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리라이팅 클래식 15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예전의 명의는 '척 보고' 아는 의원이었다.

얼굴빛만 보고도 '간이 나쁘구만.'하거나, 몇 마디 나눠보고는 '색을 밝히는 놈이구만.' 이러고...

맥을 짚어보고 '셋째가 들어섰어.'라거나, 배를 눌러 보고, '큰 병원 가봐, 오래 못 살겠어.' 이러는 의원을 명의로 쳤다.

병을 제대로 아는 것이 바른 치료의 시작이라고 했으니,

이런 여러 가지 진료의 방법으로 병증을 알아내는 것이 의사의 기본이었겠는데,

글쎄, 그것이 요즘엔 전문대 졸업한 방사선 기사에 의해서 결과가 판독되는 시대가 오고 말았다.

 

수십 만원을 내고 큰 자기공명통 안에서 고뇌의 무도를 겪고 나면,

고귀하신 원장님께로 인도된 환자는 컴퓨터 화면 앞의 자기 신체를 바라보게 된다.

물론, 이렇게 기계화된 결과 오진의 확률이 급격히 낮아졌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 값비싼 기계들을 운영하기 위하여 또한 '불필요한 진료'의 확률은 급격히 높아졌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자본의 시대엔 질병조차 자본의 관리를 받는 셈인데...

 

바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집'이다.

일단 '두 집'이 있어야 이어진 바둑돌들은 살아있는 게 되는데,

그 '집'을 갖추기 전까지는 '미생'이라고 해서, '아직 살아있는 게 아닌' 상태를 유지한다.

이 '미생'의 상태에서는 아무리 대마라고 하여도 한 순간에 위기를 맞게 되는 법이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역시 '집'이다.

일단 마음 속에 튼튼한 집이 있어야 집에서 나고 드는 사람들은 살아있다는 존재감에 싸여 살게 되는데,

그 '집'이 허약해진 상태, 어쩌면 '빈집'을 드나드는 것처럼 살아 간다면,

'함께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가정인 상태를 유지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미생'의 상태에서 아무리 부유한 집안도 한 순간에 위기를 맞게 되는 일은 당연지사.

 

편작의 큰형은 미병의 상태에서 예방을 했고, 작은형은 병이 약할 때 치료했으나, 편작은 죽을병을 낫게 하여 명의로 유명해 졌다고 한다. 편작네 집안에서 편작은 가장 하수로 여겨졌다고 하니...

 

바둑의 묘미는 대마를 잡기 위하여 '패'를 활용하기도 하고,

'자충수'를 두기도 하는 등, 꾀를 부리지만,

튼튼한 집이 있다면 어떤 고수 앞에서도 흔들릴 염려없이 살아있는 말이 되고,

집도 없이 떠돌다가 '축'으로 몰려 자폐적 행보를 보이는 자는 영락없이 자멸하는 말이 되고 만다.

 

의학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예방에 있고,

그 예방을 위하여 '자기 몸의 연구자'가 스스로 되도록 이끌어주는 책인 '동의보감'의 의미는 자못 크다고 하겠다.

허준은 '스스로 자기 병을 알아 스스로 치유해 가라'고 하고,

이제마는 '널리 의학을 밝혀 집집마다 의학을 알고 사람마다 병을 알게 된 연후라야' 장수한다고 하였다.

결국 가장 큰 의사는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것이라는 게 결론이다.

 

동양의 의학은 서구의 해부학이나 이원론적 생리학과는 자못 다른 점이 많은데,

보이고, 존재하는 해부학적 지식을 뛰어넘어 '비유적이고 철학적인' 장부의 작용이 '태극'처럼 상생하고 상극하면서 상호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복잡하면서도 미묘한 해석의 어려움을 보여주며,

이것 아니면 저것 식의 길항작용뿐만 아닌,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기운의 흐름을 다루는 점에서 존재를 상정하는 매트릭스가 다른 곳임을 배우게 된다.

어느 것이 낫다는 것을 말할 수는 없지만, 서구의 의학과 차이점을 음미할 필요는 충분히 있어 보인다.

 

동양 사상은 우주와 생명을 어떤 실체들의 종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흐름이자 운동으로 본다.(125)

따라서 삶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동사는 운동성이 존재를 규정한다.

그때 운동은 이동, 중첩, 변이가 핵심이다.

정기신, 음양오행, 이 개념들 역시 명사가 아니라 동명사에 가깝다.

그것을 절단, 채취하는 순간 명사화된다.

명사가 아닌 동사적 흐름을 사유하는 건 일단은 쉽다. 하지만 미끄럽다.

잡았는가 싶으면 슬그머니 손을 빠져나간다.

 

고미숙의 설명 역시 쉽지만은 않다.

그렇지만 고미숙이 위치한 유리한 자리는,

고미숙이 쓴 책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런 책을 들춰볼 용기를 얻기 어려웠을 것이란 지점이기도 할 것이다.

 

자본의 세상은 인간을 단절화, 단편화시킨다.

돈벌러 간 남편은 '빈집'을 두려워하면서 외도를 하고,

공부하러 간 아이는 '빈집'을 두려워하면서 학원을 전전하고,

그 '빈집'을 지키는 아내는 다시 온갖 중독에 침윤하고 마는 악순환.

 

공감과 비움,천지만물과 공명하기 혹은 절대적 영토 벗어나기,

이런 용어들이 뒤섞여 나오지만, 결국 목표치는 같다.

'빈집'을 튼튼하게 꾸리고, '빈몸'을 유기적으로 활발발한 개체로 되살리라는 것.

 

불통의 경지를, 진액이 막히면 담음이 된다... 뭐, 이런 말을 쓴다.

통즉불통, 불통즉통, 통하면 아프지 않고, 통하지 않으면 아프게 된다.

현대인의 '뒷담화'라든가, 화병으로 치닫는 조급증, 속도 경쟁은 인간을 질병의 복합체로 만들게 되는 바,

'의학 내부의 전통'과 '자연 철학적 논리'의 대립에서 선택하여야 하는 지점이 있다면,

늘 후자를 택했다는 동의보감의 저술 원리를 생각해 보면,

'의학을 위한 의학'을 뛰어넘어 '인간을 위한 의학'을 지향했던 현인들의 사랑이 돋보이기도 한다.

 

선조가 허준에게 '우리나라에서는 약재가 많이 산출되지만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니

종류별로 나누고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명칭을 백성들이 쉽게 알수 있도록 하라.'는 선조의 교지가 있다는데,

뭐, 어느 기관에서 발간되는 자료든, 맨 앞의 발간사야 기관장 명의로 기록되기 마련인 법이니 무시하고,

'신토불이'의 '동의'라는 '귀한' '책'으로서의 동의보감을 읽는 사람 옆에서 이야기 듣는 것만으로도 뿌듯한 노릇이다.

 

수승화강이라고,

음의 기운은 오르게, 양의 기운은 내리가 하는 것이 원리라는데,

요즘엔 하체가 가느댕댕하게 스키니진을 입는 것이 유행이라 하니,

음허화동, 음이 비어서 화가 동하는... 감정과 정욕이 한없이 항진하는 세상이 되기도 한다는 해석도 들어둘 법 하다.

 

존재와 병은 분리될 수 없다.

죽은 존재에게는 아무런 병도 없는 법이다.

인간은 '순음지체'이거나 '순양지체'일 수 없다고 한다.

'음양화평지체'를 추구하는 동의학에서 '질병' 역시 '인간의 존재'와 물질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대단히 복잡한 유기적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셈이다.

 

한미 FTA로 한국의 의료 서비스가 민영화 내지는 국민건강보험의 파산을 예고하기도 하는 걱정들도 있다.

유기적 관계가 깨어진 사회는,

그리하여 서로 통하지 않고 불신과 괴담만이 난무하는 사회는,

결국 '질병의 도가니'로 그 구성원을 몰아넣을 것은 아닌지 두려울 따름이다.

 

이 책에서 고미숙은 '동의보감'을 통하여 '삶의 비전'을 보자고 한다.

이 책이 부족한 점이라면, '낱낱의 전문 용어들에 대한 쉬운 설명'이다.

그렇지만 이 책의 장점이라면, 풍부한 철학적 해석과 비유를 통하여 낯선 개념이 곧장 이해되도록 하는 부분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 책의 상세 부분이 옳고 그름이야 전문가들이 판단할 영역이지만,

결국 삶이란,

바둑 한 판 두는 일처럼,

한 치 앞을 보기 힘든 '패' 싸움이 아니라,

'든든한 집'을 중심으로 살아나가는 요령을 깨우치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미생'의 '대마'는 한 순간 위기에 처할 수 있음을, 의학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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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금, 보험, 저축을 능가하는 노후대비'책'
    from 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2012-11-01 18:16 
    '두통에는 진통제', '우울증엔 항우울제', '불면증엔 수면제'라는 것이 공식처럼 각인되고 있다. 그러나 시댁과 갈등을 겪는 전업주부의 두통과 학습우울증에 걸린 청소년의 두통이 과연 같은 질병일까. 또 시댁과 갈등을 겪는 주부에게 어깨 결림, 두통, 불면증, 소화불량, 생리통이 동시에 나타났다면, 이는 각각 정형외과, 신경과, 정신과, 내과, 산부인과에서 따로 해결해야 할 병일까. ─강용혁, 『닥터K의 마음문제 상담소』, 12쪽 예전에 손발이 너무..
 
 
 
숫타니파타 - 불교 최초의 경전
법정 옮김 / 이레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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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불교를 '유아론적 사고'의 극치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유아론은, 실재하는 것은 자아 뿐이며, 다른 것은 자신의 의식 속에 존재할 뿐이라는 말이다.

극단적 형태의 주관적 관념론으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어이, 세상이 내가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냐?

암 것도 없지.

 

숫타니파타는 소승 경전 중 하나다.

여시아문, 나는 이렇게 들었노라~ 하고 증언하는 기록들인데,

중국을 거쳐 대승 불교가 삼국에 전파되다 보니,

소승 불교의 원뜻을 개무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인류를 구원하겠노라는 '대승'적 차원의 큰 수레에 비하면,

제 혼자 고통을 벗어나려는 '소승'적 작은 수레는 보잘것 없다는 것인데,

나가르주나의 '공' 즉 있는 그대로 보라. 뭐가 있다는 것인지,

이런 잔혹극 속에서 대승의 승리는 쫌, 우스워보이기도 한다.

 

소승불교가 요즈음 다시 인기를 얻었었는데,

위빠사나라든지, 틱낫한 스님처럼,

한국 현상의 독특한 토착 불교인 '혼합 종교'로서의 불교의 성격을 버리고,

자신에게로 돌아가자는 반성이 일으킨 현상이겠다.

 

8정도가 소승 불교의 중심 계율인데,

특수 계층의 초창기 불교가 주가 되므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잔혹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세상을 어떻게 혼자서 가는데... 너무 래디컬한 모습이기도 하다.

 

8정도 대신 대승에서는 6바라밀의 단계를 설정한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의 경지...

보시하고, 계율을 지키며, 수모를 견디어 나도, 중생도, 오래 사는 사람도 없음을, 곧 텅빔을 관조하란 것.

그러기 위하여 정진하며, 지혜를 얻기 위하여 선에 들고, 드디어 지혜로운 자가 되어 반야의 눈을 얻는 것.

계, 정, 혜가 말은 좋아 보이지만,

호국 불교, 가르침의 불교, 이렇게 보편 종교를 지향하노라면,

모든 중생을 구하겠다는 것은 하나도 구하지 않겠다는 것과 모순적으로 통하는 구석도 생기게 되는 것.

 

소승의 자신을 위한 수양을 넘어서

대승의 아미타(과거불), 미륵(미래불), 정토사상 등은 애초의 종교 사상을 훼손했다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초기 승려들은 탁발을 하였는데,

구걸을 하는 일은 모든 수모를 견뎌내겠다는 자세라고 한다.

삶에서 이렇게 치열한 삶을 살아야하는데,

<혀를 입천장에 붙이고 스스로 배를 비우라>고 하고 있다.

<텅 빈 배, 虛舟>가 와서 부딪힌다면 그 배한테 화를 낼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상대 배에 사람이 타고 있으면, 그 사람에게 화를 내게 되는 것.

자신을 닦는 일은 스트레스를 안으로 삭여서 '사리'를 만들라는 노릇이기도 해서,

정신건강상 좋지 않을 수도 있어 보인다. ^^

 

바닥이 얕은 개울물은 소리내어 흐르지만,

깊은 강물은 소리 없이 흐르는 법이다.(247)

 

스스로를 닦는 일이 우선인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앞세우는 '선공후사, 멸사봉공'의 정신이 아름다운지,

글쎄, 실존의 인간에게 '공'적인 사상의 강요는 또하나의 폭력이었던 것이 인간 역사의 결론임을 보면,

호국 불교로서의 종교 행위는 초기 종교의 정신을 배워야 할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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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 인간의 법칙 - 64괘에서 배우는 인간과 자연의 지혜
이창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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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가 주역에 대하여 이해하려 노력한 적이 몇 번 있었으나,

강론을 들을 기회가 없는 처지에선 산의 초입에서 길을 잃고 만 처지가 되고 말았다.

개중에 주역이 놓인 위치를 알려주는 책이 있었다면, '주역의 과학과 도' 정도가 아닐까 싶다.

 

주역의 과학성을 상징체계에 의지하여 설명하려 했던 책이었는데, 비교적 재미있었다.

 

이 책은 64괘에서 배우는 자연의 지혜란 부제로 풀이되고 있는 바,

주역은 자연의 지혜를 배우기 위하여 64괘를 활용하고 있는 체계이며, 그것은 '삶의 법칙'을 찾으려는 긴 여정의 시작일 뿐이라는 제목으로 명쾌하게 내용을 요약하여 준다.

 

춘추전국시대의 피바람이 불던 시절,

진시황은 황제의 나라인 '진'을 건국한다.

그러나, 각 지역에 할거하던 호족들을 견제하려 지나친 순수(돌아봄)에 몰두하다 과로사하고 나라는 망한다.

진시황이 국가를 다스리려하였을 때 내세웠던 프로그램은 토목공사를 통한 노동력 창출로 인한 경제 부흥이었을 것이고,

그 결과 만리장성, 운하 등도 건설붐을 이루었을 것이다.

 

진시황이 오랑캐 호(胡)자를 두려워하여 만리장성을 쌓았으나, 자식(호해)때문에 망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진시황을 타산지석 삼아 이후의 정권을 잡은 한나라는 단순한 '프로그램' 차원에서 경제부양을 시켜봤자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중앙집권을 위한 봉건제, 군현제 등을 실시한다. '시스템'의 변화가 체제 유지의 동력이 됨을 생각했을 것이다.

 

주역은 '우발성'으로 점철되는 인간의 운명을 단순한 '프로그램' 하나로 그때그때 넘기는 고식지계를 거부한다.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일들은 어떤 '시스템' 속에 내재된 법칙이 있을 것이며,

그 법칙을 알아내서 대비하는 것이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인간의 자세를 결정하게 하자는 것이다.

 

장자의 제물론에 조삼모사 이야기가 나온다.

송나라(모지란 놈은 맨날 송나라야 ㅋ) 저공이 원숭이한테 먹이가 부족하게 되자,

앞으론 아침에 3개 저녁엔 4개 주겠다 했더니 원숭이가 화를 냈고,

저공이 다시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를 제안하자 원숭이가 좋아했다는 이야기다.

 

보통 조삼모사는 조령모개, 임기응변으로 남을 속임, 협잡꾼 등으로 쓰이기 쉬운 말이지만,

장자의 원문에는 이야기 뒤에 이런 구절이 덧붙는다.

 

명분과 실질이 변함이 없는데 기쁨과 노여움이 일게 되었다.

이는 시비에 구애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시비를 떠나 조화롭게 하고 도리에 맞게 처신한다.

이러한 것을 양행(兩行)이라 한다.

 

'먹이가 부족하게' 된 시대.

한국은 비정규직을 대거 양산한다.

그래서 노여움이 하늘을 찌르지만, 권력자들은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성인이라면, 양쪽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그것이 <和>일 것이고, <不同>일 것이다.

양편이 모두 살아야 하는데, 그것은 의사소통에서 온다는 이야기겠다.

원숭이들이 화를 낼 때, 그들의 의사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정현종의 시 중에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시가 있다.

사람에겐 가지 못한다. 내거 너일 수 없고, 네가 나일 수 없다.

그렇지만, 군자는 '네가 이만큼 와, 내가 이만큼 갈게, 우리 섬에서 만나자'하는 '화'를 활용한다면,

소인은 '일로와 인마, 짜슥이 죽어 봐야 저승을 알지?'이렇게 자신과 같지 않은 존재를 처벌한다.

 

주역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 통하면 오래 간다'는 말이다.

조삼모사에서 변화의 '양행'이 상생의 길이 되고 소통이 되어 오래간다는 이야기이고,

사람들 사이의 섬에 가려는 자세가, 소통과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이야기겠다.

 

주역을 점치는 책으로 치부하기엔 소문이 너무 많이 났다.

특히 공자가 죽간으로 된 주역을 읽는데, 하도 여러번 폈다 접었다 해서 세 번이나 줄이 끊어져 새로 가죽끈을 묶었다는 위편삼절의 책이다. 공자가 머리 싸매고, 주역의 <시스템>적 사고를 국가 운영에 도입하려고 골머리를 앓았단 근거겠다.

 

주역은 괘와 효의 풀이를 통하여 삶의 기운생동의 법칙성을 풀이하려는 시도다.
그 풀이에는 무식한 놈도 알아먹을 수 있는 <형상>을 들이미는데,

그게 관조의 법칙이다.

원리를 형상을 바라보고 비춰보는 데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그 비유가 워낙에 상징성이 강하기때문에, 이현령비현령이 되어버릴 수도 있지만,

서양의 생각이 이원론 또는 사원소론 정도로 분화되는 데 비하자면,

주역의 64괘의 384개의 효를 설명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사고의 증폭을 뒷받침하는 시스템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네 개의 화구로 불을 때던 중국의 봉수대와 다섯 개의 화구를 갖춘 조선의 봉수대가

약속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16개와 32개로 엄청난 차이를 보이던 것에 비하자면,

이원론이나 사원소론에 비하여 주역의 괘사와 효사의 <상징성>이 가지는 힘은 가히 폭발적이다.

 

 

    연기의 도시, 중국 옌타이(燃台)의 봉수대                                   한국 천성산의 봉수대

 

 

 

그런데 384개의 효사가 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마치 한글의 천지인 세 가지 획으로 한국에서 발음되는 21개의 모음을 이어 붙이는 마법처럼,

효들이 아래위로 뒤집히기도 하고, 아래위의 괘가 뒤바뀌는 연상작용도 의미를 가진단다.

더 환장하겠는 것은, 비슷한 효들이 이어져 있으면, 뭉뚱그려서 이건 하나야~ 이렇게 보는 호연지가가 담겼으며,

여섯 개의 효 중에서 3-5효와 2-4효를 취하여 변화를 이끌어나갈 수 있음까지 상상한다면,

이건 뭐, 무한대의 경우의 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음양에서 사상으로 팔괘까지 퍼뜨린 뒤에 다양한 운용법을 활용하여 태극의 변화 원리를 하나의 원리 속에 꿰뚫으려 한 방대한 사고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야말로 끊임없는 '예스'와 '노'의 길을 따라 걷게 되는 알고리슴의 지루한 순환과 전진을 나는 주역 속에서 본다.

'노'의 렉에 걸린 알고리슴의 지루한 반복은 어느 값이 채택되는 순간,

'예스'의 수로를 타고 미끈하게 다음 단계로 전진한다.

그러나 다시 '노'의 반복 속으로 빨려들게 되는 컴퓨터의 원리가,

상징적으로 본다면, 인간의 시지프적 삶과 상통하는 거나 아닌가 싶다.

 

 

주역은 우리에게

 

네 마음이 저 자연의 영원한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고,

네 마음은 저 천지와 일월의 움직임에 따른다고 가르쳐준다.

점을 묻는 것은 자연의 흐름을 다시 음미하여,

그 안에서 마음의 있는 그대로의 흐름을 찾아내고 확인하는 행위이다.

주역의 괘들은 모두 역,

즉 한번 음이 되었다가 양이 되는 자연의 변함없는 흐름이 자연이나 인간의 마음 모두를 관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울처럼 비춰보여주고 있다.

자연의 흐름이 괘를 낳고, 점을 쳐 그 괘를 얻어,

그것의 의미를 묻는다는 것은

내 마음이 지금 어느 때에 있는 것이고, 어디로 변해갈 것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통해야 할 곳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멈춰야 할 곳에 서있는 자신을 반견한다.

통하지 않고 서있는 자신을 뉘우치고,

 

멈춰서는 안 되는 자신을 독려하게 된다.(229)

 

 

그래서 주역은 개인적인 삶에도 중요한 관조의 요소를 부여하기도 하는 셈인데,

솔직히 그 많은 원리들을 읽어나가는데 나는 게을렀다.

이 책만으로 그 원리들을 이해하기는 힘들다고 판단했으므로, 그 부분은 스킵하였다.

상세한 내용은 주역1,2와 계사강의를 더 읽는 수밖에 없다.

 

거북점은 '확정적인 상징'이며 주역점은 '오르고 내리며 가고 오는 상징, 승강왕래'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주역의 힘이고, 원리의 탁월성인 지점이다.

 

심리학자 '융'이 주역에 빠진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mbti처럼 간단한 도구로 인간을 이해하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 마음 나도 몰라~ 이런 것이 인간이지, 나는 내향성이야, 라고 단언할 수 있는 스타일은 없는 셈이다.

 

 

오직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으며,

 

자신에게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 지를 생각하지 좋아하는,

 

깊이 생각하고 되돌아볼 줄 아는 사람들을 위해 적합한 책.(337)

 

 

 

이라고 융은 기꺼이 주역의  판촉 사원이 된다.

 

 

 

주역의 상징성이 다양하다는 것이 장점이 된다는 주장에,

그것이 무슨 법칙성이냐는 비판이 붙을 수 있다.

저자는 이런 반박으로 주역을 감싸안는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모시고 와서...

 

은유는 하나의 사물에 그것과는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은유에 정통하는 것이다.

이것만은 다른 사람에게서 배울 수 없는 것이며,

천재성의 징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훌륭한 은유는 서로 다른 사물들의 유사성에 대한 '직관적 지각'을 함축하기 때문이다.(시학)

 

상징성의 관조로 이뤄진 물상, 그리고 변화의 방법론인 호체, 추이, 변효 등의 상세한 설명은 어렵다. 스킵이다. ㅠㅜ

그렇지만, 물상, 호체, 추이, 변효 등에서 주역의 활용 방안은 무제한으로 메가톤급 폭발력을 발휘한다.

 

융의 관심은 마음의 고통에 대한 치유,

그를 위한 자각, 결국 마음을 찾아나서기를 권유하고, 자각하여 삶을 온전히 누리라는 제안을 하는 셈이다.

 

융의 주역에 대한 접근은

마음의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자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자각이란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항상 '각성'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깨어있다'는 비유는 여기에 참 적절한 표현이다.

대부분 잠들어 있는 우리의 모든 생각과 움직임이 밝게 자신에게 알려질 수 있다면,

우리가 가진 대부분의 병적 조건들은 그 자체로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고통이 사라진다는 것은 고통이라는 실체가 파괴되고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원인을 알기때문에 더이상 고통으로부터 연유되는 불필요한 삶의 짐을 지지 않고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깨어있는 우리들은 슬픔때문에 슬프고,

기쁨때문에 기쁘며,

노여움때문에 노여워하고

즐거움때문에 즐거워할 수 있다.

그 느낌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슬픔과 분노를 감추거나 은닉하고, 다른 대체물로 그것을 소외시키는 몽매한 짓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울고, 웃으며, 기뻐하고 화낼 줄 아는 인간이 되자는 것이 그네들의 최상이지만 평범한 목표이다.(421)

 

자신의 삶을 대체할 수 있는 시뮬라시옹은 없다.

시뮬레이션 게임 속에서, first-person shooter (FPS) 게임처럼 자신이 주인공인 것처럼 들썩거려 봤댔자,

또는 롤플레잉 게임(RPG)처럼 특정한 능력을 구비하여 아무리 기를 쓰고 용을 쓰며 만렙이 되어봤댔자,

본인은 소외될 따름인저.

 

이 책은 주역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알아듣겠는 부분은 밑줄 그어가며 공부하고,

아, 쫌 복잡한데, 하는 부분은 스킵해서 다음 챕터부터 공부하면 좋을 것 같다.

도움이 되고 재미있는 부분도 있는데, 괘사의 물상 설명이나 특히 효사의 호체, 추이 등은 지나치게 깊이 들어가면 머리가 아프다.

머리 아픈 부분은 뛰어넘고, 취할 부분은 취할 수 있다면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다 읽고 뒤표지를 보니 'CEO를 꿈꾸는 리더라면 그 어떤 책보다 주역을 먼저 읽어라!

리더의 안목을 높여주는 행복한 주역읽기'라고 상업적 문구를 붙여 두었다.

ㅋㅋ 아마 실패했을 확률이 높다.

왜냐면, 그런 리더들이라면, 본제목과 부제에 그 구절이 적힌 책들을 샀을 것이기 때문이다.

리더들이 이런 변화의 원리를 공부하면서, 세상 변하는 걸 탐구한다면 아, 이 또한 아름답지 아니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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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점, 글 중간에 작게 삽입된 괘들이 이어졌는지 끊어졌는지 분간이 가지 않는 것들도 많아 읽기 곤란했다.

 

그리고 맨 뒤에 덧붙여둔 (455-) 괘사표는 복사해서 붙여놓고 공부하기에 좋은 도표인데,

화수기제, 수화미제는 좀 그렇다.

불이 위에 있고 물이 아래 있으면, 불은 훨훨 날아가고, 물은 더 아래로 갈앉는다.

가정이 이러면 절단난다. 남편은 바람다고 아내는 우울증 거리는 셈이다.

불이 아래 있고 물이 위에 있어야, 서로 <소통>하게 된다는 것이다.

 

화수미제이고 수화기제여야 할 것이 그 뒤편의 460쪽 그림에서도 화수기제, 수화미제로 그려져있다.

그 도표에서도 선이 가늘어 맘이 쓰이고 계속 불편했다.

 

427쪽에 호체괘를 호괘 분석이라 쓰고 있다. 줄여서 그렇게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색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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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중과 공자 - 패자의 등장과 철학자의 탄생 제자백가의 귀환 2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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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이라고 하면, 당연히 '공자'부터 시작해서 아류에 대한 설명으로 끝날 것으로 상정하기 쉽다.

그런데, 강신주가 여기서 '관중'을 맨 앞에, 그것도 공자 앞에 붙인 이유가 무엇이냐.

그걸 궁금하게 생각하면서 읽을 수밖에 없다.

 

관중이라고 하면 보통 관포지교에서 처음 듣는 이름이다.

관포지교. 관중과 포숙의 사귐.

그런데 사기에 보면 포숙이 관중을 이끌어 주었는데 관중이 제일 잘나가~ 하면서,

줄을 제대로 선 것이다.

줄을 선 건지, 최초의 패자라고 하는 제나라 환공을 만들어 낸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혼란의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에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등장했듯이,

혼란의 중원에서 관중의 정치론이 등장한다.

관중의 정치론은 패자를 만든 뒷받침이 되었고, 이후 제자 백가의 롤모델이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관자의 '목민'에는 '주는 것이 얻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국인'들의 귀족적 삶과는 분명히 다른 '민'의 삶을 직시한 것이다.

근대 국가처럼 리바이어던이란 괴물의 실체에 대하여 무지했던 '민'들은

주는 것 없는 군주와 귀족들을 따르지 않는 것이 상례였을 터.

 

그래서 인기있던 관중의 철학 뒷편에서 늘 따돌림당하던 철학이 공자의 철학이었다.

관중처럼 대박을 칠 날을 기다리던 공자의 논리는 '참아야 하느니라'였다.

같은 정치철학이지만,

주의 예를 핵심에 놓고서,

권력자들에게는 '극기복례'를,

민중들에게는 '살신성인'을 부르짖던 인기 꽝이던 철학자 공자.

 

정치적 좌절에서 비롯된 예와 인의 철학, 극기복례와 살신성인의 철학이 어찌하여 춘추전국시대를 마치고

마침내 패자의 정치철학이 되어갈 수 있었던지를 추리해내는 강신주의 독서력은 치밀하면서 박진감이 있다.

 

이 책의 참고문헌 목록에서 읽을 수 있듯이,

그의 이 시리즈를 읽어내려면 중국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또 사마천의 사기로부터 규정지어진 공자에 대한 찬양일변도의 전통에 물음표를 찍을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다음 권을 기다리면서 시간이 나면 다시 읽어보고 싶은 구절들이 많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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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2-02-06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신주 교수는 확실히 글빨이란게 있는거 같아요. 왠만한 소설보다 훨씬더 읽기 쉽게 되있더군요. 즐겁게 다음 책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글샘 2012-02-08 22:12   좋아요 0 | URL
이책 재밌죠.
요즘 아트 앤 스터디의 강신주 강의도 듣고 있는데... 같이 들으면 도움이 된답니다.

아무개 2012-02-09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강의에 대한 정보는 어디서 접할수 있는건가요 늘 뒷북만 둥둥~ 울리는 느낌입니다 ^^:::

글샘 2012-02-09 22:14   좋아요 0 | URL
세상엔 넘치고 넘치는 정보의 홍수죠.
저도 잘 몰라요.
우연히 얻어 걸리는 연수들이 이렇게 들리는 거죠.
찾으면, 찾아 집니다.

2012-02-09 09: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2-02-09 22:52   좋아요 0 | URL
조심하세요! 돈이 너무 많이 들어요. ㅎㅎㅎ
 
처음 읽는 일리아스
호메로스 외 지음, 마이클 J. 앤더슨 엮음, 김성은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호메로스 찜질방이라고 있다.

광안리 해수욕장 왼켠 치우친 곳에 호메로스 호텔 5층에 가면 태평양을 감싸안고

광안대교를 배경으로 쉴 수 있는 찜질방이 있어 풍광이 멋지다.

워낙 유명하여 방학이면 전국 각지의 젊은 청춘들이 득시글거려서 좀 번잡한 곳이기도 하지만,

파도가 밀려드는 바닷가를 보면서 쉬는 맛이 좋은 곳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서사시'이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서정시'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시를 내용상 '서사시, 서정시, 극시'로 나누는 데 나는 반대다.

암송의 시대에 '서사시'가 있었고,

그 후대에 그리스의 '비극'이 시적인 가사로 풍요로움을 누렸으며,

근대에 서정시가 발달하게 된다.

시를 이렇게 분류하는 것은, 마치 세계에는 그리스와 로마와 미국이 있다고 나누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렇게 나누면 한국의 시에도 '서사시, 서정시, 극시'가 있어야 할 것처럼 느껴지는 묘한 모순이 생긴다.

형식적으로 '정형시, 자유시, 산문시'로 나누는 것 역시 우습다.

한국에는 '정형시'가 없었다. '시조'가 비교적 정제된 운율을 가지고 있었지만, 변화의 묘가 심했다.

종장 첫구 외에는 2~6자로 변형이 가능한 정형시? 큭, 이다.

한시나 소네트를 읽은 사람이라면 그런 소리 하면 아니 된다.

 

그 유명한 서사시 일리아스를 읽기가 쉽지 않다.

나도 책은 사둔 지 오랜데, 아직이다.

그래서 처음 읽는 일리아스를 읽었다.

 

이 책의 장점.

각 챕터의 앞에 간단한 '줄거리'를 달아 주어서 기나긴 이야기의 어디쯤을 항해하고 있는지 알려준다.

그리고 '인물'들의 관계에 대하여서 짧게나마 설명을 붙여 주어서 이해를 돕는다.

무엇보다 줄글로 된 일리아스에 비하여 이 책은 도자기에 새겨진 그림들을 통해 도판을 제시하여 이미지화에 도움을 준다.

 

현대에 일리아스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플라톤도 일리아스의 표현이 잔인하고 무도하여 가르치지 말자고 하지 않았던가.

 

먼저 드뤼옵스의 목을 찔렀다.

다음으로 데무코스의 무릎을 창으로 쳐서 꺾은 후에 가슴을 내리쳐 목숨을 앗았다.

또 비아스의 두 아들을 창 하나로 꿰어 버렸다.

알라스토르의 아들 트로스가 앞뒤를 헤아리지 못하고 혹 살까하여 아킬레우스의 무릎을 붙들고 목숨을 애걸하고자 했다.

그러나 광포한 아킬레우스는 그의 간을 찔러,

흙먼지 속에 쓰러져 피흘리며 죽어가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는 에게클로스의 정수리를 박살냈으며,

그런 다음 데우칼리온의 팔을 찔렀다.

데우칼리온은 옴짝달싹도 못하고 그저 하릴없이 서 있었고, 아킬레우스가 목을 쳐 머리통을 멀리 내동댕이 쳤다.

그러자 척추에서 골수가 흘러나왔다.

시신이 땅바닥이 다 떨어지기도 전에, 아킬레우스는 리그모스를 창으로 꿰뚫어 전차에서 떨어뜨렸다.(337)

 

아킬레우스는 그에게 달려들어 배를 가르니 창자가 쏟아져 나왔다...

그는 아스트로파이오스의 시신을 뱀장어와 물고기 떼가 포식하도록 버려두고...(346)

 

뤼카온, 트로이의 목마 등 서양 문학의 자양분이 된 서사시이므로

유럽 여행을 앞두고 반드시 읽어보야야 할 책이기도 하다.

지적으로 줄거리가 필요한 사람이라면 토마스 불핀치의 만화로 된 책을 읽어도 무방하겠다.

 

그러면, 이 서사시를 읽어 도움이 되는 것은 어떤 걸까?

고대인들의 사고 방식 속에 드러나는 '신과 인간'의 결합.

인간의 삶에 무시로 끼어드는 신들의 <보호>와 <벌>의 판단하기 어려움.

인간 있는 곳에 사라지지 않는 '전쟁'에 대한 생각...

'영웅'이 있는 곳에 이름도 존재하지 않는 수많은 '병사들'의 존재감...

 

이런 것들을 고대인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고,

고대의 유물들과 고대의 역사 역시, 현대인들의 그것 못지않게 소중한 것이었음을 들려주는 이야기는 아닐는지...

그래서, 호메로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인간은 발전하는 역사를 가진 존재가 아니다.

그저 인간은 거기 '존재'하는 것일 뿐... 임을 배울 수 있다면 또 하나의 수확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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