 '사상의 자유'라는 보편적 특수성은 소위 '국가 안보'라는 특수한 보편성의 미명 아래 무시되어 왔고, 따라서 소위 '한국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라는 정체성은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문법 속에서 사상의 '차이'라는 측면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사상의 '위계'라는 측면으로 '차별'되어 왔다. 그러므로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의거한 국가보안법 철폐라는 동어반복적 주장은 떼려치우고 국가보안법을 전략적으로 철폐할 수 있는 정치-미학적 은유들을 창궐시키자. 예를 들어, 나는 현재 '대한민국' 정부를 이롭게 하는 모든 행위들, '국익'을 위한다고 말하는 모든 담론과 행동들이야말로 최악의 '이적(利敵) 행위'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국가 자체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하라! 

3. 나는 청년 실업 문제를 단순히 사회적 세대의 문제나 경제적 고용의 문제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청년 실업 문제를 단순히 예술적/음악적 희화나 풍자의 대상만으로 삼아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사회적 문제를 예술적으로 발언하는 예술가들 대부분은 사실 그러한 문제를 '소재적'으로만 채택하고 있으며 사실 이 문제와 별 상관도 없다. 그러니, 한국의 예술가들이여, 조금 더 노력을, 조금 더 분발하라. 문제는 단순히 프티부르주아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자본주의에 기생하는 예술가들과 그 '공범적' 행위들이다. 문제는 '인디'라는 '자랑스러운' 꼬리표가 아니라, '인디' 자체를 문화의 한 지형으로 허용하고 흡수하는 자본주의 그 자체, 그 감각적인 것의 분할 방식 자체이다. 그러니, 예술가들이여, 예술 안에 정치를 담으려 하지 말고, 예술로서/써 정치를 행하라.

— 이하, 예고한 대로 '1만 사회주의자 선언' 제안문을 옮겨놓으며,
    襤魂, 合掌/合葬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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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사회주의자 선언 

 


이 선언을 하고자 하는 우리는, 조직과 결합하지 않았으나 변혁을 갈망하며 진지하게 고민하는 개인들입니다. 이 선언의 목적은, 합당국면에서 규모있는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이들이 사회주의자로써 스스로를 인식하고, 선언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서로의 공간을 터나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는 취지에서 기획되었으며, 온라인-오프라인상의 홍보와 활동을 통해 선언에 동의하는 이들과 함께 다듬어나가며 변혁운동의 장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오롯이 설 공간을 터나가고자 합니다.

온라인에서는 선언 포스팅의 블로그로의 펌글을 통해, 그리고 blog.jinbo.net/wethesocialists의 해당 선언 포스팅에 대한 댓글을 통해 참여를 받고 있으며, 오프라인에서는 매주 월요일(3/28) 고려대학교 학생회관 생활도서관에 모여 선언의 구체적 의미와 방향에 대해 논의합니다. 활동과 스스로의 삶에 대해 고민하며 나아가는 당신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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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민주노동당 강령에서 ‘사회주의 원칙’을 삭제할 것으로 알려졌다. 사회주의 원칙이 진보세력의 통합에 걸림돌이 되고, 무엇보다 이를 삭제하는 것이 기층 당원들의 눈높이에 맞춘 처사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그리고 사회주의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다시 되돌아보게 한다. 이런 저런 구실로 사회주의 원칙을 퇴색시키려는 시도들은 단지 민주노동당 내에서의 현실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주의자들은 어느 곳에서든 우리 자신의 원칙과 노선을 명확히 표현하는 것조차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무엇보다 현실 정당 내부에서 우리들은 여러 가지 유혹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우리의 구호와 강령을 약간만 완화하고 약간만 타협하기만 한다면 우리가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협박과 회유에 직면해 있다. 우리들은 변혁에 대한 우리들의 열망을 제대로 수용할 수 있는 현실 정당과 조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사회주의를 내세우는 조직들에서조차 ‘우리들이’ 생각하는 사회주의의 원칙이 무엇인지에 관해 자유롭게 토론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우리들은 우리가 처한 어려운 현실에 대해 어떤 손쉬운 환상도 갖고 있지 않다. 노회한 진보적 어른들이 말하는 사회주의란 단지 겉치레에 불과했다. 지난 역사는 ‘진보’라는 저 막연한 관념이 사회주의 원칙을 얼마든지 판돈으로 걸 수 있는 것을 몸소 실증해 주었다. 사회주의를 말하는 여러 조직 역시도 의회정치의 의제에 끌려 다니면서 젊은 사회주의자들을 정치적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이제 환상은 끝났다. 그러므로 우리, 청년 사회주의자들은 이제 우리가 생각하는 바를 명확히 말할 것이다.

‘진보’니 ‘통합’이니 하는 저 막연한 이름으로 우리가 견지하는 원칙들에 더 많은 힘이 실릴 것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속이는 짓을 그만 둘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견해와 의도를 감추는 것을 경멸받을 일로 여긴다. 대신 우리가 생각하는 진실이 무엇인지를 공공연하게 말하자. 대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우리가 무엇을 지지하는지 정직하고 분명하게 말하자. 우리의 신념을 선언하고 어디에서든 가르치자. 현재 운동이나 정당의 규모가 작다고 우는 소리를 내는 일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전체 진실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말할 것이며, 우리들이 말하는 이 진실이 어느 곳에서도 ‘합의’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선언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회주의의 원칙이란 합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정치적 권리’를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협할 수 없는 사회주의적 원칙에 관한 우리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우리는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복지’가 시혜의 대상이나 선심성 정책이 아니라, 모두의 ‘보편적인’ 사회적 권리라는 사실을 무조건적으로 단언할 것이다. 복지는 헌법에 보장된 노동권, 교육권, 주거권, 행복 추구권, 그리고 사회적 국가를 실질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복지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소수 기술관료들이나 카리스마적인 정치인의 즉흥적인 판단에만 맡겨놓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복지는 무엇보다 예산주권의 문제이다. 이제라도 사태를 다시 바로잡아야 한다. 시민들의 사회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보육문제, 교육문제, 노동문제 등에 관해 어떤 복지가 필요한지에 대한 ‘판단’은 이제 ‘우리’들이 한다. 이에 관한 ‘정치적 책임’은 당신들, 예산을 멋대로 주무르던 정치인들과 관료들이 져야 한다. 시민들의 행복한 삶을 보장하기 위한 실질적 방안을 마련하는 데 예산을 우선 배분하라.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그 나머지 예산으로 당신들이 원하는 (각종 불필요한 토목사업과 같은) 소꿉놀이를 하라. 무엇보다 복지의 혜택을 이 사회의 구성원들이 부자이든 빈자이든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돌아가게 하라. 우리는 ‘보편적’ 무상급식 정책을 강력히 지지한다. 이제 복지에 관해서 ‘누가’ ‘더’ ‘불쌍한’ 사람인지에 관한 모욕적인 판단을 국가와 관료들이 내리는 시대는 끝났다. 복지는 이 사회의 시민 구성 모두가 당연히 누려야 할 자랑스러운 권리이다. 국가와 관료의 책임은 이러한 권리를 보장하는 데 있다.

두 번째, 노동은 이 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자원이다. 그럼에도 헌법에 보장된 노동권은 여전히 명목상의 문구에 불과했다. 우리, 사회주의자들은 모두 다 노동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며, 노동권이 단순히 몇몇 소외받는 사람들의 사회적 권리일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 전체의 ‘정치적’ 권리라는 사실을 단언할 것이다. 우선 차별받고 억압받는 자들이 노조의 자유로운 결성을 방해하는 저 흔한 폭력적인 시도들은 그 정의상 ‘불법적인’ 것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노동자와 철거민들에게 용역폭력을 동원하는 자본가들을 구속하라! 그리고 우리는 노동자들을 ‘정치적 주체’로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노동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다. 비정규직이든 정규직이든 그들로 하여금 임금결정에 참여하도록 하라. 근로조건에 관한 그들 자신의 요구는 노동의 분할(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할)을 강제하는 자본의 공세를 무력화하는 수준까지 허용되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요구가 지나치게 ‘과도’해질 것을 걱정하고 있다. 우리는 저들의 한가한 ‘걱정’을 공유하는 어떤 정치세력과도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최저임금이 아닌 ‘생활임금’을 지지한다. 모든 노동자들은 그들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그 사회가 이룩한 문명을 향유할 권리가 있다. 그들이 받아야  할 ‘최저한’의 임금은 바로 그러한 권리를 척도로 산정되어야 한다.

세 번째, 우리들은 모두의 교육받을 권리를 옹호한다. 우선적으로 공교육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사교육을 포함한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할 것이다. 오늘날 의무교육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수많은 학생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데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여라. 그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필요한 교육을 제공하라. 공교육 내부의 경쟁과 폭력에 시달렸던 수많은 학생들이 ‘대안학교’를 찾아 전전하는 불행한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공교육 자체가 그들에게 ‘대안’을 제공하도록 요구하자. 그것이 국가가 응당 져야 할 책임이다. 학력 신장을 명목으로 학교에서 자행되었던 흔한 사적 폭력들을 사회적으로 통제하라. 학교는 시민 양성소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시민적 권리를 우선적으로 교육하라! 무엇보다 우리 사회주의자들은 공교육을 넘어 대학교육에 대한 ‘사회적 통제’가 필요하다는 것에 강력히 동의한다. 제 정신을 가진 대학생들은 이제 ‘대학 선진화’라는 미명 하에 캠퍼스를 화려하게 꾸미고 값비싼 상점들을 학내에 들이며 등록금을 인상하는 저 술책들에 더 이상 기만당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대학과 자본이 상아탑 위에 쌓아올린 이윤은 우리들에게 외설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명문 대학이든 비명문 대학이든 그들이 쌓아올린 이윤은 단지 이 땅의 파행적인 학벌제도와 차별적인 노동시장 구조를 이용하여 갈취한 지대(rent)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저 위선적인 소수의 명문대학들은 명문대학으로서의 자신들의 특권적인 ‘지위’를 선전하는 저 역겨운 행위를 통해 그들이 제공하는 교육이 단순히 시장에서 제공되는 상품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반증해 주었다. 대학은 자본이 아닌 학생들이 요구하는 교육을 제공하라! 그리고 대학은 그들이 갈취한 이윤을 학내 구성원들, 학생들, 노동자들 모두에게 되돌려라!

네 번째, 우리 청년 사회주의자들은 청년들이야말로 이 사회의 ‘재생산’의 ‘책임’을 지고 있는 ‘주체’들이라는 것을 선언하며, 그들의 사회적 독립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할 것이다. 지금까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어느 정치적 세력도 청년들을 단순한 ‘동원’의 대상 그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 오늘날 청년들 사이에서 만연한 정치적 냉소주의는 단순히 그러한 현실인식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청년들이 청년에게 요구되는 ‘패기’와 ‘야성’을 잃어버린 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공간을 점유해왔던 기성세대 자신의 책임이다. 이제라도 위선적인 방식으로 청년들에게 사회적 참여할 것을 훈계하는 짓은 중단되어야 한다. 시위와 집회에 나가고 투표를 하는 등의 사회적 참여의 진정한 올바른 방향이 무엇인지는 ‘우리들’이 ‘결정한다.’ 무엇보다 청년들이 무한정 유예된 사회적 독립과 독자적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 각자의 사적영역 속에서 자기계발과 노동에 매진하는 상황에서는 어떠한 정치적 대의도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점을 직시하라. 그들이 노동권, 주거권, 교육권 등의 사회적 권리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현실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더 이상 부모가 그들을 무한적 부양할 필요가 없어질 때, 청년들의 사회적 독립과 더불어 그들의 제반 권리를 위해 투쟁의 당위성이 비로소 ‘의미’를 얻는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서슴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위해 거리에 나서는 유럽의 청년들을 부러워하기 이전에, 각 정치세력들은 그들이 청년들의 사회적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하라. 우리들은 이제 더 이상 진보니 뭐니 하는 공허한 정치적 미사여구에 속지 않을 것이며, 청년들을 본연의 사회적 주체로 진지하게 인정하는 정치세력들만을 진지한 연대의 상대로 고려할 것이다.

우리, 청년 사회주의자들은 현재 사회주의라는 대의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냉정하게 직시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위기는 ‘조직’의 위기일 뿐만 아니라 ‘개인’ 양자의 위기이기도 하다는 점을 말이다. 그 동안 진보적 이념을 내세우는 각종 조직과 정치세력들은 그들을 떠받쳐 왔던 개개인들에 대한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등한시 해 왔다. 조직들이 진보적 개인들을 추수하기에 급급한 상황 속에서, 반대로 진보적 개인들은 자신의 대의에 대한 무력감과 냉소주의에 빠져들었다. 지난날 촛불시위는 과거의 조직들에 절망한 개개인들의 느슨한 네트워크를 통해 정치적 변화를 불러일으키고자 했던 최후의 시도였다. 촛불시위 이후 우리는 더 이상 개인의 자발적인 내면과 의식만으로는 무엇도 할 수 없다는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반대로 각 조직들은 조직의 재생산이라는 장벽에 부딪히며 대중 동원능력을 급격히 상실해 가고 있다. 그들이 하나 둘 의회전술과 진보 대연합이라는 유혹에 굴복해 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럼에도 조직들은 자신의 책임과 과오를 깨닫지 못한 채 여전히 과거의 관성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문제상황에 놓여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문제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다시 이 자리에 모였다. 조직과 정파를 떠나, 우리들은 진보적 이념을 내거는 각 정치세력들에게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질 것을 다시 한 번 요구할 것이다. 진보대연합이나 각종 선거공학에 기초한 망상들로 스스로를 속이는 짓을 그만두자. 대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앞서 말한 사회주의적 원칙을 분명하게 내거는 세력들만 지지하고 연대함으로써 우리의 의사를 분명히 하자. 그리고 그들에게 그들이 대중들에게 진 정치적 책임을 자각하게 하자. 조직들로 하여금 그들이 할 일을 하도록,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혹자는 이념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들은 여기에 대해, 이념을 분명히 함으로써만 비로소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분명해질 것이라는 말로 대답할 것이다. 지금 대중들 사이에서는 이 사회가 재생산의 한계에 부딪혔다는 공통인식이 공유되고 있다. 말하자면 지금의 계급 사회가 이대로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공통감각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만연한 위기의식과 당혹스러운 망설임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이념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거리로 나서 당당하게 선언하자. 혹자가 말했듯이, "사회주의만이 유일한 대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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