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 개정판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성공작이다.

실존주의의 시대를 풍미했다던 샤르트르와 카뮈를 읽던 20세기 중반에서 묻혀버린 카뮈의 소설을

다시 베스트셀러로 올려놓았다.

 

아마도, 그 시절에 청춘을 보낸... 그러나, 그 청춘은 참으로 가난하고, 또 치열하였던 사람들에게,

카뮈의 <이방인>은 이해하기 힘들었던 텍스트, 였을 것이고, 이해했더라도 이제 나이가 들어 다시 읽어보고 싶었던 텍스트였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방인을 다시 읽도록 한 구절은,

노란 띠지의 저 말,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는 말이었다.

 

이 책이 나오기 전부터 블로그에 그 번역 노트를 게재했다는 사실은 요즘 알았다.

이 책을 다 읽어가던 시점에,

무서운,

일어날 수도 없었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세상에...

 

실존주의는 '본질'에 대한 '인간'의 저항이고 거부다.

'본질'이라는 것은 그 이전까지 있었던 '구세대의 고정관념'에 가까운 말이랄까...

아무튼 내가 이해하는 바는 그렇다.

 

어떤 '이념'을 앞에 내걸고 투쟁할 때, 결국 이념은 보이지만 사람은, 그 투쟁 사이에서 짓눌리고 으깨지는 사람은 인식되지 못한다. 그래서 사르트르가 한 말이,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 라는 말이었다.

인간 존재는 어떠한 '이념'이나 '사상'보다 소중한 것이라고...

 

이 책의 제목, 불어로 (르) 에뜨랑제...는 이방인(외국인, 방랑자)란 말의 함의와 다른 의도로 씌었을 수 있다.

제대로 시비를 걸려면, 제목부터 좀 시비를 걸어 주었더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 이방인은... 아웃사이더(국외자)나 소외당하는 인물의 개념이었을 게다.

조세희의 '난쏘공'의 '난쟁이'이거나,

최인훈의 '광장'의 '이명훈'처럼,

<나치즘>이나 <제국주의>의 본질에 의하여 희생되어가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문제제기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한 청년.

뫼르소라는 청년은 어떠한 사유에서든 살인을 저지른다.

그 살인은 이 소설에서 가장 웅장한 '운명'을 들려준다.

 

그것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같은 것이었다.(81)

 

이 짧은 노크 네 번 이전까지의 뫼르소의 삶은,

그야말로 지극히 개인적이고, 가볍고, 자유로운 것이었다.

그때까지 그에게는 아프리카의 뜨거운 햇볕과 지중해의 황홀한 바다를 즐기는 '자유'가 함께했다.

요양원에서 쓸쓸히 죽어간 어머니의 부고 역시 그의 경쾌한 삶에 큰 방점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소설의 2부에서,

그는 세계 질서 안으로 편입된다.

법정에서, 법관과 검사, 그리고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국선변호인, 그리고 배심원...

그들의 언어는 1부의 경쾌한 언어와는 전혀 다른 질의 것이다.

 

1부에서는 가볍고 반짝반짝 빛나던 삶의 편린들이,

하나하나 모두 무겁고 끈적거리는 거미줄이 되어 뫼르소를 옭죄는데 소용된다.

그는 자유인, 주체적인 인간에서 갑자기 '아웃사이더'의 처지로 전락한다.

 

실존의 위기가 최대치가 될 때는 죽음 앞에서이다.

 

아, 죽음...

죽음 앞에서 당당하게 죽음을 맞는 것을 말하는 자.

자신은 죽음 앞에 서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거나, 아니면 해탈한 사람이거나 그럴는지 모른다.

 

실존주의는 늘 죽음을 앞둔 사람을 형상화한다.

 

그러니까 그(부속사제)는 이해할까?

모든 사람은 특권자라는 것을.

특권자밖에 없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 역시, 언젠가는 선고를 받을 것이다.

그 역시, 선고를 받을 것이다.

만약 그가 살인범으로 고발되고 그의 어머니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형된다 한들 그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아주 오랜만에 다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그녀가 왜 말년에 약혼자를 갖게 되었는지,

왜 그녀가 새로운 시작을 시도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거기에서도, 삶이 점차 희미해져 가는 그곳 양로원에서도,

저녁은 쓸쓸한 휴식같은 것이었다.

죽음에 인접해서야 엄마는 해방감을 느끼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준비가 됐다고 느꼈음에 틀림없었다.

 

나는 세계의 부드러운 무관심에 스스로를 열었다.

이 세계가 나와 너무도 닮았다는 것을,

마침내 한 형제라는 것을 실감했기에, 나는 행복했고,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166)

 

 

그가 속한 나라 알제리에서도 그는 이방인이었다.

그는 지배계층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세상의 '윤리'에 어긋났기 때문이었다.

'윤리'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인륜 륜 倫'이란 자는 '무리'라는 뜻이다.

인륜은 자연스럽게 절대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무리'가 정하는 것이다.

'다수'가 정하는 것이다.

그 '다수'는 당연히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다수결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힘센 자들을 '다수'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정서의 이 책은 '윤리'에 어긋난다면서, 비윤리적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재미있다.

중립이라는 투로 말하는 사람들이 가만 보면, 스스로 어느 '무리'를 대변하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정서 편을 들고 싶다.

그가 기존 번역에 반기를 든 행위가 한국 사회에서 정말 '큰 용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그런 면에 '침묵의 나선 이론' 운운하며 동조한 페이퍼를 쓴 적이 있다.

읽고 보니, 그때 내 생각이 더 굳어졌다.)

 

http://blog.aladin.co.kr/silkroad/6972110

 

온 국민이 침통해하는 사건이 일어난,

전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 넣던 가증스런 넘들의 시대보다 더 비참한...

그런 시대에, 무기력한 정부의 구조에 항의하는 유족을 <미개하다>고 말한 '재벌의 자제분'이 계셨단다.

 

그래... 미개한 건, 다 이방인이다.

(르) 에뜨랑제가 그런 심사를 대변하는 것이고, 영어제목 스트레인저란 말도 그리 알아 들으리라...

 

자국 내에서도, 주류이거나 권력이거나 기득권을 조금이라도 가진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편이 아닌 너희는 모두 이방인이라고...

 

이 책이 아니었던들, 김화영의 '이방인'을 펼쳐 읽지 않았을 것이다.

이정서의 문장과 김화영의 그것을 꼼꼼하게 대조해 가며 읽지도 않았고,

누구의 번역이 더 나은지를 감별할 수도 없었지만,

마케팅에 대한 비난이나, 비도덕적이란 비난 같은 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깨무는 짓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그 논쟁 안에는 '김화영'도 있고, '이정서'도 있지만, '카뮈'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화영도 이정서의 교정에 많은 부분 공감할 것이다.

 

이 책을 딛고, 더 멋진 이방인을 만날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다.

 

그나저나, 식민지 시대도 아닌 지금,

자국민을 이방인 취급하는 이 현실의 부조리를... 어이할 일이냐...

슬프고... 분하고... 날마다 마음이 북받친다... 이런 걸 일컬어, 비분강개...라고 했던가...

 

비분강개 : 悲 : 슬플 비 憤 : 분할 분 慷 : 강개할 강 慨 : 분개할 개

의롭지 못한 일이나 잘못되어 가는 세태가 슬프고 분하여 마음이 북받침을 일컫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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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4-04-23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 님의 '새움판 이방인'에 대한 두 번째 글도 참 좋군요. 이 글 가운데 특히 "마케팅에 대한 비난이나, 비도덕적이란 비난 같은 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깨무는 짓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그 논쟁 안에는 '김화영'도 있고, '이정서'도 있지만, '카뮈'가 없었기 때문이다."라는 대목엔 저도 특히 공감하게 됩니다.

만약에 이번에 새롭게 번역되어 나온 <이방인>이 '역자노트'조차 미련없이 다 내버리고 '숨을 죽인 채 조용히' 알몸으로 등장했더라면 과연 독자들의 반응이 어땠을까, 저는 그게 정말로 궁금하더군요. 그랬더라면 혹시나 쇼펜하우어가 말한 '진실의 세 단계' 가운데 앞의 두 단계는 훨씬 더 수월하게 건너뛰고 막바로 세번째 단계로 직행할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마저 들더군요.
* * *
모든 진실은 세 단계를 밟는다.
첫째, 조롱당한다.
둘째, 격렬한 저항을 받는다.
셋째,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