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뜸과 눈멂의 계보학:

하나의 시점, 두 개의 시선, 세 개의 시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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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의 시점: 모든 것을 보는 눈    

 

▷ 모든 것을 보는 첫 번째 눈: 타워크레인 위에서 이불 빨래를 널고 있는 김진숙.
(ⓒ<경향신문>, 정지윤 기자)

1) 그리하여 나는 다시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할 것이다, 이 사진에 덧붙일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물음을 던지면서: 저 높은 곳(위)에서 바라보는 이 세상(아래)은 어떤 모습일까? 그러나 나는 이 물음을 통해 전지적 능력을 지닌 신(神)의 시점을 경외롭게 전제하거나 낭만적으로 상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부산 영도조선소 크레인에 올라가 '고공 투쟁'을 한 지 174일째가 되었던 지난 2011년 6월 28일,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은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6월 10일 희망 버스가 올 때 용역을 투입해서 조합원들을 끌어내리는 장면을 본 이후로 지금까지 잠을 한 시간도 못 잤다. 신경이 예민해져 있다. 위에서 그 광경을 다 봤으니 오죽하겠나."(<프레시안> 기사 「"회사에 버림받고 노조에 버림받아 죽고 싶은 생각뿐"」 참조: http://j.mp/jUkFsT) 이 말들의 마지막 문장이 나를 붙잡는다(그리고 이것이 바로 내가 그의 저 마지막 문장을 진하게 강조한 이유이다). 그러나 나는 알지 못한다, 저 위에서 이 아래의 그 모든 광경을 다 바라볼 수 있는 경험이 어떤 것인지를. 그러나 나는 또한 알고 싶어진다, 그 위에서 저 아래의 모든 움직임들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를. 이 단 하나의 절대적 시점이란 또한 얼마만큼의 절대적 고독을 전제해야 하는 것인지를, 나는 알지 못하며, 또한 그렇기에, 알고 싶어한다.

2) 그러므로 이러한 어떤 '무지'에서 촉발되고 또 그에 바탕하는 이 '선망 아닌 선망'이란, 신의 시점을 갖고 싶다는 전능함에 대한 열망과는 전혀 다른 것, 그러한 전지적 시점에 대한 갈망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다(여전히 '현재적'인 소설일, 그러나 그것이 여전히 현재적이라는 사실 그 자체가 가장 '불행한' 소설이기도 할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속의 한 제목을 빌리자면,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오히려 이러한 선망 아닌 선망은 이 아래의 '모든 것'을 바라보는 저 위의 전지적 시점이 지닌 어떤 절대적 고독감, 그 단 하나의 절대적 시점이 지닌 절대적인 무력감을 '선망'하고 있는 것. 그러므로 여기서 내가 왜 이러한 감정을 '선망 아닌 선망'이라는 역설적 언어로 표현했는지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혼자다, 그리고 우리는 여럿이다(이러한 수적(數的) 대비는 [단순히 '연대의 열정과 포부'를 표현하는 일 외에]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는 그에게 가닿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아래의 우리들을 바라본다(이러한 위계적 대비는 [단순히 '전능한 무력감'을 노출하는 일 외에] 또한 무엇을 뜻하는 걸까). 이 아래의 우리가 그에게 개미들 같은 존재일까, 아니면 저 위의 그가 우리에게 한 마리 개미 같은 존재일까(그리고 이 생물적 은유의 물음은 [단순히 '존재의 절대적 왜소함'을 비유하는 일 외에] 또한 과연 무엇을 뜻해야 하는 것일까)? 하여, 다시 사진을 바라본다. 그는, 어쩌면 너무나 '진부하게도', 그저 이불 빨래를 널고 있다. 그는, 말하자면, 저 위에서, 여전히,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 살아가야만 하는 것. 삶은 저 위에서도, 아래의 모든 광경을 다 바라볼 수 있는 저 높은 전지적 장소에서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어떤 것, 삶은 저 위에서라고 해서 결코 유예되거나 지연되거나 면제되지 않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위에서 그 광경을 다 봤으니 오죽하겠나"라는 문장이 전해주는 하나의 불편한 진실의 가장 중요한 정체는 바로 이 어쩔 수 없는 삶의 지속성이며, 또한 그가 저 위에서 고독하게 맞서 싸우는 동시에 또한 바로 그것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 역시 바로 이러한 끈질긴 삶의 지속성인 것. 이러한 삶의 성격을 우리가 새삼 알게 되고 되새기게 되는 것은, 바로 저 전도된 전지적 능력 때문, 곧 그 능력이 전지적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히려 단순히 '신적(神的)'일 수만은 없는, 바로 저 무능의 전능성 때문이다.  

 

▷ 모든 것을 보는 두 번째 눈: 제러미 벤담이 고안한 파놉티콘의 설계도.

3) 이와는 다른 또 하나의 '익숙한' 전능의 시점이, 전혀 다른 의미에서의 '단 하나의' 시점이, 저 크레인의 반대편에 존재한다. 이 시점은 일견 위계적 상하를 나누지 않는 수평적인 시점인 듯 보이지만, 오히려 상징적인 위와 아래를 내면화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말하자면, 그 힘은 '알아서 기게' 만드는 힘이다). 게다가 이 단 하나의 시점은 어쩌면 우리가 속한 시대 자체를 규정할 만큼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이 또 다른 절대적 시점은, 크레인 위의 김진숙이 그 아래의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눈과는 전혀 다른, 하나의 중심부에서 모든 주변부들을 일별하고 감시하는 또 하나의 전지전능한 시점인 것. 그 시점은 바로 파놉티콘(Panopticon)의 시점이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에서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이 구상했던 이 파놉티콘, 곧 '일망(一望) 감시 시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수감자는 권력의 자동적인 기능을 보장해주는 가시성의 의식적이고 영속적 상태로 이끌려 들어간다. 비록 감시 작용이 연속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 효과는 영속적이 되도록 하며, 또한 권력의 완성이 그러한 감시가 실제로 행사되는 일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든다. 이러한 건축적 장치는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어떤 권력 관계를 창출하고 유지하는 한 기계가 된다. 요컨대 수감자 스스로가 권력의 전달자가 되는 어떤 권력적 상황 속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 '일망 감시 장치(le Panoptique)'는 '봄-보임(voir-être vu)'의 짝을 분리시키는 하나의 기계이다. 즉, 주위를 둘러싼 원형의 건물 안에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완전히 보이기만 하고, 중앙부의 탑 속에서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결코 보이지는 않는다."(Michel Foucault, Surveiller et punir: naissance de la prison, Paris: Gallimard, 1975, pp. 202-203 / 오생근 옮김, 『감시와 처벌』, 나남, 2003[개정판], 311-312쪽, 번역은 일부 수정) 파놉티콘은 그 말 그대로 '모두를 볼(pan-opticon)' 수 있으나 그 자신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그러나 반대로 그것이 감시하는 대상은 오직 자신이 누군가에게 보이고 있다는 시선만을 느낄 뿐 그 자신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이고 효과적인 감시의 장치(dispositif)인 것.

4) 이러한 파놉티콘의 시점과 기능은 통상 권력 작용의 내면화로 해석되고 또한 그러한 점에서만 강조되거나 반대되어 왔다. 그러나 여기서 그러한 '내면화'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물론 흔히 논의되듯 '권력의 시선'을 내면화하는 것을 뜻하며, 그러한 의미에서 그 시선의 대상이 되는 개인은 또한 바로 그 스스로가 저 권력적 시선의 전달자이자 담지자이자 실행자가 된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방법으로 근대적 권력의 작용은 가장 '완전'하게 '완성'된다는 것. 그러나 이 개인은 어떻게 '그러한 개인'이 되는가? 다분히 자기-관음증적 시점을 통해, 곧 가장 뒤틀린 나르시시즘의 시점을 통해, 다시 말해 일종의 폐안(閉眼)에 기초한 또 다른 개안(開眼)을 통해, 눈멂에 의한 눈뜸을 통해 그렇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시선의 내면화는 소위 권력자가 그 권력이 적용되는 자들에게 가하는 인격화된 '억압'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권력적 시선의 작용이 권력을 실행하는 자와 그 권력이 적용되는 자를 명확하게 가르는 표층적 '정치'와 표피적 '권력'의 층위에서 작동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푸코가 파놉티콘이 지닌 이러한 '시선'의 성격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권력을 실행하는 자가 권력이 적용되는 자에 비해 갖는 어떤 실체적인 우월성이 결코 아니다. 그 시선은 장치와 구조의 효과이다. 이 기계-장치의 바깥은 없으며, 그것을 '위'에서 조종할 수 있는 메타적인 자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푸코는 지나치듯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하기야 이 건축적 장치의 한복판에 감금되어 있는 셈인 관리자 역시 이 장치와 연결된 부분적 존재가 아닐까? 전염이 확산되는 것을 방치하는 무능한 의사나, 서투른 관리를 하는 감옥이나 작업장의 관리자는, 전염병이나 폭동이 발생할 경우 첫 번째 희생자가 될 것이다. 일망 감시 장치의 경영자는 말한다. "나의 운명은 내가 고안할 수 있었던 모든 속박에 의해 그들(수감자들)의 운명과 함께 묶여 있다." 일망 감시 시설(le Panopticon)은 일종의 권력의 실험실로 기능한다."(Michel Foucault, Surveiller et punir: naissance de la prison, p. 206 / 오생근 옮김, 『감시와 처벌』, 316-317쪽, 번역은 일부 수정) 이 부분은 파놉티콘의 정의와 기능에 대한 푸코의 가장 유명한 언급들에 비할 때 우리가 결코 자주 인용하거나 주목하지 않는 부분인데, 그러나 나는 당신과 함께 이 부분을 다시 읽어야 한다. 크레인 위에서 아래의 모든 것들을 바라보며 난감하고 착잡한 마음을 품었던 김진숙의 저 시점과, 주변부의 모든 것들을 감시하며 정작 그 자신은 결코 보이지 않는 파놉티콘 중심부의 시점 사이에 놓여 있는 어떤 괴리에 주목하기 위하여, 다시 말해, 둘 사이의 구조적 상동성과 차이점,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감성적 거리와 대립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5) 왜 이 둘은 구조적으로 상동적인가? 모든 것을 한눈에 바라보는 '일망(一望)'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왜 그 둘은 구조적으로 차이가 나는가? 파놉티콘의 중심부는 모든 것을 보면서 그 자신은 보이지 않는 반면, 우리 모두는 크레인 위의 김진숙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여기서 다시 묻자면, 우리는 과연 그를 바라볼 수 있는가, 그의 모습과 정말로 마주할 수 있는가). 이 둘의 차이란 정치적인 감성의 차이가 아니라 감성의 정치라는 차이의 모습을 띤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어떤 정치를 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어떤 미학을 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맞닥뜨리게 되는 것. 이 두 미학적 시점은 공히 '모든 것을 보는 눈'의 형태를 띤다. 그러나 파놉티콘의 시점은 그 자신은 마치 '중립적'으로 '관조'하는 듯한 시선을 흩뿌리며 그 시선의 대상이 되는 개체를 관음증적 주체로 만드는 반면, 크레인 위의 시점은 그 모든 아래의 것들을 그저 관조할 수만은 없는, 위의 눈과 아래의 눈들이 모두 서로를 바라보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어떤 '거리의 관계성'을 만들어낸다. 만약 신의 시점이 있다면, 그리고 만약 그러한 시점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신의 시점이란 이 둘 중 어떤 것이 되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아마도 답할 수 없을 것이지만, 또한 아마도 분명히 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선택적'으로 한쪽이 될 수 있는 것일까? 혹은, 나는 이 두 개의 선택지가 마치 '선택 가능한' 것처럼 말했지만, 이 선택은 정말로 그 자체로 '선택적'인가? 우리는 어쩌면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선택 가능한 선택지들의 '선택 불가능성'과 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폴리페모스의 눈을 찌르는 오디세우스.

6) 따라서 우리는 선택이 자유로운 두 가지 미학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여 나는 여기서 김진숙이 올라가 있는 저 크레인 자체를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리겠다는 사측의 발상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미학' 위에서 가능했는지,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우리는 저 크레인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바다 쪽으로 옮기려는 어떤 시도가 있었음을 알고 있다. <한겨레> 기사 참조: http://j.mp/oYdoZP) 그러한 발상을 떠올리게 한 사고의 바탕에 깔려 있는 미학적 의식과 무의식은 무엇인가? 감시할 수 없는 것, 오히려 모든 아래의 것들을 내려다보며 그 자신 역시 아래에 의해 보여지는 단 하나의 눈, 단 하나의 시점을 어떻게 다루려 하는가? 시야에서 치워버리는 것, 바다 쪽으로 보내서 그 역시 아래를 내려다 보지 못하게 하고 아래의 사람들 역시 그 위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 곧 저 위와 이 아래의 모든 '거리의 관계성' 자체를 제거하면 된다는 것. 모든 것을 바라보는 단 하나의 눈은 말 그대로 단 하나만 있으면 족하다는 것. 비록 그 눈의 자리가 텅 비어 있는 중심, 공동화된 핵심이라고 하더라도, 어쩌면 오히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누군가에게 그 자신 외에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다른 눈 따위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것. 말하자면, 아래를 볼 수 없는 위와 위를 볼 수 없는 아래는 서로에 의해 잊힌다는 것, 그러한 망각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감시하고 규율하겠다는 것. 자, 그렇다면 여기서 오히려 저 파놉티콘의 눈에는 가장 강력하면서도 취약한 하나의 결정적 약점이 생기지 않는가? 마치 오디세우스에 의해 박탈당하는 외눈박이 폴리페모스의 눈처럼. 오디세우스 스스로가 폴리페모스에게 들려줬듯, 그는 '아무도' 아니다. 크레인 위의 김진숙도, 그 아래에 있는 우리도, 파놉티콘의 시점에서는 정말 '아무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가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에서 썼던 말을 다시금 떠올린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이어야 한다(Ich bin nichts, und ich müßte alles sein)."(Karl Marx, "Zur Kritik der Hegelschen Rechtsphilosophie, Einleitung", Marx Engels Werke, Band 1, Berlin: Dietz, 1981, p.389 /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1권, 박종철출판사, 1991, 13쪽) 우리는 아무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모든 것이 되고, 또 모든 이가 되어야 한다.

─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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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1-08-07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점, 시선, 시각. 눈이 매개체지만, 셋은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듯한 소제목들입니다. 그 첫번째인 하나의 시점에 대한 글, 잘 읽었습니다. 그네들은 왜 저 높은 곳에 있는 김진숙을 끌어내리지 못해서 안달일까, 심지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리려고 할까 궁금했었는데 유일해야 의미가 있는 파놉티콘 이야기를 읽고 나서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 파놉티콘이란 개념은 너무 무시무시한데 얼마전 슬프게 읽었던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도 이런 개념이 들어 있는듯해서 서늘해집니다.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김진숙의 시점과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다수의 눈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의 관계성이란 말에 작은 희망의 씨앗이 있는 것인가..생각해봅니다.

람혼 2011-09-11 16:33   좋아요 0 | URL
달사르님, 제 글의 결을 너무 섬세하고 꼼꼼하게 읽어주셔서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바로 그 '거리의 관계성'이야말로 제가 희망 아닌 희망을 걸게 되는 정확한 지점입니다. 그 작은 희망을, 커다란 내기를, 함께 걸어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