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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가 노자를 이야기한다
임어당 / 자작나무 / 1998년 6월
평점 :
절판


몇 년 전에 노자를 읽었던 적이 있다. 대학 시절 사 두었던 책으로 읽었고, 도올의 노자와 21세기를 읽었다.

대학 시절 샀던 책의 노자는 세로쓰기 책인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어서 다 읽었던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삼사 년 전에 도올의 노자를 읽었는데 왕삐가 대단하다는 이야기가 잔뜩 적혀 있고, 자기 잘났다는 이야기만 가득했다. 우리 나라의 석학(?)인 도올의 그릇이 뻔히 보이는 아쉬운 책이었다. 그래도 그 책에선 나름대로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읽어댔던 거 같다.

요즈음 이경숙의 도덕경의 도경을 쓰고 풀면서 읽고 있는데, 그런 와중에 이 책을 읽으니 정말 이해가 잘 된다. 아, 이래서 노자의 사상을 노장 사상이라고 한 거구나... 하고 깨달음이 오는 책.

노자의 텍스트를 고증하고 풀이하고, 서로 비교하고, 남들을 비판하다보면 우리같은 일반인으로서는 노자가 뭐라고 했는지는 머릿속에 남지 않고, 노자는 해석이 골때리는 책이라는 선입견만 생기기 쉬운 것 같다.

내가 읽은 두 권의 글들이 그러했듯이.

이 책에는 각 장의 처음에 노자의 한 대목이 인용되고,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 장자의 소품들을 뒤에 수록하고 있다. 그야말로 장자로 읽는 노자 공부가 되겠다.

노자의 사상은 장자에 와서 그 오묘한 구절들이 파급 효과를 얻게 되었으리라는 것도 짐작으로 미루어 볼 수 있다. 아직 멋도 모르고 읽은 내 나름의 결론이지만.

어차피 학문으로 고전을 읽는 것도 아닌 나로서는 노자에 나오는 말인지, 장자에 나오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노자의 뜬구름 잡는 듯한 <명제>들을 장자의 형상화된 <문학>으로 읽게 되어 반갑기 그지 없다.

역시 중국사람 임어당 같은 분 아니면, 우리나라에선 만나보기 어려운 책이 아닐까 한다.

이 책에서 밑줄을 긋고 싶은 욕망을 짓누르며, 백지에 옮겨 적었던 구절들을 옮겨 본다.

재산이 없는 것을 가난하다 하고,
배웠는데도 행하지 못하는 것을 병이라 한다...
세상에 영합하면서 행동하고,
친한자와 붕당을 지어서 사귀고,
남에게 내세우기 위해 학문을 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남을 가르치고,
인의를 빙자해 나쁜짓을 하고,
수레나 말을 장식하는 짓을 나는 차마 못하겠습니다.... (이거, 나를 두고 비꼬는 소리같다.-.ㅠ)

그들은 삶을 사마귀나 혹이 붙어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죽음을 부스럼이나 종기가 터져버린 것으로 생각한다.(일체 유심조 인 것을...)

도을 잃고난 뒤에 덕이 출현하고,
덕을 잃고난 뒤에 인이 생기고,
인을 잃고난 뒤에 의가 나타났으며,
의를 잃고난 뒤에 예가 크게 일어났다.(예절을 앞세우는 시대는 말세고, 의인을 숭상하는 시대는 난세며, 인자를 필요로하는 시대는 탁한 시대고, 덕이 높은 이를 필요로 하던 시대는 부덕한 시대였구나...)

최고의 완성품은 마치 모자란 듯 하지만, 아무리 써도 닳지 않는다.
가장 알찬 것은 마치 비어있는 듯 하지만, 아무리 써도 끝이 없다.
가장 곧은 것은 마치 굽은 것 같으며,
최고의 기교는 마치 졸렬한 듯하며,
최고의 웅변은 마치 어눌한 것과 같다.
고요함은 움직이는 것을 이기고,
차가움은 뜨거운 것을 이기고,
맑고 고요함은 천하를 올바르게 한다.

기계란,
쓰면 기교를 필요로 하는 일이 있게 되고,
기교를 필요로 하는 일이 있게 되면, 반드시 기교를 쓰는 마음이 있게 되고,
기교를 쓰는 마음이 가슴 속에 있게 되면, 순백의 마음이 갖취지지 않게 되고,
순백의 마음이 갖춰지지 않으면, 정신의 활동이 안정되질 못하며,
정신의 활동이 안정되지 않으면, 도를 담을 수가 없다.
나는 그 기계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워서 쓰지 않는다. (아, 나는 내가 운전 잘한다고 얼마나 잘난 체 하는 인간이었던가. 운전을 하면서 남을 위태로움에 빠지게 하고, 정신을 핸들에 빼앗겨 버리며, 툭하면 성질을 부리는 사람이 되어 버리지 않았나. 부끄러워서 쓰지 않아야 할 그 기계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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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 강의
리하르트 빌헬름 / 소나무 / 1996년 5월
평점 :
절판


주역 강의로 처음에 일반론이 간단히 펼쳐져 있고, 그 뒤로 나름대로 글을 쓰면서 괘를 활용하는 독일학자 빌헬름의 글이다.

서양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주역 해설서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초심자인 내가 읽어내기에는 상당히 부담스런 책이었다.

이 책은 64괘에 대한 이해 정도는 훤히 통달한 사람이라야 그 논리 전개를 따라갈 수 있겠다.

이제 음양 오행과 8괘에 대한 풀이 정도를 익힌 나로서는 갑자기 종횡무진 강의에서 튀어나오는 64괘의 설명에 휘둘리다 못해 중간에 접어버린 책이다.

서양인의 시각으로 주역의 세계를, 대립과 협력의 세계적 관계, 예술, 음악, 처세술과 변화 속의 불변, 형성, 나늘 버리고 나를 찾는 과정과 죽음, 부활 등의 주제에 접목 시켜 서술하고 있는 점은 서양에서는 신선한 느낌을 주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주역을 몇 년 공부하고 나서 다시 도전해 볼 만한 책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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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에 대한 46가지 질문과 대답 안티쿠스 Classic 6
한규성 / 동녘 / 199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삶의 원리를 찾아나선 사람들이 반드시 만나게 되는 책이 이 책이다. 역경은 고대로부터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책의 대표 주자로 꼽던 책이다. 올 여름에는 주역을 좀 읽으면서 보내려고 생각중이었는데, 도서관에서도 오래된 책들이 주로 꽂혀 있어서 적절한 책을 찾기 어렵다.

이 책은 다른 책에 비해서 쉽게 서술되어 있다.

여느 주역 해설서가 개념을 설명하는 데 주로 힘을 쏟다 보니 동양의 음양 오행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 독자들로서는 처음 몇 장을 넘기지 못하고 포기하게 되는 것이 상례인 듯 하다. 내가 그랬더라는 이야기다.

이 책은 아버지의 주역해설서를 아들이 읽기 쉬운 대화체로 풀어서 쓴 책으로 주역 입문서로 적절한 책일 것 같다. 내가 단정하지 못한 이유는, 내가 끝까지 읽은(물론 뜻을 알고 제대로 읽은 것은 아니다.) 유일한 역경이기 때문이다.

책의 제목과도 같이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자세히 설명하기 이전에 분위기 파악을 할 수 있도록 비유를 들기도 하고 예를 보여 주기도 하는 좋은 방법을 쓰고 있다.

전에 주역이라는 두 권으로 된 만화를 동생에게 빌려 보려 했는데, 64괘의 설명이 장황하게 시작되고 있어서 도저히 진척의 염을 낼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에서는 음양의 이치와 오행의 설명을 간단한 그림과 함께 이야기체로 풀어내고 있어서 <공부>하듯이 필기 준비를 하고 읽지 않아도 술술 읽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주역의 수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임기 응변으로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을 스스로 던지고 있다는 데 있다.

저자가 실제로 다양한 상황의 고민을 해 보았기에 적을 수 있는 글들이라 하겠다.

그러나, 역시 이 책을 읽었다고는 해도 주역의 발톱을 본 것인지 알지 못하는 지경이다.

불경을 공부하면서 만났던 끊어진 길, 길 아닌 길이 여기도 있었고, 아니 여기는 어느 경지에 오르지 못하면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길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올 여름만으로 끝나기 어려운, 씨름 상대를 하나 만난 기분이다. 옷매무새를 여미고 좀더 심각하게 만나야 할 듯한 예감으로 이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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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산책
정민 지음 / 솔출판사 / 1996년 8월
평점 :
절판


겨울 방학 전이다. 수능 마치고 좀 한가롭던 시간에 오랜만에 제대로 된 책을 한 번 읽어보리라 굳게 마음먹고 도서관에서 정민 선생님의 한시미학산책을 골랐다.

책은 500페이지에 이르는 두껍고 하드커버로 싸인 학술적인 책으로 보이지만, 구성은 말랑말랑하고 내가 기대했던대로 정민 선생님의 말투는 '~~~ 한시 이야기'와 유사하게 편안했다. 물론 내용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일단은 이 두꺼운 책이 스물 네개의 챕터로 잘 나눠져 있어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았다. 하루 한 편을 읽을 셈이었지만, 스터디 준비도 아니고 그렇게 되지 않았다. 어떤 날은 대여섯 편을 읽어대기도 했고, 어떤 글은 한 편으로 며칠을 끌기도 했다. 이것은 순전히 내 탓이지, 책의 탓은 아니다.

나는 책을 읽고 잘 깐다. 좋은 말로 하면 비판적 독서를 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비판이 올바른 비판이 되지 못하고 감정에 얽매여 디립다 욕을 퍼붓기 일쑤다. 올바른 비판이 되지 못한다는 말은 텍스트를 충실히 읽지 않고 헐뜯기 때문이다. 요즘 나오는 인문학 서적 중에서 읽다보면 짜증 나는 부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수박 겉핥기 식으로 펴내는 책들이다. 정보의 바다에 떠다니는 몇 조각의 부유물들을 책으로 엮고, 그럴 듯하게 포장하고, 그럴듯한 제목을 붙여 책이랍시고 팔아댄다. 정말 짜증난다. 내가 잘 까는 또 한 부류는 해체주의 소설이나 시집이다. 기존의 이야기 틀을 해체하는 것 까지는 좋은데, 말장난이 심하거나, 글재주만 믿고 까부는 축이 많다. 감동을 주지도 않고, 깨달음이나 깨우침을 주지도 않는데, 잘 팔린다니 읽게 되고, 그러다 보면 욕이 나온다. 나는 까고 욕하면서도 내심 찝찝했다. '임금님이 벌거벗었네.'하고 말하는 것은 상당한 위험 부담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민 선생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연암의 <답창애2>에 나오는 '눈 뜬 장님' 이야기를 빌려서, 새로운 세상이 되어 갈 곳을 모르는 우리에게 <나침반>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 나침반의 하나다. 이미 읽었던 정민 선생의 책 중에서 중복된 것도 많다. <~~~ 한시 이야기>, <비슷한 것은 가짜다>, <미쳐야 미친다>, <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에서 나왔던 이야기들이 상당히 많지만, 이 책은 그야 말로 한시 입문이라 할 만하다. 나는 한시에 관심이 많아서 전에도 몇 권의 책을 보았지만, 학문적으로 고집있는 사람들의 책들이라 내 수준에 과한 것들이었다. 정민 선생님 덕분에 한 겨울 고전의 정수, 한시를 포식할 수 있었다. 읽고난 지금도 <다시 읽고 필요한 것들을 정리해서 수업 시간에 활용하고 싶은> 욕심은 굴뚝같지만, 한 번 지나온 길을 다시 가지 않는 '한붓 그리기'와도 같은 내 독서 습관을 볼 때,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문학은 흉내가 아니다. 보살을 만나면 보살을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말처럼, 자기만의 진리를 찾기 위해 힘써야 하는 것이 현대 문학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주역에 나오는 말로 <窮卽變, 變卽通, 通卽可久>라고 했다. 궁하면 변해야 하고, 변하면 통한다. 통하면 오래갈 것이라고... 새 시대가 왔지만 예전의 학문은 변함이 없어 궁해진다. 그러면 변해야 한다. 변해서 통할 길을 찾고, 통하면 오래간다. 그러나 그저 막무가내로 변해서는 아니 된다. 오래갈 방향으로 변해야 하는 것이다. 그 <이정표>가 이 책이 될 수도 있다.

가끔 내가 적어 둔 리뷰를 돌아볼 때가 있다. 좋은 구절을 적어뒀다가 찾아보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다 보면, 내 글이 <감각적 직설>에 치우침이 많은 것을 본다. '詩思의 온유 돈후를 중시하라. 감각적 직설 보다는 에돌려 말하는 데서 오는 온건한 말이 더 깊고, 모난 말보다는 각지지 않은 표현에서 중후한 체취가 풍겨난다.'는 말은 뼛속을 에인다. '情을 잘 말하는 자는 삼키고 토해 냄이 깊은 듯 얕아 드러날 듯 다시금 감추어져 문득 그 마음의 무한함을 깨닫게 하고, 景을 잘 말하는 자는 형용함을 끊어버리고 약간의 보탬만을 더하였는데도 참모습이 또렷하고 생기가 또한 흘러 넘친다'고 한 것은 남의 글을 읽을 때, 평가의 기준이 되기도 할 것이다. "사물을 꿰뚫어 보는 통찰과 혜안 없이 그저 남의 눈을 놀래키는 수사적 기교에 탐닉하는 글은 글이 아니라고" 한 것은 나를 꾸짖는 말이 아닌가 해서 심장이 덜컹거릴 따름이다.

이 책은 시의 미학을 이론적으로 설명한 부분과, 시의 표현, 시 창작을 둘러싼 이야기들, 시가 해체되는 과정의 참요, 잡시, 문자유희 등도 다루고, 선, 산수, 사랑, 역사 등 주제에 따른 시들도 다루고 있다. 스물 네 장으로 나눈 만큼, 분류의 기준은 뚜렷하지 않으나 다양하고 풍부한 작품을 골고루 영양섭취할 수 있는 좋은 책이다. 한자를 어느 정도 알면 한시 읽는 맛을 더할 수 있겠고, 특히 국문학과 학생이나 문학 전공자라면 한자 공부삼아 정도할만한 책이다. 일반 교양인들도 한시를 대충 읽는다면 읽어볼 만한 책임에는 틀림없다.

텔레비전이 안방을 차지한 지도 30년이 넘었다. 1969년에 국민 1인당 5편의 영화를 보았을 정도로 번창하던 영화 산업이 1970년에는 텔레비전에 그 자리를 넘겨 주었으니...  내가 어릴 때는 M, T, K의 세 채널이 있었고 프로그램도 거의 외우고 있었지만, 요즘은 채널 개수도 헤아리지 못할 만큼 그 영향력은 양적 팽창이 늘었다. 그렇지만, 질적으로 발전했는지는 확언할 수 없다. 요즘은 케이블 티비를 통해 재방송을 끝도 없이 하다 보니 같은 방송을 하루에도 몇 번 만날 수 있다. 요즘 아이들 앞에서 선생하려면 <웃찾사>, <개콘>, <폭소클럽> 같은 프로그램을 시청하지 않고서는 말이 안 된다. 아이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재미가 있으나 없으나 개그 프로는 가능한 한 보는 편인데, '그런거야', '희한하네', '생뚱맞죠', '그때그때 달라요', '오, 베이베', '남녀본색', '사장님 나빠요', '안어벙에게 빠져 봅시다, 마데 전자', '봉숭아 학당의 다중이, 까잇거 경비원' 등의 말들이 요즘 유행이다. 어떤 프로그램에도 이런 말들은 서로 패러디 되고 있다. 한두개라야 쉽게 외울 수 있는데, 요즘은 너무 많아서 어렵기도 하다.

한 때, <~~ 시리즈>로 나가던 개그들이 그야말로 다원화 되어 종합 선물 세트가 된 셈인데, 간혹은 비판의 힘이 강한 코너도 있지만, 그야말로 말장난이거나 국어 사용을 해치는 우스개에 지나지 않는 것들도 있다. 물론 개그가 진지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난 적어도 매번 기본 컨셉은 같고 말장난만 바꿔대는 3,6,9나 봉숭아학당 같은 코너는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말의 재미를 느끼게 하는 코너라면 블랑카 같은 창의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는 이런 <언어 유희>로서의 한시를 깊이있게 다루고 있는데, 그런 것들은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소득이었다. 개그가 현상적인 언어유희를 뛰어넘어, 생각의 깊이나 감각의 폭, 경험의 넓이나 역사의 부피를 소화할 수 있도록 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공시적, 통시적 차원을 아우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책에서도 결국 <시는 인간의 언어 가운데 가장 정채로운 보석인가, 아무 짝에 쓸모없는 해독인가> 하는 문학의 선악설까지 다루게 되지만, 시를 짓고 감상하는  과정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즉물적인 대상이 아니라, 작가와 독자가 감응해서 설계하고 실현되는 과정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왜 다시 한시인가. 정민 선생이 가진 콘텐츠가 한시 영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시라는 특수한 표현 매체를 통한 전달의 특이성 때문에 <특이한 전달의 과정>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효용가치를 상실해 가는 한문학의 한 부분의 연구를 통해 그가 만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표현의 매체가 너무 비현실적인 것이라서 우리에게 멀게만 느껴지는 한시이지만, 한시가 추구한 정신의 깊이나 미학의 너비마저 가시 덤불 속에 버려둘 수 없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먼지 쌓인 역사의 뒤켠에 방치된 채 날로 그 빛을 바래가고 있는 한시에다 신선한 숨결을 불어넣어 막힌 길을 새로 뚫고 그 현재적 의미를 밝히기 위해 절치부심한 정민 선생의 글을 만나게 된 것은, 한 겨우내 방구석에 틀어박혔지만, 선경을 바라보고, 호쾌한 장부의 기상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었으며, 시대와 사람들의 모습을 자세히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책을 읽고 저자에게 고맙다고 생각하기 쉽지 않다. 저자에게 깊은 감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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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5-02-13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후배 하나가 모교에서 "한시"를 배우고 있더라구요.
어렸을 때 부터 한시를 꼭 배워 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데요.
그런데 졸업하고 나서 남아있는 동기들 만나러 학교에 자주 들렀는데,
한 국문과 교수님이 저녁시간에 무료로 한시를 강의하시더래요. 그 교수님도, 또 빠듯한 직장생활 하면서 한시를 배우는 후배도 멋있죠?
아이들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웃찾사"를 보시는 글샘 선생님.
항상 열려있는, 또 그러기 위해서 노력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이 보기 좋아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파란여우 2005-02-13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나이가 먹는건가요? 자꾸만 옛날 한시들에게서 느껴지는 고결하고 품격높으며 단아하고 청정한 기운들이 좋아져요. 백자사발에 맑은 물을 담아 놓고 들여다 보는 기분이랄까요..사실, 그동안 너무호들갑을 떨며 살아왔잖아요..소란스러운 자아를 정돈하는 일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온것같은 불안감이 있는게 사실입니다만, 그래도 전 티브이보다는 님의 글을 읽는 시간이 훨씬 더 좋습니다.^^

글샘 2005-02-13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 저도 한시를 배우고 싶단 생각은 많이 했지만, 뭐든지 선뜻 배우러 가기가 쉽지 않지요. 한시 같은 건 배울 데도 잘 없긴 하지만... 책에서나마 멋드러진 흥을 실컷 누렸답니다.
여우님... 형식은 내용을 규정한다 하잖아요. 한시의 단정한 아름다움. 제약 속의 단아한 품격이랄까... 이런 것이 조선의 문화였는데... 유목민의 문화에 찌들린 우리에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듯한 허탈이 우리를 두렵게 하지만, 그래도 아직 너무 멀리 오진 않았다고 생각해요. 우리 본모습을 찾기 위해서는...

비로그인 2005-02-13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퍼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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