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연극』지 2009년 5월호에 기고했던 글을 옮겨놓는다. 언제 다른 자리에서 보다 자세히ㅡ그리고 보다 '재미있게'ㅡ언급할 기회가 따로 있겠지만, '페스티벌 봄'의 일환으로 상연되었던 리미니 프로토콜의 연극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은, 무엇보다 나와 『자본론』 사이의 만남이 지닌 지극히 개인적인 하나의 '역사'를 내게 다시금 환기시키는 형식이 되어주었다. 아마도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러했으리라. 내게는 개인적으로 특히 두 개의 기억이 떠오른다. 열 두 살 때 백의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던 조선노동당사판 『자본론』을 동네 책방에서 사들고 들어왔던 기억이 새삼 새롭다. 그로부터 20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그 책을 틈틈이 들춰본다(열 두 살 때는 단 한 줄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지금 읽어도 참 좋은 번역이다). 내 스무 살 생일을 기념하여 아버지는 『맑스 엥겔스 저작 선집』 전권을 선물해주셨다. 평생 잊지 못할 선물들 중 하나이다(정작 당신 자신은 거의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었던 '맑스/엥겔스'를 자식에게 선물해주신 그 마음을 나는 아직도 결코 '완전히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하지만 어쩌면 이러한 '몰이해' 안에 오히려 '감사'의 신비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10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지만, 이 역시나 여전히 자주 들춰보게 된다. 언젠가 이 '만남'에 관련된 몇 가지 이야기들을 한 편의 '재담'처럼 할 수 있는 시간이 오기를 꿈꿔본다. 연극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은 그러한 '만남'의 몇 가지 예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러한 예들이 단순한 '조각'이나 '부분'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이러한 개인들의 역사가 한 권의 책과 맺는 '특수한' 관계들이 그 자체로 어떤 '보편성'을 위한 조건, 더 적확하게 말해서, 그러한 '보편성'의 가능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이 가장 '일반적이지 않은 일반론'은, 내게 일종의 '애증'의 형식으로 다가온다. 그런 의미에서, 이 '특수한 보편성'은, 내게 소중하지만 동시에 가슴 아픈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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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되는 연극, 역사가 되는 목소리
ㅡ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 되감기는 기억과 재생되는 미래

최정우 (작곡가/번역가)

지난 3월말 아르코 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서는 리미니 프로토콜(Rimini Protokoll)의 세미-다큐 연극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이 상연되고 있었습니다. 때론 짠한 마음으로 미간에 주름을 잡기도 하고, 때론 어떤 흐뭇한 추억에 미소를 짓기도 하면서, 저 또한 그렇게 객석 한쪽에서 그 연극을 지켜보고 있었죠. 이 연극은 전문배우들이 아닌 일반인들—하지만 자신의 삶에서 『자본론』과 어떤 방식으로든 이런저런 관계들을 맺어온 그런 '일반인들'—의 이야기를 특별한 전문적 장치 없이 '진솔하게' 배열하고 병치하는 작품입니다. 물론 이 작품에 어떤 '특별한 전문적 장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에는, 이 작품을 단순히 '일반인들의 진솔한 연극'이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어떤 어폐가 있을지 모릅니다. 관극 후 어떤 사후적 반성(reflection)의 형태로든, 혹은 관극 중 어떤 순간적 체험(experience)의 형태로든, 연극이란 어쨌든 무대에 오르게 되는 그 순간 자연스럽게 모종의 연극적 '구조'를 얻기 마련이니까요. 그러나 이 연극의 '구조'란, 삶의 개연성을 보여주는 어떤 '특수한 보편성'의 허구가 아니라 '날것' 자체의 삶을 편집해 무대 위로 옮긴 '실제적' 허구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일반적 연극의 미학적 틀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죠. 이 작품을 둘러싸고 이른바 '포스트-드라마'의 연극론을 논하는 것도 기본적으로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일 겁니다. 이날은 한국 공연에서만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인물 한 사람이 무대 위로 초대되었습니다. 남한에서 마르크스(Marx)의 『자본론』 국역본을 처음 출간했던 강신준 교수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죠(아마도 이론과실천 출판사판 『자본론』 표지에 적힌 '김영민'이라는 가명에 더 친숙한 분들도 많을 텐데요, 가명을 본명보다 더 유명하게 만들 만큼 엄혹했던 시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역설적' 시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무대 위에 선 강신준 교수의 첫 마디는 "여러분, 이제 좀 귀가 뜨이시죠?"였습니다(그의 한국어 대사들은, 나머지 등장인물들의 독일어 대사를 자막으로 봐야 하는 대다수 관객의 수고를 잠시나마 덜어주면서, 확실히 우리의 '귀를 뜨이게' 하긴 했죠). 이 하나의 대사 안에서, 곧 강신준 교수의 이 '한국어' 안에서, 저는 연극 안의 '목소리'라는 것에 대해, 더 정확하게는 무대 위 목소리들의 '재생(play)'이라는 문제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됩니다. 정작 '귀를 뜨이게' 하는 것은 그 대사의 '국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목소리'들의 연극. 리미니 프로토콜의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 공연 사진.

사실 『자본론』과 관련된 강신준 교수 개인의 이야기는 단순한 '개인사'를 넘어 한국 현대사의 가장 흥미진진한 '집단사'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파독(派獨) 간호사였던 누나와의 인연, 그 누나 밑에서 독일어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된 청소년기, 그리고 대학시절 『자본론』과의 우연한 만남, 남한 사회 최초의 『자본론』 국역본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역사적' 해프닝 등등. 유독 우리가 『자본론』에 얽힌 이 '한국인'의 지극히 '한국적'인 경험을 경청하게 되는 것은 사실 특정한 국적에 국한되는 일이 아닙니다. 아마도 이는, 칸트(Kant)의 저 유명한 '역사철학적' 용어를 차용해 말하자면, 어떤 '세계시민적 보편사' 안에 있는 경험일 것입니다. 독일인들에 의한 독일인들의 『자본론』 이야기가 그만큼의 '개별자적 보편성'을 띠고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이 그에 대한 방증이겠죠. 배우들은 특별히 어떤 '연극적' 제스처나 동선을 취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작품을 하나의 '연극'으로 보고 등장인물들의 말을 경청하게끔 만드는 것은 바로 그들의 '목소리'입니다(이 '배우 아닌 배우들'이 마이크를 착용하고 있는 이유는 뮤지컬 배우들의 이유와는 다른 것입니다). 이 '현실적 허구'의 연극은 말하자면 목소리의 어떤 가능성을 도드라지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며, 또한 작품 자체의 형식적 특수성을 넘어서, 무엇보다 연극 안의 목소리가 지닌 증언과 회고의 보편적 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여기서 『자본론』은 우리와 그들의 역사를 하나의 공통된 시간성 속에서 기억하고 사유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매개물, 곧 일종의 '재생장치'가 되고 있습니다. 이 연극의 중심적 '소리-이미지'로 등장하는 무대 한복판의 저 턴테이블처럼 말이죠. 여기서 제가 '육성(肉聲)'이란 말 안에 포함된 어떤 물질성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는, '물질성'이라는 말을 하나의 은유로서 이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말 그대로 그 육성이 기억의 물질로서 발화되며 또한 다시금 하나의 물질로서 재생되기 때문입니다. 특정한 구조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놓는 배우들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 '기억의 연극(Theater der Erinnerung)'이라는 '구조 없는 구조'에 가닿습니다. 목소리들은 우리에게 서로 다른 기억들을 접속시키게 하고 그럼으로써 다시 공통의 기억을 구성하게 해줍니다. 일회성으로서의 연극적 경험이 지닌 어떤 '반복적 재생성'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러한 목소리의 울림과 잔향 안에 있을 겁니다. 배우에게 화법과 발성이 중요한 이유도 그것이 단순히 정보와 감정의 전달에서 차지하는 효과 때문만이 아닙니다. 배우라는 타자의 몸이 지닌 목소리가 무대에서 '재생'될 때 우리는 귀를 열어 그의 말을 듣습니다. 우리는 그 말의 내용을 들을 뿐만 아니라 그 말의 '몸'을 듣습니다. 기억되고 다시 재생되는 '육성'은 무엇보다 대사이기 이전에 하나의 소리이며 또한 음악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재생장치'는 연극을 '듣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이는 연극의 대사를 '음악적으로' 들어야 한다는 어떤 당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언어는 음악이 아니고 또한 음악도 언어가 아니니까요. 다만 우리는 우리가 연극의 대사들을 이미 충분히 '음악적으로' 듣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러한 대사와 목소리들이 이루어내는 어떤 '악보'를 통해서 연극의 구조와 이미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주 간과합니다. 결국 연극을 '음악적으로' 감상하는 방법이란 곧 연극의 '구조적' 이해라는 문제에 가닿습니다. 언어를 마치 음표처럼 배열하고 분배하는 구조적 구성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 바로 연출이며 동시에 관극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배우의 몸을 통해 울려나오는 이 '음악'은 일상생활의 대화와도 다르고 문자로 만나는 언어와도 다릅니다. 독일어와 한국어의 만남, 전문배우가 아닌 일반인들의 육성과 화법이 유독 가장 '연극적으로' 환기시켜 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언어와 음악 사이의 틈, 삶 속의 언어와 무대 위의 대사 사이의 간극,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거리'가 말하고 있는 연극의 '음악적' 구조입니다. 이 목소리들은 재생되고 있는 것이며, 또한 그 재생의 형식은 과거로서의 기억을 미래로 도래하게 합니다. 역설적이지만, 이러한 '음악'으로서의 연극적 목소리 안에서 '물리적'이고 '실체적'인 음악 그 자체는 오히려 필수적인 요소가 되지 못합니다. 연극의 '음악-되기'가 일견 수동적 '체험'이면서 또한 동시에 하나의 능동적 '모험'이 될 수 있는 이유입니다. 

 

▷ 베케트의 <크랩의 마지막 테이프> 공연 사진. 2006년 런던 로열 코트 극장에서 크랩으로 분(扮)한 해럴드 핀터의 모습(photoⓒ John Haynes).

베케트(Beckett)의 희곡 『크랩의 마지막 테이프(Krapp's Last Tape)』에서 크랩은 긴 시간을 두고 목소리의 녹음과 재생을 반복합니다. 그는 이렇게 읊조립니다: "다시 한 번 해보는 거야, 다시 한 번 더. 이 모든 오래된 비참함을. 너에겐 한 번으론 부족해." 이 희곡은 연극의 목소리가 지닌 어떤 반복성과 재생성을 연극 그 자체 안에 재귀적으로 가져옵니다. 희곡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도 있었는데. 하지만 그런 기회를 더 이상 바라지 않아. 지금 내겐 더 이상 그럴 열정도 없는걸. 그래, 더 이상 바라지 않아." 이 '좌절된' 욕망은 정말 여기서 끝나는 걸까요? 마지막 장면의 침묵 속에서도 테이프는 계속 돌아갑니다. 이 마지막 대사는, 그 대사를 증언하고 있는 마지막 테이프는, 일회성의 끝이 아니라 다시금 도래할 어떤 재생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행복의 기회는 가버린 것이겠지만, 그 기회는 일회적인 것이었겠지만, 연극의 시간은 그 목소리를 되감아 그것을 마치 하나의 '음악'처럼 재생할 것입니다. 기억하기 위해, 그리고 다시 사유하기 위해. 『자본론』이라는 '과거'의 책이, 그리고 그 '과거'를 유령처럼 부르는 목소리들이, 다시금 우리의 귀에 새로운 음악으로 반복되어 '재생'되는 이유입니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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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6-11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에 가신 일 두루 잘 되시고, 안전히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이 글을 읽자니 저의 자본론에 대한 추억도 떠오릅니다. 프린트물로 된 자본론을 무거운 표정으로 토론하던 우리의 모습이 이 글에 묘사된 연극만큼이나 90년대에 어울리지 않는 연극같은 장면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80년대적 진지함을 연기하는 90년대말의 스무살.

람혼 2009-06-11 14:38   좋아요 0 | URL
공연 성공적으로 잘 마치고 무사히 귀국했답니다.^^ 휘모리님의 응원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 또한 90년대의 말미를 대학에서 보낸 학번으로서ㅡ그러고 보니 휘모리님과 저는 거의 같은 연배겠는데요!ㅡ그 치기 섞인 진지함의 '연극적' 풍경이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조이거나 허술했지만, 그럼에도 그 풍경은 아마도 제게나 휘모리님에게나 값지고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의 시간이 아닐까 하고도 생각해봅니다. '시대착오적'으로 하나의 시대를 관통하기란, 그 자체로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겠으나, 한 번 해볼만 한, 그리고 어쩌면 꼭 해야 하는, 그런 일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북한의 핵실험 소식으로 흉흉한 가운데,
(그러나, 요즘, 우리의 마음이, 흉흉하고 답답한,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지 않은가)

이명박 정부는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여전히, 아직까지도, 이명박 정부여야 한다는, 그 사실이, 가장, 흉흉하지, 않은가)

PSI(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에 '전면 참여'한다고 밝혔다.
(故人의 어록을 빌려 말하자면, "이쯤 되면 막 가자는 거" 아닌가)

민주주의에 대한 '전면 탄압'도 모자라,
정치와 경제에 대한 '전면적 무능'도 모자라, 
국민과 법치와 통치에 대한 '전면적 무지'도 모자라,
이젠 아예 '국민' 전체를 '전면전'의 위협에 노출시키려 하는가.
정말이지 묻고 싶다,
너무 궁금하니까,
도대체 모르겠으니까,
정말 다시 생각해도 알 수가 없으니까,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정부니?
너네들은 정말 누구를 위한 정부이십니까?
 
당신들의 미사여구 "잃어버린 10년"은 정말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옳은 말이다.
당신들 때문에 잃어버린 10년이 아닌가.
어떻게 쟁취한 민주주의인가, 어떻게 구축한 평화 체제인가.
너희들 때문에 잃어버린 평화와 민주주의를,
너희들 때문에 잃어버린 우리의 지난 10년을,
너희들 때문에 거꾸로 가버린, 너희들 때문에 퇴색하고 퇴행해버린 우리의 10년을,
이제 돌려달라.
잃어버린 10년을 돌려달라.

 
ㅡ 襤魂, 合掌하고 싶으나, 合掌할 두 손이 떨려, 合掌하지도, 合葬하지도 못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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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세알 2009-05-26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건강하시고 공연도 잘 하세요. 멀리 살아서 보러갈 수는 없지만..살아남아서 건강하게 살아남아서 그들이 소극으로 끝나는 것을 지켜봐야지요.

람혼 2009-05-27 04:37   좋아요 0 | URL
바쁜 일들이 조금 정리가 되고 나면 희곡 하나 쓰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소극을 가장한 비극이 되겠지만, '비극'은 여기서 끝나야 하겠지요. 응원 감사드립니다. 최선을 다해 공연 해보겠습니다!
(실은 어제도 연극 한 편을 위한 음악을 작곡해 무대에 올려놓은 상황이어서 기진맥진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응원에 힘을 얻습니다!)

콩세알 2009-05-27 15:07   좋아요 0 | URL
희곡 쓰시고 무대에 올릴때 혹시 '쥐무덤에 침뱉는' 단역이라든지, Ratbusters 1 같은 역이 있으면 불러 주세요. ^^

람혼 2009-05-28 06:32   좋아요 0 | URL
'우정출연'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언뜻 저 카뮈의 소설 제목이 떠오르지만, '페스트'라는 의학적/병리학적 은유가 결코 단순한 '은유'가 될 수 없는 우리의 상황이 참 역설적이라고나 할까요?

로쟈 2009-05-26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 귀 막고 곤봉 든 지 오래죠...

람혼 2009-05-27 04:37   좋아요 0 | URL
눈과 입 죄다 막으려다, 다시 촛불을 들게 만들기도 하고요.

파란여우 2009-05-26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SI 전면참여 뉴스를 보고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보다 더 떨리는건 저 혼자인지 모르겠습니다. 국가를 전쟁국면으로 몰아 세우는 건 독재자의 전형적인 작태로 봅니다. 이명박 정부의 위기 해결 방법이 전면참여 외에는 정녕 없는 것일까요? 70년대 박정희의 선전물을 보며 성장한 저로서는 이런 강경대응이 너무 두렵습니다. 이래저래 한숨만 깊어지는 시절입니다.

람혼 2009-05-27 04:38   좋아요 0 | URL
도대체 대책 없는 '강경 대응'으로 우리 정부가 얻는 '실용'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정부는 대책도 없지만, 생각도 없고 비전도 없고, 무엇보다 양심이 없는 정부인 것 같습니다. 노무현이 '바보 노무현'이라면 이명박은 뭐라고 해야 할지... 답이 없네요.

푸른바다 2009-05-26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마음 속으로는 희망을 버려서는 않된다 다짐 하지만 요즘은 정말 암담하군요. 도대체 이 나라가 어떻게 될까요? 아무 것도 모르는 듯한 많은 국민들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3년 반 동안 피해가 가능한 최소이길 바라고 또 바랄 뿐입니다.

람혼님 공연에 가보려고 했는데, 지금 같아서는 도저히 기분이 나지 않는군요... 아무튼 힘 내시고 공연 잘하시길 기원합니다...

람혼 2009-05-27 04:39   좋아요 0 | URL
세상에, 아직 3년 반이나 남았나요? 아직도 남아 있는 '재앙'의 기간이 새삼 환기되니 더욱 끔찍한 기분이군요... 前 대통령 탄핵하자던 그 잘난 국회의원들은 다 어디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시효'가 남아 있는 그 폭탄과도 같은 재앙의 나날들을 아직도 3년 반씩이나 참아야 하는 '국민'의 마음을 이 정부가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도무지 공연할 기분이 나지 않는 요즘이지만, 응원에 감사드립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05-26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함석헌 선생이 전쟁으로 평화가 온다고 생각하는 것 만큼 이상한 생각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지요. 참 이런 이상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왜 이나라 저나라에 많은지 이것도 전염병일까요?

람혼 2009-05-27 04:40   좋아요 0 | URL
'평화'를 아예 바라지 않거나, 혹은 '평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예 모르는 것이겠죠. 저로서는 후자, 곧 저 '완벽한 무지' 쪽에 원인이 있다고 한 표를 던지고 싶습니다만, '완벽한 무지'를 가장한 이 정부의 '완고한 야욕'은 자신의 '무지'를 압도하고도 남을 정도로 정말이지 치가 떨립니다. '페스트' 같은 전염병이라면, '박멸'에 들어가야겠죠.

프레이야 2009-05-26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어디까지 가려는지 두렵고 놀랍습니다.

람혼 2009-05-27 04:40   좋아요 0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 정부가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보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문제는 그것이, 어디까지 하면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나, 어디까지 가면 어디까지 삽질할 수 있나, 하는 따위의 '한계'라는 것이겠지만요. 하지만 참는 데에도 '한계'가 있죠.

qualia 2009-05-26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명박 정권과 그 일당들이 벌이고 있는 모든 사태는 그들이 미리 짜놓은 각본대로 진전되는 것 같습니다. 북한의 핵(실험)을 빌미로 한 PSI(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 전면 참여 → 북한 군부 강경파 자극 → 무력 도발 유도 → 국가비상사태 선언 → 개성공단 폐쇄 → (준)전시체제 돌입 등등의 수순으로 김대중 · 노무현 정권에서 공들여 조성한 남북한 평화공존체제를 전면 파탄내려 하는 것이 이명박 정권과 그 도당들의 오래된 음모이자 도박인 듯합니다(김대중 대통령이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제 판단에 이명박 정권과 그 도당들의 음모와 북한 군부 강경파들의 음모는 거의 동일 · 일치한다고 봅니다. 한반도 남북한 간에 평화 · 화해 분위기가 무르익고 통일 논의의 기운이 확산되는 것은 남한의 수구냉전 외세의존 세력뿐만 아니라 북한 군부 강경파에게도 지극히 위험한 것입니다. 특히 북한 군부 강경파는 남한의 수구냉전 외세의존 세력의 이러한 속성(혹은 약점)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 역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남한의 수구냉전 외세의존 세력(이명박 정권, 한나라당, 조중동 따위)과 북한 군부 강경파에게는 본능적으로 ­― 동시에 전술전략적으로 ― 서로 의존해야 혹은 상부상조해야 정권과 권력의 공고한 유지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성립합니다. 그들은(남 · 북 공히) 오래 전부터 이렇게 상호대결하고 상호의존하는 역설적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이런 역설적 관계를 ― 따라서 그들의 생존에 필연적인 조건인 그 관계를 ― 그들에게 닥치는 어떤 위기나 기회를 반전시키고 증폭 활용하는 데 수없이 성공적으로 써먹어온 터였습니다.

즉 남한의 수구냉전 외세의존 세력이 일종의 위기에 처하면, 북한 군부 강경파가 교묘한 타이밍으로 직접 도발해주거나, 남측의 도발 유도에 전술전략적으로 응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종의 교감이 그들 사이에는 내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개성공단이나 금강산 관광 등의 남북한 협력사업이 순조롭게 발전하고 북한 사회 내부로 확산되는 것은 남한의 수구나 북한의 강경파나 모두 경계해야 할 사안이므로, 그들이 정권을 잡고 있는 이상, (남북한 민족화해 진영의 적극적 저지가 없다면) 남북한 협력사업의 중단과 폐쇄는 당연한 귀결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수조 수십조 단위의 천문학적 경제적 손실과 민족의 희생은 그들에게 그들의 생존과 정권 유지 여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이명박 정권과 그 일당들은 대체적으로 위와 같은 시나리오대로 나아가리라고 봅니다. 여전히 수구냉전 시대의 전술전략 혹은 정략 그대로입니다. 그런데도 21세기 백주대낮의 남한(과 북한)에서는 여전히 잘 먹혀들어갑니다. 남한 내의 진보 세력, 민족 통일 세력이 저들의 음모를 폭로해내고 적극적으로 저지하지 않는다면 저들의 위험한 전쟁 도박이 한반도를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내몰 가능성이 매우 클 것입니다.

람혼 2009-05-27 04:42   좋아요 0 | URL
이른바 저들은 '적대적 공범자'들이죠. '혁명'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고 마음을 다지게 되는 시기인 듯합니다.

푸른바다 2009-05-27 11:24   좋아요 0 | URL
이 정권은 박정희, 전두환 정권보다 위험합니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은 철저한 독재정권이었기에 나름대로 나름대로 자신감을 가지고 적대적 공존체제를 관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정권의 구성원들 역시 노태우 정권에서 볼 수 있었듯이 나름대로 남북문제의 중요성에 대한 전향적인 인식을 갖고 있지 않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대북정책이 편을 가르는 기준으로 바뀌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 자들이 대북정책을 공격함으로써 보수적인 지지층을 단결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이 자들은 자신들의 대북정책을 변화하는 순간 자신의 지지층이 등을 돌릴 것이라는 생각에 빠져있습니다. 조선의 김대중이 최근 요구한 것이 바로 그것이고 이명박은 PSI가 실효성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지층 공고화를 위해 PSI참여를 선언한 것입니다. 조선 김대중 말대로 어차피 성공하기 힘드니 집토끼나 확실히 잡자는 전략인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위험성이 있습니다. 지지층 결집을 위한 수동적 선택이기에 이자들에게는 적대적 공존을 관리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직대통령을 공격하는 방식의 저열함, 촛불로 번질까 서울광장을 개방하지 못하는 그 근시안적이고 비루한 모습... 한 마디로 이자들은 한반도와 같이 복잡다단한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곳을 관리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 현실적 위험성은 상상하기도 싫군요...

람혼 2009-05-27 11:24   좋아요 0 | URL
'적대적 공존'의 체제 자체를 관리할 능력이 없는 '적대적 공범자'들이 훨씬 더 위험하다는 말씀에 크고 깊게 동감합니다. 그 '현실적 위험성'에 대한 상상은 너무나 불길한 것이라 오히려 더욱 확실하게 머리 속에 떠오르기에, 요즘 저도 너무나 우울하고 절망적인 기분입니다. 더불어 요즘 제게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문장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인데요, 최악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실험'하면서 이 정부가 한꺼번에 '잃게' 해준 지난 20년을 어떻게 상환하고 회수할 것인가, 실로 절체절명의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푸른바다 2009-05-27 12:42   좋아요 0 | URL
이땅의 진보지식인들에게 알튀세르가 수입되고 라캉이 수입되었지만, 이 이론들이 이땅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의 특수성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활용되지 못했다는 점은 안타깝습니다. 알튀세르의 말대로 계급 모순은 '최종 심급'에서 규정적인 작용을 하지만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중층 결정'되는 것이기에 그 현실적 모습은 계급모순으로 단순히 환원될 수 없습니다. 한반도에서는 분단이라는 경험과 현실이 '외상'으로서 이데올로기적 문제들을 과잉결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외상'을 풀지 못한다면 계급 모순도 풀릴 길이 없을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PD들은 이러한 점을 간과하고, 단순히 북한의 문제를 '외부'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백낙청 선생의 말대로 분단체제는 흔들리고 있는 지 모릅니다. 그러나 튼튼한 집보다 흔들리는 집이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민노당과 진보신당이 분열은 물론 민노당내 주사파들의 단순무지가 직접적인 원인이었지만 진보세력들의 분단체제에 대한 인식의 미흡함도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람혼 2009-05-28 06:28   좋아요 0 | URL
저는 개인적으로 단지 '알튀세르'와 '라캉'이라는 이름을 말하고 되짚고 해석하고 전유하는 지식인들이 반드시 '진보 지식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식의 오퍼상'이라는 수입의 문제와, 그러한 지식과의 접합/대결을 통해 현실의 이론과 실천을 사유하는 문제는, 사실 서로 전혀 다른 것일 테니까요. 저 역시나 그 이름들에 대해 크게 낯선 느낌을 갖지 않는 사람으로서 말씀드리자면, 푸른바다님이 말씀하신 대로, 저 수입된 모든 이론들은 꽤나 자주 마치 쇼윈도우에 전시되고 소비되는 하나의 상품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말씀하신 부분에서 좀 더 나가보자면, 라캉과 알튀세르의 이름으로 때때로 대변되는 저 '정신분석' 혹은 '정신분석적 마르크시즘'의 어떤 자본주의적 '효용'과 '가치'가 있다고 한다면(하지만 여기서 제가 말하는 "자본주의적"이란 수식어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소화되고 유통되고 배설되는 일종의 상품 같은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성찰에 필수적인'이라는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현실의 외상에 대한 '진단 가능성'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푸른바다님의 문제의식과 크게 공감하는 지점을 저의 언어로 오히려 '반대로' 말하자면, 북한을 일종의 '외부'로 인식하는 것도 물론 문제이겠지만, 또한 북한을 '내부' 혹은 '불편한 내면'으로 인식하는 것 또한 큰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소위 'NL과 PD의 정신분석'이란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아마도 이러한 문제 틀을 한 축으로 가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푸른바다 2009-05-28 10:11   좋아요 0 | URL
예, 맞습니다. 북한 문제의 미묘함은 외부의 문제가 아니면서도 또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 있겠지요. 아마도 한반도에 가장 직접적으로 얽힌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풀어가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qualia 2009-05-28 14:25   좋아요 0 | URL
(람혼 님과 푸른바다 님께 뒤늦게 양해 말씀 드립니다. 제가 위에 있는 제 댓글을 제 블로그에 옮겨놓으면서, 람혼 님과 푸른바다 님의 허락 없이 두 분의 댓글까지 제 블로그로 옮겨 갔습니다. 만약 두 분께서 원치 않으신다면,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허락을 받는 일이 먼저였는데, 그렇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푸른바다 님께서는 위에서 〈[이명박] 정권의 구성원들 역시 노태우 정권에서 볼 수 있었듯이 나름대로 남북문제의 중요성에 대한 전향적 인식을 갖고 있지 않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라고 하셨는데요. 제 생각에, 그들에겐 남북문제에 대한 전향적 인식이 거의 없(었)다고 봅니다. 있는 것으로 보였다/보인다 해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위장된 것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그들에게 진정 전향적 인식이 있었다면/있다면 남북의 극한적 대치 국면을 완화하고 남북 화해로 가기 위한 국가정책적 차원의 노력과 실천이 있어야 했는데/하는데, 전혀 그런 사례가 없(었)으니까요. 오히려 정반대로 남북한 극한 대치를 더욱더 노골적으로 키우면서 그로써 나타나는 전쟁 공포를 정략적으로 악용하고 있으니까요.

또한 저들이 남북문제에 대한 유사 전향적 인식을 내비친다 하더라도, 그것은 선거 기간 중에나 나타날 수 있는 진보/민족화해 진영에 대한 일시적 포섭용 제스처이거나, 북한에 대한 전술전략적 제스처에 불과하다는 생각입니다. 진정성이 결여된 위장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람혼 2009-05-29 05:59   좋아요 0 | URL
모두 공개된 댓글들이므로, 저는 글을 옮겨 가시는 것에는 큰 이견이 없습니다. 푸른바다님도 별 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신 것으로 봐서 저와 비슷하게 생각하시지 않을까요?

이명박 정부가 지닌 남북관계에 대한 '전향적 인식'이란, 푸른바다님 말씀처럼, 원칙도 없고 신념도 없는 일종의 '편가르기'와 자신의 지지층에 대한 '환상적/상상적 믿음'에 기반하고 있는 부분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명박 정부는 어쩌면 대한민국 대통령제에서 유래가 없는 '5년의 레임덕'을 경험할 정권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역설적으로 우리는 이 점을 오히려 '걱정'하고 '우려'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그 '5년의 레임덕'이 가져다주었고 가져다주고 있으며 또한 가져다줄 그 모든 폐해들은 고스란히 소위 '국민'들이 전부 짊어져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한 국가의 정부가 이렇게도 무지하고 무능할 수 있는지, 화가 나는 걸 넘어서 측은한 마음까지 들기도 합니다.

qualia 2009-05-29 06:39   좋아요 0 | URL
람혼 님, 질 낮은 제 글에 람혼 님과 푸른바다 님의 글을 모셔 가는 것이 몹시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삭제를 할까 하고 일단 람혼 님 블로그에 와보았더니, 람혼 님께서 괜찮다는 말씀을 해주시는군요. 고맙습니다.

람혼 님의 여러 정치적 비판글에서 많은 인식을 얻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막연히 람혼 님으로부터 받았던 인상과는 상당히 다른 인상을 정치적인 글을 읽을 때마다 느끼게 됩니다. 거듭 고맙습니다.

푸른바다 2009-05-29 09:24   좋아요 0 | URL
qualia님: 예, 대화를 나눈 것이니 옮겨가셔도 무방합니다.
저는 노태우 정권 때 그들이 북방정책을 추진했고, 이 정책의 입안자들의 다수가 김대중 정부에서도 계속 햇볕 정책에 참여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어찌되었건, 이 정권은 가능한 최악의 정권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겠죠.

qualia 2009-05-29 12:50   좋아요 0 | URL
푸른바다 님, 고맙습니다.
푸른바다 님 의견에 많이 공감합니다.
앞으로 우리 이 땅에 화해와 평화의 기운이 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아가서 어서 빨리 통일의 길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염원합니다.

[해이] 2009-05-26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있던 책을 집어 치우고 분연히 떨쳐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람혼 2009-05-27 04:44   좋아요 0 | URL
바꾸신 사진 이미지가 참 마음에 드는데요. 이론의 공격 또한 치열하게 펼쳐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 역시나 하게 됩니다.

푸른바다 2009-05-29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요즈음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역사'라는 것이 '원자폭탄'보다 가공할 위력을 지녔다는 에릭 홉스봄의 말이 떠오릅니다.

람혼 2009-05-29 06:03   좋아요 0 | URL
어쩌면 우리는 지금, 그러한 '역사'의 한복판으로, 다시 말해 그러한 역사적 '핵실험'의 중핵으로 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영결식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역사의 저 가공할 위력을 되새겨봅니다.
 



 

광고 글 한 자락. 

제가 몸 담고 있는 밴드 Renata Suicide가 오랜만에 공연합니다.
장소는 홍대 클럽 명월관입니다.

일시: 2009년 5월 30일(토), 9:00 PM~
(레나타는 대략 11:00 PM 정도에 무대에 오를 듯)

장소: 클럽 명월관
(명월관 위치는 클릭 → 약도
아마도 약도상에 표시된 홍대입구역 6번 출구는 현재 5번 출구로 바뀌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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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nata Suicide
www.renatasuicide.net

2002년 4월 19일, 람혼(vocal/guitar), 반시(bass), 파랑(drums)이 신림동 모처에서 작당(作黨)하여 결성한 3인조 음악집단.

클럽과 연극/무용 무대를 중심으로, 프로그레시브와 사이키델릭, 메탈과 모던 록, 댄스와 아방가르드 등을 혼합한 중독성 넘치는 이종(異種)의 록 음악을 선보이며 점차로 마니아층을 넓혀오고 있다.

그간 홍대 클럽과 대학로 연극/무용 무대 등을 통해 100회 가량의 공연을 펼쳤고,
특히 장 주네(Jean Genet)의 연극 <발코니>, 새러 케인(Sarah Kane)의 연극 <새벽 4시 48분>, 정영두 안무의 무용 <휘어진 시간>, 장은정 안무의 무용 <육식주의자들> 등 많은 문제작들에서 작곡과 연주를 맡아 주목을 받았다.
EBS의 '스페이스 공감', 원음방송의 '밴드 피플 라디오 스타' 등의 프로그램에도 출연하였다. 

끈질기게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근대적 풍경들을 노래하는 <경성연가>, 일상의 허무주의에 대한 우려와 애정이 섞인 착종된 감정을 노래하는 <매뉴얼(Manual)>, 자학 속에 도사린 작은 열정에 관한 노래인 <독의 노래>, 카프카(Kafka)의 동명소설에서 착상된 <단식광대>, 패자의 정체성에 대한 자기-관찰자적 시선을 담은 <서브라이더(Sub-rider)> 등, 그간 20곡 정도의 곡을 만들고 공연했으며, 현재 첫 번째 앨범 발표를 위해 오랜 시간 많은 곡들을 새로 쓰거나 다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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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는 명월관의 공연 예고 홍보 글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명월관 싸이월드 클럽 참조: http://club.cyworld.com/myoungwolg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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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랜드 12번째, Under-Land Vol.12, 스페셜 2번째 공연 일정이 모두 잡혔습니다!
숨어 있는 고수와 떠오르는 고수들의 향연이 되는 스페셜 2번째 공연은
그간 명월관에서 공연을 해주신 분들과 언더랜드에서 공연을 해주신 분들이 함께합니다.
한 낮의 봄의 기운은 여름을 이기듯이 뜨거움을 달리고 있고, 날씨 기온차 덕에 봄인 것 같다는 요즘.
죽음의 4월이 지난 5월에 때늦은 진지한 음악 색깔로 채우려 합니다.
09.05.30.토요일 " 언더랜드 Under_Land Vol.12 : Special Edition 2" @ 명월관
입장료 10,000 원 ( 5,000 원 음료권 1매 포함 )


Line- Up :

Band  : 내일
Band  : 호나우두와 난봉 형제들
Band  : Renata Suicide (레나타 수이사이드)
Band  : Da Pluto(다 플루토)
Band  : The Plastic Day (더플라스틱데이)
 
DJ      : Koby
DJ      : Youknow 

명월관 풍각쟁이 : DJ Bandi, DJ Bad Law

본 공연은 9시 이후 부터 시작하며, 당일 사정에 따라 시간 및 순서가 변경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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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9-05-17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마지막날이었던가요. 공연장에서 람혼님 뵌게. ^^ 곧 음반도 나오나보군요! 그때되면 다시 인사하겠지만 미리 축하드립니다.

람혼 2009-05-17 13:23   좋아요 0 | URL
올해의 첫날이기도 했죠.^^ 아프락사스님의 응원에 힘이 납니다!

드팀전 2009-05-18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갈 수 없지만 좋은 공연하세요.

람혼 2009-05-18 21:35   좋아요 0 | URL
드팀전님, 언젠가는 꼭 한 번 뵙고 싶은 분인데요... 응원해주시니 힘을 내서 좋은 공연 만들어보겠습니다! ^^

열매 2009-05-22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처럼만의 공연이군요.
일마치고 시간되면 오랜만에 공연에 한번 가보고 싶네요.
늦봄의 열기가 후끈하겠습니다^^
클럽 이름도 야시쿠리한게 좋네요

람혼 2009-05-23 03:31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이번에는 열매님 잘 보실 수 있게 큰 마음 먹고 공연 광고 해보았습니다! ^^ 오실 수 있다면야 그보다 더 반갑고 감사한 일이 없겠죠. '명월관'은 클럽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그리고 그곳 사람들이 참 좋아서, 오랜 시간 동안 아주 친하게 지내는 클럽이기도 합니다. 오랜만에 꼭 뵙고 싶네요!
 


 


이 한 장의 스틸 사진은, 오랜만에 영화의 '스틸' 그 자체에 열광케 한 사진이었다.
(요즘 어떤 글을 쓰느라 실로 오랜만에 T. S. Eliot의 "Four Quartets"를 다시 읽을 일이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저 'still'이라는 단어가 왠지 더욱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박찬욱 감독의 <박쥐>를 보면서 나는 Abel Ferrara의 <어딕션(Addiction)>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중에 <박쥐>에 관해 따로 글을 쓸 일이 있겠지만, 
일단은 이 말만은 꼭 해두고 싶다:

김옥빈의 재발견.
 

ㅡ 襤魂, 合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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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5-17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쥐를 볼까 하다가 어제, 김씨표류기를 보았는데 '김옥빈의 재발견'이란 말씀이시죠? 그렇다면 저도 박쥐를 봐야겠어요, 람혼님.

람혼 2009-05-17 21:23   좋아요 0 | URL
저는 <박쥐>와 더불어 <스타 트렉>과 <김씨표류기> 등 세 영화를 두고 '선택'을 했었는데요...^^; 저는 다음에 <김씨표류기>를 봐야겠군요, 다락방님! ^^

[해이] 2009-05-17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친구의 고집으로 인해 스타 트랙을 봤습니다... 저랑 전혀 안맞는 영화였더군요;;; 공연 성황리에 잘 끝마치시길 바랍니다:D

람혼 2009-05-17 22:43   좋아요 0 | URL
고집이 센 친구를 두셨군요.^^; <스타 트렉>은 제게 '향수 어린' TV 시리즈라서요, 게다가 'the beginning'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으니 한 번은 꼭 보고 싶습니다. 시간 나시면 공연에도 놀러오세요~! ^^

2009-05-17 2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18 0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18 1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18 2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19 0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19 0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메이데이다. 햇살이 뿌옇다. 

더듬어보면, <인터내셔널가>를 처음 들었던 건 고등학교 때 세계사 선생님을 통해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80년대 학번이던 당신의 학창시절 시위 속 한 장면: 집회를 마칠 때 즈음하여 <애국가>를 부르고 나면 그 곡 자체에 포함된 어떤 '느림과 처짐'의 정서 때문에 오히려 힘이 쭉 빠졌다는 것. 반면 <인터내셔널가>나 <라 마르세예즈> 같은 노래를 부르면 알 수 없는 힘이 솟았다는 것.
곧, 한 노래의 정치적/미학적 '용도'는 따로 있었던 것이다. 

역시나 고등학교 때 수학 선생님(이분 역시 세계사 선생님과 '동시대인')으로부터 나는 "보라, 동해의 떠오르는 태양~"으로 시작하는 송창식/김민기의 <내 나라 내 겨레>를 배웠다(이 수학 선생님은 나중에 <원리를 찾아라>, <기호와 공식이 없는 수학카페> 등의 책의 저자로 '유명'해지게 된다...). 

뜬금없이 메이데이에, 오랜만에 이 두 선생님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나는 그 기억 속에서 <인터내셔널가>와 <내 나라 내 겨레> 사이, 그 기묘한 불화와 합치의 '공존'을, 가장 '국제적'인 것과 가장 '민족적'인 것 사이의 어떤 '만남과 헤어짐'ㅡ이는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마치 PD와 NL 사이의 어떤 '역설적 마주침'이라 해야 할 것인가ㅡ을 다시 곱씹어본다.

비단 이 두 가지 예뿐만은 아니겠지만,
그러고 보면 나는 전혀 음악이 아닌 것으로 음악을 배웠던 것 같다.
(혹은, 역으로, 음악으로 전혀 음악이 아닌 것을 배웠다는 설명도 가능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하나의 역설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프랑스어 가사 오리지널 버전 <인터내셔널가(L'internationale)>:

http://www.youtube.com/watch?v=pB5x6cDMjao

 
2) 켄 로치(Ken Loach) 감독, <랜드 앤 프리덤(Land and Freedom)>에서(에스파냐어 가사):

http://www.youtube.com/watch?v=bNX02G7m9KU

 
3) 대학 1학년 때의 어느 봄날(그러고 보니 딱 이맘때쯤이다), 나는 동숭동에서 미클로시 얀초(Miklós Jancsó)의 <붉은 시편(원제: Még kér a nép)>을 관람하고 있었다. 이 영화에 <인터내셔널가>는 나오지 않지만 내게 <인터내셔널가>와 얽혀 있는 어떤 인상들은 이 영화의 장면들과 극도로 '상동적'이다(덧붙이자면, 이 영화 안에서 중심적인 대립의 축은, 그 자체로 또한 가장 '국제적'이며 동시에 가장 '민족적'이다). 이 지극히 '개인적인' 이미지와 음악/소리들의 조합을 달리 설명할 길은 없지만, <붉은 시편>의 이 한 장면(무참하리만치 집요한 이 롱테이크를 보라)이 그 설명을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단, 이 장면을 하나의 '내러티브'로 이해하지 말고, 하나의 '음악극', '소리극'으로 이해할 것:

http://www.youtube.com/watch?v=UbCmg7bul_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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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1 2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02 0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02 0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02 14: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바다 2009-05-02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약 조선 반도가 다시 통일된다면, 전 '내나라 내겨레'를 국가로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람혼 2009-05-03 01:17   좋아요 0 | URL
푸른바다님, 반갑습니다.^^
우리에게는ㅡ여기서는 일단 이 '우리'란 개념부터 문제가 되겠지만ㅡ'통일'이라는 '소원' 그 자체가 근대국민국가 형성을 위한 지연된 미완의 목표이기에, 그런 의미에서라면 아마도 <내 나라 내 겨레>가 '통일 한반도' 국가(國歌)의 유력한 후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는 공감합니다. <인터내셔널가>와 <내 나라 내 겨레> 사이에 얽힌 어떤 '추억' 속에서 제가 느끼게 되는 '근대적' 혹은 '후-근대적' 괴리감의 정체가 아마도 바로 이러한 국가(國家)와 국가(國歌) 사이에 있을 듯합니다.

푸른바다 2009-05-03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람혼님 반갑습니다. 람혼님의 진지한 글들 늘 감사하게 읽고 있습니다.

'인터내셔널'과 '내 나라 내 겨레' 사이에서 람혼님이 느끼시는 '어떤 불편함'은 저도 이해가 됩니다. 이 불편함은 아마 근대 국민국가가 성립된 후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가지게 된 어떤 보편적인 문제의식과 연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 문제의식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은 현실 역사의 진행 속에서 진보적인 대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갈등으로 끊임 없이 표출되었지요. 저는 이 문제의식의 건강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이것이 민족주의/국가주의가 가져올 수 있는 병폐를 완화시킬 수 있는 끊임없는 실천적 동력으로 작용하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현실의 생산양식/유통양식은 아직 민족주의/국가주의의 존재를 거부할만큼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현재 남북간에 빚어지고 있는 갈등 역시 근대 민족주의/국가주의에서 유발되는 특수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 특수한 갈등은 한반도 사람들의 생활 양식과 사고에 매우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저는 백낙청 선생의 분단체제론에 공감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이 특수한 갈등은 국가 및 민족의 소멸이라는 이상적인 대안을 통한 해결보다는 건강한 민족주의/국가주의에 의한 새로운 통합에 의해 해결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지 않을까 합니다. 즉 일본의 메이지 유신류의 불건강한 국가주의를 극복하고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새로운 국가의 모델을 만들어 내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아닐까 하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내 나라 내 겨레'가 그러한 새로운 국가적 통합에 대한 상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람혼 2009-05-03 13:15   좋아요 0 | URL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일천한 글들 잘 읽어주신다니 감사드리는 마음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현실의 생산양식/유통양식은 아직 민족주의/국가주의의 존재를 거부할 만큼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기에, '통일'이라고 하는 [이미 오래 전에 이루어야 했을 것으로 '상정된'] 근대적/민족적/국가적 목표가 지금 여기서 [여전히, 혹은 새롭게] 특별히 '문제적'인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어떤 '불편함', 혹은 제 언어로 말하자면 일종의 '위화감'이란 바로 이러한 문제 지형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도출되는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이 바로 '우리'의 특수한 역사적/정치적 상황이겠지만, '우리'가 처한 이 특수한 상황 자체가 오히려 민족/국민국가라고 하는 저 '역사적 보편성'의 가장 극명한 징후를 드러내는 독과 약으로서의 '특수한 보편성'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아마도 이 때문에 국민국가 체제의 집단화 혹은 중앙화로 대표되는 세계는 그 자신의 '징후성'을 '봉합'하고 '은폐'하기 위해 북한 문제 혹은 한반도 문제에 그렇게 큰 관심을 갖는 게 아닐까 하고도 생각해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또한 말씀하신 "이 특수한 갈등은 한반도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사고에 매우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현상 자체를 하나의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징후'로 파악하는 일이 더욱 시급하게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견해를 피력해봅니다. 민족주의/국가주의라는 특수성 안에서 사고된 '통일'의 주제를 하나의 '사실'로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것이 외형적으로 원하고 추구하는 듯 보이는 '소원'과 '소망'을 오히려 '배반'하면서 '비정상'의 분단 체제를 의도치 않게[혹은 '의도적으로'] 고착시키고 악용하게 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푸른바다님도 적극 공감하시리라 생각하지만, 따라서 문제는, 현실적으로 '작용'하고 '활동'하고 있는 민족과 국가의 개념에 대한 천착과 아울러, 동시에 이 '징후적' 개념들을 그 바닥과 한계에 이르기까지 '소진'시키고 그 '불가능한' 가능성의 실체와 마주하기를 병행하는 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러한 병행이 "국가 및 민족의 소멸이라는 이상적인 대안"과 다른 부분은, 민족과 국가의 개념이 징후적인 것이기에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말씀드린 저 '병행'이란, 가장 '현실적으로' 현실과 이상의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기우뚱한 균형'을 잡아가려는 이론적/실천적 노력이기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해체[주의]적' 입장을 따르는 저로서는, '선한[건강한]' 민족/국가주의가 따로 있고 '악한[건강하지 못한]' 민족/국가주의가 따로 있는 것이라고는 절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민족/국가주의 그 자체가 역설적이게도 어떤 '불건강성' 위에 기반하고 기초할 수밖에 없는 지극히 징후적인 '건강성'의 담론이라는 '기원적' 사실 자체가 제게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가 앞서 "지연된 미완의 [것으로 상정된] 통일"이라는 뉘앙스로 '통일'을 말했던 것도, 하나의 완수되어야 할, 하지만 남북 각자의 정치적 입장 때문에 부침을 반복하게 되는, 그런 통일의 노력과 논의들이, 제게는 종종 '단계적 혁명론' 내지는 '부르주아 사회 이후에 도래하는 [것으로 상정된] 공산주의의 역사적 운동법칙' 등의 논의를 떠올리게 하는, 일종의 '목적론적'인 측면이 있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간직함이 옳지 않겠나"라고 반문하는 <내 나라 내 겨레>의 문법 안에서, 제가 불끈하고 울컥하는 민족적 감상을 느끼면서도ㅡ'핏줄'처럼 흐르는 민족과 국가의 이데올로기라는 이 '체질적' 반응 속에서 과연 누가 그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만ㅡ동시에 그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또 다른 반문을 품게 되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민족/국가의 '소유'와 '건강성'이라는 개념이 지닌 '도착' 내지는 '패착'을 개인적으로 필요 이상(?)으로 민감하게 지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제 생각 또한 이렇게 '소박한' 것이지만, 이 소박한 생각을 뛰어 넘어서 민족과 국가의 개념에 대해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또한 제 소박한 취지이자 한계이기도 한 것 같다는 생각, 역시나 품게 됩니다.

푸른바다 2009-05-03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긴 답변 감사드립니다^^ 아마도 상호이해에 있어서 큰 이견은 없는 듯 싶고, 분단과 관련된 현상을 '징후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람혼님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아마도 의견이 갈리는 부분은 과연 '건강한 민족/국가주의'가 과연 존재할 수 있느냐의 문제일 것 같습니다. 람혼님은 아마 민족/국가주의는 태생적으로 건강할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같고, 저도 일정부분 동의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아마도 완벽한 이념과 제도는 존재할 수 없으며 따라서 끊임없는 실천을 통해 수정하고 보완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 아닐까 싶고 이것이 제가 두번째 댓글에서 제기했던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민족과 국가라는 것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했을 때, 저는 이러한 '주의'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병폐를 최소화하는 '구성적인' 틀에 대한 설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하는 입장입니다. 물론 완벽한 설계는 존재할 수 없기에 람혼님이 말씀하시는 '해체'적 접근에 의한 실천적인 노력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하겠지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나 후쿠자와 유키치의 근대 국민국가에 대한 '설계'가 왜 광적인 침략 전쟁으로 확대되었느냐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독일의 나치즘이나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미국의 국가주의나 중국의 민족/국가주의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게 그거라고 하실지 모르지만, 전 개인적으로는 미국의 '국가주의'가 일본의 '국가주의'나 작금 중국이 보여주고 있는 '국가/민족주의'보다는 좀더 건강한 것이라고 생각해 보곤합니다. 강한 국가주의/민족주의로 무장한 강대국에 둘러쌓여 있는 한반도에서 우리나라에서만 국가/민족에 대한 '해체적인' 실천만을 고집한다면 이것은 아마 현실적으로 무력하며 한편으론 자살행위에 해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세계적인 연대에 의해서 맞서야 한다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는 20세기 초반의 경험을 통해 어느정도 검증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방어적'인 차원에서라도 무언가 테두리를 만들기는 해야 할 텐데, 이것이 일본이나 현대 중국이 갖고 있는 민족/국가적인 틀과 유사하다면 향후 세력 균형의 변화에 따라 다시 전쟁과 개인의 희생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 제 문제 의식입니다. 사실 아직 작동해본적이 없는 '건강한 민족주의/국가주의'를 상상한다는 게 자못 관념적으로 비칠 수 있고, 람혼님의 우려도 아마 이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지정학적인 위치'와 '역사적인 경험'을 고려한다면 그러한 '건강한 민족/국가주의'는 우리나라에서 구상되고 실천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게 제 의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식민지 치하에서 해방과 독립을 구상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생각들을 다시 검토하고 해석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반도에서 '통일'이라는 문제는 단순히 하나의 단일 정부를 만드는 데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남/북이 갖고 있는 기존의 인식틀은 기존의 민족국가의 개념틀이 가지고 있는 모든 모순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를 초극하여 새로운 '평화공존'의 틀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건강한 '민족/국가주의'이고 이것은 분단체제가 가져오고 있는 '억압'에서 해방되는 것이며 또 편협한 국가주의에 대한 세계사적 전환의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 소박한 바램입니다^^ 한마디 더 덧붙힌다면 이는 진보사관에 바탕을 둔 단계론적인 시각과도 구별되어야 하며 아마도 인간적인 '상식'으로의 복귀가 아닐까 싶습니다.

람혼 2009-05-04 15:54   좋아요 0 | URL
저도 가끔씩, 푸른바다님이 말씀하신 의미에서의 "건강한 민족주의/국가주의"의 조건들을 생각해보곤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뭐랄까요, 부정의 부정을 통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요, '우리'가 보편사적 세계사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한국인 출신 UN 사무총장을 배출하는 따위의 일이 아니라ㅡ저는 그 '무력함'이 "20세기 초반의 경험을 통해 어느 정도 검증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그 "세계적인 연대"보다 훨씬 더 무력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바로 소위 평화를 위한 국가들의 연합이라는 명목을 내세우는 UN이 바로 그 '평화'에 관해 세계에서 가장 무력한 집단이라는 사실은 이미 입증되었고 계속해서 입증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ㅡ한반도의 '역사적'이고 '지정학적'인 상황이 오히려 '불건강성'을 '건강성'으로 덮고 있는 민족/국민국가 체제의 상징적 '일반성'에 대해 일종의 파열하는 '실재'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 바로 그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이러한 이론적/실천적 작업이 적극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면, 저는 그것이야말로 일종의 '세계사적 기여'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저는 한반도와 통일이라는 주제를 세계라는 상징에 대한 하나의 '치명적' 실재로 이해하는 편입니다. 제가 민족/국민국가 안에서 어떤 '건강성'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실재가 지니는 '수행적 건강성'입니다. 제가 '조국'이라는 단어로 생각하고 품게 되는 어떤 저만의 '민족적 감정'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또한 한반도의 바로 이러한 '실재'로서의 역사적/[국제]정치적 지위일 것입니다. 이는 어쩌면 지극히 역설적으로 들릴 수도 있을 텐데요, 바로 이러한 일종의 '부정의 부정'을 통해서만, 저는 한반도의 통일에 관한 정치적/철학적 담론들이 현재의 세계 체제 안에서 어떤 힘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근대민족/국민국가의 완전한 완성을 위한 하나의 전제로서 이해되는 통일이란, '선진국화'에 대한 모든 도착적인 담론들의 기초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러한 통일의 담론들로부터 이탈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분단'이란ㅡ'신비화'되고 '신격화'될 수 있는 모든 수식과 형용의 요소들을 과감히 차단하고 생각하건대ㅡ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하나의 '저주'이자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통일'이란, '상식'으로의 복귀라기보다는, 바로 그러한 '상식'의 가능조건들을 비판하고 파열하는 데에까지 나가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평화공존의 틀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일개 민족/국민국가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상황'으로써 그러한 '평화'라는 상식의 체계 안에 포함된 양가성과 균열성을 더욱 노출시켜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5-04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족편향론과 계급환원론의 끊임없는 충돌.민족문제와 계급문제는 이 범주를 못 벗어나는 것일까요.과연 민족편향을 극복할 수 있는 민족해방론은 없는 것일까요.로자 룩셈부르그는 조국인 폴란드의 독립운동이 반동진영을 고무시키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저 역시 우리나라가 통일된 이후 어떤 나라가 될 것인가에 대해서 의문이 있습니다.결국 또 하나의 패권국가가 등장하여 동북아의 군비경쟁만 더 가속화시키지나 않을까 하는...

람혼 2009-05-04 15:59   좋아요 0 | URL
그것은 어쩌면 '영원한 대위법'의 두 주제들이 아닐까요? 저로서는 현재 '유통'되고 있는 통일에 관한 담론들이 성취된 형태로서 '통일민족/국민국가'가 한반도에 출현하게 된다면, 노이에자이트님이 말씀하신 "또 하나의 패권국가"의 등장은 그에 따르는 자연스럽고도 예정된 수순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가사 안에 담겨 있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가사 안에서 구현되고 형상화되는 '통일'의 이미지, 바로 그 이미지가 실체화된 이후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앞선] 반성과 [도래하지 않은] 회고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5-04 16:04   좋아요 0 | URL
전에 박태균 씨인가 일본 역사 교과서를 모두 훑어봤는데 심지어 새역모에서 나온 우익교과서도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만큼은 자민족 중심주의 색채가 덜하다고 신문에 썼더라구요.다른 출판사의 교과서는 훨씬 민족주의 색채가 약하구요.그에 반해 우리나라는 민족이라 하면 신성불가침인 듯 모시는 분위기가 너무 강하지요.

푸른바다 2009-05-04 16:55   좋아요 0 | URL
요즈음 헉슬리의 '연애 대위법'을 가끔 펼쳐봅니다. 그런데 음악은 좋아해도 음악 이론에는 문외한이라 대위법이란게 무엇인가 싶어 사전에서 찾아 보았는데 이해가 쉽지는 않더군요^^ 화성법은 오히려 이해가 되는데 말입니다^^ 언젠가 람혼님의 음악을 한번 들어보고 싶군요^^

새로운 패권국가의 등장은 물론 생각해 볼 수는 있으나, 역시나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마 우리나라는 통일이 되어도 균형추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 지혜로운 길일 것입니다. 고구려 이후 한반도에 얽힌 사람들이 얻은 지혜가 있다면 '중국과 싸워봐야 손해'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반도라는 곳은 중국이 차지할 수도, 일본이 차지할 수도, 러시아가 차지할 수도 없는 묘한 곳입니다. 그렇다고 한국의 덩치로 보아 중국이나 러시아를 위협할 만큼 강국이 되리라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노이에자이트님 말씀대로 한국의 민족의식이 유별난 점은 있으나 아마 이는 20세기의 고달팟던 기억과 관련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한국 사람들이 비교적 보편적인 관점은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람혼 2009-05-04 23:47   좋아요 0 | URL
노이에자이트님/ 일전에 글로도 쓴 적이 있지만, 왜 이 나라의 자칭 '우익 민족주의자'들은 소위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해서는 핏대를 세우고 욕하면서 자기 자신의 과도한 '우익-민족주의'에 대해서는 그렇게 관대한지 모르겠습니다. 금성출판사의 역사 교과서를 '좌익적'이고 '자학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정작 일본 역사 교과서 문제에 대해 과연 말할 '자격'이나 있는 건지... 이러다 잘못하다가는(?) '자신이 서 있는 사상적/정치적 입장에 관해 최소한의 생각이나 반성도 안 하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사전적 정의가 '우익'이 되지 않을까(아니 이미 되지 않았나) 하는 걱정이 듭니다. 이 땅의 '우익'들이 저의 이런 근심 어린 충정(?)을 알아주실런지요? ^^

람혼 2009-05-04 23:47   좋아요 0 | URL
푸른바다님/ 제 언어로서 말씀드리자면, 화성법은 '병행', 대위법은 '평행'이라고 보시면 큰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언젠가 제 음악을 들으실 수 있기를, 제 음악을 들려드릴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통일 한반도에서 '패권국가'가 등장할 것이라는 걱정은 그 '가상의 국가'가 실제적으로 어떤 '패권'을 취득할 것이라는 예상에서 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행태와 경향에서는 '패권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나 실제로는 행사할 '패권'과 '영향력'이 전혀 없는 패권국가야말로 가장 불행한 국가가 아닐까요? ^^ 말씀하신 대로 그런 지정학적인 고려를 하면 할수록 '패권 없는 패권국가'의 등장은 실로 걱정할 만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균형추' 역할에 대한 요구라는 것도 어쩌면 좌절됨으로써 전도된 일종의 '패권 의지'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드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한국인의 "보편적인 관점"이 전도된 패권 의지로서의 '억지 춘향' 같은 균형점을 잡을지, 아니면 줄타기를 하듯 아찔하면서도 그 자신이 타는 줄처럼 예리한 선을 잡는 '기우뚱한 균형'을 잡을지, 문제는 바로 이 양자 사이의 선택과 결단에 있지 않을까 하고, 섣불리 예단하고 담대하게 희망해보는 바입니다.^^

푸른바다 2009-05-05 11:29   좋아요 0 | URL
람혼님 사진을 보니 왠지 음악과 철학에 모두 능했던 '아도르노'가 연상되는 군요^^ 물론 람혼님은 아도르노 같이 냉소적이지는 않아 보이지만 말입니다^^ 앞으로 람혼님의 음악 꼭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람혼 2009-05-05 15:27   좋아요 0 | URL
사진을 보시고 아도르노가 연상된다 하시면... 제 용모에 문제가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말씀하신 대로, 아도르노는 소싯적 제 나름으로 우러러보는 일종의 '역할 모델'이긴 했는데요, 용모뿐만 아니라 닮고 싶지 않은 부분이 몇 군데 더 있다는 게 문제이긴 합니다.ㅎㅎㅎ

푸른바다 2009-05-05 16:02   좋아요 0 | URL
이 연상은 '환유'적인 것이니 크게 우려하시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람혼 2009-05-05 20:07   좋아요 0 | URL
위로의 말씀에 조금 마음이 놓이는군요(?).^^ '제유'가 아닐까 걱정했습니다.

푸른바다 2009-05-04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캉/지젝의 용어를 빌어서 표현한다면 '한반도'라는 곳은 현재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상징계적 질서로 표현될 수 없는 '고유한 실재성' 즉 '틈'이기에 향후 새로운 세계질서를 리드할 수 있는 어떤 새로운 '담론'이 창출될 수 있는 공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람혼님도 이러한 것을 말씀하시는 거라고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이것은 어렵기는 하지만 이 땅에 '(순결하게?^^ 순결한가?) 얽혀있는' 사람(겨레?^^)들에 의해서 수행되어야 하는 과제일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말씀드린 '상식'이란 건, 그저 자유롭게 한반도를 다닐 수 있는 것 뭐 그런정도입니다^^ 적어도 말이 통하는 곳에서 가고 싶은 곳도 마음대로 가지 못하는 이러한 몰상식에서는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죠^^ 아무튼 여러가지로 생산적인 토론이었다고 생각하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함께 고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가져 봅니다^^

람혼 2009-05-04 23:53   좋아요 0 | URL
잘 읽어주시고 이해해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몰상식으로부터의 이탈과 탈구가 일단은 건강한 '상식'의 복구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저 역시나 크게 공감하는 바입니다(하지만 거기에만 머물기에는 이 세계 안/밖에 너무나 많은 '유혹'이 있다는 것이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결정적 문제라서 '문제'겠지만요^^). 푸른바다님과 말씀 나누면서 저 역시나 오랜만에 이런저런 생각들 정리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생산적이고 정겨운 토론에 깊이 감사드리는 마음입니다. 함께 생각한다는 것은, 언제나 반가운 일인 것 같습니다.^^

2009-05-06 0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06 07:0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