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뎬네 집은 예전보다 훨씬 낮아져 있었다. 벽의 절반이 땅속으로 들어갔다. 집이 수십 년간 한 자리에 서 있으면 땅을 몇 자 가라앉히는구나 싶었다. 사람이 평생 한 곳을 걸으면 땅에 구덩이가 패듯 말이다.
많은 집이 자신의 무게 때문에 한 해 한 해 땅속으로 꺼져든다. 문과 지붕이 하루하루 낮아져 처음에는 사람이 고개를 쳐들고 드나들지만 나중에는 허리를 굽혀야 한다. 많은 사람이 늙어서 허리가 굽고다리가 훨 때까지 산다. 사람이 곧게 뻗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다. 머리 위 지붕이 짓눌러서 그렇다. 하늘마저 사람을 짓누르기 시작한다. 사람이 무슨 방법이 있겠나. 억울해도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 P366

나는 황사량에서 자란 나무였다. 내 가지가 어디로 뻗어가도, 울타리와 담을 넘어 다른 곳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도 내 뿌리는 여전히 황사량에 있었다.
그들은 나를 죽일 수도 없고, 나를 바꿀 방법도 없었다.
그들은 내 가지를 다듬고 가장귀를 자를 수 있지만, 내 뿌리에는 손댈 수 없었다. 그들의 칼과 도끼는 황사량까지 뻗치지 못했다.
누군가와 내가 서로 아무리 오래 알고 아무리 친분이 깊다 해도 그가 내 고향에 가보지 않은(그곳을 알지 못하는) 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리는 역시 낯선 사이였다. - P396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언젠가 그 마을의 왁자한 소리 속에 다시금 내 소리 한두 마디를 더할 수 있을까. 음메 소리 뒤에, 문 두드리는 소리 앞에, 아니면 아이를 부르는 어머니의 소리 사이에......
갑자기 그 속에서 내 소리를 듣고픈 갈망이 치솟았다. 더없이 작디작은 소리라 해도. 있다내 소리는 이미 그곳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 P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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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른 뒤에야 깨달았다. 우리가 진정 찾으려던 것,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것은 지금 이 시각의 모든 삶이었다. 그것은 사라졌고 이제 잊혀가고 있다.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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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릴 때 나는 대지에서 일어나는 한 가지 일을 알게 됐다. 아버지가 알려준 것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미래라는 곳을 향해 정신없이 달린다. 맨 앞에서 달리는 것은 번화한 대도시, 바짝 뒤쫓는 것은크고 작은 도시, 그 뒤로는 마을이 성깃성깃 따라간다. 황사량은 너무 작아서 성큼성큼 걷지도 못하고 꽁무니에 처져 있다. 모두를 위해 후방을 엄호하는 중책이 자연스레 이 작은 마을로 넘어왔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른다. - P226

이리저리 날아다닌 끝에 잠자리가 다다른 곳은 저녁 햇빛이 내려앉은 흙담이다. 이리저리 바삐 뛰어다닌 끝에 사람이 늘그막에 이른 곳은 황혼에 잠긴 부서진 담장 아래다. - P230

어쨌든지 간에 내가 진정 알고픈 일은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의 눈에, 우리 곁에서 자라고 늙어 죽은 검둥개의 눈에 우리 가족의 삶은 어떤 정경이었을까, 우리의 이런 삶이 재미있어 보였을까. - P245

수확량이 많든 적든 가을 들판에는 알 수 없는 슬픔이 깃들어 있다. 마치 세월이 흐른 뒤의 자신을, 시든 몸으로 오들오들 떨면서 가을바람 속에 서 있는 자신을 보는 것만 같다. 수많은 가을 수확을 거치고 나면 사람은 자신의 마지막 작물이 된다.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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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에게 이런 버릇이 있다. 심을 때는 일할 시간이 많다는 듯 신이 나서 사방에 씨를 뿌린다. 뿌리고 나면 돌볼 기운이 없어 제멋대로 자라거나 풀에게 잠식되도록 내버려둔다. 아니면 아예 버리고 떠나버린다. 이 거대하고 꼴 보기 싫은 농작물을 대지에 팽개친 채. - P135

미처 끝내지 못한 한두 가지 일을 겨우내 방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매년 눈이 내리기 전에야 알아차린다. 겨울이면 한 해의 일을 내려놓고 나처럼 시린 손으로 자신의 일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어루만지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 P144

사람은 늙으면 봄이 오기를 그토록 갈망한다. 봄이 와도 자신은 새순 하나도, 꽃잎 반쪽도 내지 않으면서 말이다. 봄은 그저 대지에, 다른 이의 삶에 찾아올 뿐이다. 그래도 그는 봄을 간절히 기다리고 추위를 두려워한다. - P149

이제 와서 보면, 사람의 생에서 자라는 잡초는 호미로 없앨 수 있는 게 아니다. 마음속에서 몇 년을 키워온 것들은 온 들판에 무성한 잡초와 다를 바 없다. 그것이 누렇게 시들 때는 어느 것이 잎을 몇 장 더 내고 열매를 몇 알 더 맺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마음자리야말로 가장 머나먼 황무지다. 그곳을 한평생 잘 가꾸는 사람은 몹시 드물다. - P162

사실은 사소한 일 하나가 사람의 평생을 소진할 수도 있고,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가 사람의 평생을 덮어버릴 수도 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구석구석에서, 우리가 찾지 못하는 그 사람들이, 이런저런 사소한 일 한두 가지를 마주하며 알게 모르게 한평생을 흘려보낸다. - P166

집을 잃기란 참으로 쉽다. 사람이 떠나면 집은 곧 빈집이 된다. 집안의 공기나 간신히 발이 묶여 있지, 다리 달린 가구는 너를 기다릴 리 없다. 바퀴 달린 수레도 너를 기다릴 리 없다. 네가 문을 잠그면 사방이 다 길이 되어 모든 것이 떠나버린다. - P173

아버지 어머니, 당신들의 목소리는 결국 자식들의 목소리가 되어 세대와 세대의 골짜기에서 오랫동안 울려퍼질 거예요. 우리가 젊은 시절 아무리 말을 안 듣고 어머니 당부와 아버지 분부를 거역했다 해도요. 결국 우리는 아버지 어머니의 목소리 속으로 돌아가 당신들의 말씨로 우리 스스로는 완전히 새롭다고 여기는 인생을 표현하고, 당신들 이야기 속에 있었던 모든 일을 하고 있어요.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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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죽음을 좋은 일로 여긴다. 우리는 아직 죽을 자격이 없어서 살고 있는 거다. - P80

일이란 사람이 하니까 생기는 것이다.
어떤 일은 하지 않으면 그냥 없어진다.
하기 시작하면 평생에 걸쳐 해도 끝이 없다. - P108

똑똑한 자와 어리석은 자 모두 자기 생을 살아가고 있는데 남에게 간섭할 필요가 뭐가 있겠나. 똑똑한 사람에게 지혜와 재주를 마음껏 발휘하게 해준다면 바보에게도 자신의 어리석음을 맘껏 펼칠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그래야 공평하다.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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