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그저께 내 부주의로 차사고가 나서 차도 없고 마음도 몸도 착 가라앉아 있던 터라 억지로 일으켜 세워야했다. 눅눅한 느낌 그대로 우산을 쓰고 멍하니 대중교통을 이용해 저녁 모임 장소로 향했다. 30분 일찍 도착한 나는 아무도 없을 줄 알고 들어간 북적이는 식당의 방 한 칸에 앉아 계신 한 분을 보았다. 은발이 멋스러운 선생님이라 뒷모습만으로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눈빛이 맑은 분이라 사제복 같은 옷을 입고 계신 그 분 앞에 앉으니 마치 고해성사라도 해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말로 다 하지 못할 것들이 늘어가고 답답한 것들을 어떻게 풀어가야하나 혼란스러운 날들이다. 다친 마음도 쉽사리 낫지 않고 그저 마음은 또 길을 나선다. 수수한 분들과 식사와 반주 한 잔 나누고 몇 가지 결정사항들을 의논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역시나 유쾌한 선생님 한 분의 유머로 우리는 허름한 시내의 식당가 골목을 빠져나오며 키득거렸다. 3초 내에 사과하기!  자신이 늘 말하는 것이라며 그러면 모든 게 용서된다고 ㅎㅎ 사과에도 타이밍이 있는 것, 맞지만 쉽지 않다. 사과하고 싶지 않은 경우도 있고.

 

돌아오는 길에 우편함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언니네 마당>이라고 발신인이 찍혀 있는데, 누구실까? 핸폰 번호까지 적혀 있는데 혹시 나를 아시는 분인가 궁금하다. 벌써 10회째의 잡지다. 재생용지를 썼고 매회 다른 한 가지 주제로 엮어냈다. 재미있게 읽을 것 같다. 참신한 시각이 요소요소 보인다. 

 

어제 모임에 나가기 전 우연히 보게된 '어쩌다 어른'에서 김미경 강사의 아들 이야기에 눈시울 적셨다. 지하 10층으로 떨어진 아이 위에 서지말고 엄마는 지하 11층으로 내려가 받혀주어야 한다고. 태어나면서 누구나 갖고 있는 자존감과 천재성을 훼손하는 건 엄마의 말 한마디라고. 나는 그저께 차사고가 난 직후 엄마의 전화 한 마디로 그동안 엄마에서 품은 서러운 감정을 다 풀었다. "지금 못 오니? 방금 밥 앉혔는데.. 너 온다고 해서... 무슨 사고? 나랑 전화하다가가 그런 거 아니니? 다친 데는 없니?"  괜찮다고 하고 급하게 끊었지만 마음속에 눈물이 차올랐다. 따뜻한 밥 한 그릇 배부르게 먹은 것 이상이었다.

 

존칭으로 '어르신'이라고 불러드렸다가 된통 혼났다는 어느 선생님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60대 중후반 분이었기에 그렇게 불러드렸는데 오히려 역정을 내시더란다.  '어른'이란 얼마나 부담스러운 이름이냐. 안팎이 조화롭지 못하다는 점에서 나는 아직도 어른이 아니라는 건 확실한 것 같다. 콩다래끼 난 눈이 꺼벅거리고, 창 밖에 바람이 으르릉거린다.

 

 

 

 


댓글(19) 먼댓글(0) 좋아요(4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18-03-16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네 마당> 저도 한 번 사서 본적이 있는데
꽤 괜찮은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워낙 잡지를 잘 안 보는 편이라 지금은 못 읽고 있네요.
이런 잡지는 정기구독 해도 좋을 텐데...ㅠ

이 존칭이란 게 좀 그렇긴 해요.
전 누구에게든 언니나 누나로 불리는 게 젤 좋던데
아무나 그렇게 불러달라고 할 수도 없고,
요즘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하던데 아주머니도 그렇고 죽갔습니다.ㅠ
그나마 교회에서 집사란 호칭이 젤 괜찮더군요.
이것도 불과 3, 4년전만 해도 정말 어색했습니다.ㅠ

프레이야 2018-03-16 19:55   좋아요 0 | URL
어머니 또는 어머님에 훅 무너지죠 ㅎㅎ 아주머니는 아주 죽갔습니다 진짜. 이쁜 이십대 간호사가 아버님이라 불러서 훅 꿈에서 깼다는 중년남자분도 있더라구요. 나름 동안이라 해도 그게 또 우리끼리 나누는 위안의 말, 하얀 거짓말 같은 거죠. 현실 인정 ㅎㅎ 그나저나 집사님은 깨나 괜찮은 걸요. 전 요즘 웬만하면 선생님 호칭을 자주 붙여 드려요. 언니네마당, 이미 사서 보신 적 있군요. 역시 스텔라님입니다.

2018-03-16 1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16 1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18-03-16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사는 곳에서는 밤에서 아침까지 비가 내리고 안개가 짙은 날이었어요.
차사고 때문에 많이 놀라지는 않으셨는지요.
오늘은 어제보다는 조금 차가운 것 같은 날이었어요.
요즘 날씨가 변덕스럽습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요즘은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많이 쓰는 것 같은데, 다른 이름보다는 나은 것 같아요.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쓸 수 있고요.
그렇지만 자기 이름의 책을 출간하신 위의 두 분께는 작가님이라고 말씀드려도 좋을 것 같습니다.^^)

프레이야 2018-03-17 00:33   좋아요 1 | URL
늘 따스한 말씀 고맙습니다. 선생님이란 호칭 무난하고 적절한 것 같다는 생각 들어요 저도. 특히 연상인 분에게요. 인생길 먼저 걸어가신 분이니 적절한 것 같지요^^ 오늘 바람이 몹시 찼어요 이곳은. 꽃샘추위에 감기 조심하세요. 작가님이라는 호칭을 듣기도 하지만 때론 부담감이 드는 이름이지요. 부담감 드는 게 당연한 것이겠지만. ^^

2018-03-17 0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17 1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18-03-17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괜찮으셔요? 사고라니...에고.
어르신이라는 호칭이 부담스러운 60대. 좋은 현상이지요?
저도 어르신보다 그냥 선생님이라고 불러드려요.
편안한 주말 되세요^^

프레이야 2018-03-17 15:00   좋아요 0 | URL
네. 괜찮아요. 잠시 멍했지만 ㅎ 오늘 차 찾아요. 요즘 다들 젊어 보이고 실제로도 젊으니 좋은 거죠^^ 봄날 맞이 잘 하기에요.

서니데이 2018-03-21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저녁 뉴스를 보는데, 부산에 바람이 많이 불어서 꽃샘강풍이라고 했는데,
오늘은 눈도 내렸다고 들었어요. 여긴 저녁에 눈이 왔는데, 날씨가 꽤 춥습니다.^^
프레이야님,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한 밤 되세요.^^

프레이야 2018-03-21 22:48   좋아요 1 | URL
네. 어제도 그제도 대단했어요 특히 바닷가 동네는 더했구요. 날아가는 줄 알았습니다 ㅎㅎ 우산도 못쓰겠더라구요. 3월에 내리는 눈, 샤갈의 마을이 생각나네요.
감기조심 하자구요.

2018-03-23 1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한엄마 2018-03-23 15:29   좋아요 0 | URL
즐거운 마음에 댓글 먼저 달았네요.차사고라니-괜찮으신지 모르겠어요.
저도 요즘 사고를 낼 것 같아 차를 가지고 다니지 않아요.
갑자기 추워져 몸이 오슬오슬 한기가 들어섭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책으로 만나요.^^*

프레이야 2018-03-23 12:33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차는 수리했고 이제 괜찮아요. 며칠 겨울이 다시 왔나 싶더니 오늘은 아주 봄날이에요. 마음 화사하게 또 우리 책으로 만나요^^

水巖 2018-03-24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 사고라니, 다치진 않았나요?
며칠전 예전 경춘선 기찻길 공원을 걸어 가는데 책 카페가 눈에 띄어 한번 들러 봤네요.젊은이들이 책들을 보고 있었고 장소는 넓지 않았지만 조용하고 아늑하데요. 커피 한 잔 시키고 뽑아 온 책 좀 들쳐 보다가 중고 책 한 권 사가지고 돈을 지불하는데 어르신 차 값이라고 천원을 덜 받더군요. 노인네라고 챙겨주는데 좀 민망도 스럽고...

프레이야 2018-03-24 10:33   좋아요 0 | URL
네. 괜찮아요. 봄맞이 새해 액땜으로 생각하라더군요. 어르신 차 값 할인 좋은데요 ^^ 수암 님처럼 책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요. 고맙습니다.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순오기 2018-04-01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사고 소식에 깜놀~ 괜찮다기에 다행이다 싶어 쓸어내렸네요.ㅠ
엄마의 따신 밥 한그릇에 무한 사랑이 읽혀요!♥
선생님이란 호칭이 무난하다 싶어요.^^

프레이야 2018-04-01 17:32   좋아요 0 | URL
네. 무난한 것 겉고 적절한 것 같기도요. 차는 정말 조심해야겠다고 또 다짐해요^^