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좁은 나라에도, 어떤 동네는 물난리가 지고, 어떤 동네는 뙤약볕이 내리쬡니다.
아, 벌써 특강이 7회분이나 들어가는군요. ^^
오늘은 무얼로 이야길할까, 별로 생각하지 않고 잘도 한답니다.
수강하시는 분들이 가끔,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하고 위로를 해주시는데,
솔직히 별로 노고랄 거 없거든요. ^^
잘난 체가 아니라,(그렇게 보심 할 수 없지만)
정말 생각나는대로 마구 쓰는 것인 만큼, 부족해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지식을 팔아먹고 사는 시대가 지났다고 합니다.
인터넷 구글처럼 '링크'로 먹고 사는 시대죠.
세상에 깔리고 깔린 것이 지식인데, 그것들을 서로 관계맺는 지점을 찾아서 보여주고,
이렇게 관계맺는 방식도 있을 거 같다.
이런 지식의 디자이너,
요게 제가 추구하는 바의 '특강'인데요.
갈수록 진화할지, 매가리없이 툭 끊길지, 저도 저를 모르겠습니다. ^^
오늘은 '어떻게 살까?'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시들을 몇 편 소개하겠습니다.
어쩌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것도 한반도 아랫녘에서 살고 있는데요.
하루하루 사는 일이 팍팍하고 쉽지 않거든요.
뉴스라고 떠드는 것들도 참으로 해괴망측한 일들로 가득하구요.
뉴스에 나오지 않는 감추어진 진실들은 더욱 비참한 몰골들이지요.
그래선지,
시인들이 추구하는 '바른 삶'은 참 많습니다.
지난 번에 '권정생 선생님' 동영상을 링크했더니 가슴이 찡했다는 분이 많았어요.
권정생 선생님은,
이름 자체가 바른 삶 正生이신 분이었지만,
당신의 바른 삶은 '강아지 똥'과 같은 삶이라고 이야기하신 거잖아요.
볼품없는 존재라도, 녹아져서 민들레 꽃을 피우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존재>의 비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 시인이라면,
훌륭한 작가라면, 그 사소한 '비밀'을 밝혀내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거겠지요.
마기님, 훌륭한 시인이 되기 위해서,
마기님의 그 직관력으로 저같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비밀'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처음 다룰 시는 '만인보'를 쓰신 고은 선생님의 <머슴 대길이>입니다.
우선 한번 읽어 보세요.
새터 관전이네 머슴 대길이는
상머슴으로
누룩도야지 한 마리 번쩍 들어
도야지 우리에 넘겼지요
그야말로 도야지 멱따는 소리까지도 후딱 넘겼지요
밥때 늦어도 투덜댈 줄 통 모르고
이른 아침 동네길 이슬도 털고 잘도 치워 훤히 가리마 났지요
그러나 낮보다 어둠에 빛나는 먹눈이었지요
머슴 방 등잔불 아래
나는 대길이 아저씨한테 가갸거겨 배웠지요
그리하여 장화홍련전을 주룩주룩 비오듯 읽었지요
어린아이 세상에 눈떴지요
일제 36년 지나간 뒤 가갸거겨 아는 놈은 나밖에 없었지요
대길이 아저씨더러는
주인도 동네 어른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지요
살구꽃 핀 마을 뒷산에 올라가서
홑적삼 큰아기 따위에는 눈요기도 안 하고
지게 작대기 뉘어 놓고 먼 데 바다를 바라보았지요
나도 따라 바라보았지요
우르르르 달려가는 바다 울음소리 들었지요.
찬 겨울 눈 더미 가운데서도
덜렁 겨드랑이에 바람 잘도 드나들었지요
그가 말했지요
사람이 너무 호강하면 저밖에 모른단다
남하고 사는 세상인데
대길이 아저씨
그는 나에게 불빛이었지요
자다 깨어도 그대로 켜져서 밤새우는 불빛이었지요<고은, 머슴 대길이>
고은 선생님은 다작으로도 유명합니다. 벌서 몇 년째 노벨 문학상 후보에도 오르시곤 했는데,
만 명의 노래를 부르겠다고 해서 '만인보'를 쓰셨습니다.
그 안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가 이 시입니다.
어떤 위인보다도, 머슴 대길이같은 사람이 되길... 내 자식이 저렇게 되었으면... 이러고 바라는 시입니다.
대길이는 우선 신분이 '머슴'입니다.
조선 시대는 계급 사회였죠. 그래서 양반이 있고, 상놈이 있었습니다. 종놈은 양반의 소유죠.
그런데, 갑오개혁으로 형식적인 노비제 철폐가 이루어지고 맙니다. 그때 노비들이 어떻게 했을까요?
주인마님의 앞에 꿇어 엎드려, "주인님, 저희를 버리지 마십시오."했다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제 종의 신분을 벗어나 '머슴'이 됩니다. 종은 먹여 살리기만 하면 되지만, 머슴은 새경을 주어야 합니다.
물론 제대로 된 계약을 맺었을 리가 없는 불평등 계약 조건이기가 쉬웠겠지요.
주인도 동네 어른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지요
이 말을 뒤집으면, 대길이 아저씨 말고 다른 평민들한테는,
주인도 동네 어른도 함부로 대했다는 현실을 읽을 수 있지요.
이 '머슴'이란 신분이 한국 사회의 질곡을 잘 보여줍니다.
형식적으로는 평등한 인간이면서, 종속되어있는 '임금노동자'의 모습 말입니다.
그 중에서도 '상머슴'은 정말 일 잘하는 사람에게 붙여주는 호칭입니다.
상머슴을 거쳐 '마름'이 되면, 중간 착취자가 될 수 있는 자리라 봐야죠.
그래서 동네 처자들이 서로 혼담을 오가기 바라는 DUO 1등 신랑감일 수도 있었을 거구요.
그치만, 일 잘하고, 부지런한 대길이 아저씨는 <먹눈>이었습니다.
까막눈이 뭐예요? 하얀 건 종이고, 까만 건 먹이다... 이 수준인 눈이잖아요.
문자 속을 까맣게 모르는 사람.
먹눈은?
먹물이죠.
지식인인 겁니다. 글자를 알았던 거죠.
계약서에, 월 쌀 1가마, 이런 거 적어 놓으면, 읽을 줄 아는 사람과 뭔지 모르는 사람의 차이겠지요.
대길이 아저씨에게 글자를 배운 화자는 역시 마찬가지 농부의 아들일 가능성이 큽니다.
자라봤자 소작농이나 되고, 까막눈으로 살 운명이었겠지요.
그렇지만, 그는 대길이 아저씨를 만난 덕에 '먼 데 바다'를 바라보게 됩니다.
사람이 너무 호강하면 저밖에 모른단다
남하고 사는 세상인데
대길이 아저씨가 화자에게 들려준 메시지.
아,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이고, 예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공자도 그랬거든요.
극기복례... '이기심'을 이겨야 '예의'로 돌아간다.
4단 四端, 인간이 갖춰야 할 기본 네 가지 마음 중에서 '예'에 해당한는 것이 '사양지심'이거든요.
(참고로, 어질 인...은 측은하게 여기는 측은지심,
옳을 의...는 부끄러워할 줄 아는 수오지심,
예도 례...가 금세 이야기한 사양하는 사양지심,
지혜 지...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시비지심.)
옛날에 배운 건데, 이렇게 쉽게 설명하는 건 첨 들었죠? ㅎㅎㅎ
원래 마음에 우러나서 공부하면 이토록 쉬운 거랍니다. 공부가.
이기심을 버리는 것,
"저밖에 모르는 사람"
이런 것을 버려야 한답니다. 예에 맞게 살려면.
그래서 <사양>할 줄 아는 마음이 예의에 맞는 거죠.
너무 호강해서 저밖에 모르는 인간.
남하고 사는 인간인데...
극기복례,를 윤리 문제 정답에서만 아는 인간. 어이쿠, 쿡, 찔리넹...
극기훈련은 등산하는 게 아니라, <나의 이기심>을 이기는 훈련. 이런 거죠.
아, 제가 매일 근무하는 학교에서 기르는 인간상이 딱, 이것입니다.
극기복례를 극복한 인간. 휴 =3=3
무자비하게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 저밖에 모르는 사람 양성!!!
화자는 대길이 아저씨를 <불빛>으로 삼았습니다.
자다 깨어도 그대로 켜져서 밤새우는 불빛... 아, 불빛은 어떤 걸까요?
어두움과 불빛...
불빛은 화자에게 <똑바로 살아라>를 보여주는 증인 아니었을까요?
깍두기들이 등짝에 새긴다는 쉽고도 명징한 진리. <차카게 살자!>
이 시의 주제를 찾으라면, 바람직한 삶의 자세 발견 정도가 되겠네요.
다음엔, 백석의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이란 시를 한번 보겠습니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끝에 헤메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 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 인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백석이란 시인은 1987년 해금되기까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시인입니다.
북한의 시인이란 이유로 묶여 있었는데요. 최근에 <여승>이란 시가 교과서에 실렸습니다.
평안도 사투리를 구수하게 구사하는 시인입니다.
제목인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이란 형식에 대해서 익숙하신가요?
어려서 셋방살이에 익숙한 저같은 사람이야 이런 주소 형식에 익숙한데요.
원래 농경사회에서는 기본적으로 친척들이 모여살기에 '집'의 개념이 '대단위가족'의 개념이었죠.
그러다가, 식민지 경제와 함께, 토지조사사업으로 땅들을 잃고,
도시화로 인한 떠돌이들이 탄생하게 됩니다. 자본주의가 기형적으로 이식된 형태죠.
아, 이 <방>이란 글자에는 참으로 애환이 담긴 사회사가 있을 것입니다.
<댁>과 <방>에는 정착과 유랑, 자기 것이 있는 쪽과 가진 것이 없는 쪽, 이런 '금'이 들어있거든요.
이 <방>이란 글자에서 저는 '근거지를 잃은 방황하는 영혼의 쓸쓸함'이 느껴진답니다.
요즘 쓰이는 '-방'이란 접미사 중에 가장 그런 의미가 뚜렷한 것이 '떳다방'인데요.
점포 하나 없이도 돈을 쫓아 부유하는 복덕방, 떳다방...
아이들의 놀이방, 에도 들어가는 이 쓸쓸한 단어. 놀이방의 아이들을 생각하면 좀 안쓰럽네요.
피시방 아이들의 고립감,
노래방,도 마이크 잡은 넘만 소리지르지, 나머지는 제 노래 찾느라 고개 처박고 있다는...
안마방, 보도방(*지*매방),대딸방(여대생이**이를해주는방)... 에효, 그야말로 근거지 잃은 영혼들의 방랑처가 바로 이 '방'이란 글자에 모여있습니다.
시인이 남신의주란 도시의 유동에서 박시봉씨네 방에 세들어 살게 된 것입니다.
목수네 집에 헌 삿자리를 깐 허름한 집에 혼자 있는 거죠. 인터넷도 없었고, 라디오도 없었던 시대...
질옹기(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붙여 두고,
자신의 슬픔과 어리석음을 연신 되새김질 하는 처지.
이것이야말로, 공동체 사회를 잃어버린 방황하는 영혼의 쓸쓸함이 아닐 수 없답니다.
현대 사회를 유목의 사회, 노마드의 사회라고 합니다.
정주민들의 시대는 갔다. 온 세계가 좁도록 글로벌리제이션된 사회다.
근데요.
그건 잘 사는 나라 사람들 얘기랍니다.
미국 넘들은 이 후미진 코리아에 와서도 영어 강사 할 수 있잖아요.
노마드의 시대.
그렇지만, 베트남 스무 살 가난한 아가씨는 과연 노마디즘의 세례를 받아 한국에 국제결혼을 왔던 것일까요?
떠돌이도 <가진 자는 노마드>, <못가진 자는 에뜨랑제 - 이방인>가 되어버리는 사회를 무작정 <노마디즘>으로 들이대는 것 역시 폭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의 삶 역시 여기서 벗어나기 쉽지 않을 것이구요.
백석의 남신의주 역시 적극적 노마드의 그것이라기 보다는, 에뜨랑제로서의 외로운 존재감이 큽니다.
그렇지만, 이 의지 강한 시인은 그저 주저않거나, 아무에게나 총구를 돌리는 이방인의 고독한 삶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는 마지막 행의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시어에 함축된 선비같은 삶을 추구하고 있겠지요.
'굳다'와 '정하다'의 두 단어를 썼을 뿐인데,
이 힘겨운 시가, 이 긴 시가 푸념으로 가득하지만,
마지막 시행에 와서 그만 <굳고 정한 갈매나무> 생각으로 가득차게 되는 것입니다.
강남 엄마들이 자식을 <명품>으로 길러서 서울대를 보낸다고 합니다.
그래서요?
그래서, 명품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일 것입니다.
인간은 생각보다 복잡한 존재거든요.
서울대를 나와서 돈과 권력을 움켜잡던 시대는 이미 지나가버렸습니다.
물론 돈과 권력의 이합집산이 그들 중심으로 이루어지기때문에 상대적으로 서울대 졸업생이 유리한 고지를 점유할 수 있기도 하겠지만, 앞으로의 돈과 권력은 역시 <나무줄기>처럼 튼튼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수시로 변하는 <뿌리줄기>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끈질기게 재생되고 생명력을 이어갈 것입니다.
너무 말이 많나요?
그럼 또 시를 하나 만나 보시죠.
오늘은 시를 좀 여러 편 들이대겠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 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으면서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은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김종삼 >
시가 뭐냐고, 시인은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이런 의문에서 시작하죠.
아름다운 '시의 가슴'을 노래한 시인도 있었지만,
뭔가 <클래시컬>한 수준이 있을 것 같은 <시 poetry>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단테 신곡 강의>에는 전쟁 나면 배 한척 쾌척할 수 있는 <클래스>와 그렇지 못해 자식을 내보내야하는 <프롤레타리아>에 대하여 설명하는데요. 그래서 클래식, 하면 타임리스... ㅋㅋ가 아니라 뭔가 고상하고 품격있는 ... 이런 수준을 담고 있기도 하죠.
시는 왠지 수준높아 보이는 품격있는 언어예술일 것 같아서 시인에게 묻습니다.
"시가 도대체 뭐야?"
근데, 눙치고 있죠.
"난 잘 몰러유~ "
무교동 낙지, 뭐 별로 맛도 없더만 비싸기만 하고. ㅋㅋ
종로 빈대떡, 요건 좀 맛있지만 역시 비싸고, 청진동 해장국이 더 좋은데, 없어졌담서요?
명동의 노점상, 이거 예술이었는데 ㅠㅜ 남산 케블카... 햐, 좋죠.
그러다가, 남대문 시장으로 왔습니다.
시가 뭘까? 어떤 품격있는 것이 시이며,
시인이란 뭘까? 어떤 기품있는 인품을 가진 인물이 시인일까? 이러던 중에,
시인의 뷰파인더에 남대문 시장에서 <사람>이 잡힙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은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품성이 어떤 것일까요?
비싼 옷과 기름진 음식으로 인한 풍요로움과,
투명한 피부와 온갖 액세서리로 장식한 호화로움에서 우러난 격조가 아니란 것 정도만 말해 두죠.
고생하면서, 순하고 명랑하고, 맘좋고 인정이 넘치는,
지식도 없는 무지랭이일지라도, 삶의 슬기로운 지혜로 넘치는 사람들.
아까 이야기한,
극기복례. '이기심'따윈 관심두지 않고 '사양지심'의 예를 이루는 이들.
뭐, 능력이 없어서 더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기가 쉽겠지만,
가진 게 없으니 더욱이 꾸밀 수 없는 것이 현실이겠지만,
그래도, 거기서, 세상 사는 묘미를 화자는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 광명, 시인은 모두 하느님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겠지요.
이기심을 버리는 일이 시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일이 되는 것일까요?
좀 포인트가 다르지만, 이면우의 <거미>도 한번 엮어서 보시죠.
오솔길 가운데 낯선 거미줄
아침 이슬 반짝하니 거기 있음을 알겠다
허리 굽혀 갔다, 되짚어 오니 고추잠자리
망에 걸려 파닥이는 걸 보았다
작은 삶 하나, 거미줄로 숲 전체를 흔들고 있다
함께 흔들리며 거미는 자신의 때를 엿보고 있다
순간 땀 식은 등 아프도록 시리다.
그래, 내가 열아홉이라면 저 투명한 날개를
망에서 떼어내 바람 속으로 되돌릴 수 있겠지
적어도 스물아홉,서른아홉이라면 짐짓
몸 전체로 망을 밀고 가도 좋을 게다
그러나 나는 지금 마흔아홉
홀로 망을 짜던 거미의 마음을 엿볼 나이
지금 흔들리는 건 가을 거미의 외로움을 안다
캄캄한 배속, 들끓는 열망을 바로 지금, 부신 햇살 속에
저토록 살아꿈틀대는 걸로 바꿔놓고자
밤을 지새운 거미, 필사의 그물짜기를 나는 안다
이제 곧 겨울이 잇대 올 것이다
이윽고 파닥거림 뜸해지고
그쯤에서 거미는 궁리를 마쳤던가
슬슬 잠자리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나는 허리 굽혀, 거미줄 아래 오솔길 따라
채 해결 안된 사람의 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면우, 거미>
이 시의 화자는 <마흔아홉>입니다.
마흔아홉이 되면서, 스스로 삶에 대하여 반추하여 보겠지요. 되새김질, 꺼억~~
양철나무꾼님, 이 연세쯤 되셨나요? 온라인 나이는 도통 알 수가 없어서리...
저도 아직 몇 년 있어야 마흔아홉입니다만,
서른에서 마흔까지...지금껏 나이가 별로 아쉽지 않았거든요.
근데, 마흔아홉, 하면, 컥, 할 거 같아요.
쉰이잖아요. 옛말에도 지 운명도 다 안다는 쉰.
신 세대의 반댓말, 쉰 세대의 기수. 쉰 살... 에효... 쉰 냄새가 펄펄나는 세대.
거미줄에 고추잠자리가 걸렸습니다. 불쌍하죠. 파닥이는데...
이제, 불쌍한 '잠자리'가 아니라, 먹고 살기 힘든 '거미의 삶'이 보이는 거죠.
왜, 어려서 보던 동물의 왕국에서 사슴이 맨날 불쌍했잖아요. 근데 나이 들면, 그러잖아요.
저게 삶이야. 잡는 사자도 고달퍼~
조용필의 노래 중에서,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있는데요, 저는 그 중 한 대목을 참 좋아합니다.
화려하면서도 쓸쓸하고 가득찬것 같으면서도 텅비어 있는 내 청춘에 건배!!!
순오기님, 혹시 계시면, 저랑 건배 한 잔 해 주시죠~ 맥주든, 소주든... ㅠㅜ
화려하면서도 쓸쓸하고 가득찬 것 같으면서도 텅비어 있는 그런 게
인생이란 것을 알아버리는 나이.
그 나이가 마흔아홉쯤, 되지 않나 싶습니다.
그때쯤이면, <올바른 삶>에 대해서도 좀더 시야가 넓어지지 않을까... 이런 미몽도 갖게 되구요.
화자는 흔들리는 거미줄을 봐요.
그 거미줄이 거미뱃속의 열망이고
그 열망을 뭔가 보이는 걸로 바꿔놓고자 거미는 밤을 지새워 필사적으로 거미줄을 짜요.
이제 곧 겨울이 바로 올 것이므로, <가을 거미>는 외롭지만 필사적이 되는 겁니다.
그걸 보다가, 화자는 다시 <사람의 일 속>으로 걸어 들어가지요.
마흔아홉쯤의 조금은 지혜로운 시선이 느껴지지 않나요?
이 시인의 마음이 느껴지시나요?
거미줄을 바라보면서도 '아, 가을 거미의 필사적 거미줄'이 눈물겨워 시가 나오는구나...
나도 마흔아홉이 되면, 조금 쓸쓸하면서도 뭔가로 가득차 있어야 할텐데... 이런 반성도 불러오는 시이기도 하구요.
제가 첨에 알라딘에 글을 올린 것이 서른 다섯 살 무렵입니다.
그때, 더 나이먹기 전에 책 좀 읽고, 잊기 싫은 것은 글로 좀 적어 두자... 이런 의도로 리뷰를 쓰기 시작했거든요.
그것이 이미 2천 편이 넘어버렸는데,
그 독서들이 요즘 시 특강에 구석구석 짱박혀 있는 것 같네요.
자, 오늘의 주제는 '어떻게 살까?'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했던 건데요.
이야기가 어디서 어디로 흘렀는지...
아이는 어머니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말이 있답니다.
아이의 인생인데, 아이가 어머니가 원하는 것을 눈치껏 한다는 거죠.
요즘 말하는 엄친아(엄마친구아들)가 자식 적은 한국 사회의 병폐로 드러난 결과물이라면,
우리가 아이들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인간상이 될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일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먼저, 나부터 어떻게 살 것인가?
극기복례,를 항상 가슴에 품어 두고 살아야겠단 생각을 합니다.
이기심을 이기는 일, 이것이 인간다운 삶의 단초다~ 이렇게요.
그리고, 이렇게 시 특강을 하는 것은, 그걸 나 혼자만 할 게 아니라,
두 사람이 하고, 세 사람이 하고, 그러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겠다, 이런 생각이지요.
어느 것이 먼저일 수 없는 것이 삶의 방식인 것 같습니다.
세상이 맑아져야 살기가 좋은 건지,
개체가 노력해야 세상이 살기 좋아지는 건지...
에른스트 에셔의 <그리는 손>처럼 먼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함인지도 모르구요.
마지막으로 '함께 사는 삶'을 생각해 보면서, 도종환의 <담쟁이>를 덧붙입니다.
오늘의 <엔딩 포엠>입니다.
이제 이 정도 시는 설명없이도 행복하게 읽으실 수 있는 정도는 레벨업 되셨죠?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도종환, 담쟁이>
우리, 손을 잡고, 담쟁이처럼 삽시다.
물 한 방울 없고,
절망의 벽이라고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말할 때,
그 벽을 넘는 힘은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는 일이란 거
사는 일이 힘들 때,
가끔, 저는 이 영상을 봅니다.
우리가 힘들었던 80년대를 봄비처럼 촉촉하게 적셔주었던 이문세와 이영훈의 만남을 말입니다.
구호만 난무하던 시대, 따뜻하게 정서를 적셔주던 노래들을요...
날이 무쟈게 덥습니다.
어디는 비도 오고, 난리라더니...
휴~ 건강한 여름 보내고들 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