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겠다” - 고병권이 만난 삶, 사건, 사람
고병권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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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이 약하지 않다는 것,

우리에게는 힘이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258)

 

성매매 여성들에게 쉼터를 만들어주던 활동가가 한 이야기다.

인문학은, 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대학 내의 학문으로서만 자리잡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고병권이 각종 운동의 현장에서 이야기하고 생각했던 것을 잘 풀어쓴 책이다.

난 아무리 좋아하는 작가라 해도 이런저런 잡지에서 끌어온 칼럼집 같은 책을 아주 싫어하는 편인데,

그래서 이 책을 보고도 그럴까 우려했는데,

전혀 아니다.

이 책은 무척 좋다.

 

인문학자가 데면데면하게 서야 하는 자리.

장애인들 앞에 서서 인문학을 강의해야 하는 자리.

스물 두 명이나 죽어나간 동료들의 영정을 앗기고 불태운 국가 권력에 울고 있는 노동자들 앞에서 강의하는 자리.

그런 참으로 힘든 자리에서 생각한 것들, 이야기한 것들에 대한 그의 감동이 이 책에선 오롯이 묻어난다.

 

시설에서 이동권을 박탈당한 장애인들,

삶의 터전을 국가의 전력 수급 계획과 한전의 등쌀에 빼앗긴 노인들,

그들 앞에서 그는 끝없이 좌절하고 또 배운다.

 

우리가 역사 앞에서 참 빨리 절망하는구나.

희망도 그렇고,

바로 뒤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지만 우리는 모든 게 끝난 듯 절망하거나, 또 헛된 희망을 품는구나.

희망도, 절망도 필요 이상으로 크고 깊다고나 할까.

그러면서 묵묵히 한 걸음씩 내딛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또 얼마나 소중한지...

아마 그런 걸음을 걸어가는 사람 중 하나가 이계삼 선생...(232)

 

세상은 반성하지 않고, 나아가기만을 외치는 사람들이 많다.

 

후쿠시마의 원전이 녹아내리며 그 무섭고도 아픈 진실을 전할 때

한국이 일본을 제치고 원전 강국으로 도약할 기회가 왔다고 말하는 사람.

하이데거가 <전진하는 무사유의 발걸음>이라고 부른...

성찰없이 계산기만 두드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172)

 

나 또한 성찰없이 전진하는 무사유의 발걸음으로 오늘 하루 살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돌아본다.

 

점거란 대안 없음에서 시작되는 운동이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그 대안 없음에서 어떤 대안이 고개를 내민다.(132)

 

월 스트리트의 점거에 대하여 그는 여러 차례 글을 쓴다.

2008년의 촛불 역시 하나의 점거였다.

그 점거를 박살낸 정부는 파죽지세로 광장을 죽여버렸다.

현대의 민주주의는 점거와 철거의 사이에서 좌표가 움직인다.

 

전향력이라는 힘이 있다고 한다.

지구는 하루에 한 바퀴 자전하는데,

적도 부근은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돌지만,

극지방에 가까워질수록 그 속도가 느려지게 된다.

그래서 적도 부근에서 극지방으로 향하는 물체는 그 속도의 차이때문에 전향력을 얻게 된다.

그 방향은 지구가 자전하는 동쪽 방향이고 힘은 극지방으로 갈수록 커진다고 한다.

 

삶의 진자 역시 그런 힘이 있는 것 같다.

어떤 때는 하루하루가 역동적인 속도의 변동을 느낄 수 있지만,

어떤 때는 그날이 그날인 듯, 힘의 변화를 느끼기 함들다.

그럴 때 '안정과 나태'가 스물스물 몸을 잠식한다.

 

고병권의 인문학은 전향력이 큰 사고방식이다.

위도가 낮은 곳에서 위도가 높은 곳으로 발사한 물체처럼,

그 자전 속도의 차이때문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변화를 겪게 되는 현상처럼 말이다.


삶을 살아도 각자의 삶의 속도는 다르다.

그때 속도가 빠른 지점에서 날아온 메시지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우리가 바보가 되는 것은 지능이 모자랄 때가 아니고,

의지가 꺾일 때이다.(랑시에르, '무지한 스승'에서, 96)

 

결국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의지를 꺾으려는 '동풍'에 나부끼는 '풀'이라도,

다시 일어나야 하고, 끝내 웃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김수영이 '다시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고 쓴 모양이다.

풀뿌리는 누워도 꺾이진 않으니까.

신경림은 말했다.

산다는 일은... '갈대' 처럼...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라고...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인간은 '의식화' 되어야 한다.

 

의식화된 사람은 박식한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는 지식과 정보에 대해 달리 보고 달리 느끼는 사람이다.

그는 어떤 생각에 쉽게 동조하기보다는 오히려 '감히 비판하고 질문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92)

 

의식화된 인간 만들기... 그런 것이 인문학의 좌표다.

 

한국은 '도가니'의 세상이다.

온갖 영토에 철조망의 시설을 만들어 두고,

그 안에서는 인권이 실종된다.

장애인, 각종 복지 시설, 감옥, 불법체류자 등에게 둘러쳐진 철조망의 안과 밖은 법의 중력장이 전혀 다르다.

 

춥고 배고픈 것보다 더 슬픈 건 내가 짐승이 되어가는 기분이었다.(71)

 

장애인들, 시설에 수용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니체를 격렬하게 몸으로 느끼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부르르 떨렸다.

젠체하고 읽고 쓰기를 즐기는 나같은 사람은 느끼지 못하는 정서...

짐승이 되어가는 기분... 같은 말을 책에서 보고 인문학의 힘을 실감한다.

 

인문학은 머리로 이해되는 공부가 아닌 것이다.

그야말로 '사람'에 대한 '글과 말'에 대한 '성찰'이 인문학이어야 하는 게다.

 

취업시켜주지 않는 취업기관으로 전락한 대학을 논하면서,

견유주의와 냉소주의의 어원이 같음을 이야기한다.

개처럼 짖는 학자, 곧 발언하는 파수꾼으로써의 견유주의자와는 정반대 편에

냉소주의 대학이 자리잡은 현실...

현실을 바로보는 일은 마음 편하지 않다.

 

견유주의자는

누구보다 민감하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의 정체를 빨리 알아채고,

그것을 인류라는 본대에 알리는 자.

아무런 보호도 없이 인류에 앞서 냄새맡고, 용기를 내서 진실을 알리는 자.(32)

 

인문학도는 이런 위치를 견지해야 한다.

우리가 의식화의 스승 내지 수괴로 리영희 선생을 꼽는 것도 그가 철저한 견유주의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철학의 지혜란 홀로 득도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한다.

마찰의 불꽃이 영혼의 램프에 옮겨 타는 것, 그것이 철학의 지혜가 아닌가.

우리는 위대한 누군가로부터 그 불을 나눠받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몸에서 계속 기름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누군가에게 건네받은 불은 금세 꺼져버릴 것이다.

우리는 우리 삶을 쉼없이 가꾸어 감으로써만 우리 영혼의 램프를 밝힐 수 있다.

그것이 철학이라면 철학은 참 멋진 학문이 아닌다.(29)

 

노년의 플라톤을 인용한 그의 이런 구절을 읽으면서,

의붓자식을 독살하려한 모친의 죄를 대속하려 '등신불'이 된 만적의 이야기(김동리, 등신불)나,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며 횃불을 든 전태일이 떠오른다.

전태일의 유서를 만나는 일은... 혁명이고 프로메테우스의 불을 이어받은 경험이었다.

 

이 책을 많이 나눠읽기를 바란다.

 

사랑하는 친우여, 받아 읽어 주게.

친구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잊지 말아 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 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 버린다고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리고 만약 또 두려움이 남는다면 나는 나를 영원히 버릴 걸세.

그대들이 아는, 그대 영역의 일부인 나

그대들이 앉은 좌석에 보이지 않게 참석했네.

미안하네. 용서하게. 테이블 중간에 나의 좌석을 마련하여 주게.

원섭이와 재철이 중간이면 더욱 좋겠네.

좌석을 마련했으면 내 말을 들어 주게.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어쩌면 반지(돈의 힘)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애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않기를 바라는,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이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 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전태일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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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4-04-10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윽 어제 주문한 책 한 상자가 오늘 오는데..
이 책은 아직 보관함에 있는데...

리뷰만 보고도 왠지 울컥합니다.

글샘 2014-04-10 16:39   좋아요 0 | URL
괜찮은 책입니다. 일독을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