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선별적 포섭, 보호, 배제를 제도화하면서 공공부조 수급자에서 난민·이주자에 이르기까지 빈자를 식별하고 등급화한다. 지구상의 공유부commons 를 상품화하고, 인간생명을 인적 자본으로 취급하며 경쟁을 독려해온 기업은 고도로산업화·전문화된 반빈곤 네트워크의 젖줄이 됐다. 이들은 사회공헌, 윤리적 자본주의, 임팩트 투자, 환경·사회·거버넌스ESG 등 시기별로 다양한 구호를 변해가면서 빈곤산업의 언어와 문법을 ‘혁신‘하고, 다수의 빈곤을 초래한 대가로 축적한 자본의 극히 일부를정부, 대학, 비영리재단, 시민단체에 세련된 퍼포먼스와 함께 재분배한다. - P5

숱한 제도적 · 실천적 개입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결핍이란 지워내야 할 불운, 수치, 숙명으로 남았다. 그런 점에서 빈곤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 P6

6장은 한·중 대학생으로 구성된 한국 대기업 자원봉사단이 중국에서 벌인 활동에 관한 문화기술지다. 일방적인 선물을 거부하는 중국-국가, 전략적 이익에 몰두하는 기업, ‘진정성 게임‘을 반복하는 실무자, 타인의 빈곤보다는 자신의 불안을 치유하고 싶어하는 한국 학생, 빈곤산업의 내부고발자를 자처하는 중국 학생이 뒤엉킨 현장은 빈곤 레짐의 통치성에 대한 정돈된 비판을 거스른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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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캐릭터는 또 다른 이유로도 유용할 수 있어요. 누가 맞춰보실까요?"
(중략)
"동물들은 쓰고 버릴 수 있으니까요." 나는 말한다. "작가들은 종종 긴장감을 자아내려고 동물들을 죽이죠. 인간을 죽이는 것만큼 중대하진 않지만 놀랄 정도로 동요를 일으킬 수 있으니까요." - P15

매일 써라, 내가 학생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영감을 기다리지 마라, 그건 끝까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영감의 신은 늘 네가 쓰고 있을 때 찾아온다. 마음을 들여다보고 써라. 하지만 대부분의 선생처럼 나도 자신의 충고를 따르는 데는 별로 영민하지 못하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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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는 인구가 40만에 육박하는 일본 제2의 도시이자 열도의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 잘 먹는다고 소문이 자자한, 떠들썩하고 활기가 넘치는 상인들이 지배하는 도시였다. 에도, 교토와 나란히 오사카는 번주가 지배하는 도시와 반대되는 의미로 쇼군이 다스리는 영역이었다. 쇼군은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오사카를 차지했다. 일본의 3대 도시 가운데 에도는 쇼군의 본거지, 교토는 천황의 본거지였지만 오사카는 둘 다를 지탱하는 경제적 원동력이었다. - P220

부유한 상인들이 쌀과 돈을 매점하는 한편에서 왜 빈민들이 굶어죽어야 하는가? 왜 의로운 사람들이 뇌물이나 챙기면서 밤이고 낮이고 방탕한 생활을 하는 오만한 관리들의 의견을 따라야 하는가? 사실 쇼군의 가신들은 대부분 강도, 그러니까 거리에서 애들 군것질거리를 뺏는 흔한 범죄자나 다를 바가 없었다. - P221

영국인들은 동아시아에 모습을 드러낸 최초의 원양항해 철제기선과 세계 최강의 해군을 자랑했다. 유혈 전투가 이어지면서 중국의 피해가 커지자 일본의 식자층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공포가 점점 커지면서 그들은 사실을 깨달았다. 청나라의 강력한군대가 패배할 수도 있다면, 서구의 포함들이 에도 항구에 나타나는 경우 일본이 맞서 승리할 가능성은 전무했다.
마침내 "국내의 소요"와 "해외의 위협"으로 제기되는 위험에 대한 일본 지도자들의 인식이 교육받은 농민과 도시 셋집에 사는 평민들에게까지 다다랐다. 이런 불길한 예감은 에도성에 있는 쇼군에서부터 에치고의 논에서 일하는 농민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본인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지만 처음에는 에도를 집어삼켰다. - P225

과소비를 제한한다는 명분을 내건 개혁의 잔인한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는 개혁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최소한의 체면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쓰네노가 돈이 필요할 때 최후의 수단으로 흔히 의지하는 전당포조차 몇 년 전만큼 옷을 잘 받아주지 않았다.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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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에도 사람들은 전부 옷과 머리핀으로 자신이 제정신이라는 환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또 어쩌면 다들 처음에는 고결한 사람이었는데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결코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몇 번이고 거듭해서-깨달으면서 괴물로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 P206

쓰네노는 히로스케가 그냥 평범한 남자인 줄 알았지만 그가 기꺼이 남편을 자처하고 나서자 일종의 마법이 일어났다. 쓰네노는 집안의 수치이자 골칫거리로 사실상 버린 자식이었고, 호의를 누릴 자격도 없고 무능하고 믿을 만하지도 않고 게다가 외톨이였다. 근 1년 동안 고향에 편지를 보내봐야 마지못해 조금 도와주거나 은근히 모욕을 주었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한 단어로 지위가 바뀌었다. 이제 다시 가족의 일원이 된 것이다. - P214

쓰네노는 평생을 살면서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남자와 여자는 같은 기술을 배우지도 같은 언어를 쓰지도, 같은 옷을 입지도 않았고, 맞닥뜨리는 운명도 달랐다. 정토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도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어려웠다. 일부 법사들은 여자는 월경과 출산으로 흘리는 피로 땅을 더럽힌 이들에게 정해진 지옥에 빠질 운명이라고 가르쳤다.
(중략)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여자가 훨씬 더 많은 문제들이 얽혀 있음을알게 되었다. 여자가 되는 것에는 수치와 자기의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약이 따랐다. - P215

쓰네노의 붓은 일본 문자의 우아한 모양을 따라갔다. 그녀는 부드럽고 여성적인 언어를 구사했다. 숱하게 많은 일에 분노했지만 그녀의 분노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사람을 겨냥했다. 쓰네노는 방세를 낸다는 사실이 아니라 관리인인 진스케에게 분노했다. 가부장적 가족이라는 제도가 아니라 오빠에게 화를 냈다. 자기가 여자라는 사실에 어떻게 화를 낼 수 있었겠는가? 쓰네노는 다른 어떤 존재가 되는 법을 알지 못했다.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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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펑성대의 사무라이에 대한 서술은 읽을 때마다 청나라 말기의 팔기군 자제들이 생각난다. 다른 부분이야 있겠지만 대략 비슷한 상황이었을 듯.

이 남자들 가운데 전투에서 총이나 활을 쏘거나 칼을 휘둘러 본 이는 하나도 없었다. 도쿠가와 막부의 태평 시대는 왕국에 안정을 가져다주었지만, 사무라이들은 그 때문에 전쟁에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할 기회를 빼앗겼다. 그들은 그저 자기들끼리 조상들이 용감하게 싸웠다고 이야기했다. 그 사실을 증명하는 족보가 있었고, 없으면 날조했다. 사무라이들은 대대로 내려오는 전쟁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학교에서 무술을 연구했다. 하지만 왕국이나 자기 집안 다이묘를 지키라는 요청을 받으면 정말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기란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냥 칼에 번쩍번쩍 광을 내고 겉모습을 유지했다. 그들은 돈과 상업이라는 더러운 세계와 거리를 두는 초연한 태도를 열망했다. 낯선 이들사이에서나 대중 앞에서 그들은 조금만 모욕을 받아도 바로 칼을 뽑을 듯한 기세를 보이려고 애썼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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