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초월한 삶의 교과서를 한글로 만나다' 『한글 논어』서평단 당첨자를 발표합니다.
한글 논어 - 시대를 초월한 삶의 교과서를 한글로 만나다 한글 사서 시리즈
신창호 지음 / 판미동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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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벌써 시도를 요약한다.

'한글 논어'라...

 

보통 논어라고 하면,

공자님 말씀이고, 고리타분하고, 산만한 한문문장이 난해한 책으로 여기기 쉽다.

또 실제 그러하다.

맹자나 노자, 장자 들에 비하면, 논어는 특정한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기에는 너무도 잡다한 주제들이 등장하고,

그야말로 '논'한 것과 '어'- 말씀하신 것이 들쭉날쭉 등장한다.

 

그래서,

논어를 처음부터 펼치고 들면, 1편 학이를 다 읽기도 전에 졸기 쉽다.

 

그리하야, 계륵같은...

먹자니 성가시고, 먹을거리를 취하기 힘든데, 버리자니 이거 너무도 중요한 텍스트라 어쩔 줄 모르던 차에,

팟캐스트의 <ebs 고전읽기>에 2주를 할애하여 10시간이나 '논어'를 읽어주던 방송을 출퇴근길에 들었다.

명로진, 권진영이 진행하는 이 방송으로 고전을 접하는 것도 좋지만,

논어처럼 특정 주제를 뽑아가며 읽어야 하는 책은

이렇게 읽어주는 동기를 만나게 된 것이 참 행운같은 기회로 여겨진다.

 

나처럼, 논어 - 그녀에게 관심은 있으나,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존재로 여겨질 때,

두 눈 딱 감고, 팟캐스트를 활용해 본다면,

권진영 희극인이 말한 것처럼, <논어, 참 쉽죠잉~>, <친근하고 편안해져요~>

이런 느낌과 함께 논어를 접할 수 있을 듯 싶다.

 

논어는 그야말로 잡다하다.

한문 문장 역시 풀이하기 쉽지 않다.

유명한 구절들 몇 개를 안다고 논어를 읽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책의 장점은, 한문에 얽매이지 않고 논어를 읽을 수 있게 도와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굳이 한문 구절 하나하나에 구속되지 않고 알아듣기 편한 말로 풀고 있다.

물론, 해석이 사람마다 달라질 수 있고, 오역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한글 논어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은, 한문 공부나 논어 강설로 얻는 것에 비해 적다고만 여길 수는 없을 게다.

 

요즘 시국이 시국인지라...

이번에는 읽으면서, 정치인의 자세와 교육에 대하여 만난 구절들이 가슴에 쏙 파고 들었다.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여 부조리한 사람의 윗자리에 배치하면

국민이 따르게 됩니다.

반대로 부조리한 사람을 높은 자리에 등용하여 정직한 사람 위에 쓰면 국민이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위정편, 19장, 105)

 

장관할 사람이 없어서 청문회를 약화시켜야 한다는 그야말로 어불성설을 지껄이는 자들이야말로,

논어를 외우게 해야할 노릇아닌가 싶다.

 

활을 쏘는 목적은 과녁의 가죽을 뚫는 데 있지 않다.

왜냐하면 활쏘는 사람의 힘이 같지 않고 실력에 차등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옛날부터 내려오던 활 쏘는 방법이다.(팔일, 16, 123)

 

교육을 부자에게 유리하게 하는 것은, 힘센 사람이 가죽을 뚫도록 가르치는 일이나 한가지다.

힘이 약해도 누구나 골든존에 맞히기만 하면 되는 것이 교육이다.

굳이 과녁을 뚫도록 경쟁시키는 것에 핵심이 있지 않다.

 

아침에 세상 사물의 이치와 사람의 길이 무엇인지 듣고 깨닫는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137)

 

조문도 석사가의... 유명한 말이다.

아침에 진리를 깨닫는다면, 진리를 낮동안 음미하고, 후배에게 전수하고, 실천한 뒤에,

저녁에 죽는대도 좋다고 했다.

 

그런 자세로, 죽음을 두려워 말라는 뜻이렷다.

 

이 책에서는 '군자'라는 말을 <참된 사람>, <정치지도자> 처럼 풀었다.

그렇다.

<군자>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어떻게 풀든 우리말로 옮겼어야 할 말이었다.

영어로 '뉴욕'을 굳이 옮길 이유는 없지만, '세렌디피티' 같은 것을 그대로 쓰면 번역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또하나의 돋보이는 단어는 '인'이다.

논어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한자인 '어질 인 仁'

 

<포용력이 있다>거나 <도덕성이 높다>처럼 때에 맞게 옮기고 있다.

그것을 꼭 옳다, 그르다고 시비하기보다는,

어떤 것이 요즘 사람들이 쓰는 용어에 근접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번역자의 고충이자 존재 이유이리라.

 

공자 시대의 '인민'과 '선비 사'는 상당히 계급적 관점을 가진 어휘들이었을 게다.

사람 인, 은 다만 인간 존재가 아니라, 지배계층이기 쉽다.

백성 민, 은 피지배계층에 어울리는 사람들일 게다.

선비 사, 는 지배계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관료집단을 일컫는다. 사와 대부를 합쳐 사대부라 불렀다.(사에 비하면 대부가 관직에 진출한 경우를 말했다.)

 

학문으로 시작한 논어는 '학이시습지'로 출발한다.

마지막 장은 '요왈'편인데, 그 3장은

'부지명 무이위군자야

부지례 무이립야

부지언 무이지인야'...로 마친다.

 

이 부분은 해설이 조금 미흡해 보이기도 한다.

 

자연의 질서를 이해하지 못하면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사회의 도덕을 알지 못하면 세상에서 떳떳하게 행세할 수 없다.

자연의 질서와 사회의 도덕을 체득하여 적용하지 못하면 인생을 경영할 수 없다.(467)

 

이렇게 해설했는데, 마지막 구절과 찰싹 들러붙은 해석이라 보기 힘들다.

 

참고로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책, <논어, 이산동양고전>에서는

 

천명의 존재를 깨닫지 못한다면 학문을 한 군자라고 할 수 없다.

예를 배우지 않으면 독립할 수 없다.

말하는 법과 듣는 법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분별할 수 없다.(311)

 

김형찬의 책, <논어, 홍익출판사>에서는

 

천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고,

예를 알지 못하면 세상에 당당히 나설 수 없으며,

말하는 법을 알지 못하면 사람의 진면목을 알 수가 없다.(215)

고 되어 있다.

 

아무튼, 순리를 어겨 가며 쿠데타를 일으킨 자나, 부정선거로 권력을 거머쥔 자는 지도자가 될 수 없고,

예를 어기며 거짓 참배를 하거나, 거짓 눈물을 흘리면 똑바로 서기 힘들고,

제대로 말할 줄 모르는 지도자라면, 남(고위 관리)을 판단하는 능력이 없다는 뜻은 이러구러 통한다.

 

앞부분의 공자 전기가 단출하게 나와있다.

굳이 읽지 않아도 논어 즐기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통일할 곳,

17쪽과 18쪽의 공자 아버지 이름을 '숙량흘' 또는 '숙양흘'로 뒤섞어 쓰고 있다. 이는 이름일 따름이니 굳이 두음법칙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보면, 숙량흘로 통일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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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논어
주대환 지음 / 나무나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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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과 좌익(좌파)가 통하게 된 것은 러시아 혁명에서 백군과 적군의 대립이 최근 대립쌍이겠지만,

한국에서 흔히 '좌빨'이라는 이름으로 좌파를 욕되게 하는 자들을 본다면,

빨강과 좌익이 아직도 이렇게 찰싹 들러붙어서 '낙인'처럼 보이는 곳은 드물지 싶다.

 

좌파는 강한 진보를 추구하고, 구체제를 수호하려는 수구 세력과 대립한다.

새로운 이론을 주장하고, 기존의 이론에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

한국에서처럼, '돈 지키기'만을 목표로 하는 당파가 '빨간' 옷을 입고 나온 것을 보면, 웃겨도 한참 웃긴다.

아마, 민주당이 빨간 옷을 입었더라면... 글쎄, 벌써 여럿 죽어 나갔을 것이다.

 

이 책은 표지가 과하게 붉다.(그런데 염료가 과다한 것인지, 화학 염료 냄새 때문에 아직도 머리가 아프다.)

내용은 그다지 붉지도 신선하지도 않다.

 

다만, 저자가 오랜 기간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일선에 섰던 사람이라,

'붕우'를 '시민 단체' 같이 바라보는 시선일 따름이다.

 

과오를 저지르고도 고치지 않으면 그것을 과오라고 한다.(47)

 

논어는 워낙 난삽한 책이어서, 일관성을 찾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논어에서 가장 핵심적인 한 마디는, '일이관지'다.

일관된 사상을 가지고 사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소인과 군자, 지자와 요자 등 많은 대립항을 상대적으로 설정하는데,

그 차이는, 소인은 모르면서도 아는 체 하고,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치지 않는다.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세 가치,

자유, 평등, 연대 중에서 연대의 정신을 동아시아 사회에 접목할 역사적 백미로서 인을 재발견해야 한다.(90)

 

어차피 물 자체는 인식할 수 없다.

다만 최선을 다해서 관찰하고 사색하여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라.(일이관지)(132)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꼽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지만,

'각개 약진'만이 남아있는 무한 경쟁을 극복하고 '연대'의 가치를 발견하는 전통을 세워야 한다.

이것 없이는 미래가 없다.

 

이 책의 가치라면, 작가가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을 정리하는 도구로 논어를 활용했다는 것이다.

논어를 공부하려면, 이 책보다 나은 책이 많을 것이다.

다만, 논어를 그저 옛날 사람들의 옳은 소리라고 일방적으로 들어라~ 한다면 문제가 있다.

그러니, 이렇게 자신의 뜻에 터하여 일이관지하는 자세를 보는 일이 중요하겠다.

 

 

온고이지신, 술이부작...

이런 말로 유명한 책이 논어이다.

옛것을 기초로 새로운 것의 지식을 넓히고,

다만 서술할 뿐, 새로 만들 것은 없는 것이 '지식의 세계'라는 것이 논어의 전제다.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을 능사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새로 교육감이 된 사람들이 좀 너무 나서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용한 가운데서, 학교의 중심이 '승진'이나 '행정'이 아닌 '교육'과 '사람'으로 옮겨갔으면 좋겠다.

혁신 학교... 같은 걸 난 원래 믿지 않는다.

혁신은... 효율성을 위해 인간성을 버릴 때나 쓰는 말이 아니던가?

 

개혁하여 새로이 만들기보다는,

아무리 구태의연하여도 한국 교육의 장점들을 잘 살리고,

바꿔야 할 것은 구체적으로 지목하여야 한다.

말하자면, 대학의 85% 이상을 차지하는 사립대를 개혁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는 이 나라의 교육개혁은 모래성이고,

국비로 월급을 다 주는 사립학교를 공립화 하지 않고서는 끊임없이 부조리의 온상이 될 일이니 말이다.

학교 몇 개 혁신 시켜봤자, 찻잔 속의 태풍에 머물 따름이다.

 

공자가 그토록 사랑하던 제자, 안회는 '불천노 불이과'라고 하였다.

노여움을 옮기지 아니하고, 허물을 두 번 다시 하지 않았다.(206)

 

속된 인간들은 자신의 노여움을 남에게 푼다.

허물을 또 저지르고 반복한다.

공부하는 인간이라 보기 어려울 것이다.

 

'정명'이라는 말은 '이름을 바로잡는다'는 말이다.

북한은 인민 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이름이지만, 김씨 왕조이고,

남한은 민주 공화국이라지만, '아직도 이조 오백년은 끝나지 않았다(신동엽, 종로 5가)'

 

이 책을 읽다 보면, 고전을 읽는 느낌과 함께,

글쓴이의 생각을 논어와 함께 풀어내는 부분도 많다.

고전이란 무릇, 자신의 생각을 풀어낼 때,

새로운 것을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옛 것으로 서술하는 일이라는 의도와 잘 맞는다.

 

그래서 이 책을 읽노라면, 분노한다.

왜 매일 똥통의 구더기처럼 굼실거리는 것들이 망언을 쏟아내고 있는지,

이 땅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부패한 곳인지... '곧지 못한' 곳인지... 돌아보게 해서 그렇다.

 

교언영색이 선의인이라.(220)

 

말을 교묘하게 꾸며서 하는 자는 어진 자가 드물다.

 

요즘들어... 논어의 이런 말이 은근히 비판하는 것은 '노자'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말을 '교묘하게 하는 이'로는 노자만한 캐릭터가 없기 때문이다.

상선약수라...

우리가 사소하게 얕잡아 보는 것을 일컬어 '물로 보냐?'고 하는데,

그 흔한 물을 불러 '가장 좋은 것'이라 불렀으니 그 말의 교묘함은 비할 데가 없다.

 

그래서, 지자요수요 인자요산이라...

지자는 물을 좋아하지만, 인자는 산을 좋아한다.

이렇게 은근히 노자의 사상을 에둘러 '지자'에 머물린 것이나 아닐는지...

 

아니면 말고~ ㅋ

 

자 절사러니, 무의, 무필, 무고, 무아...이다.

선생님은 네 가지를 끊으셨다.

뭔가 하려는 뜻이 없고, 반드시 어떠해야한다는 마음이 없고,

고집하는 마음이 없고,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없으셨다.(243)

 

이런 부분은 어쩌면 후대에 종교적 관념과 결부지어,

금강경의 '공관'과 관련된 부분일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논어를 학습하기에 좋은 책은 아니다.

다만, 이렇게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풀이하는데 논어를 이렇게 엮어 넣으려면,

상당한 식견을 바탕으로 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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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세 만화 삼국지 1 - 난세의 영웅들 이현세 만화 삼국지 1
이현세 글.그림 / 녹색지팡이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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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게 워낙 팍팍한 날의 연속이고,

어떻게 하루 살고 나면 다음날도 역시 팍팍하다.

 

이럴 때, 선이 굵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가슴 속 서늘한 죽비 소리를 얻을 수 있다.

 

의리를 지키고, 삶의 줏대를 지키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현세의 삼국지가 만화로 나왔는데,

이렇게 간추린 만화로 읽으면서 놓치는 것도 많겠지만, 얻는 것도 많다.

우선 시대적 배경을 쉽게 간추릴 수 있고,

졸가리를 훑으면서 그 많은 사람들의 관계를 정립할 수 있다.

 

물론, 상상력을 통해 전장의 장수들의 심리전과 박진감 넘치는 삶의 현장을 느끼는데만은 못하겠지만...

 

이제 2권까지 읽었는데,

황건적의 난이 어떤 시대적 배경을 통해 일어난 것인지,

만화로 읽으면서 좀더 금세 읽을 수 있어 좋았다.

 

아이들에게 특히 중고생에게 열 권이나 되는 장편대하를 읽게하긴 쉽지 않다.

그렇지만 역사 속에 스러지는 사람들의 면면을 읽게하려면,

이런 만화 정도는 옆에 두고 틈틈이 펼쳐보게 하면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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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빛난다 -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서양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
휴버트 드레이퍼스 외 지음, 김동규 옮김 / 사월의책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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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제는 all things shining이다.

에필로그에서처럼 '빛나는 모든 것들'이 옳다.

모든 것은 빛난다는 말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세상은 너무 구질구질하고 더럽기 짝이 없어졌다는 데 있었다.

이 책의 부제는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서양 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라고 되어 있다.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라는데, 모든 것이 빛날 수 있겠는가?

아무리 허무하고 무기력한 시대라 해도, 빛나는 것들은 있게 마련이다.

이 책은 폐허처럼 우중충한 지구별에서 <아직 남아있는> 그런... '빛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스승님 : 제자들아. 이제 너희는 세상에 나가라.

    세상의 모든 것들이 빛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너희들의 인생은 복될 것이다.

  ........... (오랜 후)..........

제자 1 : 나는 세상에 있는 많은 빛나는 것들을 보는 법을 배웠지. 하지만 여전히 불행하네.

     슬프고 실망스러운 것들 역시 많이 보았기에.

    솔직히 모든 것들이 빛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없었으니 말이야.

제자 2 : 모든 것들이 빛나는 건 아니라네. 하지만 더없이 빛나는 것들은 존재하지.(에필로그)

 

이 책은 서양 고전의 몇 구절을 통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펼치려는 의도를 가진 책이다.

다시 말해, <서양 고전에서 삶의 의미>를 되찾고자 씌어진 책은 아니다.

부제인 'Reading the western classics to find Meaning in a Secular age'란 말은,

'세컬러'한 시대의 의미 찾기~인데, 세컬러의 의미는, 레귤러의 반의어로 <세속적인, 종교적이지 않은>이란 뜻이란다.

정해진 시각에 수도원 안에서 <레귤러>하게 규칙에 따라 의식을 행했던 반대쪽인,

세속의 <세컬러>는 종교적이지 않은~ 시대란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아야 이 책의 뜻이 통한다.

 

서양 고전을 읽고 싶어하는 독자들이 이 책을 집어든다면, 뭥미? 하고 당황할 수 있겠다.

그건 순전히 책팔이들의 농간에 놀아난 결과이니 당황하지 않아도 된다.

이 책은 재미있는 부분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서양 고전을 읽고 싶어 하도록 만들어 주는 책이라고 착각하면 안 되지만,

그런 책이라면, 이미 '로쟈의 인문학 서재'나 강유원의 '인문 고전 강의'를 우리 문화는 가지고 있으므로,

이 책은 이 답답한 시대를 살아가는 해법의 하나로 고전 몇 권 읽기를 권할 따름이다.

 

특히 모비 딕을 열심히 읽게 하는데,

모비 딕을 떠올리면서 <스타 벅스>를 상상하게 된다.

우리가 멋도 모르게 입에 익혀버린 커피맛처럼,

세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문화'에 접하게 된다.

 

서사시의 시대에는 인간이 신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모자란 존재~일 뿐이었고,

그리스 비극의 시대에는 인간의 모든 삶은 신들의 행위에 의한 결과~일 뿐이었다.

 

그 고대의 작품들에서 작가는 <퓌시스>라는 '반짝이는 생동감 넘치는 세계'를 본다.

그 세계는 <포이에시스>라는 '예술적 세계'로 반영되는데, 현대에서는 다양한 테크놀로지 등의 융합으로 이 세계가 단조롭게 한다.

그를 위해 작가는 <메타 포이에시스>의 삶을 제안한다.

<메타>란 것은 <기반>이 되는 구조나 <틀>을 읽어내는 시각인데, 그런 것들을 읽어내기 위해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의미이리라.

 

이 책에는 장자의 <모든 고전은 찌꺼기>라는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무늬만 목재인 것들을 절대로 쓰지 않는 구식 일꾼들을 안다.

그들은 숙련된 일꾼은 결심 판사와도 같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나무는 대패나 도끼 아래서 이제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성질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손으로 느꼈기에 나의 눈으로 아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 문외한에게 가르칠 수는 없다.

하지만 실제 작업을 해본 사람들만이 그것을 안다.(356)

 

장자의 이야기에서는, 목수가 일의 진실된 고갱이는 말로 전해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마님이 읽는 책은 모두 <옛날에 죽은 사람들이 지껄인 찌꺼기>라고 했다는 것이다.

작가 역시 실제로 참여해 본 사람만이 몸으로 느낄 줄 아는 세계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것은 삶의 진실에 다가가기 보다는, <장인적 기술>, <창작의 오묘함>을 드러내는 데 머무르는 인용이다.

장자보다 한참 격이 떨어지는 해석이다.

그리고 고전에 대한 인용에서 일관성 없이 프로 야구나 커피 등으로 널뛰는 이야기를 읽는 일은 싱겁기도 했다.

 

올해 최고의 책으로 꼽을 만한, 뜨겁고 아름다운 책.

이 책에서 강력하게 던진 질문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허무주의와 싸우며 찬란하게 빛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바로 그것이다.(뒤표지, '삶을 바꾸는 책 읽기' 저자)

 

이런 사람들이 싫다.

과연 이 책을 읽고나 이런 말을 썼던 걸까?

이 책이 정말 뜨겁고 아름다웠을까?

하긴, 저 사람은 이 책이 '빛나고' 뜨겁고 아름다웠을지 모르겠다.

그냥, 제목과 부제를 읽고 상상력을 발휘했을지도 모르겠다. 출판사의 서평 참고 자료를 읽고...

그거나 다 읽었을래나?

나는 그런 거 받으면 바로 버리는데... ㅋㅋ

 

이 책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6장의 모비 딕이다.

<서양 문학 속의 철학적 이슈 읽기>라는 팟 캐스트를 운영하고 있다 하니,

이 책은 그 강의를 어찌어찌 얽어매어 책으로 만든 느낌이다.

 

부제 그대로.... <레귤러>한 시대, 고대의 작품이나 중세의 작품과 비교하여,

<세컬러>한 시대, 현대의 작품을 읽어 보면서,

인간은 어떻게 파편화되어 왔는지를 철학적으로 읽어주는 내용이라,

철학적 기반이나 서양 고전에 대한 기본적 이해 없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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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예수 - 비교종교학자 오강남 교수의 '도마복음'풀이
오강남 지음 / 예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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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 교수의 '도마복음' 풀이

 

공관복음이라는 말도 첨 들어본 나로서는 '도마복음'은 낯설었다.

그런데 이미 서론을 읽으면서도 이 책, 교회의 고집쟁이들은 참 싫어하겠단 생각이 든다. ㅋ~

그래서 맘에 들었다.

특히 한국 교회처럼 '성장 교회주의'를 우선하는 현실을 고려하면,

이런 책들은 더 나와야 한다.

물론, 오강남 교수는 한국에서 활동하기 어렵겠다만...

 

여러분이 여자가 낳지 아니한 사람을 보거든 엎드려 경배하십시오.

그분이 바로 여러분의 아버지이십니다.(15절, 95)

 

성령으로 혹은 불로 다시 태어난 사람,

스스로 내 안의 하느님을 발견하라는 도마복음서의 취지에 따르면,

교회에 계신 하느님을 찾지 말고, 내 속에 빛으로 계시는 하느님(GNOSIS)을 깨달으라는 말이 된다고 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158)

 

이 회개는 어원적으로 '의식의 변화'를 뜻한다고 한다.

반성해서 그분의 세계에 편입되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의식의 변화 혹은 변혁의 체험'을 바랐던 분이 예수님이셨다고...

 

초기 기독교 사회에서 '도마복음'을 배격하고 '요한복음'까지 설정한 것은 의미가 깊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깨달음에 이르므로 모두 예수님처럼 자유의 사람이 되라는 '도마복음'식 기별을 받아들이는 사람보다,

예수를 믿고 은혜의 선물로 주는 영생을 강조하는 '요한복음'의 길을 채택한 사람들이 많았다.(135)

 

많은 기독교 교회들이 권력과 결탁하여 부를 누리고 있다.

첨탑이 뾰족하게 자꾸 높아지면서 진리에서는 멀어지고 있는 현실은 안타깝다.

이런 현실에서는 '요한복음'처럼 빛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보다,

'도마복음'처럼 빛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우리 스스로도 빛임을 깨닫고 이를 비추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임을 공부하는 일도 신선한 경험이다.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말을 인용하면서 종교의 기본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무엇을 해야 할까보다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할까를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

성결의 기초를 행위에다 두지 말고 됨됨이에다 두도록 하라.

행위가 우리를 성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위를 성화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본질적 됨됨이에 있어서 위대하지 못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그 행위는 헛수고에 그치고 만다.(176)

 

헌금을 많이 하고, 신도 수를 늘리기 위하여 역전에서, 지하철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람들을 보면,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할까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무엇을 할까를 골몰한다.

길거리에서 노래부르며 커피 나눠주는 '00교회' 신도들 역시 그렇다.

그들의 됨됨이가 <등경 위의 등잔> 같다면, <우뚝 솟은 바위산> 같다면,

애써 기타 튕기며 노래하고 커피 주지 않아도 교회로 사람들이 갈 것이다.

 

도마복음의 가르침에서 뭔가를 얻을 수 있다면,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 해야할 가장 시급한 일도

이처럼 종교 지도자들이 감추거나 잃어버린 '깨침의 열쇠'를 다시 찾아 활용하라는 열쇠.(207)

 

두드려야 열리고, 찾으면 구할 것인데,

무엇을 할까에 골몰하는 그들은 두드리거나 찾지 않고, '감추거나' 애써 '잃어버리는' 교회로 가는 것은 아닌지.

 

<크리스찬> 되기보다 <크리스트>가 되라

 

이렇게 가르친 도마 복음을 되짚어 보는 일은, 높은 곳에서 자기들끼리 잘 사는 신도들에게

뜨거운 죽비가 되지나 않을까?

이미 죽비따윈 두렵지 않는 단단히 걸어잠근 마음이라면, 교회는 이미 크리스찬들의 천국이 되어버린 곳인지도 모르겠다.

 

누구든지 알게된 사람은 시체를 찾은 사람입니다.(56절, 267)

 

죽음을 알고 겸허한 사람은, 삶을 속도와 성장에 무게두지 않는다.

삶의 포인트는 밀도여야 한다.

괴로운 밀도는 트라우마가 되지만, 행복한 밀도는 삶의 자양분이 되는 법.

'깨달음' 이후로는 삶이 밝고 환하게, 신 나고 즐겁게 이끌어질 수 있다.

시체를 찾은 사람이 되어라.

 

가스펠 송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한 구절

 

I once was lost, but now am found.

 

<참나>를 찾아 울타리를 떨쳐나갈 용기있는 사람.

그 사람을 찾는 성경이 <도마 복음>이다.

 

새삼, 안중근 선생의 세례명이 '도마'였음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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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14-01-02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올의 도마복음이야기(중간에 갑자기 계획이 선회했는지 1권 다음은 역주로 제목을 붙혀 나왔지요.)를 재미있게 읽고 이 책도 구입했었는데, 생각해보니 아직도 읽지를 않고 있네요. 그런데, 안중근 선생의 '도마'가 세례명이라는 건 처음 안 사실이네요. ㅎㅎ

글샘 2014-01-03 10:19   좋아요 0 | URL
도마가 영어 이름 토마스~ 같은 거래죠.
기존 교회의 성경 해석보다 진일보된 것 같아서, 시야가 트이는 느낌이 드는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