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창비시선 374
안현미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대학다니던 80년대는

서양의 68 시대의 후일담이 넘실거리던 시대였다.

자유와 혁명의 이념 아래서 여성의 문제도 같이 출렁였다.

그래서 여성의 해방은 인간의 해방과 함께가야 하는 과제라는 것을 책에서 배웠다.

 

그러다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해서 살아보니

이론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결혼해 보니 어머니도 여자였고, 아내도 여자였다.

당황스러웠지만 난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 채, 이십 년이 넘어버렸다.

 

안현미 시집을 읽으면서 '여자'의 일생을 느낀다.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류의 발설이 등장한 것은 요즘 젊은 작가들 이후의 이야기다.

최영미가 말 잘 듣는 컴퓨터, 그 매력적인 존재에게 '컴퓨터와 씹하고 싶다'고 말한 것도

잔치가 끝난, 서른이 발설하기엔 쑥스러운 것이었다.

화끈하긴 하지만,

솔직하긴 하지만,

난 그런 것을 시라고 읽고 싶지 않다.

발랄, 명랑하다고 여기는 이도 있을지 몰라도,

은은, 담백하지는 않다.

난 아무래도 은은, 담백 애정남인 모양이다.

 

안현미의 시를 극찬한 한창훈에 꼴딱 넘어가서 그의 시집 3권을 샀다.

한창훈이 극찬한 내간체를 보았다.

 

  결혼 후 한 계절이 지났습니다 입덧이 시작되었고 제가 믿고 싶었던 행복을 얼음처럼 입에 물고 있습니다 너무 서

둘러 시집왔나 생각해봅니다 입안이 얼얼하고 간혹 어린 엄마였던 언니가 너무 사무칩니다 

 

  삶의 비애를 적확하게 바라본다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닐 테지만 나를 보아 너무 서둘지 않아도 나쁘진 않았을 텐데

어리고 영민한 여자가 현모양처가 되기란 동서남북 이 천지간에서 얼마나 얼얼해야 하는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고 싶었던 행복을 얼음처럼 입에 물고 너도 곧 엄마가 되겠구나 무구하게 당도할 누군가의 기원이 되겠구나

여러 계절이 흘렀으나 나는 오늘도 여러 개의 얼음을 사용했고 아무도 몰래 여러 개의 울음을 얼렸지만 그 안에

국화 꽃잎을 넣었더니 하루 종일 이마 위에 국화향이 가득하였다 그 향을 써 보낸다 그저 얼얼하다 삶이(내간체, 전문)

 

여러 번 읽었다.

아름다웠다. 은은하고 담백하였다. 좋았다.

 

강 옆에서 물이 다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삐아졸라를 들으며 나는 내가 다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

(아버지는 이발사였고 어머니는 재봉사이자 미용사였다, 부분)

 

삶은 그렇게

다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목숨을 스스로 버리기도 하지만,

삐아졸라를 들으며

무념의 경지가 되어

내가 다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일.

 

  언젠가 나는 이곳에 와본 적이 있다. 열아홉 혹은 스무살

봄에. 사랑을 시작해도 부동산 투기를 시작해도 외국어 공

부를 시작해도 실패하기 딱 좋은 나이, 실패해도 상관없는

나이, 즉흥적이어서 아름다운 나이, 열아홉 혹은 스무살 봄.

그때 우리에게 허락된 양식은 가난뿐이었지만 가난한 나라

의 백성들처럼 가난하기에 더 열심히 서로가 서로를 향해

찬송가 불렀지. 찬송가책도 미래도 없이. 누구는 그걸 사랑

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불렀었

지. 언젠가 나는 이곳에 와본 적이 있다. 전생 혹은 전쟁 같

았던 그 봄 춘천에.(춘천, 씨놉시스, 부분)

 

서른, 잔치는 끝났을지 몰라도,

기억은 남는 것.

기억은 완벽하지 않지만, 기억이 기록이 되고, 기록이 기다림이 된다는....

에셔에게서 빌려온 무한대...처럼...

그에게 기억은 '나의 힘'이 된다.

 

뜨겁거나 화끈 달아오르기보다는,

담담해서 편안하고 은은해서 오히려 아름답다.

 

'전갈'에서 '아산을 지날 일이 있으면 연락하렴'의 연락과,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사막의 고독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전갈의 뒷모습을 닮았던 선생님'

의 곤충을 떠올리듯,

'이별'을 '이 별'과 환치시키기도 한다.

 

그이 시에서는 이런 여자도 나온다.

 

  결국 공식 속에 모든 사람들의 말을 백 퍼센트 담을 수

있다는 여자가 공모에 당선되었고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

갔으나 결국 눈사람을 만들기 위한 혹독한 추위가 전국적으

로 선포된다 다시 백 퍼센트 겨울 공화국이 시작되고 있다(눈사람의 공식, 부분)

 

여자라고 다 여자가 아니다.

여자보다 더 독한 족속이 있는 법이다.

은은하게 여자의 삶이 겪어온 슬픔을

쓴 소주 한 잔 없이 엮어온 그였지만,

 

마지막 시인의 말은 쓰디 쓰다.

소주 대신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다.

 

  어떤 슬픔은 새벽에 출항하고 어떤 아픔은 영원히 돌아

오지 못한다. 오늘 우리는 겨우 살아 있다. 어쩌면 저주가

가장 쉬운 용서인지도 모르겠다.(시인의 말)

 

새벽 출항,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어떤 아픔.

20140416

이런 것들은 이제 하나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아릿한 아픔과 진한 눈물을 부르는 상징이...

 

장미가 다시 피는 계절

여자의 아픔에 눈물 흘리는

장밋빛 향기가 슬픈 시집을 만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양철나무꾼 2015-05-14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 소개 받으러 들어왔다가 맘 아파서 어쩌지 못하고 앉았습니다.
그러고보면 참 비겁했는지라,
일부러 애써 외면하려 했었는데...
기어이 보고야 말았고,
그래서 가슴에 무언가 얹혀서 올리지도 내리지도 못하는 하루 하루지만,
제 그것은 호강이고, 사치네요.

글샘 2015-05-20 12:28   좋아요 0 | URL
맘에 얹혀서 올리지도 못하고 내리지도 못하고 사는 게
어쩌면 우리가 세월호를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