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에 기대어 문학의전당 시인선 25
송수권 지음 / 문학의전당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 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山茶花) 한 가지 꺾어 스스럼 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 물 속에 비쳐옴을 (산문(山門)에 기대어)

 

'산문'은 절집어귀에 있는 문이다.

일주문 같은...

시인은 남동생을 잃고 마음이 무척 헛헛했다 한다.

산문은 이승과 저승, 속세와 절집을 가르는 갈림길이겠다.

 

누님의 치맛살 곁에 앉아
누님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심심한 때는
골목을 빠져나와 바닷가에 서자.

비로소 가슴 울렁이고
눈에 눈물 어리어
차라리 저 달빛 받아 반짝이는 밤바다의 진정할 수 없는
괴로운 꽃비늘을 닮아야 하리.
천하에 많은 할 말이, 천상의 많은 별들의 반짝임처럼
바다의 밤물결 되어 찬란해야 하리.
아니 아파야 아파야 하리.

이윽고 누님은 섬이 떠 있듯이
그렇게 잠들리.
그때 나는 섬가에 부딪치는 물결처럼 누님의 치맛살에 얼굴을 묻고
가늘고 먼 울음을 울음을.
울음 울리라. (박재삼, 밤바다에서)

그이 시를 읽노라면,

박재삼의 밤바다...가 중첩된다.

 

박재삼은 1950년대의 가난이고, 송수권은 한 20년 뒤의 가난인데,

참 이나라의 가난의 한은 깊다.

 

여러 산 봉우리에 여러 마리의 뻐꾹새가
울음 울어
떼로 울음 울어
석 석 삼년도 봄을 더 넘겨서야
나는 길뜬 설움에 맛이 들고
그것이 실상은 한 마리의 뻐꾹새임을
알아냈다.

智異山下(지리산하)
한 봉우리에 숨은 실제의 뻐꾹새가
한 울음을 토해 내면
뒷산 봉우리 받아 넘기고
또 뒷산 봉우리 받아 넘기고
그래서 여러 마리의 뻐꾹새로 울음 우는 것을
알았다.

智異山中(지리산중)
連連(연연)한 산봉우리들이 다 울고 나서
오래 남은 추스림 끝에
비로소 한 소리 없는 ()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섬진강 섬진강
그 힘센 물줄기가

 하동쪽 남해를 흘러들어
南海群島(남해군도)의 여러 작은 섬을 밀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

봄 하룻날 그 눈물 다 슬리어서
智異山下(지리산하)에서 울던 한 마리 뻐꾹새 울음이
이승의 서러운 맨 마지막 빛깔로 남아
細石(세석) 철쭉꽃밭을 다 태우는 것을 보았다. (지리산 뻐꾹새, 전문)

 

지리산 뻐꾹새 역시 절창이다.

그 하염없는 눈물이

세석까지 타오르는 시각으로 눈물겹다.

 

푸른 이내를 적시는

방울소리 뚝 끊어지고

어느 강물에 시치미도 흘려 버리고

그린 듯이 하늘 가에

나의 매는 섰어라.(그리움, 전문)

 

절절한 그리움은

기러기든, 매든 하늘 가를 우러르는 눈매에 잡히는 것은 모두 서럽다.

이녘과 뚝, 끊어지는 인연은

푸른 안개 적셔진 온 세상을 서럽게 운다.

 

아이들이 크는 동안은 다 이렇게 귀여운 것인가

꽃밭 하나를 차지하고 꽃을 가꾸는 아이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들이 피워낸 꽃이 비록 작은

분꽃이나 나팔꽃일지라도(情, 부분)

 

딸을 가진 기분은 어떨까?

 

무엇이 마음에 차지 않을 때에는

일부러 개 울음소리를 흉내낸다

아빠가 성난 얼굴을 하면

월,월, 월, 혀를 내둘러 놓고는

냅다 뛴다(정, 부분)

 

이런 귀염상 가득한 딸의 애교를 보면, 어떤 사상도 다 놓아지지 않을까?

 

김수영이 생계를 위해 닭을 기른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인상파 회고전'에서 수영을 만난다.

그리고 삶의 비애를 시로 쓴다.

 

일금 삼십 원을 들고 서서

닭의 밑구멍을 빤히 들여다 보고 서 있는

이젠 이 짓도 그만둘 거라며

두 손 짝짝 털고

무덤 쪽으로 가고 있는 수영의

검은 얼굴... (수영의 닭장, 부분)

 

김용직은 평론에서 송수권과 박재삼을 마주 대본다.

 

재삼은 수권이 심각하게 의식해야할 시인이었다.

그는 이미 50년대에 한국적인 정조를 그 씨날로 할 작품들을 양산해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송수권이 시의 발판으로 삼은

지방의 독특한 말씨, 그 감칠맛이 있는 느낌까지가

교묘하게 수용되어 있었다.

그의 기가 펄럭이는 연대에 시단 진출을 한 것이 송수권.(145)

 

이 시집엔 없으나,

난 그의 '여승'이 참 정겨웁다.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종일 방 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女僧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과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집 처마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발치로 바릿대를 든 女僧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 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小僧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 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로 되돌라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뒤로 나는 女僧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女僧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事物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를 쓴다. (여승, 전문)

 

 

비로소 인간으로서 상대를 인식하기 시작한 무렵,

우연히 만난 여승의 추억은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 같이

시의 가슴을 살포시 젖는 물결 같이>

에서 영랑이 찾던 <시의 가슴>을 경쾌하면서도 진하게 느끼게 한다.

 

남도 가락이 유장한

서편제 풍의 송수권의 시는,

그 배경에 깔린 한과 함께

바닷가 비릿한 사람들의 한을 오롯이 담아내는 시를 쓴 사람이다.

 

지리산 뻐꾹새가

섬진강 줄기따라

울음울며 내리다

남해 다다라

섬 하나에 막혀 솟구친

그런 울음으로 가득한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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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향기 2015-04-28 0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송수권 님의 시는 정말... 아 오랜만에 다시 읽으니 너무 감동이네요!

글샘 2015-05-03 20:57   좋아요 0 | URL
네, 송수권 님 시는 울음이 가득한 소년 시절의 막막함... 그런 걸로 가득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