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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뢰즈(Deleuze)는 니체(Nietzsche)의 철학에 관해 두 권의 '직접적인' 해설서를 남기고 있다. 프랑스 대학 출판부(PUF)에서 출간된 『니체와 철학』(1962)과 『니체』(1965)가 바로 그것. 이 중에서도 특히 『니체』는ㅡ들뢰즈가 생각하는ㅡ니체 철학의 주요 주제들을 아주 간략하고 명쾌하게 정리한 후 이와 관련된 니체 자신의 글들을 니체의 여러 저작에서 비교적 고루 선별하여ㅡ물론 불역(佛譯)으로ㅡ수록하고 있기 때문에, 현대의 니체 입문에 있어서는 건너뛸 수 없는 중요한 책들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다. 일독을 권한다. 『니체와 철학』은ㅡ물론 번역에서 몇 가지 이상한 점들이 발견되기는 하지만ㅡ이미 1998년에 민음사에서 국역본이 간행된 바 있으므로(초판은 이데아 총서의 일환으로 출간되었던 것인데, 최근에는 '들뢰즈의 창'이라는 제목의 총서 하에 발간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하에서는 『니체』의 주요 내용들을ㅡ특히 들뢰즈의 '해설'이 펼쳐지고 있는 2장을 중심으로ㅡ간략하게 소개해보고자 한다.

           

▷ Gilles Deleuze, Nietzsche, Paris: PUF(coll. "Philosophes"), 1965.
▷ Gilles Deleuze, Nietzsche et la philosophie, Paris: PUF(coll. "Quadrige"), 1962.
▷ 질 들뢰즈, 『 니체와 철학 』(이경신 옮김), 민음사(이데아 총서), 1998.

2) 들뢰즈는 먼저 니체의 철학으로부터 다음과 같이 서로 '평행'하는 두 개의 계열들을 추출해내고 있다(Nietzsche, p.17 참조, 이하에서는 쪽수만을 표시함): 1. 해석(interprétation)ㅡ의미(sens)ㅡ잠언(aphorisme)ㅡ의사/생리학자(médecin/physiologiste). 2. 평가(évaluation)ㅡ가치(valeur)ㅡ시(poème)ㅡ예술가(artiste). 주지하다시피 니체는 기존 형이상학의 표면적 과제였던 '인식' 또는 '진리의 발견'을 '해석'과 '평가'로 대체한다. 두 계열의 첫 번째 항들은 바로 이 점을 나타내고 있다. 해석은 의미를 결정하는 작용이고, 다시 그 의미들의 위계와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평가라는 작용이다(두 계열의 두 번째 항들). 그리고 이러한 철학적 전회가 취하는 서술 전략이 바로 잠언과 시가 되는 것이다(두 계열의 세 번째 항들). 들뢰즈는 니체 철학을 기존 철학들과 확연히 구별시켜주는 이러한 형식적 차이가 이미 "철학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구상(une nouvelle conception de la philosophie)"이며 동시에 "사유하는 자와 사유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이미지(une nouvelle image du penseur et de la pensée)"를 함유하고 있다고 본다(p.17). 이때 잠언은 해석의 기술임과 동시에 해석의 대상이기도 하며, 마찬가지로 시는 평가의 기술임과 동시에 평가의 대상이기도 하다. 해석자로서의 철학자는 현상을 하나의 징후 또는 증상(symptôme)으로 파악하여 그에 대해 진단을 내리는 '의사'이자 '생리학자'이며, 그 의사의 언어가 바로 잠언이다. 또한 평가자로서의 철학자는 '관점들(perspectives)'을 창조하고 기존의 가치들을 비판하는 '예술가'이며, 그 예술가의 언어가 바로 시인 것이다(두 계열의 네 번째 항들). 따라서 들뢰즈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니체가 요구했던 '미래의 철학자상'을 요약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의 철학자는 예술가이자 의사이다ㅡ한 마디로, 입법자(législateur)인 것이다."(p.17)


   

▷ Gilles Deleuze, Présentation de Sacher-Masoch, Paris: Minuit(coll. "Arguments"), 1967.
▷ Gilles Deleuze, Critique et clinique, Paris: Minuit(coll. "Paradoxe"), 1993.


           

▷ Gilles Deleuze, Masochism(trans. by Jean McNeil), New York: Zone Books, 1989.
▷ 질 들뢰즈, 『 매저키즘 』(이강훈 옮김), 인간사랑, 1996.
▷ 질 들뢰즈, 『 비평과 진단 』(김현수 옮김), 인간사랑, 2000.


3) 앞서 네 개의 항을 갖는 두 계열들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들뢰즈가 말하는 이러한 두 계열에 마지막 다섯 번째 항이라 할 것을 개인적으로 덧붙여보자면, 그것은 진단(clinique)과 비판(critique)의 쌍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철학에 관한 이러한 방식의 규정은 들뢰즈가 비교적 초기의 저작에서부터(예를 들면, 『자허-마조흐 소개』의 서문(avant-propos), 특히 p.11을 보라) 말년의 저작에 이르기까지(다시 한 번 예를 들면, 『비판과 진단』을 보라, 이 책이 지닌 내용과 편제에도 불구하고 'critique'를 굳이 내가 '비평'이 아니라 '비판'이라고 번역하고 싶은 것은 칸트 혹은 마르크스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인데) 일관되게 견지한 입장으로서, 이는 철학이 지닐 수 있는 두 가지의 의미, 곧 의학적(혹은 심리학적) 또는 생리학적 의미, 그리고 문학적 또는 비판적 의미에 관한 니체의 사유에서 영향 받은 바 크다고 할 것이다. 『자허-마조흐 소개』는 자허-마조흐의 작품 「모피를 입은 비너스(Venus im Pelz)」의 불역본과 들뢰즈의 해설을 함께 담은 책으로, 국내에는 '매저키즘'이라는 제목으로 1996년에 번역본이 나온 바 있는데 번역의 질은 그리 좋지 못하다. 1989년에 출간된 영역본도 몇 가지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긴 하지만, 번역된 것을 읽으려면 오히려 이 영역본을 읽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11년만에 같은 번역자, 같은 출판사로 올해 국역본의 재판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판본이 '개역판'인지는 아직 개인적으로 확인해보지 못했다). 이 시점에서 문득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 '정겨운' 사실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노래 <Venus in Furs>가 바로 이 자허-마조흐의 작품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노래라는 것. 한때는 정말 '구토가 나올 정도로' 지독히도 애청했었는데... 독자들 중에서는 벌써 이들의 음악과 함께 했던 추억에 입맛을 다시는 이들도 있으리라. 번쩍, 번쩍, 번쩍, 빛나는, 저 차갑도록 매력적인, 가죽 부츠와 함께 말이다.


▷ "Shiny, shiny, shiny boots of leather..." ㅡ Velvet Underground, <Venus in Furs> 中.


4) 들뢰즈는 "입법자로서의 철학자가 지닌 두 개의 덕목들(vertus)"에 대해 말하고 있다(p.19). 니체에 따르면, 그 하나는 "기존에 있던 모든 가치들에 대한 비판"이며, 다른 하나는 그렇게 비판된 가치들 이후에 다시 "새로운 가치들을 창조"하는 것이다(p.19). 니체는 철학이 이미 소크라테스 때부터 어떤 "타락/퇴화(dégénérescence)"의 선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p.20). 왜냐하면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것이 본질과 외관, 참과 거짓, 지성과 감성 등의 이항대립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할 때, 소크라테스야말로 바로 그 "형이상학을 발명한(invente la métaphysique)" 사람이기 때문이다(p.21). 이로부터 삶에 우선하는, 삶에 대해 우월한 지위를 갖는 가치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진, 선, 미, 신성(神性) 등등. 따라서 인간의 삶은 그러한 가치에 종속된 수동적인 것이 되며 "스스로 가치 폄하하게(se déprécier)" 되었다는 것. 칸트 역시 인식의 오류나 도덕적 오류들을 규탄했지만 인식이라고 하는 형이상학적 이상 그 자체, 도덕성(moralité) 그 자체, 그 가치들의 기원과 본질 자체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또한 니체에게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물론 이러한 평가는 칸트에 대한 일면의, 부당한 평가라는 사실을 '우리'는 아마도 잘 알고 있을 테지만). 니체에게 있어서, 헤겔의 변증법도, 종교개혁 이후의 종교도, 상황은 같다. 그래서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미래의 철학자, 곧 의사로서의 철학자(philosophe-médecin)는 동일한 악(mal)이 여러 다른 증상의 형태를 띠고 계속되고 있음을 진단하게 될 것이다."(p.22) 이러한 타락의 선이 비단 철학에만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타락은 또한 가장 일반적인 생성 전반과 역사의 가장 근본적인 범주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끈질긴 것이다. 니체는 이로부터 '반시대적 고찰'의 필요성을 끌어내고 있는 것. 이에 대해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정식화하고 있다: "따라서 진정한 철학은, 미래의 철학은, 영원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또한 역사적인 것도 아니다: 철학은 시의적절하지 못한(intempestive) 것이 되어야 하며 항상 그래야 한다."(p.23) 여기서 니체가 말하는 'unzeitgemäß/intempestif'는 통상적으로 '반시대적'이라는 말로 번역되곤 하지만, 보다 정확하게는 '때를 잘못 맞춘', '시대에 맞지 않는' 등의 뜻을 가진 단어이다. 곧 이는 '일부러' 시의성을 포기한다는 것, '의도적으로' 시의성을 거스른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 점은 사실 간과되기 쉬운 '디테일'이지만 분명 곱씹고 되새겨봐야 할 '번역어'의 중요한 문제라는 개인적인 생각 한 자락.

5) 들뢰즈는 이른바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volonté de puissance)'라고 하는 니체의 개념에 대해 흔히 일어나곤 하는 오해를 먼저 경계하고 있다. 들뢰즈가 보기에 의지는 "힘이 힘과 맺고 있는 관계(rapport de la force avec la force)"에 다름 아니다(p.24). 힘에의 의지를 단순히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désir de dominer)"으로 이해하는 것은 기존의 형이상학적 가치들로 다시 돌아가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p.24 참조). 니체에 따르면 힘에의 의지란 무언가를 취하려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고 부여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의지가 원하는 것이 힘이 아니라 "의지를 통해 [무언가를] 원하는 것(ce qui veut dans la volonté)"이 바로 힘이라고 말하고 있다(p.24). "하나의 힘이 명령을 하는 것도 의지에 의한 것이지만, 하나의 힘이 복종하는 것 또한 힘에의 의지에 의한 것이다."(p.24) 여기서 들뢰즈는 힘에의 의지가 갖는 두 가지 성질, 곧 긍정(affirmation)과 부정(négation) 사이의 전도를 말하고 있다. 힘에의 의지는 능동적인 힘들을 긍정하는 것이며 이때 긍정은 으뜸가는 첫 번째 가치가 된다. 여기서 부정이란 단지 긍정의 향유(jouissance)에 부속되는 여분, 하나의 결과일 뿐인 것이 된다. 반대로 수동적인 힘들에게 있어서는 부정이 첫 번째 가치가 된다. 긍정과 부정에 대한 니체의 이러한 생각은 단순한 이원론이라고 할 수는 없는데, 그 이유는 그에게 긍정이란 그 자체가 다수적이고(multiple) 복수적인(pluraliste) 것이기 때문이다. 긍정은 그렇게 복수적인 것을 긍정하는 것이며, 이에 발맞춰 부정은 하나 되기를 부정하는 것, 곧 일원적이며 단수적인 사유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6) 니체가 "허무주의(Nihilismus/nihilisme)"라고 명명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긍정의 힘에 반대되는 수동적인 힘과 부정의 의지가 승리하게 되는 현상이다(pp.25-26 참조). 약자 또는 노예가 승리하는 것은 힘의 구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지니고 있는 전염(contagion)의 힘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힘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존재들이다. 이러한 전염의 결과가 바로 니체가 말하는 "타락/퇴화"인 것이다. 여기서 강자와 약자, 주인과 노예를 단순히 역사적인 계급 대립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들뢰즈의 주문이다. 이것은 "질적 유형학(typologie qualitative)"의 문제(p.27), 곧 고귀함과 천함이라는 성질의 구분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허무주의의 승리가 뜻하는 것은 바로 힘에의 의지가 창조하기(créer)를 멈추고 단지 의미하기(signifier)만을 행한다는 것(여기서 들뢰즈는, 니체를, 저 유명한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의 저자로서의 마르크스와, 또한 접속시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곧 지배하기를 욕망하고 돈, 명예, 권력 등의 기존 가치들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니체는, 역설적이지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항상 약자들에 대해서 강자들을 보호해야 한다."(p.27) '교조적' 혹은 '인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아마도 이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을 터.


7) 이어 들뢰즈는 이른바 "니체적 심리학(psychologie nietzschéenne)"이 이뤄낸 몇 가지 '위대한' 발견들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정식화하고 있다: 1. 원한(le ressentiment) ㅡ 이것은 "네 탓이야(c'est ta faute)"라고 말하는 심리 상태. 심리학적으로 투사(projection)의 기제가 작동하는 것이다. 이는 곧, 약자가 자신의 불행이 강자의 행동(action)에 있다고 보고 행동 그 자체를 수치로 여기고 능동적인 모든 것에 반기를 들며 따라서 삶 자체를 죄악시하게까지 되는 수동적인 상태를 말한다. 2. 양심의 가책(la mauvaise conscience) ㅡ 이제 "내 탓이오(c'est ma faute)"라고 말하는 단계. 심리학적으로는 내사(introjection)의 기제라고 하겠다. 수동적인 힘이 자기 자신을 응시하며 어떤 잘못을 자신 안에서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는 단계이다. '원죄' 또한 이러한 작용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심리의 '전염'이 수동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3. 금욕주의적 이상(l'idéal ascétique) ㅡ 이제 심리학적으로 승화(sublimation)의 단계가 오게 된다. 수동적이고 나약한 삶을 원하는 것이 이제는 궁극적으로 삶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힘에의 의지가 곧 무(無)에의 의지가 되어버린다. 삶에 우선하고 반대되는 경건한 가치들을 세우고 그러한 가치들을 통해 삶 자체를 단죄하는 것이다(우리는 이러한 비판의 모티브를 또한 기독교에 대한 바타이유의 비판 속에서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단계는 "무로서의 신(Dieu-Néant)"과 "수동적 인간(Homme-Réactif)"의 결합으로 표현되고 있다(p.29). 따라서 인간은 '우월한' 가치들이 부과하는 짐을 짊어지고 가는 짐꾼이자 노예 같은 존재가 된다. 삶 그 자체가 짊어지기 힘든 부담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허무주의의 이전 단계들에서 탄생하게 되는 이러한 사유의 범주들이 바로 자아, 세계, 신, 인과성, 목적성 따위라는 것이다. 4. 신의 죽음(la mort de Dieu) ㅡ 이제 회복(récupération)의 순간이 온다. 말하자면, 인간이 신을 죽이고 새로운 짐을 떠안는 단계. 인간은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며 그리하여 결국 자신이 신을 대체하고자 한다. 니체의 생각은 이렇다. 곧, 신의 죽음 그 자체는 분명 거대하고 중요한 사건이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허무주의는 계속되며 실상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 우월한 가치들이라는 미명 하에 삶의 자기 비하와 부정이 계속되는 것이다. 단지, 우월한 가치들이 이제는 인간적인ㅡ저 유명한, '너무나 인간적인'ㅡ가치들의 모습으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예를 들어 도덕이 종교를 대체하고 유용성, 진보, 역사 등의 개념이 이전의 신적인 개념들을 대체하는 식이라는 것이고, 따라서 구조적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질 것이 없다는 말이다. 이전에는 노예가 "신적인 가치들의 그늘 아래에서(á l'ombre des valeurs divines)" 승리를 구가했다고 한다면 이번에는 "인간적인 가치들을 통해서(par les valeurs humaines)" 승리하게 되는 것일 뿐이다(p.30 참조). 인간은 신을 대체함으로써 현실(la Réalité)로 복귀하고 긍정의 의미를 회복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때의 긍정이란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듯 단지 "당나귀의 긍정(Oui de l'Âne)"일 뿐이라는 것이다(p.31). 5. 마지막으로, 마지막 인간(le dernier homme), 그리고 사라지기를 원하는 인간(l'homme qui veut périr)의 단계 ㅡ 마지막으로 종말(fin)의 순간이 온다. 허무주의의 절정에 선 마지막 인간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인간이다: "무를 의지하기보다는 차라리 의지를 없애는 것이 낫다(Plutôt un néant de volonté qu'une volonté de néant)!"(p.32) 이 마지막 인간을 넘어 사라지기를 원하는 인간이 등장한다. 이를 통해 허무주의는 완성되며 또한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자정(Minuit)"의 시간이다(하지만 이 '도정'과 '완성'의 주제는, 그 자체로 얼마나 '헤겔적'인가). 니체의 방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이제 "변화(transmutation)"를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난 것. 덧붙여, 이러한 '니체적 심리학'에 대한 들뢰즈의 정식화가 탁월하면서도 섬세한 부분은ㅡ바로 '니체적 심리학'이란 용어의 사용에서도 드러나듯이ㅡ이렇듯 니체 철학의 주요 논점들과 심리학의 개념어들을 성공적으로 밀착시키고 있는 그의 이론적 기민함에 있다는 생각 한 자락.

8) 모든 가치의 변화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힘들이 능동적이 되는 것[힘들의 능동적인 생성](un devenir actif des forces)", 그리고 "힘에의 의지 안에서 긍정이 승리하는 것(un triomphe de l'affirmation dans la volonté de puissance)"이 바로 그것이다(p.32). 이제 부정은 긍정의 힘이 갖는 공격성(aggressivité)이라는 의미, 곧 창조 행위에 수반되는 총체적인 비판 작용이라는 의미를 띠게 된다. 차라투스트라에 이르러 부정은 수동적인 무가 아니라 하나의 행동(action)이 되며 긍정하고 창조하는 것을 위해 봉사하는 심급으로 기능하게 된다. 들뢰즈는 이를 단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의 긍정은 당나귀의 긍정에 대립되며, 이는 창조하는(créer) 일이 짐을 짊어지는(porter) 일에 대립되는 것과 같다."(p.33) 결국 모든 가치의 변화란 이러한 긍정-부정 관계의 전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들뢰즈가 니체의 옷을 입고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변화와 전도가 허무주의의 도래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부정이 그 자체로 하나의 행동이 되고 긍정을 위해 봉사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마지막 인간과 사라지기를 원하는 인간을 거쳐야만 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다음과 같은 니체의 유명한 정식이 가능할 수 있었다: "허무주의는 극복되었지만, 그것은 그 자체를 통해 극복된 것(le nihilisme vaincu, mais vaincu par lui-même)."(p.33) 

9) 하지만 여기서 다음과 같은 물음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긍정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Mais qu'est-ce qui est affirmé)?" 여러 가능한 답변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 대답이 존재(l'Être)는 아니다. 형이상학의 전체 역사 속에서 존재는 무엇보다 "무(Néant)와 마치 형제처럼 닮아 있기"(p.33) 때문이다. 오히려 긍정되는 것은 복수성과 다수성, 그리고 생성(devenir)이라고 할 수 있다. 형이상학이 최종적으로 도착하는 종착지로서의 허무주의는 생성을 제거해야 할 것으로, 곧 존재 안으로 용해하고 포섭해야 할 것으로 파악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앞서 살펴본 바 있다.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 복수성과 다수성은 부당한 어떤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일자(l'Un)에게 통합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생성과 다수성은 유죄(coupables)"인 것이다. 여기서 들뢰즈는 니체의 변화와 전도가 지닌 네 가지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pp.34-40 참조): 1. 니체는 다수성과 생성을 최상의 힘을 지닌 것으로 승격시킨다. 2. 니체가 말하는 긍정은 긍정에 대한 긍정, 곧 이중 긍정의 모습을 띤다. 3. 일자는 다수성 속의 일자가 되며 존재는 생성의 한 양태가 된다. 다르게 말하자면, 일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다수성과 복수성뿐이며, 또한 마찬가지로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생성뿐이다. 4. 니체가 말하는 변화는 초인(Übermensch/surhomme)의 존재를 포함하고 또 요청하고 있다.

10)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영원 회귀가 똑 같은 것의 반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들뢰즈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니체의 비밀, 그것은 영원 회귀가 선택적(sélectif)이라는 것이며, 그것도 이중적으로 선택적이라는 것이다."(p.37) 이는 사유와 존재의 양태 측면에서 모두 선택적이라는 말이다. 이 중 특히 존재의 측면에서 영원 회귀가 갖는 선택적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들뢰즈는 바퀴(roue)의 비유를 들고 있다. "바퀴의 운동은 원심력을 띠며 모든 부정적인 것을 [밖으로] 쫓아낸다. 존재는 생성을 긍정하기에 그러한 긍정에 대립하는 모든 것, 허무주의와 수동성의 모든 형식들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제거한다."(p.38) 들뢰즈는 이를 정리하여 다시 한 번 이렇게 말한다: "영원 회귀는 반복(Répétition)이다. 하지만 그것은 선택하는 반복이며 구원하는 반복이다."(p.40)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뢰즈는 네 가지 주의사항을 환기하며 글을 맺는다(p.41). 첫째, 힘에의 의지를 단순히 지배하려는 욕망이나 힘에 대한 갈망으로 이해하지 말 것. 둘째, 니체가 사용한 약자와 강자라는 용어를 사회 체제의 권력에 대입하지 말 것. 셋 째, 영원 회귀를 고대 그리스나 인도 또는 바빌론에서 발견되는 시간에 관한 순환적 사유로 이해하지 말 것, 또는 영원 회귀를 똑 같은 것의 회귀, 똑 같은 것으로의 회귀로 이해하지 말 것. 넷째, 니체의 말년 작품들을 광기의 결과로 파악하지 말 것.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들뢰즈는 니체에 관한 많은 오해들을 제거하여 그를 독립적으로 독창적인 하나의 온전한 철학자로 위치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들뢰즈의 『니체』가 지닌 '1960년대적' 목표였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목표는 현재, 어쩌면 이미 '초과하여' 달성된 것인지도 모르지만.

▷ Friedrich Nietzsche, Sämtliche Werke. Kritische Studienausgabe in 15 Bänden
    Berlin/New York: Walter de Gruyter, 1988[2. Aufl.].

11) 내가 소장하고 있는 니체 전집은 발터 데 그루이터(Walter de Gruyter) 출판사에서 간행된 15권짜리 학습판(Studienausgabe)이다. 물론 이는 온전한 '전집'은 아니다. 현재까지 니체 전집은 역시나 데 그루이터 출판사에서 계속 간행되고 있으며 여전히 아직도 채 완간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따라서 얼마 전 책세상 출판사를 통해 선보인 국역본 니체 전집 역시 사실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의 '전집'은 아닌데, 이는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간행된 프로이트 전집이 역시나 온전한 의미에서의 '전집'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 하지만 이 학습판은 사실상의 '니체 전집'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콜리(Colli)와 몬티나리(Montinari)가 편집했으며, 초기의 문헌학 관련 저술 등 극히 일부의 저술만을 제외하고는 유고들까지 포함하여 니체의 철학적 저작들 모두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 학습판은ㅡ시대순 프로이트 전집판에 기초하여 편집/간행된 피셔(Fischer) 출판사의 프로이트 학습판 또한 그러하지만ㅡ본래의 니체 전집에 비해 책의 크기가 작고 휴대가 간편하며 정리가 잘 되어 있어 여간 쓸모가 있는 게 아니다. 일독을 권한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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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07-22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번역도 되지 않은 책을 소개해주셨군요. 잘봤습니다.^^
한가지 질문드리자면 위에서 소개해주신 <니체>라는 저작과 <니체와 철학>간에는 어떤 내용상의 차이점이 있는지요. 그리고 위에서 소개해주신 두 계열중 첫째 계열에 나오는 의사/생리학자라는 비유는 철학에 대한 진단을 내리는 역할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진단이라는 것이 뒤에 나오는 예술가의 평가(비판)와는 어떻게 다른 것인지..그리고 그 "진단(해석)"과 "평가(비판)"이 전통 형이상학에서의 "인식"과 "진리의 발견"과는 또 어떻게 다른 것인지. 또 그를 현대의 최고의 형이상학자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으로(이정우씨의 경우)아는데 그럴 경우 또 어떤점에서 전통형이상학과 같은 계열선상에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인지 궁금하네요.
초면에 너무 복잡한 질문을 드리는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람혼 2007-07-23 0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격적인 저작으로는 <니체와 철학>이 들뢰즈가 바라보는 니체 철학에 대한 보다 정치하고 상세한 '해설'을 담고 있고, <니체>는 '대학교재' 형식의 축약판 내지는 작은 앤솔로지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말씀해주신 문제들에 관해서는 제가 정치하고 자세하게 답변할 수 있는 능력은 되지 못하지만, 기본적으로 드는 생각은 '지평의 차이'에 있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인식'과 '진리의 발견'을 '해석(진단)'과 '평가(비판)'로 대체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부분에서 아마도 니체의 '관점주의'가 개입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말하자면 '절대성'을 '상대성'으로 치환했다고 단순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성' 또는 '외관상의' 순수성을 일종의 '정치성'으로 치환했다는 데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거란 생각입니다. 아마도 '반시대적 고찰'이라는 모토의 의미는 바로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요.^^

yoonta 2007-07-23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변 감사합니다. 무슨 이야긴지 불분명했던 구절들이 보다 또렷해지는 느낌이 드는군요. 앞으로도 좋은글 많이 기대하겠습니다.^^ 아 그리고보니 위에서 소개해주신 <니체>가 이번에 박찬국씨 번역으로 출간된것 같네요. (들뢰즈의)니체이해를 위해서는 아마도 이 책이 <니체와 철학>보다 더 먼저 독해되어야 할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람혼 2007-07-23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야 번역되는군요. 좋은 소식 알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말씀하신 순서의 독서 방법도 [들뢰즈의] 니체 이해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됩니다.
 

1) 역사에 관한 저서나 논문을 읽는 일은 실로 많은 '인내심'을 요구한다. 중요한 것은, 역사에 관한 글은 연역적일 수 없고 언제나 귀납적인 방식으로 결론을 도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귀납법의 추동력은 결국 풍부한 사료이다. 사료가 얼마나 풍부하고 다양하며 집중적인가에 따라 그 사료를 근거로 한 결론이 힘을 얻는다. 뒤집어서 말한다면, 수백 쪽에 달하는 사료가 단 한 줄의 결론적인 문장을 도출하는 것이다. 여기서 저술에 사용된 사료들은 모두 그 구체적인 내용과 시대 그리고 등장인물들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어떤 하나의 '현상'과 동일한 주제에 대한 여러 변주(variation)들이다. 그러므로 역사책 읽기란 곧 결론 읽기가 아니라 서론 읽기, 본론을 가장한 서론을 꼼꼼히 읽어나가는 행위인 것, 또한 그 독서는 지극히 '개인적으로' 사회적인 행위 중의 하나인 것. 이하 몇 개의 연속적인 글들을 통해 거시와 미시를 넘나드는 몇몇 뛰어난 역사서들을, 역시나 지극히 '개인적으로' 소개해보고자 한다.

           

▷ Philippe Ariès, L'homme devant la mort, I. Le temps des gisants
    Paris: Seuil(coll. "Points histoire"), 1985(1977¹).
▷ Philippe Ariès, L'homme devant la mort, II. La mort ensauvagée
    Paris: Seuil(coll. "Points histoire"), 1985(1977¹).
▷ 필립 아리에스, 『 죽음 앞의 인간 』(고선일 옮김), 새물결, 2004.

2) 역사에 대한 글의 독서를 지난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단 한 줄의 결론에 도달하기 위하여 그 모든 사료들을 말 그대로 '건너가고 거쳐가야' 하는 읽기의 과정이다. 우리는 물론 단 한 줄의 결론만을 읽고 재빠르게 그것만을 취할 수도 있다(저 많은 사료가 '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는 '이유 없는' 반항). 또는 보통 역사서의 맨 마지막 장에 위치한 결론만을 읽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필립 아리에스(Philippe Ariès)의 책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방식과 죽음을 경험하는 주체는 시대에 따라 변화해 왔다"는 결론에 바로 도달할 수 있다(『죽음 앞의 인간(L'homme devant la mort)』. 당신은 훌쩍 1000쪽을 넘는 이 두터운 번역본을 읽으며 번역의 미덥지 못함을 발견할 때마다 내가 느끼는 소심하고 신경증적인 짜증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사실은, '일반적으로' 하는 말이지만, 위 번역본의 가독성은 상당히 뛰어난 편에 속한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라는 물음은 역사책의 독서에서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문형이다. 그리고 이 '어떻게'를 이해하고 이론적인 근거로 내재화하는 것은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일이다. 역사서 읽기에는ㅡ물론 이 '부재하는 지름길'에 대한 비유는 너무도 식상해서 이 수사법을 사용할 때는 마치 죄를 짓는 기분까지 들지만ㅡ지름길은 없다. 다만 한 걸음 한 걸음 저자가 어떤 일정한 순서와 배치를 통해 모아놓은 사료들의 이런저런 지형들을 걸어 지나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것이 역사에 대한 글을 읽는 고통스러운 쾌락이다. 곧, 그 쾌락은 하나의 길인 것, 하나의 결론을 위해 치달아야 하는 '건너가고 거쳐가야' 하는 과정이 아닌 것, 그것은 방편이 아니라 그 자체가 머무를 수 있고 머물러야 하는 하나의 길이다.

3) 아리에스가 서구의 죽음을 분류한 저 유명한 구분법에 대해서는 여기서 따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은, 급사(急死)를 일종의 저주로까지 여겼던 '예고된 죽음'의 시대에 관한 것이다. 예고되는 죽음, 미리 알고 있는 죽음은 정리의 시간을 전제로 한다. 죄를 사함, 곧 고해를 위해 준비된 시간이 바로 그것이다. 급사는 그러한 준비를 위한 시간, 구원을 위한 시간을 갖지 못한다. 급작스러운 죽음은 삶을 온전하게 완결짓지 못한 치욕스러운 일인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특히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만 '죽음을 예견하는 능력' 같은 것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이 시대의 '죽음'이란 무엇보다 이러한 정리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준비된', 그리고 '예고된' 죽음'이어야 했다'. 이 '일요일의 역사가' 아리에스를 심성사(心性史, histoire des mentalités)의 대표적 역사가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당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지니고 있던 이러한 '심성'에 대한 그의 풍성한 분석력 때문인 것이다. 위 책들의 일독을 권한다. 원서의 초판은 1977년에 나온 바 있고, 1985년에 두 권으로 분책되어 'Points histoire' 총서의 문고판으로 다시 출간되었다(소장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문고판). 또한 아래의 책들을 먼저 읽고 다시 위의 책들을 읽는 순서도 권할 만하다. '그림으로 보는 <죽음 앞의 인간>' 정도의 표제를 가져야 할 책인데, 실은 『죽음 앞의 인간』보다 먼저 번역되었고(그래서 "죽음 앞에 선 인간"이라는 다소 어중간한 제목을 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죽음에 관한 매력적인 도판들을 다수 싣고 있으며 일종의 '요약판' 내지는 '도해판'으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 일독을 권한다(이 시점에서 문득 떠오르는 책은 바로 바타이유(Bataille)의 『에로스의 눈물(Les larmes d'Éros)』인데, 바타이유가 그의 생애 마지막으로 펴낸 이 눈부신 책에 관해서는 따로 자리를 마련해 소개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 Philippe Ariès, Images de l'homme devant la mort, Paris: Seuil, 1983.
▷ 필립 아리에스, 『 죽음 앞에 선 인간, 上 』(유선자 옮김), 동문선, 1997. 
▷ 필립 아리에스, 『 죽음 앞에 선 인간, 下 』(유선자 옮김), 동문선, 1997.

4) 우리가 역사에 대한 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사료들로부터 저자가 뽑아낸 어떤 결론이 아니라 그가 사료들을 조직하고 배열하고 그로부터 결론을 도출해내는 방법론이다. 사실 역사가의 '결론'이란 이러한 그만의 전체적인 '방법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료들은 결코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가의 방법론이 이 사료들의 선택과 성격 그리고 존재 자체까지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곧 역사가의 방법론은 그 역사가가 지닌 '이데올로기'에 다름 아닌 것이다. 어떤 사료들을 선택하고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의 문제, 곧 특히 역사적인 서술에서 저자가 채택하고 있는 방법론과 기술 방식 그 자체가 역사에 대한 그의 어떤 '결론'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 스스로 역사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예를 들자면,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아날(Annales) 학파의 역사가들이 그러하고, 미시사(microhistory) 역사가들 또한 그러하다. 물론 여기서 푸코(Foucault)의 거의 모든 저작들이 보여주는 저 '역사성', 그리고 그가 다른 '역사가'들과 맺고 있는 내적인 관계 역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필립 아리에스, 『 죽음의 역사 』(이종민 옮김), 동문선, 1998.
▷ 필립 아리에스, 『 아동의 탄생 』(문지영 옮김), 새물결, 2003.

5) 아리에스의 책으로는 두 권을 더 추천한다. 『죽음의 역사』는, 일단 그의 죽음에 관한 '사분법'을 가장 압축적이고 집중적으로 서술하고 있기에, 어쩌면 아리에스의 역사학에 입문하는 데에 있어 가장 먼저 읽어야 하는 책일지도 모른다. 일견 역사학이라는 학문의 테두리를 넘어서 있는 듯이 보이는 이 '죽음'의 역사는, 결국 하나의 '삶'의 역사, 곧 사람들이 어떻게 죽음을 사고하고 어떤 방법으로 죽음을 '살아내는가'를 보여주는 심성사의 가장 매력적인 주제라는 생각이다. 또한 『아동의 탄생』의 일독을 권한다. 책의 제목에서도 간파할 수 있듯이, 이 책은 '아동'이라는 개념의 탄생, 곧 사람들이 어린이를 어떻게 '인식'하고 '취급'해 왔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그런데 잠깐 지나가는 길에 내가 언급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탄생'이라는 단어이다. 이 책의 원제는 '앙시앵 레짐 하의 아동과 가족의 삶'으로서, 원래는 제목에 '탄생'이라는 말이 들어가지 않는다. 사실 국내에서 '탄생'이라는 표제가 유행하게 된 계기는 어쩌면 푸코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다('임상의학의 탄생', '감옥의 탄생' 등등, 또한 르 고프(Le Goff)의 '연옥의 탄생'ㅡ이는 물론 원제에서도 동일하지만ㅡ이라는 제목과 개념도 역시). 그러나 사실 이러한 '탄생'의 개념이야말로 아날 학파와 심성사의 방법론을 대표하는 표제라는 생각이다. 오히려 푸코가 '탄생'이라는 단어와 개념을 전면에 배치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아날 학파의 '배경'을 성공적으로 전유하고 매력적으로 자기화했기 때문이었다. 사건으로서의 역사, 제도로서의 역사가 아닌 하나의 개념과 그에 따르는 심성으로서의 역사, '탄생'의 개념은 바로 이러한 역사학을 이해하는 하나의 훌륭한 키워드인 것.  

6) 앞으로 기회가 될 때마다 이 연재의 일환으로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 뤼시엥 페브르(Lucien Febvre),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조르주 뒤비(Georges Duby), 자크 르 고프(Jacques Le Goff), 카를로 진즈부르그(Carlo Ginzburg) 등의 책들을 차례로 소개해볼까 한다. 말하자면 나는 어떤 '크로스오버'나 '퓨전'에 대한 서론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문학화, 철학의 문학화. 저자가 자신의 방법론을 서론에서 밝히는 것, 그것은 서론 속에 결론을 숨겨놓는 것, 옷자락 안에 품은 칼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론은 또 하나의 결론, 책의 서술 순서로부터 역산(逆算)할 수 있는 결론의 원래 모습이다. 거쳐가게 하는 것, 통과해야 하는 것, 말하자면 일종의 '천국 같은 지옥'으로 인도하는 것, 사실은 말이다. 따라서 사실 이 '지옥' 앞에서 연역법이 먼저인가 귀납법이 먼저인가 하는 물음은 또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식의 '역사학적' 물음이기도 한 것.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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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07-17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재가 고대되는군요.^^

람혼 2007-07-18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로쟈님.^^
 



▷ Michel Foucault, Raymond Roussel, Paris: Gallimard(coll. "Folio essais"), 1992.

1) 푸코(Foucault)가 남긴 문학 관련 글들의 양은 다른 철학자에 비해ㅡ푸코가 '순수한' 철학자인가 하는 '곁가지의 중대한'(일종의 형용모순?) 질문은 차치하고라도ㅡ상당히 많은 편에 속하지만, 단행본으로 출간된 글은 오직 이 한 권, 레이몽 루셀(Raymond Roussel)에 관한 책뿐이다(초판은 1963년). 사실 이 책은 푸코의 다른 저작들보다 상대적으로 '부당하게' 낮은 평가와 주목을 받아온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푸코의 거의 모든 저작들이, 이른바 '지적 유행'이라는 몇 겹의 물결을 거쳐, 그리고 수정에 수정을, 재판에 재판을 거듭하며 국역되어 있는 현재 시점에서도 이 책만이 거의 유일하게 번역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정이 그에 대한 방증이라면 방증이겠다. 그렇다면, 왜ㅡ푸코에게 있어 오히려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가들이라고 할 수 있을 바타이유(Bataille)도 아르토(Artaud)도 아닌ㅡ하필이면 루셀인가? 그런데 이 단순해 보이는 질문은 예상 외로 많은 담론의 지형들을 드러낼 수 있는 물음이라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내 일천한 독서 경험으로 볼 때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변을 제시하며 푸코의 사상적 궤적 안에서 이 책이 차지하는 위상을 평가하고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데, 그 대표적인 논자로는 두 사람의 철학자, 곧 들뢰즈(Deleuze)와 마슈레(Macherey)를 거론할 수 있겠다.

       

Critique, n° 229, juin 1966, Paris: Minuit.
▷ Michel Foucault, La pensée du dehors, Montpellier: Fata Morgana, 1986.
▷ Michel Foucault, Dits et écrits, tome I: 1954-1969Paris: Gallimard(coll. "Bibliothèque des sciences humaines"), 1994.

2) 물론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푸코의 문학 관련 단행본으로는 사실 한 권의 책이 더 있긴 하다.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에 대한 책인 『바깥의 사유(La pens
ée du dehors)』가 바로 그것이다. 푸코의 문학론을 논하는 데에 있어서 바타이유에 대한 글과 함께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글로서, 그리고 블랑쇼의 문학론 자체에 대한 탁월한 입문서이자 해설서로서, 일독을 권한다. 하지만 이 글은 원래 블랑쇼에 관한 특집호로 간행되었던 『비평(Critique)』지의 229호(1966년 6월)에 처음 실린 것으로서(나중에 이 글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 할 푸코의 학문적 일생 동안 축적된 논문과 인터뷰들을 집대성한 책 『말과 글(Dits et écrits)』(전 4권)의 1권에 다시 수록되는데, 이 책에는 『레이몽 루셀』의 근간을 이루는 글 「레이몽 루셀의 작품에 있어서 말하기와 바라보기(Dire et voir chez Raymond Roussel)」와 『레이몽 루셀』 출간 이후 「르 몽드(Le Monde)」에 기고한 관련 글 또한 수록되어 있다), 이 글이 파타 모르가나(Fata Morgana) 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된 해가 푸코 사후인 1986년이었던 것으로 미루어볼 때, 푸코 자신이 이 글을 단행본으로 출간할 의지가 『레이몽 루셀』에 비해 더 확고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글에서 논의되는 블랑쇼의 많은 주제어들ㅡ예를 들어 '체험(expérience)', '문학적 공간(espace littéraire)', '바깥(dehors)', '밤(nuit)', '공백/공허(vide)', '위반(transgression)' 등ㅡ이 바타이유적인 주제들과 공명하고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겠지만, 특히 5장에서 자세히 서술되고 있는 블랑쇼[또는 카프카(Kafka)]의 '법' 개념이 벤야민(Benjamin) 또는 데리다(Derrida)의 법에 관한 논의와 만나게 될 '어떤' 접합의 지점을 찾아보는 작업도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 김현(編), 『 미셸 푸코의 문학비평 』, 문학과지성사, 1989.
▷ 김현, 『 폭력의 구조/시칠리아의 암소 』(김현 문학전집 10권), 문학과지성사, 1992.

3) 푸코의 「바깥의 사유」 번역은, 예전에 김현 선생의 편집으로 불문과 출신 여러 역자들의 번역을 통해 출간되었던 『미셸 푸코의 문학비평』에 수록되어 있다. 번역에는 몇몇 수정할 사항들이 보이지만 그리 큰 무리 없이 읽어내려갈 수 있다. 일독을 권한다. 또한 푸코에 관한 김현 선생의 독립적인 연구서로는 「시칠리아의 암소」를 들 수 있겠는데, 이 글은 예전에 문학과지성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된 적이 있었지만 현재는 김현 문학전집 10권에 르네 지라르(René Girard)에 관한 연구와 함께 수록되어 있다. 물론 김현 이후 그간 푸코에 대한 소개와 연구는 이 화면을 통해 다 소개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방면에서 상당수가 이루어져 왔다. 조만간 나남 출판사에서 간행 예정으로 알고 있는 오생근 선생의 푸코 연구서는 고대하고 있는 책들 중의 하나.

4) 푸코의 루셀論에 대한 마슈레의 글은 대표적으로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텐데, 하나는 일전에 소개했던 그의 문학론집 『문학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에 수록되어 있는 글 「루셀의 독자 푸코: 철학으로서의 문학(Foucault lecteur de Roussel: la littérature comme philosophie)」이고, 다른 하나는 위의 책 『레이몽 루셀』 문고판(1992)의 도입에 수록된 해설(présentation)이다. 이 두 글의 기본적인 논지는 대동소이하다고 할 수 있는데, 마슈레의 '해설'에서 이러한 논지를 가장 압축적으로 서술한 문장을 하나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문장[언어와 (문학적) 공간에 관한 푸코의 문장]은 바타이유와 블랑쇼가 표명하였던 요구, 곧 문학을 전통적으로 문학이 귀속되어 있던 예술의 영역 밖에 위치시키고 또한 문학을 사유의 대표적 형식들 중의 하나로 자리 매김하면서 문학을 진지하게 다룰 것에 대한 요구를 명확하게 정식화하고 있다."(pp.xiv-xv) 곧 마슈레에게 있어서 푸코의 루셀론이 갖는 궁극적인 의미는 '문학의 철학화' 또는 '하나의 사유 형식으로서의 문학'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마슈레는 이러한 푸코의 '철학화된' 문학론이 바타이유의 '체험' 개념과 블랑쇼의 [문학적] '공간' 개념을 배경으로 탄생할 수 있었던 영향사를 간략하게나마 잘 정리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마슈레는 『광기의 역사』와 『말과 사물』 사이에서 이러한 푸코의 루셀론이 수행하고 있는 이론적 '가교' 역할에 대해서도 설득력 있는 논의를 제시하고 있다. 


   

▷ Gilles Deleuze, Foucault, Paris: Minuit(coll. "Critique"), 1986.
▷ Michel Foucault, Dits et écrits, tome II: 1970-1975, Paris: Gallimard(coll. "Bibliothèque des sciences humaines"), 1994.

5) 아마도 들뢰즈는 푸코의 루셀론이 갖고 있는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도 일찍이 간파한 철학자들 중의 한 사람일 것이다. 들뢰즈가 푸코에 대해 '들뢰즈의 방식'으로 쓴 위의 책은 아마도, 1970년에 푸코가 또한 들뢰즈에 대해 「철학의 극장(Theatrum philosophicum)」이라는 글을 썼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특히나(이 글은 푸코의 『말과 글』 2권에 수록되어 있다), 두 사람 사이의 묘한 우정과 교류에 관한 일련의 기록들 중의 하나로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들뢰즈가 푸코의 루셀론을 푸코의 대표적인 개념어들인 언표(énoncé)와 가시성(visibilité)의 관점에서 인용하고 분석하고 있는 부분(pp.59-65)은, 마슈레와는 조금 다른 의미 맥락에서 수행된 푸코 루셀론에 관한 자리 매김이라는 점에서, 일독을 요하는 중요한 글이다. 이 책의 국역본은 예전에 마그리트(Magritte)의 그림을 표지로 해서 한 번 출간된 바 있고ㅡ출판사는 기억나지 않는다ㅡ현재는 동문선 출판사의 판본으로 구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국역본은 소장하고 있지 못한 관계로 번역의 질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 Alain Robbe-Grillet, Pour un nouveau roman, Paris: Minuit(coll. "Critique"), 1963.
▷ 로브그리예, 『 누보 로망을 위하여 』(김치수 옮김), 문학과지성사, 1981. 

6) 푸코의 루셀론이 국역되어 소개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는, 레이몽 루셀의 작품이 국내에 단 한 편도 제대로 번역되고 있지 못하다는 사정도 한몫하고 있다. 오래 전부터 국내에서 그 소설보다는 오히려 '누보 로망'에 대한 비평으로 먼저 많은 주목을 받았던 로브-그리예(Robbe-Grillet)의 유명한 비평집 『누보 로망을 위하여(Pour un nouveau roman)』(이 책은 푸코의 『레이몽 루셀』이 출간된 때와 같은 해인 1963년에 간행되었다)에는 원래 레이몽 루셀에 관한 비평이 한 편 실려 있었지만, 1981년에 출간된 김치수 선생의 국역본에서는, 루셀의 작품이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아 그 비평적 근거와 자료가 희박하다는 이유로, 그 번역이 누락되었던 바 있었다. 이와 비슷한 '적극적인 배려'의 편역 사례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말이 나온 김에 그 중 대표적으로 아쉬운 사례를 하나만 들어보자면, 필립 르죈(Philippe Lejeune)의 『자서전의 규약(Le pacte autobiographique)』 국역본(윤진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8)에서 미셸 레리스(Michel Leiris)에 관한 장의 번역이 누락되었던 예가 떠오른다. 현대의 자서전 문학 혹은 '자기에 대한 글쓰기' 영역에서 레리스가 점유하고 있는 중요한 위치를 생각해볼 때 이러한 누락은 실로 안타깝다고 말할 수 있을 텐데, 해당 작가 작품의 직접적인 번역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그에 대한 주요 비평들이 먼저 번역됨으로써 해당 작가/작품의 이해와 번역을 향한 예비적인 길을 놓아줄 수도 있다는 점에서, 특히나 이러한 '과도한 배려'로서의 누락은 반갑기는커녕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 Michel Foucault, Histoire de la sexualité, tome 2: l'usage des plaisirs, Paris: Gallimard(coll. "Bibliothèque des histoires"), 1984.
▷ Michel Foucault, Histoire de la sexualité, tome 3: le souci de soi, Paris: Gallimard(coll. "Bibliothèque des histoires"), 1984.
▷ Michel Foucault, L'herméneutique du sujet, Paris: Gallimard/Seuil, 2001.

7) 내 생각에 푸코에 관한 마슈레의 논의에는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점이 있다. 문학적 '존재론'의 문제는 푸코에게 있어서 바로 문학적 '윤리학'의 문제를 수반한다는 명제가 바로 그것(À quoi pense la littérature?, p.190 참조). 이는 무슨 뜻으로 이해해야 할까? 푸코는 『성의 역사(Histoire de la sexualité)』 1권과 2권 사이에서 일종의 '전회'라 이름할 노선 수정을 하고 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주체 문제로의 전회', '미학적[이라 이름할 수 있는] 자기-관리의 윤리학으로의 전회' 혹은 '자기의 테크놀로지 문제로의 전회' 등으로 불리는 논의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이미 수정된 국역본도 나와 있는 『성의 역사』 2, 3권 외에도, 푸코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의 하나인 『주체의 해석학(L'herméneutique du sujet)』의 일독을 권하는 바인데, 이 책을 통해 이러한 '전회'의 주제와 관련된 푸코의 보다 생생한 논의를 만날 수 있다(이 역시 얼마 전에 번역된 것으로 알고 있다). 마슈레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이러한 노선 수정의 단초와 맹아를 푸코의 루셀론에서 '이미' 발견할 수 있다는 가설을 얻게 되는 느낌이다. 루셀에게 중요했던 것은 이른바 '정통적'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과는 대조적인, 무의미와 자유연상에 대한 '관리' 혹은 '통제술'이었던 것. 또한 푸코 혹은 마슈레가 루셀에게서 발견하는 중요한 특징은 재현(représentation)의 논리에 대한 반대, 해방(libération)의 논리에 대한 반발이다. 이는 곧 세계의 무의미에 대한 존재론 혹은 인식론이 그러한 무의미를 관리하고 통제하려는 '자기-존재'의 윤리학 혹은 행동학으로 이행하는 전환의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논의는, 푸코의 루셀론이 비단 광기에 대한 저작과 에피스테메에 대한 저작 '사이'에만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이후 확장된 형태로 되돌아올 하나의 윤리학에 대한 '씨앗'으로도 독해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함으로써, 푸코의 사상적 여정에 관한 전체 지도를 그리는 데에 있어 하나의 '생산적인'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는 생각 한 자락 밝혀둔다. 


       

▷ 김상환, 『 풍자와 해탈 혹은 사랑과 죽음: 김수영론 』, 민음사, 2000.
▷ 김진석, 『 소외에서 소내로 』, 개마고원, 2004.
▷ 김상환·장경렬 外, 『 문학과 철학의 만남 』, 민음사, 2000.

8) 앞서 언급하였던 '문학-사유' 혹은 '문학-철학'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단독적 저서는 국내에 그리 많지 않다. 두 권만을 꼽아본다면, 김상환 선생의 김수영論 『풍자와 해탈 혹은 사랑과 죽음』, 그리고 김진석 선생의 비평집 『소외에서 소내로』 정도를 이 계통의 수준급 저서들로 거론해볼 수 있겠다. 김상환 선생의 책에서는 김수영의 시와 다양한 철학들 사이의 흥미롭고도 감동적인 만남을 경험할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 이 책의 독서를 통해 한 철학자의 '문학적' 자기고백과도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을 기억한다. 이러한 '자기고백' 또는 '자기가 자기와 소통하는 대화적 독백'ㅡ여기서 '독백'이라는 단어를 단순히 바흐친적인 의미에서 이해하고 폄하해서는 안 되는데, '대화적'이라는 한정어를 붙인 까닭은 이러한 독백의 '공간'을 사장시키지 않기 위해서랄까ㅡ을 읽는다는 경험은 상당히 짜릿하면서도 중량감이 있다. 더군다나 이러한 전율과 무게가 김수영의 시를 사랑해온 이에게야 오죽할까. 일독을 권한다. 김진석 선생의 비평집 중에서는 우선 김소진論과 박상륭論의 일독을 권한다. 특히나 박상륭에 대한 비평의 환경이 꽤나 척박하다고 할 수 있는 국내 비평계의 상황에서 김진석 선생의 박상륭론은 상당히 참신한 느낌이 있다. 박상륭의 대작 『칠조어론』ㅡ이 책 앞에서 얼마나 많은 독자들이 좌절하고 또 전율했을 것인가ㅡ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그 '소박한' 논의는, 논의의 과정 자체가 상당히 추상적이고 일반적이며 심지어 '개인적'이기까지 하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박상륭의 문학에 관해 사유할 수 있는 여러 요소들을 '물음'의 형식으로 던져준다는 점에서 무시 못할 '장점'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다('포월', '소내', '탈-' 등의 창조적인 철학 개념들을 창안했던 이 '소중하고 빼어난' 한국 철학자 김진석의 다른 책들에 관해서는 다른 기회에 따로 자리를 마련해서 소개해볼까 하는데, 그가 아주 이른 시기부터 서양 현대 철학을 전유하고 자기화한 과정은, 그의 서술이 보여주는 '문체'와 더불어, 어린 시절의 나에게는 경이의 대상이었다는 고백 한 자락, 덧붙여둔다). 덧붙여, 문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일반적 입문서 내지 다양한 접근방법의 소개서로는 민음사에서 간행된 논문집 『문학과 철학의 만남』의 일독을 권한다. 수록된 글 모두 흥미로운 논문들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중에서 특히 김우창 선생의 글 「문학과 철학 사이: 데카르트적 입장에 대하여」와 [역시나] 김진석 선생의 글 「제 살 깎아먹는 프로이트」ㅡ이런 제목을 달고 있는 글을 안 읽고 뛰어넘을 재주가 있었을까ㅡ를 추천하고 싶다.




▷ Martin Heidegger, Erläuterungen zu Hölderlins Dichtung, Frankfurt am Main: Vittorio Klostermann, 1996[6., erweiterte Auflage].

9) 아마도 이 시점에서, 이러한 '철학적 문학' 혹은 '문학에 대한 철학적 해석'의 전통을 어디까지 소급해볼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던져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당연하게도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그 범위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매우 다양한 논의를 포괄할 수 있는 광범위한 것이 될 것이며, 어쩌면 서구의 '문학사' 또는 '철학사' 전체와 동일한 외연을 갖는 엄청나게 거대한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특히나 현대에 있어서 철학과 문학 사이의 [권력]관계를 점검해볼 때 결코 빠트릴 수 없는 책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하이데거의 횔덜린論(초판은 1944년)이라는 생각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현대의 '철학-문학' 논의 또는 '철학적 문학론' 저술들의 어떤 '무의식'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다. 일독을 권한다. 이 책을 통해, 엄밀한 철학적 논증보다는 시적 사색으로 접근해가는 하이데거 후기 철학의 '문체' 문제ㅡ여기서 문체는, 단순한 문체의 문제로서만 끝나는 것이 아닌데ㅡ를 시[문학]와 철학의 관계 속에서 추적하고 규명해보는 작업도 매우 흥미로운 연구 영역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개인적인 생각 한 자락 밝혀둔다. 

10) 잡생각을 계속 이어가 보자면, 철학에 대해 '문학적[시적/소설적]'이라는 평가가, 혹은 문학에 대해 '철학적[사변적]'이라는 평가가, 하나의 욕설로 사용되던 시기도 있었음을 떠올리게 된다. 예를 들자면, "시를 써라, 시를 써!" 혹은 "소설 쓰고 앉았네!"라는 문장이 "철학하고 자빠졌네!"라는 문장(독일어 동사 'philosophieren'의 가장 '창조적인' 번안 사례?)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이웃하고 있는 풍경, 이제 우리에게 그런 풍경은 낯설거나 혹은 오래되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경계와 배제의 작용 안에서 발생한 와해의 물결, 혹은 'genre'의 구획과 'discipline'의 분류 체계에 불어닥친 해체의 바람, 그 탈-구축의 각종 기상현상들은, 여기, 지금, 나의 글쓰기에 대한 하나의 물음을, 다시금, 재-구축한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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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에르 마슈레, 『 문학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 』(서민원 옮김), 동문선, 2003.
▷ Pierre Macherey, À quoi pense la littérature?, Paris: PUF, 1990.

1) 얼마 전 우연찮은 계기에 피에르 마슈레(Pierre Macherey)의 논문 「조르주 바타이유와 유물론적 전복(Georges Bataille et le renversement matérialiste)」을 국역과 대조해가며 오랜만에 다시 꼼꼼히 읽어볼 기회가 있었다. 이 논문은 마슈레의 문학론을 모은 책인 『문학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À quoi pense la littérature)?』에 실려 있는 글인데, 바타이유의 사상에서 발견되는 이른바 '유물론적' 입장에 대한 희귀한 탁견을 담고 있음과 동시에 [사르트르(Sartre)와 바타이유의 비교 못지 않게 중요한] 브르통(Breton)과 바타이유의 비교 분석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각별한 주목을 요하는 논문이다. 원서는 현재 절판 상태이며 개인적으로는 복사본만을 갖고 있다(그러한 이유로 인해 원서 표지의 사진을 올리지 못하는 점에 대해서 양해를 구하며, 동시에 혹시라도 이 책을 해외 중고서적 웹사이트에서 발견하여 알려주시는 분께는 후사를 약속하고 또한 장담하는데, 몇 년째 틈날 때마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이 책을 찾곤 하는 나로서는, 이제는 약간 포기하는 심정에 가까운 쪽으로 기울었다는 점을 솔직히 고백해야 하겠다). 국역본에 관해서는, 별로 따로 말하고 싶지 않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절대 구입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만을 적어두기로 하자(이러한 부정적인 언급이 또한 때때로 판촉의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는 사실은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일 것이다). 도대체 이 국역본은, 책의 제목을 문자 그대로 차용하자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번역되었을까, 내가 제일 궁금한 것은 바로 이 점이다(사실 말이 나온 김에 동문선 출판사의 번역본들에 대해서 한 마디만 하자면, 왜 그런 명저들의 판권을 다량으로 가져가서는 그토록 허술한 번역본들을 양산해내는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할 밖에, 하지만 물론 몇몇 예외도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 바로 떠오르는 그 예외의 일례를 들자면 당장 곽광수 선생의 바슐라르(Bachelard) 번역을 제시하고 싶지만, 그런데 이 책은 가만히 생각해보니, 사실 예전에 이미 민음사의 이데아 총서를 통해 선보였던 책이 아닌가 말이다!).




▷ Louis Althusser, Étienne Balibar, Roger Establet, Pierre Macherey, Jacques Rancière, Lire le Capital, Paris: PUF(coll. "Quadrige"), 1996.

2) 아는 사람들은 다 알다시피, 마슈레는 알튀세르, 발리바르, 랑시에르, 에스타블레 등과 함께 『자본론 읽기(Lire le Capital)』(초판은 Maspero,1965)를 저술한 '마르크스주의자'이다. 이 책을 일독하라는 권유는 개인적으로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생각한다. 60년대 사상이 일으킨 폭풍의 핵심에 위치했던 저서 중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마르크스에 대해서 [여전히] 새롭게 사유하게끔 만들어주는 책이기 때문이다(이러한 마르크스의 '재전유'에 대해서는 후일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책들만을 따로 소개하는 기회에 보충하기로 한다). 아주 예전에ㅡ아마도 90년대 초반 두레 출판사를 통해서였던 것으로 기억하지만ㅡ이 책의 국역본이 나온 적이 있었는데, 그 번역의 질에 대해서는 왈가왈부 말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개인적으로 직접 국역본의 질을 확인해볼 기회는 불행히도(다행히도?) 아직까지 없었다. 어쨌거나 이러한 평가는 소문에 속지 말고 직접 확인하고 수행해보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종류의' 소문은 대부분 맞는다는, 그리고 맞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있는데, 그렇다면 현재 이 국역본이 절판이라는 사실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불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른바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의 쇄신'이라는 이름에 값할 운동 속에서 마슈레가 차지했던 위치에 대해서는 이미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바 있지만, 그가 또한 문학에 관해 몇 권의 묵직한 저서를 상자한 비평가의 면모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국내에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여기서 잠시, 프랑스의 사상 조류를 '문학화[안전화?]'하여 소화하는 경향이 있는 영미권의 비평계가 이러한 마슈레를 어떻게 수용하며 평가하고 있는지가 문득 궁금해지는데, '해체-주의(deconstruction-ism)'ㅡ보라, 나는 '영어를', 그러니까 '영어로', 병기한다ㅡ라는 '-ism' 또한 문학비평의 한 형태로서 가장 먼저 받아들였던 영미권의 학문적 '소화력'과 '편식 양태'에 대해서는 일종의 정밀한 ['문화적'] 정신분석이 필요하다는 개인적인 생각 한 자락만 밝혀두고 지나간다.


       

    

▷ Pierre Macherey, Introduction à l'Éthique de Spinoza. La première partie: la nature des choses, Paris: PUF, 1998.
▷ Pierre Macherey, Introduction à l'Éthique de Spinoza. La seconde partie: la réalité mentale, Paris: PUF, 1997.
▷ Pierre Macherey, Introduction à l'Éthique de Spinoza. La troisième partie: la vie affective, Paris: PUF, 1995.
▷ Pierre Macherey, Introduction à l'Éthique de Spinoza. La quatrième partie: la condition humaine, Paris: PUF, 1997.
▷ Pierre Macherey, Introduction à l'Éthique de Spinoza. La cinquième partie: les voies de la libération, Paris: PUF, 1994. 

3) 마슈레는 또한 현재 가장 영향력 있는 '스피노자주의자' 중의 한 명이기도 하다. 그가 펴낸 위의 다섯 권으로 된 스피노자 『윤리학(Ethica)』에 대한 주석서는 이미 스피노자 해석에 있어서 고전의 반열에 오른 지 오래이다. 물론, 당연하게도, 일독을 권한다. 또한 이 책들을 일종의 안내자로 삼아서 스피노자의 『윤리학』 원전 독해에 도전해보는 것도 권할 만하다(또 다른 스피노자 해석의 고전들, 예를 들어 게루(Gueroult)와 마트롱(Matheron)과 들뢰즈(Deleuze) 등의 책들은 다른 기회에 다른 자리에서 소개하기로 한다). 개인적으로, 국내에도 이미 하나의 학문적 '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많은 '스피노자주의자'들ㅡ이는 현재 국내에서 '라캉주의자'들만큼이나 하나의 '대세'라고 말하고 싶은, 하지만 또한 동시에 하나의 '거품'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싶은, 그런 느낌의 규정어인데ㅡ중의 한 명이 저 노작들의 번역에 어서 착수해주기를 고대해마지 않는다. 국내 스피노자 전공자들의 역량이 이제 그만큼 되었다는 느낌도 있거니와, 또한 이른바 소위 말하는 '국가적'이나 '민족적'인 입장으로 보았을 때도, 다른 나라와 비교해 한국에서 더욱 특수하게 비약적으로 성장해가고 있는 스피노자학 연구의 축적된 성과가 발휘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Pierre Macherey, Avec Spinoza. Études sur la doctrine et l'histoire du spinozisme, Paris: PUF(coll. "Philosophie d'aujourd'hui"), 1992.
▷ Pierre Macherey, Hegel ou Spinoza, Paris: La Découverte(coll. "Armillaire"), 1990.
▷ 피에르 마슈레, 『 헤겔 또는 스피노자 』(진태원 옮김), 이제이북스, 2004.

4) 이 주석서들보다 조금 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는 마슈레의 스피노자 관련 논문집인 『스피노자와 함께(Avec Spinoza)』를 들 수 있겠다. 이 책은 이른바 '스피노자의 현대성'을 논함에 있어 중요한 저서 중의 하나로서, 다른 근대 철학자들(홉스, 파스칼 등)과의 비교에 관한 논문 및 현대 철학자들(러셀, 하이데거, 아도르노, 푸코, 들뢰즈 등)과의 영향 관계에 관한 논문들도 수록하고 있다. 일독을 권한다. 『헤겔 또는 스피노자(Hegel ou Spinoza)』(초판은 Maspero, 1979)의 일독을 권한다는 말 또한 빠트릴 수 없겠는데(사실 이 책은 마슈레의 책들 중에서도 '강추' 목록에 속한다), 이것이 마슈레의 가장 대표적인 주저라고 할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제목의 "또는(ou)"은 스피노자의 유명한 명제인 'Deus sive natura'에서 따온 것으로, 이 책의 논의 전개 상에서 'sive', 'ou', '또는'은 단순히 간과할 수 있는 성질의 접속사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둔다). 이 책은 몇 해 전 진태원 선생의 훌륭한 번역을 통해 이제이북스에서 국역본이 출간된 바 있다. 진태원 선생의 번역은 언제나 충실한 해제와 역주, 그리고 무엇보다도 학구열을 불태우게 만드는 꼼꼼하고 적확한 번역이 강점인데, 이 번역본에서도 역시 이러한 미덕이 십분 발휘되고 있다(나는 여기서 슬그머니 '강점(强點)'을 '미덕(美德)'으로 치환하고 있는데, 이는 '힘'으로부터 파생되는 '아름다움'과 '실천성/도덕성'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으로 가장 소박하고 맹목적인 예찬이려나, 하는 잡생각 한 자락만을 풀어놓은 채로, 조만간 데리다의 저작들에 대한 다른 소개글을 통해 그의 후기작 『법의 힘(Force de loi)』과 그 번역의 강점과 미덕ㅡ그리고 '약간의' 문제점들ㅡ을 다루게 될 때 다시 이 주제로 돌아오기로 하자). 


   

   

▷ 스피노자, 『 에티카 』(강영계 옮김), 서광사, 1990.
▷ Spinoza, Die Ethik nach geometrischer Methode dargestellt(übersetzt von Otto Baensch), Hamburg: Felix Meiner, 1994.
▷ Spinoza, Éthique(traduit par Bernard Pautrat), Paris: Seuil(coll. "L'ordre philosophique"), 1988.
▷ Spinoza, Éthique(traduit par Bernard Pautrat), Paris: Seuil(coll. "Points essais"), 1999.

5) 『윤리학』의 국역본으로는 이미 오랜 시간 동안 강영계 선생의 번역이 통용되어 왔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원전과의 비교를 통해 가감해서 읽는 독해 방식이 요구되는 번역본이지만, 그냥 따로 읽는 데에도 크게 문제는 없다. 하지만 앞으로 스피노자 전공자들에 의해 개역판이 나오기를 가장 갈망하게 되는 책은 뭐니 뭐니 해도 저 스피노자의 '윤리학'이 아니겠는가. 라틴어 원전과 그 인구어 번역은 베르나르 포트라(Bernard Pautrat)가 편집한 라틴어-불어 대역본을 추천한다. 누락 부분에 관한 정오표를 따로 실었던 본래 판본을 수정하여, 현재는 문고판(Points 총서)으로도 구해볼 수 있다. 독일어 번역으로는, 물론 가장 유명한 카를 겝하르트(Carl Gebhardt) 편집의 전집판 외에도, 마이너(Meiner) 출판사에서 간행된 오토 바엔쉬(Otto Baensch)의 번역본을 추천한다. 이 책은 1994년에 나온 번역본인데, 개인적으로 특히 [스피노자 이후] 칸트와 헤겔 등이 사용한 독일어 개념어와 관련한 비교 독해를 할 때 상당히 유용한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프랑스의 스피노자학을 이끌고 있는 피에르-프랑수아 모로(Pierre-François Moreau)의 지휘 아래 프랑스 대학 출판부(PUF)를 통해 계속 출간되고 있는 스피노자 저작 선집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스피노자를 본격적으로 다루거나 발리바르의 저작들을 다룰 때 따로 언급하기로 한다.


   

▷ Georges Bataille, Œuvres complètes. Tome I: premiers écrits 1922-1940, Paris: Gallimard, 1970.
▷ Denis Hollier(éd.), Le Collège de Sociologie 1937-1939, Paris: Gallimard(coll. "Folio essais"), 1995.

6) 바타이유의 유물론은 논자들 사이에서 그리 자주 '애호'되는 주제는 아니다. 이에는 물론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바타이유의 유물론'이라는 표현이 그 자체로 이미 어색한 느낌을 준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겠다. '바타이유의 신비주의' 혹은 '바타이유의 니체주의'라는 표현은 왠지 익숙하지만, 마치 '바타이유의 마르크스주의'라는 존재를 상기시키는 듯한 '유물론'이라는 단어와 '바타이유'라는 이름의 결합은 어쩐지 그 자체로 '바타이유적'인 생경한 언어의 조합을 드러내는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점이 '바타이유의 유물론'을 말하는 마슈레의 탁견이 빛을 발하는 지점이다. 마슈레가 중점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텍스트들은 '유물론'에 관한 바타이유의 초기 논문들인데, 이 글들은 바타이유 전집 1권에 수록되어 있다. 마슈레가 문제 삼고 있는 글들은 대부분 잡지 『도큐망(Documents)』에 수록되었던 것들인데, 이와 관련해서는 드니 올리에가 편집한 '사회학회' 시절 바타이유의 저술들(초판은 Gallimard, 1979) 또한 일독을 권한다. 이 책에 수록된, 이른바 근대사회 안의 '신성(神性/divinité)'이라는 문제에 천착했던 이들 집단ㅡ여기에는 바타이유 외에도 로제 카이유와(Roger Caillois), 미셸 레리스(Michel Leiris), 피에르 클로소프스키(Pierre Klossowski), 장 발(Jean Wahl) 등이 포함되는데ㅡ의 글들은 부단히 재독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텍스트들이다. 또한 이 시기의 지적 교류와 저술들이 바타이유의 '일반경제'론에 끼친 영향사는 언제나 매력적인 연구 영역으로 남아 있다.

7) 마슈레가 논하고 있는 바타이유의 유물론이 지닌 가장 큰 핵심은, 해소될 운명이 미리 정해져 있는 '모순'이 아니라 극명한 '대립'의 끝없는 지속 그 자체에 있다. 바타이유의 텍스트 안에서 수도 없이 반복되고 있는 저 '극성(polarité)'이라는 주제가 이에 상응한다. 생산과 소비, 사회와 희생, 이성과 非知(non-savoir), 금기와 위반 등의 대립어들은 그 자체가 '탈-변증법적 변증법'의 계기들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원문의 "ambivalence"는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모호성'이라기보다는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양가성'이라는 말로 번역되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바타이유에게서 극성을 띤 두 개의 대립항들을 대표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가성'은 지양되어버릴 운명의 제 3항을 전제하지 않으며, 모순(contradiciton)의 해소가 아닌 지속적인 대립(opposition)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개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마슈레는 바타이유의 유물론을 전복의 유물론, 이른바 "이원론적 유물론(matérialisme dualiste)"으로 규정하면서 "일원론적 유물론(matérialisme moniste)"과의 차이점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원문, p.108 참조).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반(反)-변증법으로만 요약될 수 없는 어떤 전복적인 운동이다. 바타이유가 전집 1권의 「유물론(Matérialisme)」이라는 글에서 말하고 있는 주요한 논지는 '순진한' 유물론의 필연적 실패이며, 그 실패는 단지 관념론 안의 상층부와 하층부의 위치만을 뒤바꿀 뿐인 피상적 유물론의 바로 저 '순진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던지고 싶은 물음은 다음과 같다: 바타이유의 '유물론'이란 결국엔 마슈레에게 있어서 '유물론'의 철저화된 형태, 혹은 '변증법'의 전복된 형태를 가리키는 것인가.

8) 이러한 전복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결국 철저화 또는 첨예화라는 생각이다. 마슈레에게ㅡ사실 그보다 더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에게ㅡ문제가 되는 것이 마르크스의 철저화이듯, 그리고 또한 라캉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 프로이트의 철저화이듯 말이다. 그렇다면 바타이유는, 혹은 바타이유의 '유물론'은, 무엇의, 누구의 철저화인가, 하는 물음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평자와 주석가들이 바타이유에게 있어서 니체의 강력한 영향을 많이 거론하고 있지만, 오히려 내 생각에는, 특히나 더욱이 마슈레가 말하고 있는 '유물론'의 문제가 중심이 된다고 할 때에는, 바타이유가 철저화하고자 하는 것은 니체가 아니라 바로 헤겔이라고 말하고 싶다(나는 물론 여기서, 니체의 '철저화'라고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이론적 작업인가, 그런 것이 있다고 한다면 어떤 형태여야 하는가, 라고 하는, 곁가지의 질문 하나를 더 던져볼 수도 있을 것이며, 또한 이른바 바타이유의 '유물론' 속에서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라고 하는 통합적인 함의의 일단을 목격할 수도 있다는, 곁가지의 언급 하나를 덧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바타이유의 『저주의 몫(La part maudite)』은 이러한 헤겔[-마르크스]적 문제의 첨예화와 철저화라는 관점의 연장선 상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바로 그러할 때 이 저작의 '일반경제적' 성격이 보다 정확하고 분명하게 평가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또한 이러한 헤겔의 철저화 또는 첨예화의 문제는 라캉과 상당 부분 교집합을 갖고 있다는 점도 지적해둘 필요가 있다. 앞서 다른 글에서 라캉에 관한 몇 권의 입문서를 소개할 때도 잠시 언급했지만, 이러한 바타이유와 라캉 사이의 교집합이라는 문제는 현재까지 극소수의 필자들만이 지적했을 뿐 아직 본격적으로 천착되지는 못한 연구 영역이다(물론 라캉과 헤겔의 접점에 관해서는 지젝의 매력적인 책들이 여러 권 있기는 하지만). 이 교집합 안에 포함되고 있는 주요 개념어들만 소개한다고 해도, 불가능성(impossibilité), 실재[계](le réel), 금기(interdit)와 위반(transgression) 등등 실로 엄청난 수맥을 갖고 있는 이론의 지평이 이들 둘 사이에 잠재하고 있다는 생각 한 자락 밝혀둔다. 




▷ Alenxandre Kojève, Introduction à la lecture de Hegel, Paris: Gallimard(coll. "Tel"), 1979.

9) 사상사적으로 보았을 때 바타이유와 라캉이 추구한 이러한 헤겔의 [재]해석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것은 물론 코제브(Kojève)의 『정신현상학』에 관한 강의록이다. 이 책은 아쉽게도 '아직도-여전히' 국역되지 못하고 있다(하지만 영역본은 1980년에 출간된 바 있다). 어쨌거나 일독을 권한다. 코제브의 이 강의록은, 한때 헤겔에 관한 논문을 바타이유와 공저하기도 했던 시인 크노(Queneau)의 정리와 편집으로 1947년 갈리마르(Gallimard) 출판사를 통해 처음 출간되었다(내가 갖고 있는 책은 1979년에 Tel 총서로 발간된 판본이다). 이 강의록이 라캉의 욕망(désir/Begierde) 개념이나 바타이유의 지상권/절대권(souveraineté) 개념에 미친 영향에 관해서는 따로 소개할 자리가 있겠지만, 또한 코제브가 특히나 더욱 강조했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더 이상의 강조가 필요 없을 정도로 하나의 '상식'이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이겠지만, 20세기 초반 프랑스 철학계에 스며든 헤겔 철학의 영향과 그 계보를 파악하는 작업에 있어서 이 책이 반드시 여러 번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코제브는 당대 그의 '수강생'들에게 마치 헤겔의 '현신(現身)'과도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는 풍문이 전해져 오고 있는데, 이러한 일화는 당시 프랑스 지성계 풍경의 일단을 그려볼 수 있게 해준다는 의미에서 매우 흥미롭다). 개인적인 기준에서 이 책 중에서도 특히나 라캉과 바타이유의 여러 공통된 주제들과 관련하여 더욱 주의 깊게 독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헤겔 철학에 있어서 죽음의 관념(L'idée de la mort dans la philosophie de Hegel)」인데, 또한 이 글이 보드리야르의 책 『상징적 교환과 죽음(L'échange symbolique et la mort)』과 맺고 있는 '내적' 관계도 개인적으로 깊은 관심의 대상이다.




▷ Jean Baudrillard, L'échange symbolique et la mort, Paris: Gallimard(coll. "Bibliothèque des sciences humaines"), 1976.

10) 사상의 전유, 그 전유의 몸짓 자체가 문제되는 지점이 있다. 특히나 '철저화'나 '첨예화' [따위의 부차적인?] 논의가 이론적인 문제로 부상할 때는, 마치 '부상당한' 내 신체의 일부를 바라보기라도 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누가 누구의 첨예화이자 철저화라는 것은 내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하는 다소 헛되이 반항적이기만 할 뿐인 명제가 그런 느낌을 갖게 하기도 한다. 이에는 물론 복합적인 감정들이 섞여 있다. 이미 아주 오래된 '근대적' 이론의 주제들 중의 하나인 '마르크스-니체-프로이트의 통합적 이해'에 언제까지 매달려 있을 것인가, 하는 반론 또한 내 몸 어느 곳에선가 꿈틀거림을 감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시점에서는, 이 통합의 과제가 '본래' 무엇을 의미했던가를 반추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통합'이란 단순히 거대한 사상적 인물들 사이의 통합도 아니고ㅡ예를 들어 물리학에서의 통일장 이론과 같은ㅡ거대 담론과 이론들 사이의 통합도 아니다. 그들이 근대성-자본주의-국가주의를 바라보았던 시선에는 공통된 무언가가 있었다. 그 공통 지점은 일반적인 정치경제학, 철학(혹은 문헌학), 정신분석의 경계와 통합을 넘어서 있는 어떤 무엇이다. 그 무엇은 무엇인가? 결국 이러한 통합의 과제는 근대의 '봉합'에 다다르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이지만, 그 '균열'과 '상처' 자체에 대한 확인 앞에 머무르게 된다. 이러한 통합(統合)은 결국 통합(痛合)인 것이다. 내가 게걸스럽게 갈구하는 이론에 대한 관심은 결국 무엇인가, 하는 물음, 그리고 나는 무엇 때문에 끝도 없는 책과 이론들의 고리를 숨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 채로 따라가고 있는가, 하는 물음, 결국 이러한 물음들, 이러한 물음들의 부상(浮上)은, 나의 행위가 곧 부상(負傷)당한 신체의 생채기에 계속 침을 바르며 달래는 행위는 아닌가 하는, 그래서는, 결국에는, 역설적으로 그 생채기를 오히려 덧나게 하고 고름 흐르게 하는 그런 '자해'와 같은 짓은 아닌가 하는, '부활과 갱생과 발효'에 관한 또 다른 물음들을 부상하게 하고, 또 부상당하게 한다.

11)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 중의 하나인 최인훈의 소설 『화두』(민음사, 1994, 전 2권)의 서문에는, 일종의 '시대의식'이라 이름할 수 있는 감상에 관한 매력적인 은유가 등장하는데, 사실 나의 감상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작은 기쁨임과 동시에 깊은 슬픔이다. 조금 길지만 이를 그대로 옮겨보면서 이 글을 갈무리하고자 한다: "인류를 커다란 공룡에 비유해 본다면, 그 머리는 20세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바야흐로 21세기를 넘보고 있는데, 꼬리 쪽은 아직도 19세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진흙탕과 바위산 틈바구니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짓이겨지면서 20세기의 분수령을 넘어서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ㅡ이런 그림이 떠오르고, 어떤 사람들은 이 꼬리부분의 한 토막이다ㅡ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불행하게도 이 꼬리는 머리가 어디쯤 가 있는지를 알 수 있는 힘ㅡ의식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이상한 공룡의 이상한 꼬리다. 진짜 공룡하고는 그 점에선 다른 그런 공룡이다. 그러나 의식으로만 자기 위치를 넘어설 수 있을 뿐이지 실지로는 자기 위치ㅡ그 꼬리 부분에서 떠날 수 없다. 이 점에서는 진짜 공룡과 다를 바 없다. 꼬리의 한 토막 부분을 민족이라는 집단으로 비유한다면 개인은 비늘이라고 할까. 비늘들은 이 거대한 몸의 운동에 따라 시간 속으로 부스러져 떨어진다. 그때까지를 개인의 생애라고 불러볼까. 옛날에는 이 비늘들에게는 환상이 주어져 있었다. 비록 부스러져 떨어지면서도 그들은 이러저러한 신비한 약속에 의해서 본체 속에 살아 남는 것이며 본체를 떠나지만 결코 떠나는 것이 아니라는. 그러나 오늘의 비늘들에게서는 그런 환상이 거두어졌다. 그리고 상황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살지 않으면 안 된다. 비늘들의 신음이 들린다. 결코 어떤 물리적 계기에도 나타나지 않는. 듣지 않으려는 귀에는 들리지 않는. 이런 그림이 보이고 이런 소리가 들린다. 20세기 말의 꼬리의 비늘들에게는 한 조각 비늘에 지나지 않으면서 불행하게도 이런 일을 알 수 있는 의식의 기능이 진화되어 버린 것이다. 이 침묵의 우주공간 속을 기어가는 <인류>라는 이름의 이 공룡의, <역사>라는 이름의 이 운동방식이 나를 전율시킨다."(『화두』 1권, 5-6쪽) 말미에 한 마디 사족을 붙이자면, 나는 이 비감 어린 "전율"을 '헤겔적 전율' 혹은 '헤겔적 비감'이라 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거대한 사족(蛇足)이자 용미(龍尾)가 아니었던가.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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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07-06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 생각 없는 번역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였죠. 알라딘에도 둥지를 트신 걸 알라디너의 일원으로서 환영합니다. 덕분에 알라딘을 찾는 재미가 하나 늘 거 같습니다.^^

람혼 2007-07-06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환영 말씀 감사합니다. 저도 최근에 루만의 책이 번역되어 나왔다는 소식이 참으로 반가웠는데, 좋은 관련 글 올려주셔서 잘 읽었답니다.^^

열매 2007-07-24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와 관련해 코제브의 책은 81년에 <역사와 현실 변증법>(한벗)으로 번역되어 나왔었습니다.(절판) 설헌영이라는 분이 석사과정때 독일어본에서 번역했다고 나오네요.
여하튼 좋은 소개글 잘 읽었습니다.
서구사상뿐 아니라 일본사상에도 정통하신 분이 새로이 등장하신 것 같습니다^^

람혼 2007-07-24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얼마전에 제 네이버 블로그 쪽에서 이성민 선생이 알려주셔서 저도 번역본이 존재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좋은 지적 감사드립니다. 독일어본은 아마도 Suhrkamp에서 나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국역본은 앞으로 헌책방에 갈 때 슬쩍 물어나봐야겠습니다.^^

2008-10-18 0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18 1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 고야스 노부쿠니(子安宣邦), 『 일본근대사상비판 』(김석근 옮김), 역사비평사, 2007.

지난 해 고야스 노부쿠니의 『귀신론(鬼神論)』(이승연 옮김, 역사비평사, 2006)을 아주 흥미롭게 읽고나서 일본의 두터운 학문적 지층과 그 왕성한 사상적 '소화력'에 다시금 새삼스레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고야스의 다른 책으로는 이미 국내에 『동아·대동아·동아시아』(이승연 옮김, 역사비평사, 2005)와 『야스쿠니의 일본, 일본의 야스쿠니』(김석근 옮김, 산해, 2005)가 번역돼 나온 바 있었지만, 이 두 책이 공통적으로 다분히 '친한적(親韓的)'인 주제에 입각해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던 반면에, 『귀신론』은 이른바 '소라이가쿠(徠學)' 등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정통적인 [정치]사상사 계통을 잇는 본격 사상사서라는 점에서 그 번역이 더욱 반가웠던 것이다. 물론 고야스의 방법론이나 제재가 '정통적으로' 정통적인 것은 분명 아니다. 그의 문장이나 문제의식에서는 구조주의 이후 현대 [서구]철학이 걸었던 행보의 잔향과 수혜가 느껴진다. 『귀신론』만 놓고 봐도 주제의 선택이나 그 주제를 다루는 방법론에 있어서 정통의 일본사상사의 영향보다는 오히려 아날 학파나 미시사 연구의 영향이 더욱 강하게 느껴지는 것이 그 한 사례이다. 역사비평사에서 고야스의 책들을 선별하여 순차적으로 출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러한 영향사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 고야스의 최근 성과물들이 번역되는 대로 찬찬히 살펴보면서 천천히 음미해보기로 하자('근간' 예정인 책들을 번역하고 있을 번역자들에게 표면적으로는 부담을 주지 않는, 하지만 가장 강력한 부담을 안겨주는, 독한 제안, 지독한 제안). 

1) 최근에 읽었던 고야스의 책은 역시나 역사비평사를 통해 올해 4월 김석근 선생이 번역하여 출간한 『일본근대사상비판』이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김석근 선생은 특히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의 저작을 중심으로 일본과 근대성 담론에 관한 만만찮은 역작과 노작들을 꾸준하게 한국어로 옮겨 오고 있는 정력적인 번역가이다.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늦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고3 시절 여름에 읽었던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정치사상사연구』 국역본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숨 막힐 듯한 마루야마의 정치한 논의도 논의였거니와, 권두에 수록된 도올 김용옥의 해제는, 낙엽만 뒹굴어도 폭소를 터뜨리고 찬바람만 불어도 눈물을 떨구던 어린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 丸山眞男, 『 日本政治思想史硏究 』, 東京大學出版會, 1996[新版 9刷].
▷ 마루야마 마사오, 『 일본정치사상사연구 』(김석근 옮김), 통나무, 1995.

2) 일본의 근대와 사상사를 다룬 저서의 경우, 이 역시 아는 사람들은 아는 바, 마루야마 마사오를 언급하지 않고는 거의 책을 쓸 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만큼 마루야마의 사상사 논의는 이후 '근대'와 '일본'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필수적인 고지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따라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만, 고야스가 펼치는 '근대' 논의의 중심에도 마루야마 비판이 자리 잡고 있다.

3) 하지만 고야스의 마루야마 비판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책의 순서를 따라가보도록 하자. 그는 제1부 "일국적 지식의 성립"에서 일국민속학과 국어신학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일국적 지식(一國知)"이라는 말 자체가 지극히 일본적인 배경을 지닌 말, 곧 일본의 근대화 담론을 배후로 하여 형성된 용어이다. 다시 말해서, 민족주의/국가주의(nationalism)의 형성을 제쳐두고서는 이 용어를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먼저 지적해야 한다.

4) 여기서 고야스가 일국민속학과 국어신학 비판을 통해 공통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외부자의 배제', 곧 '내부자의 시선에 대한 강조'이다. 예를 들어 고야스는 일국민속학에 대한 비판으로 야나기다 구니오(柳田國男)의 이른바 '오키나와의 발견'이라는 텍스트를 꼼꼼히 독해하고 있다. 고야스가 따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야나기다의 '민속학'을 비판하고 있는 이 부분에서 [한국인으로서?] 내가 거의 즉각적으로 바로 떠올린 인물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였다. 그는 누구인가? 서슬 퍼런 식민지 시대에 이른바 '조선의 민중'과 그 예술('민예(民藝)')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보이며 많은 저술을 남겼던 '일본인'이다. 야나기 무네요시에 관해서는 아래 두 책의 일독을 권한다(작년에 출간된 그에 관한 평전은 아직 구해 읽지 못했다). 어떤 의미에서 이 두 책은 '발전적' 구조로 묶어서 일별해볼 수 있다. 야나기가 조선 민예라는 '각론적'이고 구체적인 세계로부터 출발해서 어떻게 "미(美)의 법문(法門)"이라는 추상적인, 아니 거의 종교[미학]적이라 할 수 있는 세계에 이르게 되는지, 그 개인적인 이론의 '발전사'를 확인해볼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이렇게 본다면, 야나기 무네요시의 '개인적' 발전사는 거의 완벽하게 '헤겔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렇다면, 한 개인의 '발전사'가 정확히 헤겔적 운동에 부합한다는 것은, 축복인가, 아니면 저주인가, 그런 생각도 드는 것이다).


   


▷ 야나기 무네요시, 『 조선과 예술 』(박재삼 옮김), 범우사, 2003[2판].
▷ 야나기 무네요시, 『 미의 법문 』(최재목·기정희 옮김), 이학사, 2005. 

5) 고야스의 야나기다 구니오 비판에서 내가 문득 야나기 무네요시를 떠올린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마치 야나기다가 오키나와에서 그가 보려던 것만을 보고 발견하려던 것만을 발견함으로써 결국엔 자신의 '확고한' 가설이었던 야마토 정신(大和魂)을 확인하는 데에 그쳤던 것처럼, 조금은 다른 층위에서ㅡ그러니까 어쩌면 야나기다의 논리가 정반대로 뒤집힌 논리에서, 혹은 더욱 '은밀하게' 확장된 논리에서ㅡ야나기 무네요시가 이른바 '조선 민중의 민예'를 통해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느끼고 싶은 것만을 느낀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 때문에서였다. 따라서 뿌리 깊게 착종되어 있는 '한-일 관계'와 그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식민지적 '근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나로서는ㅡ이러한 '강박증'은 나만의 '천형'인가?ㅡ일본[만]의 입장에서 보다 '충실히' 국가주의적이라 평가될 수 있는 야나기다 구니오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근대적 착종 관계의 중심 혹은 경계에 서 있는 야나기 무네요시가 훨씬 더 '문제적' 인간으로 가깝게 다가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가깝게'라고 말했지만, 그렇게 애써 겨우 입을 떼긴 했지만, 내 안에서 이 '가까움'의 거리는 어쩌면 현기증이 나도록 지극히 '머나먼' 거리감의 반어적 표현일 지도 모른다(요즘 유행하는 말을 차용하자면, 차용증서 없이 차용하자면, 나는 딱 이맘때 즈음에 이르러 기분이 매우 '메롱'해지는 것이다).

▷ 윤택림, 『 인류학자의 과거 여행 』, 역사비평사, 2003.

6) 고야스의 야나기다 비판 읽기, 그리고 거기에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한 개인적인 '회상'이 덧붙여지는 이 즈음에 떠오르는 책이 하나 있다. 윤택림의 『인류학자의 과거 여행』이라는 책이 그것이다. 말랑말랑하게 들리는 제목이 어울리지 않을 만큼, 이 책은 국내에서는 보기 드물게 치밀하고 본격적인 구술사(oral history) 저서이다(이 책의 부제는 "한 빨갱이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이다). 르 고프의 심성사도 좋고 긴즈부르그의 미시사도 좋지만, 누군가 읽을 만한 역사서를 한 권 추천하라고 한다면 나는 단박에 이 책을 거론하고 싶을 것이다. 고야스의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이 떠오른 이유는 아마도, 고야스가 야나기다의 민속학을 비판하면서, 그리고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을 모범적으로 언급하면서 이야기하고 있는 '내부자-외부자'의 구분법 때문인 것 같다(물론 이때의 나의 위치는 일종의 '피분석자적' 위치인 만큼, 나도 나의 '자유연상' 논리를 모두 설명해낼 수가 없다). 그러한 구분법을 이 책에 적용시켜 본다면? 이 책의 시각과 방법은 내부자의 시선인가, 아니면 외부자의 시선인가, 혹은 구술사란 무엇인가, 아니면 무엇이 되어야 하나, 무엇을 위한 것인가 등등의 질문이 폭주할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말이다.

7) 나는 고야스의 '일국민속학' 비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ㅡ아니, 동의할 수밖에 없지만ㅡ그의 '국어신학' 비판 논의, 혹은 '국어'와 '일본어' 사이의 대립에 대한 논의에 관해서는 몇 가지 아쉬운 점을 덧붙이고자 한다. 독서 내내 나에게 특히나 아주 흥미로웠던 것은, 이른바 '국어'의 정립에[만] 관심이 있었던 중심적이고 관제적인 주류 학자들과는 사뭇 다른 주장을 폈던 도키에다 모토키(時枝誠記)의 텍스트였다. 그가 '국가' 중심의 '국어' 이해라는 편협성에서 이탈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경성제국대학의 교수를 역임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주장은 '국어'라는 것을 '모국어'이자 '민족어'로 이해하는 한계 안에서는 식민지 조선에 '국어(일본어)'를 강제할 명분과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곧,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도키에다는 그 자신에게 고유한 '식민지' 경험 덕분에, 일본이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을 기획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국가' 단위를 훌쩍 뛰어넘어 버리게 되는 '국어/일본어'의 문제를 오히려 첨예하게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도키에다는 민족 개념에 근거한 '국어'가 아니라 일본의 정치적 우위에 근거한 '국가어'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다. 그런데 고야스가 생각하는 이러한 도키에다의 한계랄까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하지만 도키에다가 일본의 정치적 우위에 기초해서 말하는 국어의 가치적 우위 주장은, 그가 말한 국어가 결국은 야마다의 '대일본제국의 용어'와 큰 차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준다."(『일본근대사상비판』, 97쪽)

8) 물론 야마다와 도키에다, 둘의 차이는 현상적으로나 결과적으로는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다. 나도 그 점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나의 의문은 이렇다. 첫째, 현상적으로, 결과적으로는 그렇지만, 인식적으로도 과연 전혀 차이가 없는가. 둘째, 첫째 의문과 관련하여, 고야스가 이른바 [푸코 식의] '지식의 고고학'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라면, 오히려 저러한 인식적인 둘의 차이가 보다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혹은, 물음을 바꾸자면, '지식의 고고학'을 방법론으로 삼은 고야스가 저렇게도 쉽게 이런 손쉬운 결론을 내려버려도 되는 것일까. 셋째, 따라서 도키에다의 텍스트는 보다 '징후적으로', 그리고 '내재적'이고 인식적인 입장에서 독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내 기준에서 고야스의 결론은 일차적이고 표면적인 비판밖에는 안 된다는 반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고야스 스스로 제시하고 있는 방법론이 이미 그 자신의 너무 '안이한' 결론을 훨씬 상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야스가 다루고 있는 문제가 '근대성' 혹은 '국민국가(nation-state)'의 문제라고 할 때, 그리고 또한 그의 방법론이 푸코 식의 '고고학'이라고 할 때, 도키에다의 텍스트에 대한 분석은 보다 징후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도키에다에 대한 표면적 비판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고야스가 더욱 치열하게 문제 삼고 포착해야만 했던 것은, 도키에다로 하여금 '국어-일본어'의 관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저 '근대성-국민국가-제국주의'의 배후, 그것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고야스의 논의를 흥미롭게 읽으면서도 자꾸 느끼게 되는 것은 이러한 아쉬움이다.


▷ 이연숙, 『 국어라는 사상 』(고영진·임경화 옮김), 소명출판, 2006.

9) 『일본근대사상비판』의 1부 3장에서 다뤄지고 있는 '국어' 또는 '일본어'에 관한 논의 역시 마루야마의 '학문적' 그늘 안에서 이해될 수밖에 없고, 또 그러할 때만 고야스 논의의 쟁점을 파악할 수 있다. 물론 이 문제에 관한 책은 일본 안에서도 수도 없이 많다. 다만 고야스가 언급해줬으면 하고 내심 바랐지만ㅡ한국어판 서문에서든 후기에서든, 그 어디서든ㅡ그가 그렇게 하지 않은 책이 하나 있다. 이연숙의 『국어라는 사상』이 바로 그것이다(이 책의 일본어판은 1996년에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에서 출간되었다). 고야스가 말하고 있는 '국어'와 '일본어'의 대립, 혹은 국어학과 언어학의 대립에 관한 일본 내의 통시적이고 공시적인 논의와 세부적인 쟁점사에 관심이 있다면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책이라는 생각이다. 일독을 권한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일제 말기 한국 작가들의 일본어 글쓰기 혹은 이중어(조선어/일본어) 글쓰기에 관한 김윤식 선생의 흥미진진한 논의에 관해서는 아래 두 책의 일독을 권한다. 선생의 이중어 글쓰기 논의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별도의 장문을 요하는 일이라 후일로 미루지만.


   

▷ 김윤식, 『 일제 말기 한국 작가의 일본어 글쓰기론 』,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 김윤식, 『 김윤식 선집 7: 문학사와 비평 』, 솔, 2005. 

10) 어쩌면 『일본근대사상비판』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고야스의 마루야마 비판으로 다시 돌아와보자. 고야스의 마루야마 비판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마루야마가 '근대'라는 개념을 하나의 '이념형'으로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일본근대사상비판』, 213-214쪽 참조). 이 말은 다시 바꿔 말하자면, 기본적으로 '근대성 일반'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판에 다름 아니다. 다양한 제 각각의 근대성이 존재하는 것이지, 근대성 일반이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ㅡ고야스는 독자인 내가 조금 쑥스러울 정도로 정색을 하면서 단언하고 있지만ㅡ이는 현재의 시점에서 당연하기 그지없는 말이다. 게다가 이러한 비판은, 어쨌거나 헤겔의 영향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마루야마의 시대적 입장을 생각해볼 때 더욱 당연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내게는, 도키에다에 대한 비판과 마찬가지로 고야스의 마루야마 비판 논리 역시, 일종의 정치한 이데올로기 분석으로서의 '고고학'이 지녀야 할 방식과 효과에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바로 이 시점에서 이런 생각도 드는데, 만약 이러한 나의 '재비판'을 고야스가 읽는다면, '고고학'의 방법론을 하나의 '이념형'으로 만들고 있다고 다시 '메타-비판'할 지도 모른다는, 그런 기우, 그런 잡생각 한 자락). 도키에다의 텍스트를 읽는 시점에서부터,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도키에다의 동서양에 대한 '상대적' 규정의 논리를 읽어내는 시점에서부터, 고야스가 보다 정치한 '고고학자'의 모습을 보여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내겐 계속 남는 것이다.  

11) 고야스의 마루야마 비판이 지닌 두 번째 요지는 좀 더 세부적인 것, 곧 '근대'라는 용어의 사용법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하지만 그 용어가 다른 것도 아니고 바로 '근대'일진대, 사실 이는 전혀 세부적이지 않고 오히려 가장 포괄적인 문제라고 할 밖에). 저 유명하고도 유명한, 저 악명 높고도 높은 '근대의 초극' 논의에 적대적이었던 마루야마가 '근대의 초극'에서의 '근대'를 '근대적 사유'로 치환하였다는 것, 곧 '근대의 초극'이라는 논의를 '근대적 사유의 초극'으로 재빠르게 뒤바꿔버렸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이것이 비판의 사유가 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사실 이러한 '조작'과 '치환'이야말로 마루야마 사상사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니었던가, 하는 반문 하나 남겨둔 채 지나가도록 하자. '근대의 초극'에 관한 논의의 일차적 문헌은 물론 '근대의 초극' 좌담회이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일본어 문고판은 신주쿠(新宿)의 키노쿠니야(紀伊國屋) 서점에서 샀던 것인데, 이 중에서 좌담회 내용 부분은 예전에 『다시 읽는 역사문학』에 번역·수록된 바 있고 내가 주로 읽은 것도 바로 이 번역이었지만, 이 번역본은 현재 천인공노하게도(!) 절판 상태이다. 가까운 국/공/시립 도서관을 협박차 방문하자.


   

▷ 『 近代の超克 』, 富山房百科文庫, 2002[8刷].
▷ 한국문학연구회 엮음, 『 다시 읽는 역사문학 』, 평민사, 1995.

12) 오히려 내가 생각할 때 고야스의 논의가 가장 빛나는 부분은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이다: "말하자면 마루야마는 '초극(넘어설 것)'을 말하고 있던 근대, 그것을 곧바로 옹호하거나 집착한 것은 아니었다. 초극이 주장된 근대 그 자체를 따져 묻지 않고서, 마루야마 같은 학자들이 품었던 강한 파시즘에 대한 위기의식 속에서, 이른바 저항의 언설이 옹호하는 근대 개념이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파시즘에 대한 저항의식을 가지고, 어떤 근대 이념이 옹호되고, 그리고 그 근대가 미확립된 국가 사회의 구조적 병리를 드러내서, 비판하는 근대에 대한 새로운 담론이 성립하는 것이다."(『일본근대사상비판』, 221쪽) 왜냐하면 이 문장은 마루야마 [정치]사상사의 본령을 정확히 짚어 정곡을 찌르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고야스의 이러한 분석은 우리가 마루야마의 어떤 저작들 사이에서 읽어낼 수 있는 일견 '표면적인' 표리 혹은 '모순'을 성공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이다. 곧 『일본정치사상사연구』에서 소라이가쿠를 통해 일본[내]적인 근대 담론의 뿌리를 탐색했던 마루야마와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에서 일종의 사회심리학적 분석을 통해 일본 근대의 취약성을 폭로했던 마루야마 사이의 '어떤' 간극이 사실은 절대로 '간극'이 아니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 丸山眞男, 『現代政治の思想と行動』, 未來社, 2003[增補版 156刷].
▷ 마루야마 마사오,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김석근 옮김), 한길사, 1997.

13) 마루야마 마사오의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는 이른바 전후 일본 지성계에 획기적인 획을 그은 논문으로 평가된다. 물론 고야스의 마루야마 비판의 한 꼭지가 이 논문의 등장 이후 일본의 '자가분석'은 마루야마를 따라 일종의 '병리 분석'이 되고 말았다는 점이지만, 언제 읽어도 그 분석의 날카로움에는 감동을 받게 되는 논문이다. 일독을 권한다. 이 논문은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에 수록되어 있다(이 책 역시 김석근이 옮겼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일본판[증보판]은 긴자(銀座)의 유서 깊은 마루젠(丸善) 서점에서 2003년에 구입한 것인데, 그때 이미 증보판으로도 156쇄였고 증보판이 나온 것만도 이미 1964년이었으니, 지금은 몇 쇄까지 나왔을지 대강 상상과 계산을 해보시라. 그 정도로 이 책은 일본내에서 스테디셀러라고 할 수 있는 책이다. 마루야마는 나중에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에서 갈파했던 '주체의식의 부족'이라는 일본적 심리 구조를 확대·일반화하여 '무책임'의 구조라는 개념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러한 논의를 포함하여 마루야마의 '개념화' 작업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책 중의 하나가 바로 『일본의 사상』이다(이 책도 김석근 옮김, 하하). 이 책 역시 일독을 강권한다('강권'하는 이유는, 나의 모든 다른 '이유'들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개인적인 것인데, 내가 이 책을 읽고 눈물을 왈칵 쏟았다는 것이 그 이유, 하지만 왜 울었는가, 그것은 말하지 않으련다).


   

▷ 丸山眞男, 『日本の思想』, 岩波書店, 2005[82刷].
▷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의 사상』(김석근 옮김), 한길사, 1998.

14) 오히려 고야스의 마루야마 비판과 관련하여 내가 좀 더 도전적으로 묻고 싶은 물음은 다음과 같다: 그렇다면 마루야마가 '결여'하고 있던 시각은 무엇인가? 파시즘 자체가 '근대적 이성'의 진리라는/였다는 것, 곧 체계의 진리는 그 과잉 속에서 드러나고 '실현'되는 것이라는, 강박적일 만큼이나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 저 기이하게도 익숙한 명제에 기반하는 그 어떤 시각이 아닐까? 고야스의 지적처럼, 마루야마에게 있어서는 아직 일본에 '합리적' 근대란 도래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또한 앞으로 도래해야 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러나 이러한 '이성'과 '근대'와 '과잉'ㅡ혹은 그에 덧붙여 '나치스'ㅡ에 대한 보다 진전된 논의, 곧 단순한 '과잉'과 '진리'의 담론에 머무르지 않는 보다 진전된 논의는 지젝의 책 『까다로운 주체(The Ticklish Subject)』 1장의 하이데거에 관한 논의에서 찾고 싶다. 하지만 이는 후일에 따로 장문으로 논의할 성질의 문제이다.



▷ 마루야마 마사오 外, 『 사상사의 방법과 대상 』(고재석 옮김), 소화, 1997.

15) 사상사란 무엇인가, 결국 우리는 다시 이 가장 기본적인 정의(definition)의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언제나 다시 반복하게 되는, 하지만 매번 다르게 반복하고 발음하게 되는, 이 질문은 내게는 그런 종류의 '강박적' 질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을 스스로 던지기에 앞서, 마루야마의 아주 친절하면서도 짤막한 강연문 「사상사의 사유 방식에 대하여」의 일독을 권한다(이 글은 위의 책에 첫 글로 수록되어 있다). 개인적인 독서 경험에서 하는 말이지만, 아마도 마루야마 자신의 글 중에서 사상사의 방법론에 관해 이만큼 집약적이고도 독립적인 글은 잘 찾아보기가 힘들 것이다. 10년만에 이 책을 다시 꺼내 읽어보면서 들었던 몇 가지 생각들과 접점들,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개인적인 물음들은 다음과 같다:



넓은 의미에서의 '사상사'라는 범주를 놓고 볼 때, 푸코가 그의 생애 후반기에 행했던 이론적 작업들과 그 결과물(혹은 과정물?)인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강연들ㅡ이 작업들은 푸코 사후에 갈리마르 출판사와 쇠이유 출판사의 공동 편집을 통해 강의록으로 출간되게 되는데ㅡ, 곧 이른바 '사유 체계들의 역사(Histoire des systèmes de pensée)'는 어떤 이론적이고 역사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는가? 또한 우리에게는 딜타이(Dilthey)의 이른바 '정신사(Geistesgeschichte)'라고 하는 개념과 방법론에 대한 새로운 검토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마루야마가 일본적 심리 구조에 있어서 '주체의식의 부재'를 말하고 '책임성의 부재'를 말할 때, 이는 주체의 상실 또는 결여라는 현대적 주제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 것일까(어떻게 보면 한쪽으로는, 롤랑 바르트가 『기호의 제국(L'empire des signes)』에서 그 '기호들의 제국'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무대로 일본을 '상정'한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괄호를 열어[닫아]젖힌 김에 여담 한 자락 풀어놓자면, 앙리 미쇼가 만들어놓은 땅 '가라바뉴(Garabagne)'도 몰라서 역자 주석의 지면을 변명으로만 가득 채웠던 『기호의 제국』 번역본의 절판은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해도, 적어도 이땅에서 '근대의 초극' 좌담회 번역본은 어떤 형태로든 다시 출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16) 고야스의 일국민속학과 '지나학'의 역사적 지위에 관한 논의를 읽으면서 드는 의문이 하나 더 있었다. 이 시대, 이른바 '세계 속'의 '한국학'의 자리와 위치라는 담론에 관한 의문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오래된 문법, 오래된 노래는 가끔씩, 아니 자주, 다음과 같은 논리의 전개를 보여준다: '서구에서는 오래 전부터 일본학이 있어 왔다', '일본에서도 오래 전부터 지나학이 있어 왔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한국학은?', '세계 속의 한국학의 확립과 확대는 국가적 사안이며 국력의 잣대이다' 등등. 이러한 지극히 순진한 논리의 전개ㅡ사실은 끔찍하리만치 근대적이고 국민국가적이며 심지어 제국적이기까지 한 요설의 전개ㅡ앞에서 우리는, 그러니까 '한민족'이라고 하는 눈물 나는 이름으로, 그러니까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자랑스러운 이름으로, 울어야 하나 웃어야 하나. 나는 이것이 정말 궁금하다,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다, 너무 궁금해서 웃지도 울지도 못할 지경이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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