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엄마랑 경주엘 갔다 왔어.
지난 주엔 하동 쌍계사 벚꽃길을 보고 왔는데,
경주 보문단지엔 벚꽃이 다 졌더라.
참 금세 지지.
사람도 금세 늙는단다.
믿을 수 없겠지만. 

엄마랑 돌아오는 길에 카이스트 학생들 이야기가 나왔어.
영어로 수업한다는 이야기 끝에,
과연 영어로 수업을 해야 실력이 느는 건지...
외국인 교수라면 당연히 영어로 수업을 하겠지만, 특히 카이스트야 특별한 아이들이 모여있으니 말이지.
한국인 교수라도 영어로 수업을 한다는 건, 글쎄 수업의 질을 떨어뜨릴 수도 있는 일이겠지. 

오늘은 엄마의 사랑을 가득 담은 시를 한 편 읽어 볼게.
나희덕의 '허공 한 줌'이야. 우선 한번 읽어 보렴. 

이런 얘기를 들었어.

엄마가 깜박 잠이 든 사이 아기는 어떻게 올라갔는지 난간 위에서 놀고 있었대.
난간 밖은 허공이었지. 잠에서 깨어난 엄마는 난간의 아기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이름을 부르려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아가,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엄마는 숨을 죽이며 아기에게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어.
그러고는 온몸의 힘을 모아 아기를 끌어안았어.
그런데 아기를 향해 내뻗은 두 손에 잡힌 것은 허공 한줌뿐이었지.
순간 엄마는 숨이 그만 멎어버렸어. 다행히도 아기는 난간 이쪽으로 굴러 떨어졌지.
아기가 울자 죽은 엄마는 꿈에서 깬 듯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달렸어.
아기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는 울음을 그치고 잠이 들었어.
죽은 엄마는 아기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 아랫목에 뉘었어.
아기를 토닥거리면서 곁에 누운 엄마는 그후로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지.
죽은 엄마는 그제서야 마음놓고 죽을 수 있었던 거야.

이건 그냥 만들어낸 얘기가 아닐지 몰라.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나는 비어 있는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어.
텅 비어 있을 때에도 그것은 꽉 차 있곤 했지.
수없이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그날밤 참으로 많은 걸 놓아주었어.
허공 한줌까지도 허공에 돌려주려는 듯 말야. <나희덕, 허공 한 줌> 

보통 액자 소설이란 말을 많이 쓴다. 소설의 서술자가 다른 이야기를 하나 꺼내는 경우를 말하지.
이 시에선 액자 시처럼 시가 전개돼. 

처음엔 '이런 얘기를 들었어~'로 시작하지.
그리고 마지막엔 '이건 그냥 만들어낸 얘기가 아닐지 몰라.'하고 말이야. 

그러면서, 화자는 이 시 속의 이야기를 곰곰 생각하면서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비어있는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어.
화자는 손아귀에 아무 것도 없을 때조차도 욕심으로 가득차 있었던 모양이지.
텅비어 있을 때에도 그것은 꽉 차있곤 했다는 걸 보면 그렇게 보여. 

화자는 버스 안에서,
수없이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자신이 참으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려 욕심을 부렸구나.
어리석게도 집착에 눈이 멀었구나... 반성을 하면서
참으로 많은 걸 놓아주려 노력했나봐. 

'허공 한 줌' 까지도 자기 소유로 가지려 했던 자신을 반성하면서,
그 허공 쯤이야 허공 속으로 돌려주려고 했던 거겠지. 

허공 한 줌.
소유할 수도 없고, 소유할 필요도 그다지 없는 것을 뜻하는 말이겠구나.
그렇지만, 화자는 그걸 소유하려고 했던 일을 돌아보고 헛됨을 느끼는 거야. 
그런 깨달음을 얻게 된 시 속의 이야기를 한번 살펴 보자.  

이야기 속엔 우선 <엄마>가 등장해.
엄마가 깜박 잠든 사이 아기가 난간 위에 올라갔지.
난간 밖은 허공이었고,
잠깬 엄마는 깜놀했고, 이름도 못 부르고... 안타까이 아가를 바라보았단다. 

엄마가 아기에게 다가가 끌어안았어.
그런데 엄마는 아기를 잡지 못했단다.
엄마는 그 뒤에 나오지만, 이미 죽은 엄마였기 때문이야. 
엄마가 아기를 받으려 내민 손에 잡힌 것은 <허공 한 줌> 뿐이었지. 

그래서 엄마는 그만 <숨이 멎어> 버렸단다.
이미 죽은 엄마지만 숨이 멎을 정도로 긴장했단다.
다행히 아기는 난간 밖으로 떨어지지 않고, 이쪽으로 떨어졌대.  

 

아기가 놀라서 울자 죽은 엄마는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달렸대.
아까는 죽은 엄마 손에 아기가 받아지지 않았지만,
얼마나 간절했는지,
죽은 엄마는 아기를 안고 달린단다.
오로지 아기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 만 가득했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는 울음을 그치고 잠이 들었어.
죽은 엄마는 아기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 아랫목에 뉘었어.
아기를 토닥거리면서 곁에 누운 엄마는 그후로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지.
죽은 엄마는 그제서야 마음놓고 죽을 수 있었던 거야.  

결국 이 이야기는,
이미 죽은 엄마지만 아기의 안위를 걱정하려 차마 죽지 못하고 눈감지 못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지.
아기가 안전하게 자라는 것을 믿게 되어서야 죽은 엄마는 마음놓고 눈을 감았다는 이야기겠지. 

엄마는 죽어서도 아기만을 위해서 자신을 잊고 애쓰는데,
화자는 얼마나 부질없는 것들을 위해서 애쓰고 살았던지를 되돌아 보았단다.
그러자 자그마한 손아귀 안에 참으로 많은 것을, 많은 지위와 많은 재물과 많은 상들을 얻으려 애썼겠지.
허공 한 줌처럼 손에 잡을 수 없는 것들을 말이야. 

그래서 그것을 깨닫고 허공 한 줌까지도 놓아준다는 화자의 목소리가 쟁쟁 울린다.  

 

국어교과서의 '어느 날 심장이 말했다'가 생각나는구나.
여친을 위해서 해도달도 다 따다주던 머저리가 여친의 꾐에 빠져 '니 애비의 심장'도 빼오란 말을 듣고 실행하지.
여친을 위해 달려가던 머저리는 그만 엎어져서 심장을 땅에 떨구었는데,
그 땅의 심장이 말했다잖아. "얘야, 어디 다친 데는 없니?"하고. 

민우를 바라보며 기르던 엄마의 심장이 그런 심장이었을 거야.
하마나 엎어질까, 깨질까 조심조심 기르던 엄마 말이야.
민우가 그렇게 좋아하던 엄마도 언젠가는... 민우 곁을 떠나가겠지. 

그때 후회하지 말고,
지금 즐겁게 잘 지내자. ^^
엄마 아빠는 네 옆에 있지 않더라도, 저 시 속의 죽은 엄마처럼 민우의 행복을 위해 힘쓰고 있을 거야.
멀리 떨어져 살든,
오랜 뒤에 세상을 떠나서든,
우리 아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 온 마음으로 저렇게 너를 안아주고 있다는 걸 잊지 말기 바래.
그러면, 삶이 조금 팍팍해도,
폭신한 구석이 있음을 느끼게 될 거야. 

폭신한 주말 밤이다. 
일 주일간 고생 많았어.
푹 쉬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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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저녁으로 날이 차서 감기가 떨어지질 않는데도,
한낮엔 여름이다. 

요즘 뉴스거리는 인터넷 도박 자금 백억 원을 마늘밭에 숨겼다가 빼앗긴 형제에 대한 것이다.

처남이 인터넷 도박으로 번 돈 백억원 이상을 마늘밭에 숨겨 주었고,
또 그걸 빼서 쓰려다 적발되고 하는 인간의 추악한 욕심과 재물에 대한 집착을 잘 보여주는 뉴스였다. 

이런 <이야기>는 많은 생각들을 낳는다.
황금 만능주의 세상이 되어버렸으니,
돈을 많이 준다면 어떤 일이라도 벌이겠다는 사람들도 나서는 판국이다.
이야기하자면 그렇다고 하지만, 그래도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은 인간의 체면을 구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은 <시>와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들어 보자.
우선 최두석의 <노래와 이야기>다.

노래는 심장에, 이야기는 뇌수에 박힌다
처용이 밤늦게 돌아와, 노래로써
아내를 범한 귀신을 꿇어 엎드리게 했다지만
막상 목청을 떼어내고 남은 가사는
베개에 떨어뜨린 머리카락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하지만 처용의 이야기는 살아 남아
새로운 노래와 풍속을 짓고 유전해 가리라
정간보가 오선지로 바뀌고
이제 아무도 시집에 악보를 그리지 않는다
노래하고 싶은 시인은 말 속에
은밀히 심장의 박동을 골라 넣는다
그러나 내 격정의 상처는 노래에 쉬이 덧나
다스리는 처방은 이야기일 뿐
이야기로 하필 시를 쓰며
뇌수와 심장이 가장 긴밀히 결합되길 바란다. <최두석, 노래와 이야기>

첫 행이 인상적이다.
노래는 심장에 가 닿고, 이야기는 머리로 이해된다는 것.
얼마 전 '나는 가수다'란 프로그램이 있었든데,
명가수들이 경쟁적으로 벌이는 노래 경연은 정말 볼만했다.
피디가 좀 편집만 잘했더라도 정말 괜찮은 프로그램이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일곱 명이 정말 쟁쟁한 가수들이니,
하나를 떨어뜨리더라도 일주일에 하나씩 떨구는 건 좀 심하니깐,
3주의 점수를 합친다든지... 뭐, 그랬더라면 더 좋았을 뻔 했다.  

훌륭한 가수들의 노래를 듣노라면,
가슴 속이 쓰라려 오기도 하고 간질간질 하기도 하다.
요즘 아이유란 가수가 인긴데, 그 아이의 '레몬 트리' 같은 노래는 참 새침떼기같은 느낌과
뽀송뽀송한 청춘의 멋이 잘 담겨 있더구나. 

왜 인간은 시를 짓고 노래를 했던 것일까?
시의 언어가 <독백>으로 개인의 역사를 펼쳐낸 것이니만큼,
개인의 역사 와중에 특별한 이야깃거리가 있었던 것일게다. 

처용가라는 노래가 향가중에 있단다.
처용은 밤늦도록 노닐다가 돌아와보니,
아내와 역신이 동침하고 있었다는구나.
설화 속 이야기인 만큼, 이것은 어떤 상징을 담고 있겠지.
역신이란 질병의 신이기도 하니깐,
질병을 퇴치하는 한 방편으로 무당의 굿과 같은 노래를 불러 퇴치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런 큰 작용을 하던 노래라도,
음률과 성악을 떼어내고나면 가사만 남는데, 아무 힘이 없다는구나.
처용의 이야기는 오래 남는데 말이지. 

정간보가 오선지로 바뀌는 것은 시간이 흘러 현대로 오면서 시절이 바뀐다는 거야.
정간보는 조선 세종때의 악보로, 우물정(井)자 모양으로 칸을 나눠 율명(律名)을 기입하였다고 그래.  

예전의 정간보에 노래가 기록되던 때에는,
시 속에 살아 움직이는 <심장의 펄떡거림>이 담겼었는데,
요즘의 오선지에는
단순한 노래일 뿐, <심장>에 감동을 주는 노래는 없다는 거겠지. 

그래서 노래하고 싶은 시인은 말 속에 <박동>을 골라 넣어야 한대.
그러려면, <격정으로 상처난 노래>에 <이야기>란 처방으로 다스리는 수 밖에 없다고 그러는구나. 

왜 그는 <이야기로 하필 시를 쓰는지>
마지막에 밝혀 놓았어.
그것이 <뇌수>의 합리적 사고를 끌어내는 이야기가
<심장>의 펄떡거리는 감성과 어우러진 <이야기시>를 쓰는 이유라고 밝히고 있지.
사실 최두석의 이야기 속에는 뭔가 이야기가 하나씩 담겨있곤 하단다.

그의 '고재국'이란 시를 읽어 보렴.

유난히 뚝심 세었던 동갑내기 고종사촌 고재국은 중학교 중퇴의 학력으로 상경해 쟉크 염색 기술을 배웠다. 지독한 염료 냄새에 콧구멍은 진즉 마비되고 늘 골머리까지 띵하더니 상경한 지 삼 년 만에 한 모금 피를 토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내려와서 굼벵이로 술을 담거 먹었다. 초겨울 마람 엮어 지붕 갈 때 썩은새 속에 굼실거리는 살진 굼벵이로. 매미의 유충이 굼벵이라던가. 농사일 뒷전에서 거들며 지내기 일 년 만에 매미 소리처럼 가슴이 시원해진 그는 다시 상경하였고 굼벵이술을 계속 먹으며 십여 년 고생해서 모은 돈으로 쟉크 염색 공장을 차렸다. 비록 동업이지만 바야흐로 찌든 얼굴 펴지고 내 선생 월급을 묻고는 미소짓는 게 참 다행이다 싶었는데 아 그는 요즘 미칠 지경이란다. 아니 미쳐서 돌아다닌단다. 예비군 훈련간 사이 공장 들어먹고 잠적한 동업자를 찾으러. (최두석, 고재국) 

이 시 속에는 고모의 아들 고재국 이야기가 들어있다.
그는 지적이지도 않고,
인간성이 뛰어나지도 않아.
아니, 오히려 좀 멍청한 인간 같단다.
그렇지만, 그는 <바야흐로 찌든 얼굴 펴지>는 정도로 돈도 벌었고,
그리고 나더니 <내 선생 월급>을 묻고 미소짓는 좀 속물이지.
그러던 그가 미쳐서 돌아다닌대.
자기 재산을 동업자가 들어먹고 날랐다지 뭐야. 

산다는 건 이런 거라는 이야기지.
시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삶이 다 그런 것임을 넌지시 보여주는 것이야. 

뭐, 세상에 잘난 사람도 없고,
인생만사 새옹지마라고 잘나갈 때 조심하라는 그런 거.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는 그런 거.  

그렇지만 또 세상은 한 세상 살만 하다는 거. 

다음엔 강은교 시인의 '시'를 한편 읽고 오늘은 마치자.

십이월 햇빛 내리는 소리보다도 작게 

낮달 뜨는 소리보다도 작게
노을 지는 소리보다도 작게 

그렇게 그렇게 

바람 소리보다는 크게
바다 우는 소리보다는 크게

벼락 소리보다는 크게
눈물 출렁이는 소리보다는 크게 

공기의 소리이게
떠돌 곳도 없이 가득 떠도는
별의 소리이게
눈뜨지 않고도 하늘 한가운데 눈뜨는.

소리없는 소리이게
그렇게 그렇게 

나를 엎드리게 해다오
구름 밑 흙 속속
시여
캄캄한 밝음이여. (강은교, 시) 

강은교 시인에게 '시'란
작고 작은 소리도 크게 듣는 장치란다. 

나직한 목소리로 읊조리는 시지만,
때로는 강렬하기 그지없는 힘을 가진 것이기도 하지. 

그렇게 시는 화자를 꼼짝 못하게 엎드리게 한단다.
마치 하나님을 믿는 신도처럼 그 권위와 권능의 힘에 경건하게 무릎꿇지. 

시는 <캄캄한 밝음>이라고 역설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예찬하는 어조를 내지른다. 

캄캄한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것이 바로 <시>이고,
구름 밑의 어두운 세상, 흙 속의 답답한 세상을,
그 캄캄한 세상을 환히 밝힐 수 있는 권능을 가진 것이 바로 시라는 것이지. 

어제도 고정희의 <상한 영혼>을 이야기하면서 시의 힘을 이야기했지? 

시는 그렇게 독자 스스로 상채기를 치유할 수 있는 베타-엔돌핀을 내뿜을 수 있도록
자생력을 길러주는 역할도 하는 도구이기도 하단다.
어쩌면 이 시의 화자에게는 시가 삶의 목적이기도 하겠지만 말이야. 

적어도, 인간은 돈을 위해서 무슨 일이라도 하는 존재로 살아서는 안되겠단 생각을 많이 하는 봄이다.
일교차가 크다. 건강 조심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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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04-15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두석의 <노래와 이야기>라는 시는 글샘님을 통해 처음 접합니다. '노래는 심장에, 이야기는 뇌수에 박힌다'는 첫구절이 참으로 인상적이군요. 좋은 시 소개 감사드립니다.

글샘 2011-04-17 23:32   좋아요 0 | URL
이야기 시를 쓰는 이유를 시로 적은 시론이라 볼 수 있죠.
멋진 시죠?
 

한 2주는 쉬었구나.
3월 한달 바쁘면 일이 좀 줄어들 줄 알았더니,
웬걸, 아직도 학교 가면 정신이 하나도 없다.  

어제 모의고사를 치고 나서 좀더 열심히 하려는 자세를 가지게 된 것 같아 기분이 좋더라. 
민우도 의욕을 좀더 가졌을 것 같다. 

아빠가 읽은 책 중에서 '꿈꾸는 다락방'이란 책이 있어.
뭐, 자기 계발서에 많이 나오는 이야기지만, 생생하게 꿈꾸라, 현실이 될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주제야.
'시크릿'이란 책의 주제도 그런 것이지.
이끌림의 법칙이란 거.
될 것이라고 강하게 믿으면 이뤄지지만,
안 될 거라고 스스로 비웃으면 절대 이뤄지지 않는 다는 그런 말 말이지. 

세상 일이 그런 것 같아.
늘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웃으면서 살고,
즐겁게 지내려고 노력하노라면, 정말 세상은 즐거운 곳이 될 수도 있는 그런 것.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모이고, 서로 도와줄 수 있는 즐거운 곳 말이지.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시인 고정희의 '상한 영혼을 위하여'를 한번 읽어 보자.
다시 매일 짧게라도 글을 적어 보도록 노력할게.
아무리 바쁘더라도 때를 놓치면 안 되는 일이 있으니 말이야.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작정하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고정희, 상한 영혼을 위하여>

이 시는 세 연이 비슷한 길이로 이뤄져 있지.
그 첫 번째 연에서 가장 두드러진 단어는 <상한 갈대>구나.
제목이 <상한 영혼>이니 '상처받은 존재'란 뜻인가 보다.  

상한 갈대도 하늘 아래서 한 계절 흔들린다는 건,
고통스런 세상이라도 '좀 여유롭게' 살자는 의미겠지.
세상은 그렇게 고통스런 곳만은 아니란 거.
밑둥이 잘리는 고통을 겪어도 뿌리가 깊다면 새순이 난다는 것. 

그래서 흔들리고, 고통스럽더라도, 그것을 너무 괴롭게만 생각지 말자는 것.
갈대처럼 흔들리고 시달리더라도 꿋꿋이 버티고 나면 지난 세월 이야기할 때가 온다는 것. 

2연도 마찬가지 이야기란다.
부평초는 '개구리밥'이라고 하는 뿌리도 제대로 없는 물위에 떠서 사는 풀이란다.
보잘것 없는 존재지.
그저 바람불면 부는대로 쏠려다니는 볼품없는 수생식물. 

그렇지만 물 조금 고이면 꽃도 피운대.
세상이 아무리 가물어 보여도, 어디나 개울도 흐르고 부평초 살 수 있지.
아무리 어두운 세상이래도,
거기 등불 켜는 사람은 있듯이,
고통을 피하려고만 말고, 살 맞대고 살아보재.  

힘든 것 이겨내는 법은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힘든 상황에 살을 맞대고 적극적으로 견대는 거지.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디든 갈 수 있고,
해가 져도 잘 갈 수 있다는구나.

그래서 드뎌 3연에서는
고통과 설움의 땅을 벗어난단다.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이 박을 수 있는 곳.
그래서 꿋꿋하게 상처를 이겨내고 꽃을 피울 수 있는 곳으로 가자고 한다.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지만,
또 그 바람이 눈물도 나게 하지만,
그 눈물이 영원히 흐를 것도 아니란다.
그러니 <상한 영혼>이여, 너무 삶에 좌절하지 말자~ 이런 얘기겠지. 

마지막에서 <상한 영혼>에게 큰 희망을 준다.
아무리 캄캄한 밤이라도 좌절하지 말라!
하늘 아래서
너를 마주잡아줄 손 하나 오고 있단다. 이러고 말이야.
박지성을 인정해줄 히딩크의 손길처럼 따스한 손길이 말이지.

세상에는 이렇게 연대할 수 있는 집단이나 인물이 꼭 있게 마련이란다.
행복한 시절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될 것이고,
불운한 시절에는 자신을 업수이 여기는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다리다보면,
마주잡아줄 손 하나 반드시 온다.
너무 마음상해 좌절하고 꺽이지 말라는 시지. 

요즘 카이스트에서 힘든 대학생활에 좌절한 학생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린 일이 있었어. 
그야말로 자신이 '상한 갈대'처럼 느껴지고,
'부평초'처럼 가치없이 느껴졌을 수도 있지. 

그렇지만,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문학의 상상력일 수도 있단다.
언젠가 너를 마주잡아줄 손 하나 오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힘든 일도 충분히 이겨낼 용기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현실은 쓰라리지만,
극복할 힘마저 잃어서는 안되겠다는 의지가 강한 시란다. 

전에 한번 읽었지만,
신석정의 시에도 비슷한 구절이 나오지.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어니...... (신석정, 들길에 서서 부분)

이렇게 뼈에 저리도록 슬픈 상황에서도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이 거룩한 우리의 삶의 한 순간이라니 말이야.
힘들 때,
상처받은 영혼이라 생각할 때,
이런 시를 읽어 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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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4-14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쁘셨던 거로군요~

상처받은 것과 상한 것과 다른 의미로 다가왔었어요.
왠지 상한 그러면 썪은 우유가 생각나는 것이...

상처받는 것은 상처가 아물면 더 단단해지지만,
상한 것은 어쩔 수 없어 진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상처받은 영혼이다 싶을 때, 상한 영혼이 되는 것만은 막아보자는 심사로 읽어보려구요~^^

글샘 2011-04-14 14:35   좋아요 0 | URL
傷한 갈대... '상하다'에는 썩다와 다치다, 헐다의 뜻이 다 있습니다.
그렇네요. 많이 다치면 썩을 수도 있겠군요.^^

마립간 2011-04-14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질문이 있는데요. TV만화 손오공에서 근두운을 대신하는 스케이트보드를 탑니다. 사오정이 이것을 보고 날틀이라고 비행기라는 의미에서 말합니다. (제가 가끔 사용하는 단어,) 날틀은 동사 어간에 명사를 합친 것으로 우리나라 정통 조어법에 맞지 않는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우리나라 전통 조어업에 관해 책 추천 좀 부탁드립니다.

글샘 2011-04-14 17:11   좋아요 0 | URL
통사적 구조(일반적 문장 구조)에 일반적인 경우가 있고, 그것을 벗어난 경우도 있는데요.
동사 어간에 명사가 붙은 '먹-거리'나 '날-틀'은 그런 예가 되죠.
조어법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구요. ^^
문법책이래도 일부분에 불과할 겁니다. 필요할 때마다 네이버 지식에서 검색하는 게 빠를 듯. ㅋ

마립간 2011-04-15 12:02   좋아요 0 | URL
답변 댓글 감사합니다.

글샘 2011-04-17 23:32   좋아요 0 | URL
우리말에 관심을 많이 가지셔서 제가 괜히 부끄럽습니다. &&
 

역사는 발전하는가? 하는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갑론을박하던 주제였단다.
역사 속에서 경제적으로 발달함에 따라 역사가 풍족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올바른 배분의 역사가 있었던 적은 인류 역사상 그리 흔하지 않은 일이다. 

한국은 1인당 국민 소득이 20,000달러가 되니 마니 하는 나라지만,
1인당 2만 달러면, 한국 돈으로 2천만원 이상 되고,
4인 가족 기준으로 연간 8천만원 이상을 벌어야 한다는 소린데,
글쎄, 부가 편중되어서 그렇게 버는 가족이 그닥 많을 것 같지는 않구나. 

오늘은 1970~80년대의 노동자들의 노래를 한번 보자.
1988년에 올림픽이 열리고, 그 전후의 민주화 운동과 노동자 대투쟁을 통하여 임금인상이 상당히 많이 되었어.
그렇지만, 사장들이 노동자들에게 권리를 넘겨주기 싫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지.
더군다나, 정경유착이라고,
정치인들은 경제인들과 짝짜꿍이 맞아서,
노동자들의 정당한 노동운동을 경찰의 힘을 빌려서 막곤 했단다. 

그러니 아직도 한국의 노동운동은 세계적으로 많이 뒤떨어진 편에 속한다고 봐야겠지.
앞으로도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이 더 많아지고,
한 사람이 몇 가지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근근히 먹고 사는 시대가 점점 오고 있다고 봐야해.
그런 것이 세계화의 원리이자 결과물이지.
FTA의 결과로 비정규직이 많아지고, 부가 편중되는 것이 심화되는 일은 어쩜 당연한 거란다.
국가 전체의 이익이 많아진다고 해도, 부가 편중되는 것이 심화되면, 가난한 사람이 더 많아지는 결과를 낳게되 되겠지. 

오늘 소개할 시들은 이미 지나간 시대의 시들이다.
그렇지만, 역사는 반복된단다.
이런 슬픈 노동의 노래들을 다시 부를 시대가 올는지 모를 일이야.
우선 <노동 해방>의 앞자를 따서 이름을 '노해'라고 지은 '박노해'의 '손 무덤'을 읽어 보자. 

올 어린이날만은
안사람과 아들놈 손목 잡고
어린이 대공원에라도 가야겠다며
은하수를 빨며 웃던 정형의
손목이 날아갔다

작업복 입었다고
사장님 그라나다 승용차도
공장장님 로얄살롱도
부장님 스텔라도 태워 주지 않아
한참 피를 흘린 후에
타이탄 짐칸에 앉아 병원을 갔다

기계 사이에 끼어 아직 팔딱거리는 손을
기름먹은 장갑 속에서 꺼내어
36년 한많은 노동자의 손을 보며 말을 잊는다
비닐봉지에 싼 손을 품에 넣고
봉천동 산동네 정형 집을 찾아
서글한 눈매의 그의 아내와 초롱한 아들놈을 보며
차마 손만은 꺼내 주질 못하였다

훤한 대낮에 산동네 구멍가게 주저앉아 쇠주병을 비우고
정형이 부탁한 산재관계 책을 찾아
종로의 크다는 책방을 둘러봐도
엠병할, 산데미 같은 책들 중에
노동자가 읽을 책은 두 눈 까뒤집어도 없고

화창한 봄날 오후의 종로거리엔
세련된 남녀들이 화사한 봄빛으로 흘러가고
영화에서 본 미국상가처럼
외국상표 찍힌 왼갖 좋은 것들이 휘황하여
작업화를 신은 내가
마치 탈출한 죄수처럼 쫄드만

고층 사우나빌딩 앞엔 자가용이 즐비하고
고급 요정 살롱 앞에도 승용차가 가득하고
거대한 백화점이 넘쳐흐르고
프로야구장엔 함성이 일고
노동자들이 칼처럼 곤두세워 좆빠져라 일할 시간에
느긋하게 즐기는 년놈들이 왜이리 많은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선진조국의 종로거리를
나는 ET가 되어
얼나간 미친 놈처럼 헤매이다
일당 4,800원짜리 노동자로 돌아와
연장노동 도장을 찍는다

내 품속의 정형 손은
싸늘히 식어 푸르뎅뎅하고
우리는 손을 소주에 씻어 들고
양지바른 공장 담벼락 밑에 묻는다
노동자의 피땀 위에서
번영의 조국을 향락하는 누런 착취의 손들을
일 안하고 놀고먹는 하얀 손들을
묻는다
프레스로 싹둑싹둑 짓짤라
원한의 눈물로 묻는다
일하는 손들이
기쁨의 손짓으로 살아날 때까지
묻고 또 묻는다 <박노해, 손 무덤>

이 시 속에는 <이야기>가 들어있어.
그런 시를 '서사적'인 시라고 했지? 

화자는 손목을 잃은 사람을 '정형'이라고 부르고 있어.
그런 걸로 보면, 같은 노동자인 처지라고 봐야겠지.
정형은 올해 어린이날은 어린이대공원에라도 가겠다는 꿈을 꾸는,
싸구려 은하수 담배를 피우던(빨던) 소박한 노동자였단다. 

지금은 공정이 많이 자동화 되었지만,
아직도 외국인 노동자들의 영세한 공장들은 위험천만이란다.
프레스 기계로 냄비같은 것을 만드는 공장에선 손목 날아가는 일도 흔한 일이었대. 

빨리 병원으로 후송해야 하는데,
더러운 작업복 차림으론 사장님의 고급 승용차도 탈 수 없고,
짐차 트럭의 짐칸에 실려 병원으로 간대. 

화자는 기계 사이에 끼어있는 정형의 '손'을 장갑 속에서 꺼내고,
비닐봉지에 싸서 정형의 집으로 가.
봉천동은 가난한 사람들의 산동네였는데,
거기서 정형의 아내와 아들을 보면서 손을 전하지 못했대.

하릴없이 소주나 한 잔 마시고,
산업재해(산재) 관련 서적을 찾아보는데,
큰 서점에도, 산더미같은 책 중에도, 노동관련법은 찬밥이야.
변호사들도 '노동법'은 모른대.
판사들도 '노동법'은 모르면서 되는대로 판결을 내린다더구나. 

책을 찾으러 종로엘 간 화자는 마치 미국이라도 온 듯,
세련된 남녀들의 멋진 모습에,
작업화 신은 스스로를 '탈출한 죄수'처럼 이물감 느끼며 쫄아들었대. 

한 노동자는 오늘 손을 잃었는데,
세상에선 멀쩡하게 사우나, 술집, 백화점, 야구장에서 즐기는 사람으로 가득해.
노동자들이 일할 시간에 즐기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화자는 비속어를 막 내뱉지.
노랫말 속에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어... 아, 아, 대한민국, 아, 아, 우리 조국, 아, 아, 영원토록, 사랑하리라...
이런 노래를 부르던 가수가 있었는데,
어느 재벌 총수의 첩이 되어 무슨 백화점을 하나 얻었다는 소문이 있더구나.
웃기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데, ㅋㅋ
그건 할아버지의 첩이 되어야 하는 일이라니 말이지.

화자는 자신이 <탈출한 죄수>같다가, 이번엔 <이티>같대.
그리고 다시 노동 현장으로 돌아와서 연장노동을 시작한대. 

아직 화자의 품 속에 있는 '손'은 식었는데,
그래서 그 손을 소주에 씻어 들고 양지바른 담벼락 밑에 정성스레 묻어.
그 싹둑 잘린 노동자의 손을 보면서,
일 안하고 놀고 먹는 하얀 손들(백수),
그들에 대한 원한의 눈물을 흘리게 된대. 

일하는 손들이
기쁨의 손짓으로 살아날 때까지
묻고 또 묻는다

이 마지막 구절에서 화자는
노동자가 일한 만큼 대접받는 세상, 그 기쁜 세상이 될 때를 바라며,
손을 묻는다는구나. 

이런 사회 비판적이고 참여적인 시를 썼다고 해서,
박노해는 감옥살이를 하게 돼. 한 일도 별로 없는데 무기징역을 선고받지.
뭐, 나중에 풀려나지만.
무슨 '사회주의 노동자 동맹(사노맹)'이란 단체를 만들었다는구나.
그렇지만, 그 단체가 한 일은 기껏 이런 시 몇 편 노동자에게 읽히고,
파업해야할 때 파업하는 것의 정당함을 이야기한 것 뿐이지. 

5월 1일은 세계 노동절이란다.
메이데이라고 하지.
미국의 노동자들이 노동운동 중에 많이 희생된 날을 기념하는 날인데,
한국에선 '노동절'이란 말을 엄청 싫어해.
자꾸 '근로자의 날이란 말을 쓰지.
'노동자'는 '사용자'와 반대입장에서 싸우는 의미가 강하거든.
'근로자'는 시키는 대로 온순하게 일하는 의미가 강하고.  

이런 단어 하나에서도 화자의 의도는 그대로 드러난단다. 

박노해는 1958년 개띠야.
58년 개띠란 말을 많이 쓴단다.
그 해에 태어난 사람도 많고, 아주  가난하던 시절이라,
너무 흔하고 귀하지 않은 사람들의 무리를 일컫는 용어로 쓰여.
또 박정희의 아들 박지만이란 사람이 공부를 못해서 고등학교 입시도 없어지고,
그래서 공부를 안 했겠지? 58년 개띠들이?
그래서 열공해서 명문고 들어갔던 선배들이 무시하는 뜻으로 썼겠지. 58년 개띠. 이러고 말야. 

그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섬유 · 금속 · 정비 노동자로 일했대. 
유신 말기인 1978년부터 노동 운동에 뛰어들었고,
노동자의 삶을 다룬 시가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노동시들은 바로 노동자 자신에 의한 시쓰기라는 점에서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어.
1984년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을 간행하여 완전 베스트셀러가 되었지. 



그의 시 <노동의 새벽>을 한번 읽어 보렴.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

이러다가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가 끝내 못 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 가도
끝내 못 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쳐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박노해, 노동의 새벽>

화자는 몇 살이지? 
3연에서 나오지. 29세.
그 젊은 나인데, 어투는 마치 49세쯤은 되어 보이는구나.
전쟁같은 밤일을 마치고, 찬 소주나 마시는 노동자의 싸구려 인생. 

그러나 그 인생을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해.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에서 보이잖아.
그러나 그들에게 절망만 있는 건 아니야.
그들에게도 희망이 있단다. 좀 억지 희망이긴 하지만,
그들은 <차가운 소주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 동지들이 있어. 

그러노라면, 노동자에게도 <햇새벽>이 밝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보이지.
노동자들이 1988년 노동자 대투쟁때 내세웠던 이슈가 뭐였는지 알아?
'두발 자율화'였대.
머리도 제대로 기르지 못하던 노동자들의 비인간적 삶이 잘 드러나 있지. 

노동자뿐 아니라, 농민들의 마음을 드러낸 신경림의 <파장>도 한번 읽어 보렴.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 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신경림, 파장>

'못난 놈들'에서 농민들의 동류의식이 잘 보인다.
'참외, 막걸리'같이 서민적인 음식을 나누면서,
'가뭄 걱정, 빚 걱정'을 이야기하지. 

그러면,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는 마음을 감출 수 없어. 
이촌향도라고 촌을 버리고 도시로 향하던 시대였잖아.
시골에선 먹고 살기도 힘들고,
도시 위주의 개발을 하니 죽을 맛이겠지. 

농무의 시인이잖아.
답답하고 울분이 터지던 농민의 춤사위. 

마지막에서 사든 것은 '고무신 한 켤레'임을 볼 때,
장터에 온 것은 꼭 물건 구입은 아닌 모양이지.
삶의 답답함을 풀기 위해서 나온 거지.
<절뚝이는> 장터는 농촌 현실의 <파행(절뚝걸음)>을 보여주는 시어야.
술에 취해 비틀거리듯, 엉망으로 망가진 농촌 말이지.

이 시는 낮시간부터 파장 무렵까지 <시간 경과>에 따라 시상이 흐르고 있어.
이러던 시절에 김지하는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를 썼지.
간절히 민주주의와 자유를 원하던 노래 말이야.
그 시의 원류가 된 폴 엘뤼아르의 시를 한편 읽어 보렴. 

 

초등학교 시절 노트 위에
나의 책상과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가 읽은 모든 페이지 위에
모든 백지 위에
돌과 피와 종이와 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황금빛 조상(彫像) 위에
병사들의 총칼 위에
제왕들의 왕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밀림과 사막 위에
새 둥우리 위에 금작화 나무 위에
내 어린 시절 메아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밤의 경이로움 위에
일상의 흰빵 위에
결합된 계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누더기가 된 하늘의 옷자락 위에
태양이 곰팡 슬은 연못 위에
달빛이 싱싱한 호수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들판 위에 지평선 위에
새들의 날개 위에
그리고 그늘진 방앗간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새벽의 입김 위에
바다 위에 배 위에
미친 듯한 산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구름의 거품 위에
폭풍의 땀방울 위에
굵고 무미한 빗방울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반짝이는 모든 것 위에
여러 빛깔의 종들 위에
구체적인 진실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깨어난 오솔길 위에
뻗어나간 큰 길 위에
넘치는 광장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불 켜진 램프 위에
불 꺼진 램프 위에
모여 있는 내 가족들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둘로 쪼갠 과일 위에
거울과 내 방 위에
빈 조개껍질 내 침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게걸스럽고 귀여운 우리 집 강아지 위에
그 곤두선 양쪽 귀 위에
그 뒤뚱거리는 발걸음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 문의 발판 위에
낯익은 물건 위에
축복받은 불의 흐름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화합한 모든 육체 위에
내 친구들의 이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놀라운 소식이 담긴 창가에
긴장된 입술 위에
침묵을 넘어선 곳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파괴된 내 안식처 위에
무너진 내 등댓불 위에
내 권태의 벽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욕망 없는 부재 위에
벌거벗은 고독 위에
죽음의 계단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되찾은 건강 위에
사라진 위험 위에
회상 없는 희망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그 한 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삶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자유여.  <엘뤼아르, 자유>

세상 만물의 자유를 갈구하는 의지의 목소리로 외치는 이 시는,
김지하 시인에게 같은 열망을 표현하는 시를 쓰게 했지.

22개의 연에서 모두 단 하나의 초점(포커스)를 위하여 달려오고 있어.
바로 그것은 간절하게 <자유>를 원하는 것처럼 표현되고 있지. 

이 시는 엘뤼아르가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프랑스 점령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운동을 전개하면서 발표한 저항시래. 

시인은 시간적으로 초등학교 시절부터 현재까지,
공간적으로는 지상의 미세한 사물에서 저 하늘에까지
모든 것에 자유를 쓰고 있지.  

그러한 `자유'라는 이름을 쓰는 행위가 무려 20연에 걸쳐 행해지고 있어.
게다가 모든 연의 마지막 행은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고 말야.
그러나 이러한 반복에도 불구하고 자유라는 이름을 쓰는 그 구체적 사물들이 끊임없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어서
오히려 상승적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단다.
시인이 모든 사물 위에 `자유'라는 이름을 쓴다는 것은
곧 모든 사물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명명한다는 뜻이고,
이 세계의 모든 존재가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기를 갈망하고,
아울러 자유라는 깃발을 들고 자유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야.

이 시의 원래 제목은 `단 하나의 생각'으로,
주제는 사랑하는 여인을 그리워하는 것이었다고 그래.
어찌 보면 `님'에 대한 절실한 사랑은 한용운 스님의 시와 비슷하단다.
인류의 공동 가치에 대한 절실한 애정과 일맥 상통하는 법이라,
자유에 대한 간절한 희망이나,
애인에 대한 '단 하나의 생각'이나 한줄기로 통하기도 하지. 

유사한 시, 김지하를 읽어 보자.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2연의 <소리>들은 억압받던 현실을 감각적으로(청각) 잘 살리고 있지.
<푸르른 자유의 추억>도 자유 민주주의 실현 열망이 감각적으로(시각) 잘 나타난 표현이고 말이야.

2연의 <외로운> <눈부심>은 역설적 표현이지?
외로움, 괴로움, 답답함과
눈부심, 환함, 희망, 기대감은 상반되고 모순된 표현이니 말이지.
투쟁하는 이의 앞길은 <외로운 감옥의 길>이기도 하고 심하면 <죽음의 길>이기도 하지만,
그 길은 옳은 일을 행하는 <눈부신> 길이기도 하고, 희망을 추구하는 <삶>의 길이기도 하니 말이야. 

이런 저항시들로 인하여 김지하는 박정희의 하수인인 법원에서 '사형' 선고까지 받게 돼.
전두환 때의 박노해보다 더 무섭던 시절이지.

민주화를 의인화시켜 표현한 이 시는 노래로도 만들어져 많이 불리우곤 했단다.
아빠가 대학생이던 시절엔 지하 주점에 앉아 이 노래를 구슬프게 부르곤 했지. 

이런 <손무덤>이나 <노동의 새벽> 그리고 <타는 목마름으로> 같은 시들을 읽으면서,
불의와 부정에 맞서려는 의지를 가지던 사람들이,
1987년 드디어 6월 항쟁을 통해서 군사독재에 이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단다.
물론, 미국의 개입으로 다시 군사정권이 들어서긴 했지만,
상당히 민주화된 국가로 발전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은 틀림없지.  

 

 

1980년 광주에서 총과 탱크로 짓밟힌 국민이
7년만에 권력자를 무릎꿇게 한 일은 대단한 것이란다.
1953년 전쟁을 마친 국민이 7년만에 독재자 이승만을 하와이로 보낸 일도 대단한 일이었고. 

한국인은 7년만 열받으면 100도씨까지 끓어서 보그르르 넘친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어. ^^ 

오늘은 민중의 노래, 저항시 몇 편을 읽었다.
역사는 오락가락 순서가 없는 것 같아.
좋은 일도 일어나고 나쁜 일도 함께 벌어지고 말이야.
과거의 역사를 아는 일은 그래서 힘들 때 힘이 되기도 하는 것이란다.
거기서 미래에 희망을 가지는 힘도 생기는 것이고.
역사에도 관심을 가지고 책도 읽고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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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 초가 지나가는데도 아빠는 몹시 정신이 없이 산다.
지난 주에 수련회를 다녀오고 나니 더 바쁜 것 같아.
리듬을 잃어서 그런지, 아니면 진짜 바쁜 건지...
바쁘다는 핑계 속에서 하루하루가 가고,
집에 오면 픽 쓰러져 자고 그랬구나. 

아들도 피곤하긴 마찬가지겠지만,
아빠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힘을 덜어주는 활력소가 되면 좋겠다. 

요즘엔 수업 시간에 '정체성' 이야기를 하게 돼.
윤동주의 시 비평문을 가르치는데, 정체성이란 말이 나오거든.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알려고 노력하면서 평생을 보내는 존재인 거 같아.
그렇지만, 그 정체, 자신의 본모습을 알긴 참 어렵지. 

오죽하면 소크라테스가 '네 자신의 본모습을 알라. 너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존재 아니냐?" 이러고 물었을까.
자기 점수를 보면 20점 같고, 옆사람 점수를 보면 100점 같아 보여.
내 재산을 보면 100원 같은데 옆사람 재산은 수십 억원 같아 보여.
그렇지만, 아빠는 이런 비유를 쓴단다.
20점과 100원을 가진 사람의 가치는,        1,000,000,000,000,000,000,000,000,000,120이고,
100점과 수십 억원을 가진 사람의 가치는, 1,000,000,000,000,000,000,000,100,000,100인 거라고. 
아랫 사람이 과연 훨씬 더 가치있는 사람일까?
과연 인간의 정체성을 <분별>할 수 있을까?
그 낫고 모자람을? 

성경에서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부끄럼을 알고 스스로의 몸을 가렸다고 그래.
과연 '선악과'를 먹은 것이 왜 잘못됐을까?
하느님의 명령을 어겨서?
'선악'을 구별하게 된 것이 무슨 잘못이지?
그것은 바로 '인간의 분별이나 구별은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일 거야. 

인간의 불완전하고 미흡한 구별. 차별. 그런 시를 한 편 읽어 볼게.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
발 아래 구부리고 엎드린 작고 큰 산들이며
떨어져 나갈까 봐 잔뜩 겁을 집어먹고
언덕과 골짜기에 바짝 달라붙은 마을이며
다만 무릎께까지라도 다가오고 싶어
안달이 나서 몸살을 하는 바다를 내려다보니
온통 세상이 다 보이는 것 같고
또 세상살이 속속들이 다 알 것도 같다.
그러다 속초에 내려와 하룻밤을 묵으며
중앙 시장 바닥에서 다 늙은 함경도 아주머니들과
노령노래 안주해서 소주도 마시고
피난민 신세타령도 듣고
다음 날엔 원통으로 와서 뒷골목엘 들어가
지린내 땀내도 맡고 악다구니도 듣고
싸구려 하숙에서 마늘장수와 실랑이도 하고
젊은 군인부부 사랑싸움질 소리에 잠도 설치고 보니
세상은 아무래도 산 위에서 보는 것과 같지만은 않다.
지금 우리는 혹시 세상을
너무 멀리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너무 가까이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경림, 장자를 빌려 - 원통에서> 
**노령노래 : 러시아 노래, 생활을 위해 러시아 영토로 떠나가는 참담한 실정을 노래한 함경도 민요. 조선 말기 함경도 남자들은 생활이 어려워 흔히 러시아 지방으로 품팔이를 나갔는데, 이 민요에는 그러한 절박한 상황, 즉 생활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가족과 헤어져 떠나야만 하는 애달픔, 남편을 보낼 수밖에 없는 여인들의 슬픔, 조국에서 살 수 없어 국외로 가야 하는 현실 등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시는 세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어.
첫 부분은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 바라본 세상.
다음은 <속초에 내려와> 본 세상.
그리고 <잘못보는 인간>에 대한 비판 내지 반성. 이렇게... 

높은 관점에서 잘난 체하면서 보면
인간의 모든 삶의 원리를 다 알 것 같기도 하지.
그렇지만 또 낮은 곳에서 인간의 땀냄새 고름냄새를 맡노라면,
인간에 대해 다 알 것 같던 그 생각이 조금 달라지기도 한단다. 

그래서 마지막에서 <우리는 너무 멀리서만, 혹은 너무 가까이서만> 바라보는 것은 아닌지,
비판을 하고 있어. 

인생을 멀리서만 보고,
"인생, 까짓거 뭐 있어~ 즐기다 가는 거지."하고 까부는 것도 우습고,
인생을 너무 좁게 보고,
"아이고, 공부 끝나니 취직 걱정이고, 취직 끝나면 결혼 걱정이고,
다시 진급 시험봐야 하고, 아이고, 세상은 걱정 투성일세."
이렇게 비관하는 일도 어리석은 일이지. 

멀리서도 보고, 가까이서도 보고,
그 중간의 관점을 유지하는 일.
이런 일을 '중용'을 지킨다고 하겠지. 

제목이 '장자를 빌려'인 이유는,
[장자] '추수편'에 '큰 앎은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살핀다.'는 글귀가 있대.
진정한 앎은 먼 곳에서도 보고, 가까운 곳에서도 보는 지혜가 있다는 거지. 

아들아.
네 삶을 너는 어디서 보고 있니?
하루하루의 삶의 반복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고 쉽게 지치고 있나,
아니면, 긴 삶 속의 좁은 지점이라 쉽게 생각하고 있나,
하루를 백년처럼 지겹게나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지,
이런저런 걱정이 된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안심도 한단다.
아들을 철석같이 믿는 것은,
네가 어떤 삶을 살든 엄마와 아빠는 너를 응원할 것이기 때문이야.
최선을 다해서 사는 아들을 응원하는 일은 당연한 거지.

세상은 이렇게 단순해 보이면서도 복잡하고, 거꾸로이기도 한 거야.
암튼, 아빠는 영원히 아들의 편이고 팬이기때문에
네가 잘 되기를 바란단다.
잘 되는 건,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즐겁게 살고,
재미있는 일 찾아서 즐겁게 살고,
이쁜 아내 귀여운 아기들과 즐겁게 사는 그런 일이겠지. 

물론 멀리서 보면,
세상이 험악한데 혼자서 즐겁게 살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또 가까이서 보면,
하루하루 즐겁게 사는 일의 소중함도 결코 가볍지 않단다. 

오늘은 멀리서 보고 가까이서 보는 관점들이 보여주는 모순,
그리고 그 모순 사이의 진실을 느껴보는 시를 한 수 읊었어.
바빠도 한 수씩 읊으려 노력할게.

설악산 대청봉을 읽노라니 오세영의 <강물>이 떠오르는구나.  

 무작정
 앞만 보고 가지 마라.
 절벽에 막힌 강물은
 뒤로 돌아 전진한다.

 조급히
 서두르지 마라.
 폭포 속의 격류도
 소(沼)에선 쉴 줄을 안다

무심한 강물이 영원에 이른다.
텅 빈 마음이 충만에 이른다. <오세영, 강물>
 

너무 전진만을 위한 삶을 살지도 말고,
너무 서두르는 삶을 살지도 말라는 이야기야.
무심하고 텅 빈 마음이 목표에 도달하게 할 때도 있다는 거지. 

신경림의 시나 오세영의 시나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죽자사자 뛰는 삶'이 정답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지.
<통념 속의 정답>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오답>이거나 <답과 거리가 먼 답>일 수도 있는 거야.
이런 시를 통해 마음도 좀 너그럽게 가지고 그러자.
그럴 수 있다면,
매일이라도 시를 읊어야지. ^^
동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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