뿔을 적시며 창비시선 342
이상국 지음 / 창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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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그는 해바라기 하는

달동네 아이들을 생각했던 것이다

 

담장을 기어오르다 멈춰선 담쟁이의

시뻘건 손을 생각했던 것이다

 

붕어빵을 사들고 얼어붙은 골목길을 걸어

집으로 가는 아버지들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냥 있어선 안 된다고, 누군가 먼저 가

봄이 오는 걸 알려야 한다고

 

어느날 눈길을 뚫고 달려왔던 것이다

그 생각만 했던 것이다 (매화 생각, 전문)

 

돌산 향일암엘 갔더랬다.

올 한해도 아이들과 그럭저럭 무탈하게 보내기를 빌면서 해맞이를 했다.

돌아오는 길에 옥곡 장이 서길래 들러서 매화나무 조그만 녀석을 샀다.

꽃망울이 금세 말라버려서 아쉽지만, 삐죽빼죽 잎눈이 돋기 시작한다.

매화를 봤으니, 바야흐로, 봄이다.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나무는

한겨울에 뿌리를 얼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바위에 틈을 낸다고 한다

바위도

살을 파고드는 아픔을 견디며

몸을 내주었던 것이다

치열한 삶이다

아름다운 생이다

나는 지난겨울 한 무리의 철거민들이

용산에 언 뿌리를 내리려다가

불에 타 죽는 걸 보았다

바위도 나무에게 틈을 내 주는데

사람은 사람에게 틈을 주지 않는다

틈(틈, 전문)

 

벌써 8년 전 일이다.

용산의 아파트도 삼성이 큰 지분을 가지고 있었던 곳이다.

징그럽다. 삼성.

 

누가 기뻐서 시를 쓰랴

 

새들도 갈 데가 있어 가지를 떠나고

 

때로는 횡재처럼 눈이 내려도

사는 일은 대부분 상처이고 또 조잔하다

 

그걸 혼자 버려두면 가엾으니까

 

누가 뭐라든 그의 편이 되어주는 것이다

 

나의 시는 나의 그늘이다(그늘, 전문)

 

사는 일은 상처...

가여워서, 그의 편으로

그늘을 드리우는 것이 시란다.

 

 

비 오는 날

 

안경쟁이 아들과 함께

 

아내가 부쳐주는 장떡을 먹으며 집을 지킨다

 

아버지는 나를 멀리 보냈는데

 

갈 데 못 갈 데 더듬고 다니다가

 

비 오는 날

 

나무 이파리만한 세상에서

 

달팽이처럼 뿔을 적신다(뿔을 적시며, 전문)

 

이 시집에서는 사는 일의 고단함이 가득 묻어난다.

그 사는 일이 곧 달팽이가 되어 세상을 기어가는 것 같은 일인데,

비오는 날,

시인은 젖어든다.

 

어느덧, 2017이란 숫자가 어색한데 벌써,

3월이란다.

기미년의 태극기가 숫제 치욕스러운 시대,

서글퍼서 비라도 내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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