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 생각해보면 가족은 연락을 끊어도 채권자는 끊임없이 안부를 묻는 셈이다. 빚 있는 자의 건강을 염려하는 사람은 혈육보다 오히려 채권자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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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죽은 채 방치되는 사건이 늘어나 일찍이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던 고독사 선진국 일본. 그 나라의 행정가들은 ‘고독’이라는 감정 판단이 들어간 어휘인 ‘고독사孤獨死’ 대신 ‘고립사孤立死’라는 표현을 공식 용어로 쓴다. 죽은 이가 처한 ‘고립’이라는 사회적 상황에 더 주목한 것이다. 고독사를 고립사로 바꿔 부른다고 해서 죽은 이의 고독이 솜털만큼이라도 덜해지진 않는다. 냉정히 말해서, 죽은 이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자 편에서 마음의 무게와 부담감을 덜어보자는 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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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 있는 죽음‘을 스스로 정의한다면?
-품위 있는 죽음이란 죽음이 두렵지 않은 상태의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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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죽음을 인정하고 수용해서 승화하는 단계까지 가면 좋지만 인정조차도 제대로 못 하는 것이 우리나라 대부분 사람들의 현실이지 않나 싶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것만으로도 화가 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왜 죽음 이야기를 읽고 있는 것일까 속상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나의 스토리를 스스로 종결하지 못하고, 나의 내레이션을 마지막으로 장식하지 못하고 남이 대신 마치게 하는 것이다. 지금껏 내 이야기는 모두 다 내가 썼는데,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해서 내 선택에 의해서 대학을 가기도 하고 안 가기도 하고, 여러 인생행로를 내가 만들어 여기까지 왔는데 왜 삶의 가장 중요한 마지막 스토리를 내가 못 쓰고 다른 사람이 쓰게 하는 것일까? 내 인생의 마지막은 반드시 내가 종결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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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우리 인생의 마지막 과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평소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하려 하지 않고, 될 수 있으면 언급 또한 피하려고 한다. 더욱이 현대사회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죽음을 우리 삶과 철저하게 분리한 채 우리에게 죽음의 민낯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생각해본 적도 없게 되고, 삶을 그저 닥치는 대로 살면서 일시적인 위안과 위로에 현혹되기 쉽다.
그렇지만 인생은 죽음이라는 끝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죽음이 있기에 삶의 목적을 향해 힘겹더라도 걸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을 생각해보지 않고 피하려고만 한다면 우리는 우리 생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고민할 수 없다. 그러면 막상 죽음이 닥쳤을 때 우리는 비참함과 슬픔에 사로잡혀 아름다운 마무리를 할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또한 다른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도 감정의 둔마鈍痲를 겪게 되고 더 나아가서 무관심하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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