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 대하여 오늘의 젊은 작가 17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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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좋은 사람이다.

평생을 그렇게 하려고 애써왔다.

정말 힘들었겠구나.

나는 공감하는 사람.

최선을 다했으면 됐다.

나는 응원하는 사람.

다 이해한다. 이해하고 말고.

나는 헤아리는 사람.

아니, 어쩌면 겁을 먹은 사람. 아무 말도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

뛰어들려고 하지 않는 사람. 깊이 빠지려 하지 않는 사람.

나는 입은 옷을, 내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사람.

나는 경계에 서있는 사람. 듣기 좋은 말과 보기 좋은 표정을 하고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뒷걸음질 치는 사람.

여전히 나는 좋은 사람이고 싶은 걸까

며칠 동안 딸과 나 사이에는 캄캄한 침묵이 흐른다.(69)


딸을 고학력자로 만들어 두었는데, 그 딸이 떵떵거리는 사윗감은커녕 여자 아이를 데려온다.


요양보호사인 어머니는 젠이라는 노인을 간병하고 있다.


좁고 갑갑한 고독 속에서 늙어가는 사람.

젊은 날을 타인과 사회, 그런 거창한 것들에 낭비하고

이젠 모든 걸 소진한 다음 삶이 저물어 가는 것을

혼자 바라봐야 하는 딱하고 가련한 사람.(104)


딸과의 사이에 캄캄한 침묵이 흐르는 어머니는

비로소 젠의 처지가 눈에 들어오고, 제 딸 역시 그럴 것 아닌가 하면서, 생을 생각한다.


사람들은 그게 무엇이든 예민하게 알아채고, 

알게 된 것을 말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긴다.

뭐든 모른 척하고 침묵하는 것이 예의라고 여겨지는 이 나라에서

나는 태어나고 자라고 이렇게 늙어버렸다.(127)


아, 모른 척하고 침묵하는 것이 예의라고 여겨지는 비루한 양반의 나라.

이제는 성조기와 교회를 편들어서 침묵을 강요하는 나라.


파견 직원에 불과한 화자에게 '일'은 아무 것도 아니다.


오늘날 일이란 행위는 모두 훼손되고 더렵혀졌다.

그것은 오래전에 우리 세대에게 자긍심과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던 역할을 잃은 지 오래다.

사람들은 이제 일의 주인이 아니고

그것에 종노릇을 하며 소외당하고 외면당하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해야 한다.

그리고 끝내는 일 밖으로 밀려나고 쫓겨나고 실패를 인정해야 하는 순간을 맞는다.(160)


정직원이라 해도 다를 바 없다.

그 일이 국가직이든 지방직이든, 임시 채용 강사이든 소외의 본질에서 멀지 않다.


난 내 딸이 차별받는 게 속이 상해요.

공부도 많이 하고 아는 것도 많은 그 애가

일터에서 쫓겨나고 돈 앞에서 쩔쩔매다가 가난 속에 처박히고

늙어서까지 나처럼 이런 고된 육체노동 속에 내던져질까봐 두려워요.

그건 내 딸이 여자를 좋아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잖아요.

난 이 애들을 이해해 달라고 사정하는 게 아니에요.

다만 이 애들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내버려두고

그만한 대우를 해주는 것, 내가 바라는 건 그게 전부예요.(169)


왜 그들은 무지갯빛 깃발을 그렇게 혐오하는가?

여성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혐오하는가?


훌륭한 삶요?

존경받는 인생요?

그런 건, 삶이 아주 짧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에요.

봐요.

삶은 징그럽도록 길어요.

살다 보면 다 똑같아 져요.

죽는 날만 기다리게 된다고요.(173)


남을 위해 평생을 바친 젠이나, 

이제 나이들어 삶에 벅찬 화자나, 

아직 젊은 그 딸에게나,

삶은 벅차게 길다는 것을 환기시키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벅차다.


소설을 쓰는 동안

다른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해라는 말 속엔 늘 실패로 끝나는 시도만 있다고 생각한 기억도...

그럼에도 내가 아닌 누군가를 향해 가는,

포기하지 않는 어떤 마음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소설도 끈질기게 지속되는 그런 수 많은 노력 중 하나...(작가의 말 중, 199)


페미니즘은 지식인 여성들이 남녀 평등을 주장하던 시대는 갔다.

우리 삶의 모든 분야에서 쓸데없는 참견과 분간없는 차별에 대하여 저항하는

모든 약자의 목소리가 이제 페미니즘과 뒤섞이는 시대가 되었다.

페미니즘과 퀴어 축제가 무슨 상관이냐고 묻고 싶다면,

사람에 대한 이해를 향한 노력이란 면에서, 

그런 수많은 노력 중 하나라고 답한다면, 이 소설의 한 구절이라도 읽은 것이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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