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나의 독서와 관련한 화두는 이야기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요즘 어떤 책을 읽어도 이야기의 관점에서 보게 된다. 한 해 동안 읽었던 책들을 정리해 본다.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인간의 스토리텔링 본능을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책. 한마디로 말해서 스토리텔링 본능은 인류의 생존에 도움을 준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를 지어내고, 전하고, 듣고, 믿는 방향으로 진화했다는 것.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사회성. 인간의 초사회성은 이야기를 만들어냈고, 그렇게 태어난 이야기는 인간의 초사회성을 강화했다. 잊고 있었던 사실 하나, 우리가 가장 관심 있는 이야기는 바로 남 얘기라는 것.

인류가 여기까지 온 동력은 바로 이야기.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은 모두 이야기로 되어있다. 이야기라는 말 속에는 구성된 허구라는 뜻이 들어있다. 따라서 우리가 그것을 믿지 않으면 그것은 힘을 발휘할 수가 없다. 신화와 종교, 민족과 국가, 법과 제도, 이념과 같은 이야기들은 우리가 그것을 믿을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의문이 있다. 이 이야기가 아니면 안 되는가? 앞으로는 어떤 이야기가 등장할 것인가? 그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가?

유발 하라리의 생각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면 이렇게 된다. '우리는 이야기를 지어내면서 누군가가 만들어내는 이야기 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자의 이 말은 우주는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이자, 수많은 작은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일 게다. 신화와 동화에서 만화와 영화까지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분석하는 책이다. 흥미로운 것은 진화론까지 하나의 이야기 구조로서 분석하고 있다는 것. 이야기와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과학도 사실은 하나의 이야기 체계였던 것. 다윈 본인이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서로 만나지 않았음이 분명하지만, 두 사람이 만났다면 어떤 일이 펼쳐졌을까? 이 책은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그럴듯한 이야기다. 사실 어떤 이야기가 사실인지 허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를 사로잡는 이야기는 언제나 그럴듯한 이야기다. 다윈의 '진화'와 마르크스의 '혁명' 중 어떤 이야기가 더 그럴듯한 이야기인가? 진화는 상식이 되고, 혁명은 따분한 이야기가 된 것은 무슨 연유이고, 그것이 두 이야기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있는가? 앞으로도 영원히 두 이야기의 위상이 지금과 같을 것인가?

안티고네와 크레온이 각각 상징하는 것을 법이나 윤리, 혹은 이념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뭐라 부르든 유발 하라리에 따르면 그것의 본질은 이야기이다. 안티고네와 크레온은 각자가 믿는 이야기를 무기 삼아 싸운다. 그러나 이야기의 입장에서 보면 그 반대다. 이야기도 서로 경쟁한다. 도킨스가 말하는 유전자와 인간의 관계처럼 안티고네와 크레온은 어쩌면 이야기의 도구일 뿐이다. 그것도 모르고 둘은 서로 싸운다. 비극을 지켜보는 어제의 그리스인도, 희곡으로 읽는 오늘의 우리도 싸운다. 말, 즉 이야기로 싸운다. 저 뒤에서 이야기가 웃고 있다.

우리는 조선시대 인물이 그려진 작은 종이를 물건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동물이다. 이 신념의 체계가 바로 이야기다. 우리가 이야기의 생존경쟁에 이용당하는 도구라는 것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야기가 바로 화폐라는 이야기, 혹은 자본주의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자본의 증식은 이미 우리의 의지와 욕망을 넘어섰다. 자본은 스스로 증식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 도구에 불과하다. 이렇게 적으면 이것은 또 얼마나 식상한 이야기인가?

이야기의 중층 구조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책. 첫째, 이 책은 역사책이다. 역사는 가장 규모가 큰 이야기 중 하나이다. 둘째, 이 책은 종교를 다루는 책이다. 종교는 거의 모든 인류를 매혹시켜온 이야기다. 셋째, 주인공 메노키오와 그를 심판하는 심문관들이 주고받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끝으로 메노키오가 읽은 책들도 이야기로 된 책이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야기가 삶과 죽음에 걸쳐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책이라는 것. 생사가 걸린 종교재판에서 메노키오는 끊임없이 자신의 신념을 말하려 하고, 심문관들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천일야화>의 이탈리아 버전인 셈.

어떤 이야기를 기록한다는 것은, 그것을 제외한 다른 이야기는 기록하지 않는다는 것. 역사 서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선택의 문제이리라. 사마천은 결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지 않았다. 그의 역사에는 그의 '마음'이 배어있고, 그래서 저자는 <사기>에서 그의 마음을 읽는다. 사마천의 글에는 사마천 아닌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결국 우리가 읽는 것은 사마천 한 사람의 마음이다. 그의 마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가 누구의 이야기를 선택했는가 하는 문제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한 글쓰기가 있다면 카프카와 같은 글쓰기가 아닐까? 로쟈 선생님의 강의에서 들은 말이다. <선고>에서는 예술적 자아를 상징하는 러시아 친구가 살아남아 아버지에게 인정받는다. <화부>에서는 부모에게 항변하지 못하는 주인공이 배 안에서 정의감에 불타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항의한다. 현실에서 하지 못한 것을 카프카는 이야기 속에서 우회적으로 해냈다는 취지다. 카프카 스스로 자신의 글을 다른 사람들이 읽을 필요가 없는 자신만을 위한 글이라고 생각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글에 담긴 내용은 역설적으로 이야기와 인간의 사회성이 결합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체호프는 푸시킨을 인용해서 이렇게 썼다. '진리의 어둠보다는 우리를 고양시키는 기만이 더 소중하다.'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이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고, 허구가 이야기의 본질이라면, 우리의 삶이 거짓과 기만 위에 서 있음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상자 속의' 삶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은 아닐까? 굳이 상자 밖으로 나갈 필요가 있을까? 아니, 상자 밖으로 나가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촘스키의 말이 떠오른다. '과학이란 마치 길 건너편에서 열쇠를 잃어버리고 반대편 가로등 아래서 열쇠를 찾고 있는 술 취한 사람과 흡사합니다. 가로등 아래에 빛이 있기 때문이죠. 다른 선택은 없습니다.'

(유발 하라리에 비하면) 비교적 가까운 과거에 우리가 어떻게 이야기를 만들어냈는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고귀한 출생과 훌륭한 가문으로 상징되는 소수 엘리트의 지배가 당연하다는 이야기의 기원을 신라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 밝히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친족 이데올로기라는 이야기는 중국에서 건너온 과거제와 신유학이라는 새로운 이야기를 물리치고 19세기 말까지 살아남았다. 오늘날 이 이야기는 완전히 패퇴한 것일까? 우리는 뉴스에서 종종 '왕자의 난'과 '금수저'를 보고 있다. 아무래도 이야기는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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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라 2019-05-20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나서 대화를 나눠보고 싶을만큼 매력적인 리뷰입니다.

책의속밖 2019-05-20 19:2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